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론주의(辯論主義)란 민사소송법상 원칙으로 소송자료(사실과 증거)의 수집, 제출책임은 당사자에게 있고, 당사자가 수집하여 변론에서 제출한 소송자료만으로 재판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변론에서 제출되지 않은 주요사실은 판결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 민사재판에 있어서 변론주의
글 :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이주헌
“아니, 판사님. 도대체 왜 그걸 이제야 알려주는 겁니까?”
원고에게 청구원인 사실에 대한 입증을 하란 필자의 말에 원고는 화를 내듯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
그 날은 피고에게 소장 부본이 송달되고 열린 제1회 변론기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필자는 배석판사 생활을 마치고 막 민사소액재판을 담당한 그야말로 풋내기 판사였기 때문에 원고의 신경질 섞인 물음에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같이 판사의 당황하는 기색에 오히려 원고는 더욱더 자신감을 얻은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깊은 호흡으로 일단 평정심을 되찾은 다음 원고에게 천천히, 그리고 가능한 한 부드러운 말투로 원고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주장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원고에게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소를 제기할 때, 그리고 변론기일 전에 미리 증거자료를 법원에 제출하셔야지, 그런 것까지 재판부에서 일일이 알려드릴 수도 없고, 또 엄연히 상대방인 피고가 있는 마당에 법원이 원고를 일방적으로 도와줄 수도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제서야 원고는 판사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얼굴에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그대로 남긴 채 다음 기일을 지정받고 법정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일은 필자가 그 후로도 민사, 형사, 가사재판을 하면서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겪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당사자 본인(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이른바 ‘나홀로 소송’을 하는 사건 당사자를 통상 '본인’이라고 칭합니다)에게 위와 같은 설명을 반복해서 하게 되었는데,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도대체 당사자들이 이런 질문들을 반복하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하였습니다.
그 원인을 고민해 본 결과, 우리나라 교육과 전통적인 법감정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소송절차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민사소송법에는 공개심리주의, 직접심리주의, 구술심리주의와 더불어 ‘변론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변론주의란 소송자료, 즉 사실과 증거의 수집ㆍ제출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맡기고, 당사자가 수집, 제출한 소송자료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변론주의의 근거로는, 재산관계 등 사적자치의 원칙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사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승소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에게 유리한 소송자료를 수집하도록 하는 것이 충실한 자료수집이 되어 진실을 규명함에 있어 좋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며, 또 당사자가 제출한 사실 및 증거자료만을 가지고 이를 재판의 기초로 삼는 것이 보다 당사자에 대한 절차보장을 확실하게 해주고 그로 인하여 공정한 재판에 대한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너는 사실을 말하라. 그러면 나는 권리를 주리라”라는 법언(法諺)이 변론주의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법과대학에 들어와서 민사소송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까지는 그와 같은 원칙에 관하여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법률가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변론주의가 비법률가들인 국민들에게 생소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그와 같은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대학에서도 교양과목인 ‘법학개론’ 수준의 강좌에서 그런 강의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학창시절 사회시간에 주로 수차례 개정된 헌법의 사소한 내용까지 줄줄이 암기하기에 바빴지, 사회의 성숙한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교육은 받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 재판과정에서 당사자들이 관련된 중요한 증거는 하나도 내지 않은 채로 그냥 ‘솔로몬과 같은 현명한 판결’을 바라거나, 또한 옛날의 원님재판도 아닐진대 ‘그냥 똑똑하신 판사님이 알아서 판단해 달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필자가 예전에 읽었던 ‘권리를 위한 투쟁(Der Kampf ums Recht)’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예링(Rudolf von Jhering)은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 권리추구자의 주장은 그 자신의 인격의 주장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자의 의무이다.권리를 위한 투쟁의 이익은 사법(私法), 사적 생활뿐만 아니라 국법 또는 국민생활에까지 미친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의 권리조차 용감하게 방어하려 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전체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기꺼이 바치려고 하겠는가’라고 우리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예링이 말해주는 교훈과 같이 우리의 재판 당사자는 법관에게 공정한 판결을 요구하기에 앞서 변론주의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입증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결코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국민의 권리의식이 놀라울 만큼 신장되었고 그에 따라 사법부에 대하여도 그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져가고 있는 반면에, 실상 우리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책임의식이나 주인정신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재판당사자들의 권리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없이는 결코 판사가 솔로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국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주장이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법절차를 이해하고 이를 지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높아진 국민들의 수준에 부응하기 위하여 각 법원마다 그리고 재판부의 판사들마다 자신의 법정에서 재판진행모습을 촬영하고 이를 검토하여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한 언행이나 동작들을 수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 민사재판에서 구술변론주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여 재판부가 당사자들의 사소한 말이라도 귀 기울여 경청하고, 나아가 당사자를 재판의 대상이 아닌 재판의 실질적인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는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서 계속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나 전관예우 등과 같은 사법불신이 결코 사법시스템에 대한 오해나 법절차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