1832년 귀출라프 함허스트호 통역 및 의사, 충남 보령군 고대도, 국왕에게 한문 성경 전달 거절,
기다리는 20일 동안 주민에게 감자 심는 법, 전도지, 한문주기도문을 한글번역작업하고 일본으로 향함.
1865년 토마스 아내 중국 순교(혼자서 유산한 채)
1866년 토마스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 순교 —박춘권. 최치량. 박영식.
마펫 (27년 후 1893년 평양도착, 막에서 벽지에 한문성경을 발견)
장대현교회, 길선주, 이기풍,
1872년 로스 아내와 중국 산둥성 도착,
영하25도의 살인적인 추위가 계속되는 날씨 속에서 임신상태, 아들 출산 산후조리 못함.
1873년 로스선교사 아내 순교,
1874년 로스선교사가 고려문전도, 이응찬과 성경변역사업, 서상륜을 만남.(북쪽 선교의 시작)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2년 한미수호조약 견미단(민영익)이 미국가서 가우처 와 게일목사를 기차 안 에서 우연히 만나 3일 동안 여 행, 가우처목사가 일본 맥클레이에 연락,
이수정(곡성)과 김옥균 통해 고종에 친서보내고,
메클레이선교사가 고종 알현하고 의사와 3명의 영어선생을 허락받음(선교사)
1884년 알렌(미공관의사)입국,
갑신정변(수구파를 몰아내자)으로 칼에 찔린민영익을 살림-광혜원을 선물 받음.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배제학당, 스크랜턴-이화학당,
광혜원(12일 후 제중원으로 개명)
1986년 헤론선교사 입국-태평양을 제일 빨리 건넜지만 일본에서 체류
1887년 예수성경전서 로스역 출간
1889년 언더우드 호튼선교사와 결혼(독신선교사활동의 제약으로)
1890년 중국선교사 네비우스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네비우스선교방법론을 채택함.
1890년 헤론소천, 언더우드 알렌과 갈등이 심했고, 임종직전 언더우드와 화해,
그러나 알렌의 정치적인 역할의 도움으로 최초로 양화진 묻힘.
1891년 언더우드 건강문제로 귀국, 미국내쉬빌에서 선교동원을 윤치호(윤웅렬의 아들)같이 동행함.
1892년 11월 감동받고 7인의 선발대가 한국도착,
북장로교와 상의하여 충청도 남부 및 제주도 포함, 전라도 지역을 할당받고 답사를 통해 선교부를 물색
1893년 임시 전주선교부 시작,
1894년 동학농민운동봉기로 기독교운동 중지./레이놀즈 전라도 답사 여행.
1895년 유진벨을 전라도쪽 남부의 선교책임자로 명함. 12월 31일 단발령 전국
1896년 선교부 물색을 위해 나주로 가던 도중
광주에서 윤치호의 부친 윤웅렬(초대 광주 시장)을 만나서 환대를 받고 사냥까지 함.
그 후 나주에 선교부를 두고 유진벨선교사가 책임자가 됨.
1897년 은송리에 정식적으로 전주선교부
나주 유진벨선교사가 선교할 수 있는 집을 구함.
어학선생 변찬영과 조리사 대동.
단발령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유림의 적극적인 반대가 있었으나 400명 복음 들음.
그러나 신변의 위협과 오웬 선교사가 늦게 입국,
목포가 개항장이 되면서 나주를 포기하고 목포로 선교지 이동함.
그러나 나주에 사람을 지속적으로 보내 선교지를 관리함.
1898년 오웬부부과 유진 벨부부, 스트레퍼자매등 목포에 들어옴,
유진벨이 전도사업, 오웬은 의료사업, 스트레퍼는 교육사업.
유진벨과 레이놀즈가 목포양동교회개척.
1898년 양림리 86번지 토지 1만66평의 토지를 최초 목포부 J.S니스벳이 구입
1898년부터 1907년까지 미국 선교사들이 구입한 토지는 양림리 205번지 등 모두 21개 필지에 면적은 약 5만 5800평에 달하고 있다. 논·밭은 물론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대지, 임야, 묘지, 잡종지 등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은 다 양한 용도의 토지를 매입했다.
당시 양림동은 풍장터로 총 비용이 2천달러 정도 였다고 전해진다.
1899년 유진벨의 딸 샤롯이 출생하고 성장하여 윌리엄 린톤과 결혼하여 : 2세대
휴린튼과 로이스린튼(순천결핵요양원)-검정고무신 / 순천지구 선교뿌리내림 : 3세대
스티브린튼-유진벨재단이사장, 존린튼(인요한) : 4세대
1900년 오웬이 목포에 진료소 개설.
1901년 벨의 첫 번째 아내 로티벨이 심장병으로 사망,
벨이 집을 건축하는데 집중하는 시기로 사택을 짓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이었다고 기록됨.
로티벨의 죽음은 남편없이, 오웬부부, 스트레퍼양이 지켜봄.
언더우드선교사 집례로 양화진에 묻힘, 이후 두 자녀 데리고 미국으로 일시 귀국
1901년 5월 –1902년 12월까지 유진 벨이 안식하고 돌아옴.
1901년 벨이 없고 사역이 지친 오웬이 미국행, 스트레퍼도 서울행, 레이놀즈가 임시로 맡음
모두 떠난 이후에 목포교인을 중심으로 평신도 사역으로 광주근교도시까지 진행,
개종자가 늘어나고 김윤수, 변창연등의 협력자가 초기 광주선교에 기여함.
1903년 선교사 목포로 돌아오고 벨이 목포에 정명여고, 1903년 영흥고 시작.
남학교 교장 변요한(프레스톤), 여학교 교장 스트레퍼
1904년 광주에 벨과 오웬등이 입성, 목포 총순 벼슬하신 김윤수가 사택을 마련함
12.25일 11시에 예배드림 —그자리에 1882년 선교기념비.
설교제목: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은혜 “200명 구경꾼이 옴”
김윤수아내가 찬양을 함.
집을 짓기 위해 준비할 때부터 또 집을 짓기 위해 물건이 올 때부터 구경꾼이 많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전도지를 나누어줌.
예배 이후 양림동 회중이 놀랍게 증가됨(집구경, 음력설날전후, 특수 정치상황),
그 당시 광주 인구 8천명-만명정도,
1904년 벨사택-->광주북문안교회(가든백화점,1906년 완공)-->금정교회(남문밖교회, 황금동파출소)를 통해
북문밖교회인 중앙교회(최홍종)가 나왔고,
금정교회에서 또 양림동교회/ 광주제일교회가 분리됨.
양림교회는 현재 3군데, 양림동산에서 볼 때 좌측 예장합동, 예장통합, 우측기장.
1905년 광주 제중원 롤란선교사 1대원장 ( 유진벨 사택에서 진료시작, 첫날에 9명 진료, 구경꾼이 40명 옴) ,
1905-1906년까지 벨목사부부, 오웬의사부부, 프레스톤(변요한)의사부부,놀란의사부부, 스트레퍼자매가
광주 양림동 외국인 전부, 교회출석 50명, 한국인지도자 김윤수
1907년 스트레퍼양이 사직하고 그라함(엄언라, 수피아초대교장)이 광주 도착,
양림동 교인 125명
1907년 숭일고설립 숭일고 초대 교장 변요한선교사
오웬선교사 보고에 의하면 환자진료건수가 12663회.
1908년 수피아여고(광주여학교)
처음 3명의 아이로 시작, 김윤수의 딸 2명, 주막하는 표씨 딸
1대교장 그라함(엄언라) 2대교장 구애라(맥킨)
엄언라교장은 1926년 건강악화로 미국요양 후 회복이 어려워 한국에 묻히길 원해 다시 돌아왔으며
1930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소천, 녹스선교사의 집례로 양림동산.
현 수피아여고 자리는 1912년 이주.
2대 기독병원 윌슨선교사 부임 제중원 확장, 최홍종이 조수로 임명.
“백만인 구령운동 시작”
1909년 오웬이 순회 진료 중 장흥에서 급성 폐렴 위독,
소식듣고 포사이드 목포에서 광주오다 나주에서 여자 나환자를 태우고 옴,
오웬은 42세 나이로 소천,
기독병원 환자의 반대로 가마터에 오웬 선교사 쓰던 침대 사용 치료
소문이 나면서 나병 환자 늘어나고 최홍종이 봉선동에 땅 1000평기부 하고,
숫자 늘어나면서 여수 애양원, 소록까지 연결됨.
소록도나환자촌 확대위해 11일간 행진(서서평선교사 같이 하심.)
-최홍종선교사가 기독병원 조수시절 외국선교사님은 나환자를 안고 다니 면서치료하는데
조선인 최홍중은 나환자가 떨어뜨린 지팡이조차 줍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회심한다.
1909년 코잇(고라복)선교사가 광주선교부에 부임,
목포의 변요한(프레스톤)선교사가 광주로 남궁혁을 데리로 오고 숭일교 교사.
1910년 니스벳, 변요한, 윌슨 헤리슨 4인위원회구성 순천을 선교부를 세우기로 만장일치함.
이후 여선교사 비거와 두피, 의료선교사 티몬스와 크레인등 이 합류하여 순천선교탄력
양림동 교인 600명.
1911년 포사이드 질병으로 미국으로 돌아감.
기독병원: 환자 만 명 진료, 190건 수술.
수피아 2대 구애라교장이 미국에서 가서 학교를 위한 헌금 요청하여
수피아홀 건립(스턴스부인 여동생 jennie speer의 죽음기념 5천달러 기부)
1912년 서서평선교사 32세 처녀선교사로 입국,
14명의 양자양녀, 39명의 과부를 거둠
한일 장신대의 전신 이일학교를 세움.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등록
1933년 나환자를 이끌고 최홍종과 더불어 서울총독부까지 행진,
500명의 나환자와 함께 행진하여 소록도 땅을 얻음,
최초의 광주시민장으로 장례, “어머니라고 오열하는 시민들“
1912년 순천 선교부를 위해 고라복, 변요한 선교사가 순천에 파송,
선교사 주택을 마련하고 1913년 순천으로 이주함.
(고라복선교사 두 자녀 순천에서 추위에 동사, 양림동산에 묻힘)
1913년 순천 선교부 설립
이전에 1894년 레이놀즈가 순천을 순회하였고,1898년 테이트선교사가 복음 지를 뿌림.
1914년 오웬기념각 완성. 서로득(스웨인와트) 건축, 오웬과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가족 후원금으로 건축.
해남갯벌, 르네상스풍, 서쪽수피아, 북쪽 숭 일, 멘사드지붕.
1917년 최홍종장로 평양신학교 입학 목사가 됨. 양림기장 5대 목사로 부임.
1919년 기미년 독립 운동에 수피아 전교생이 선봉으로 참가,
교사 2명과 학생 21명 등 23명이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
1919년 유진벨 둘째 부인 마가레트 소천
3.1운동 때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 을 돌아보고 오던 길에 건널목에 기차와 충돌,
크레인과 같이 사망.
1920년 유애나(에너벨 M 리스벳) 목포정명여고 교장 소천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려는 학생을 지도하고 나오다가 계단에서 넘어져서 소천.
남편 유서백(리스벳)은 유애나소천후 라헬과 재혼하여 얻은 딸,엘리자베스
1923년 이불을 잘못 덮어서 질식사함 양림동산묻힘.
1924-1925년 정명여고 교장.
1924년 수피아 제3대 교장 마정원(Miss Margaret Martin) 선교사 취임
1925년 벨 57세 사망 양림동묘역에 안장. 유진벨기념 커티스메모리홀.
수피아 제 4 대 교장 김아각(Dr. D. J. Cumming) 박사 취임
1926년 윌슨(우월선)기독병원 2대원장이 여수애양원에서 같이 내려가서 기거하면서 치료를 함.
애양원이름은 환자분들이 공모하여 지음.
1926년 고든 에비슨이 광주 YWCA와 합류함.
1927년 윈스브로우 홀 (북장로교 부인전도회에서 생일헌금모아서 58875달러 기부) 서로득건축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운동
1930년 백청단사건 조아라, 기독병원 3대병원 브란도 취임. 결핵으로 사망 후 양림동산.
1933년 수피아 5 대 교장 유화례(Miss Florence E. Root) 선교사 취임, 음악교사. 호남의 성자.
고든 에비슨 양림리에 농촌소년실습학교 세움.
1934년 서서평선교사 소천.
만성풍토병과 영양실조가 원인, 유산 담요반장 동전7전, 강냉이가루 2홉.
1937년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폐교 (유화례선교사 주도)
애양원으로 내려가서 손양원목사등과 같이 신사참배 반대운동
1942년 유화례선교사 강제 출국 후 1947년 다시 귀국함.
1950년 수피아 제 10 대 교장 유화례 선교사 취임
1961년 호남신학원 초대원장 브라운선교사(부명광), 백운동
1963년 호남신학원이 호남신학교
1971년 장로교호남신학교로 개명하고 브라운선교사 초대 이사장
1973년 브라운선교사, 8년간 미국 남장로교 총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