楓橋夜泊(풍교야박) - 장계(張繼)
풍교에서 자다
月落烏啼霜滿天(월낙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달이 지자 까마귀 울고, 찬 서리 흩날리고
강가에는 단풍나무, 고깃배 불빛에 잠 못 이루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울리는
한밤중의 종소리가 객선까지 들려오네.
楓橋 : 지금의 강소 소주성의 西郊에 있다.
姑蘇 : 소주(蘇州)의 별칭. 市 서남에 있는 姑蘇山(고소산)에서 따온 이름.
장계 (당나라)
소주 풍교에 있는 장계 조각상
출생 당나라 양주 (지금의 중국 후베이성 샹양시)
서거 서기 779년
홍주(洪州, 지금의 중국 장시성 난창시)
대표작 《풍교야박》.
장계(張继, ? - 779년), 자는 의손(懿孫), 양주(襄州) 양양(襄陽, 지금의 호북 양양) 사람, 일설 남양인[1], 성당말의 시인.
생애
장계생년은 이미 시험을 볼 수 없다[1]. 천보 12년(753년) 진사[2], 진사에 오른 후 관직을 맡았는지는 더 이상 알 수 없으며, 회계, 오중, 소주 등지[1]를 돌아다녔다는 것만 알 수 있다.
달력 4~5년 동안 우창에서 관직을 맡아 황보장과 친분을 쌓았고, 두 사람은 서로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보수를 받았다[1]. 후검교 사부원 외랑(外郞)은 홍주(洪州, 지금의 강서남 창시)에서 판관(判官)으로 있으면서 재정을 담당하였다[주1]. 음력 말년에 아내와 함께 홍주[3][1]에서 연이어 죽었다.
문학적 업적
《장사부 시집》 한 권이 있다. 당나라 시인 중에서 장지는 상당히 뛰어난 시인으로 송인엽몽득의 《석림시화》에는 그 시가 남송에 30여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당시》에는 40여 수가 있다. 고중무는 장지시를 평하며 "외부인이 대사를 역임하고 궁모를 익혔다. 그것은 글로서 스스로 수식하지 않는다. 당신이 급제했을 때, 수발 당시. 시체가 청명하고 판박하여 도가의 풍격이 있다. "비흥이 깊다. "《풍교야박》은 그의 가장 유명한 시이며, 이 천고의 명편은 쑤저우 한산사를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
한산사
《신당서·예문지》, 《계》의 자는 의손이며, 양주 사람이다. 대력 말, 검교 사부인 외랑(外郞)이 홍주에 재산을 분배하였다. 당재자전은 위염철판관이라고 했다. 저우의는 《당재자전》을 교정하고 장지가 염철판관을 맡았는지 아닌지는 "아직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쉬안종의 '당나라 시인 총고·장지카오'는 장지가 저우샤오셴과 마찬가지로 임대 판관, 환적 판관 등의 관직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제안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