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04
살아있는 전설, 20년차 '강철허리' 조웅천
지금은 효산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꾼 순천상고라는 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다. 1986년에 입학하거나 전학 온 학생들이 졸업한 1989년 봄까지, 단 삼년간의 일이었다. 그 사이 전국대회에서 단 한 번의 승리도 맛보지 못한 채 6번의 1회전 탈락이라는 민망한 기록만을 야구사에 남긴 하나의 해프닝이었지만, 그 팀이 배출한 선수 하나가 한국야구사에 굵직한 획을 써내려가고 있음은 그저 우연이라기엔 너무 대단한 행운이다. 송진우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마운드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며 더 널리 기억되고 응원 받았을, 조웅천이라는 선수에 관한 이야기다.
고교 졸업 후 그는 꼴찌 팀 태평양 돌핀스의 연습생으로 간신히 프로무대에 발을 들여놓았고, 한 해 만에 정식선수가 되긴 했지만 단 한 번의 승리나 세이브도 기록하지 못한 채 무려 다섯 해를 흘려 보내야 했다. 물론 해마다 프로무대 문턱 앞에서 좌절하며 야구 말고는 아무 것도 배워보거나 꿈꿔 보지 못한 삶의 막다른 길을 마주하는 수백 명의 소년들보다 조금 나은 행운을 누리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2군과 후보 사이를 전전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며 처자식 먹여 살릴 걱정에 더 아득한 절벽을 목격하는 또 다른 수백 명의 길을 그는 어김없이 따라 걷는 듯했다.
그는 듬직한 체구를 가진 것도, 위압적인 눈빛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빠른 공을 가지지도 못했다. 항상 마운드 위에 서면, 그의 운동선수 같지 않은 고운 선의 얼굴에는 경기에 나섰다는 기쁨과 막강한 적을 맞이한 두려움, 그리고 긴장과 설렘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팀 돌핀스의 전설적인 물방망이 타선을 등에 업고 오로지 자신의 공 하나만을 믿고 나서야 했던 전장에서 그는 간혹 꽤 여러 이닝동안 무실점이나 1실점 호투를 하고서도 기록에 뭔가를 남겨 적지 못하고 물러서곤 했었다.
독하지는 않지만 질긴 근성
▲ 조웅천의 투구동작 듬직한 체구를 가진 것도, 위압적인 눈빛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빠른 공을 가지지도 못했다. 항상 마운드 위에 서면, 그의 운동선수 같지 않은 고운 선의 얼굴에는 경기에 나섰다는 기쁨과 막강한 적을 맞이한 두려움과 긴장, 설렘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그리 독해 보이지는 않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는 질긴 근성을 가졌고, 내년 시즌에는 조금이라도 더 성장한 모습으로 마운드에 오르겠구나 하는 확신을 주는 선수였다. / ⓒ SK 와이번스
패전처리를 하던 시절부터 그를 좋아했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어떤 잠재력을 알아본 안목을 내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런 점이 있었다. 그리 독해 보이지는 않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는 질긴 근성. 아마도 별 성적을 남기지 못한 또 한 시즌을 마치고도, 지레 단념하고 유니폼을 벗지는 않겠구나 하는 느낌. 그래서 내년 시즌에는 조금이라도 더 성장한 모습으로 마운드에 오르겠구나 하는 확신.
요령 없이 너무 정직했기에 한 바퀴만 돌아도 두들겨 맞곤 했지만, 정교한 제구력에 더해 마치 탁구공처럼 휘어 들어가던 절묘한 싱커의 궤적. 그것은 가진 것 없고 미처 다듬어지지 못한 채 돌려 막기로 등 떠밀려져야 할지언정, 역부족의 적들에게나마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겠노라고 버텨보는 모든 못난 것들의 발악의 상징이었고, 마찬가지로 되는 일 없이 밀리고 밟히고 겉돌며 살아가던 나를 위한 대리전이기도 했다. 그는 그 시절 나의 자화상이었고, 자존심이었다.
그가 프로무대에서 첫 승을 올린 것은 연습생과 패전처리로 7년을 보낸 1995년 6월 15일이었고, '마당쇠'로나마 주전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팀이 태평양에서 현대로 간판을 바꿔 단 1996년부터였다. 90년대 초반 LG트윈스에서 시작된 투수 분업화의 바람이 확산되며 '중간계투'의 공간이 넓어지던 시절이었고, 그의 정교한 제구력과 변화구 구사능력이 가장 빛을 낼 수 있는 보직을 찾은 것이었다.
1996년 팀이 치른 경기의 절반이 넘는 68경기에 출전하며 6승과 3세이브를 올리는 대활약을 한 데 이어 2000년에는 무려 74경기에서 94이닝을 던지며 16홀드와 8세이브를 기록해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의 18승 트리오와 마무리 위재영을 잇는 필승공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바로 그 2000년은 현대 유니콘스가 역대 시즌 최다승인 91승으로 두 번째 우승을 달성하며 '극강'으로 불렸던 해다.
프로 20년차의 '강철허리'
2001년 이적해간 팀 SK 와이번스에서도 그는 중간계투와 마무리를 오가며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2003년 와이번스가 창단 4년 만에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던 것 역시 그 해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구원왕에 올랐던 조웅천의 활약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시작된 그의 전성기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굵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3시즌 동안 별다른 기복 없이 해마다 50경기 이상 출장해 3점 안팎의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며 앞서가는 경기를 지켜냈고 때론 무너지는 전열을 수습해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 통산 800경기 출장 그가 2008년 8월 27일에 세운 통산 800경기 출장기록 역시 우리 야구사의 빛나는 한 고비이며, 어지간한 재능과 노력으로는 앞으로도 누가 근접하기 어려울 진땀 내 나는 금자탑이다 / ⓒ SK 와이번스
지난 2008년 8월 27일, 문학 두산전에서 세운 통산 800경기 출장기록 역시 우리 야구사의 빛나는 한 고비이며, 어지간한 재능과 노력으로는 앞으로도 누가 근접하기 어려울 진땀 내 나는 금자탑이다. 그리고 내년이면 연습생 시절을 빼고도 프로 20년차를 맞는 그는 여전히 '강철허리'로 불리며 국내 최강팀의 '필승공식'으로 군림하고 있다.
성실, 겸손, 책임감...'전설'이 가져야 할 모든 것
와이번스가 팀 창단 후 첫 우승을 달성한 지난 2007 시즌 직후, 그의 FA계약 여부는 팬들 사이에서 초미의 관심사였고, 12월 9일 축승회 현장에서야 계약이 성사되었음이 발표되었다. 계약 내용은 세간의 예상보다 많지 않은, 2년간 옵션 포함 8억이라는 조건이었고, 본인의 표정도 썩 만족스러워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날 그가 남긴 소감은 특히 팬들을 감동하게 했다.
"팬들이 구단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을 읽으면서, 팀에 남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 태평양 데이에, 김성근 감독과 함께 이름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꼴찌팀 태평양 돌핀스의 연습생으로 시작한 프로선수생활. 그러나 그는 또하나의 '살아있는 전설'을 만들어가고 있다 / ⓒ SK 와이번스
성실함에 더해 팬을 향한 겸손함, 그리고 체질적인 '오버맨'은 아니면서도 분위기가 어두울 때마다 '좋아 좋아', '괜찮아 괜찮아'를 외치며 더그아웃을 헤집고 다니는 어색한 투지와 고참으로서의 책임감까지. 광주 출신이지만 인천에서만 19년을 뛰어주었다는 것 말고도, 팬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많다.
지금 당장 최고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꼭 그가 만들어온 숫자들의 묘기가 아니고도 그저 뛰는 모습만으로 흐뭇함을 전해줄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다. 그래서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재능도, 착실하게 어린 시절부터 착착 밟아진 '엘리트 코스' 덕분도 아닌, 그저 황량하고 막막한 삶의 맨바닥에서부터 다져올려진 그런 공든탑의 존재가, 우리 모두에게 가지는 가치는 참 큰 것이다.
김은식(punctum)
자료출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