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경 낙동강 중심의 6가야 가운데 고령가야국(후)
6가야 연맹체는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倻), 고령의 대가야(大伽倻), 함안의 아라가야(阿羅伽倻), 고성의 소가야(小伽倻), 성주의 성산가야(星山伽倻), 상주의 고령가야(古寧伽倻)이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가야사(伽倻史) 전반(前半)의 맹주였고, 고령의 대가야는 후반(後半)의 맹주였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육가야(六伽倻)의 하나인 고령가야(古寧伽倻)는 낙동강 상류지역인 상주, 문경에 위치했다. 자세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지만 초기 가야연맹을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침입으로 신라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함녕군(咸寧郡)의 옛 지명인 고령군(古寧郡)이 본래 고령가야였으나 신라가 이를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 또는 고릉현(古陵縣)으로 부르다가 경덕왕(景德王) 때에 고령군으로 명칭을 바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시조 수로왕(首露王, 재위 A.D. 42~199)에서 구형왕(仇衡王)까지 491년간 계속되다가,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게 멸망하였다
고령의 대가야(大伽倻)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에서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520년간 존속하고 562년 멸망했다
함안의 아라가야 559년경 신라에 투항하였으나 나머지 3가야는 언제 신라에 흡수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1세기(42년) 에서 6세기(562년) 까지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시대 7세기만 삼국시대이다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7번지에 1979년 12월 18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고령가야 태조의 왕릉으로 전하는 무덤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29 함창현(咸昌縣)의 건치 연혁조에 의하면 함창은 ‘본래 고령가야국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 일명 古陵)으로 하였다가 경덕왕 때에 고령(古寧)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서기 41년(유리이사금 18)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육가야 중 이곳 함창에 고령가야국을 건국한 태조왕의 왕릉을 ‘서릉(西陵)’, 왕비릉을 ‘동릉(東陵)’이라 한다.
1592년‘古寧國太祖伽倻王陵(고령국태조가야왕릉)’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묘비가 발견되어 당시 관찰사 김수(金睟)와 함창현감 이국필(李國弼) 등에 의하여 확인된 뒤 함창김씨(咸昌金氏)의 자손들이 춘추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1712년(숙종 38) 왕명에 의하여 묘비(墓碑)와 석물(石物)을 다시 건립하였고, 능의 크기는 직경 6.7m, 둘레 21m, 높이 3m이며, 비석, 석등, 상석, 석상, 석수 2쌍이 있다. 왕릉 앞의 50m 지점에 재사(齋祠)인 만세각(萬歲閣)이 있다.
동편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왕비릉이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지도서>에 '가야왕묘(伽倻王墓)는 함창 관아의 남쪽 2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만세각(萬歲閣)은 왕과 왕비릉을 관리 보존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건물이다
당교의 서쪽에 상감지(上監池)라고도 했던 정화지(井花池)가 있었다. 정화지는 관아의 북쪽 5리에 있고 상감지라고도 한다. 민간에 전하는 말에 가야왕이 여기서 노닌 적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여지도서> 함창현 제언조)연못에 연꽃이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경지로 변했으나 가야와 관련한 전승이라 적는다.(참; 통영로, 최헌섭, 해딴에, 2017)
첫댓글 古加耶 太祖 古露干의 墓宇 古陵館
고령가야 태조 고로칸의 묘 고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