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민낯 - 칫솔과 치약 오줌의 미백 효과를 넘어서다
인기멤버
hanjy9713
2023.09.16. 03:28조회 2
댓글 0URL 복사
사물의 민낯
칫솔과 치약
오줌의 미백 효과를 넘어서다
요약 칫솔 : 이를 닦는 데 쓰는 솔
치약 : 이를 닦는 데 쓰는 약
어른도 어린아이도 치과는 두려워한다
병원을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기 싫은 병원 중에서도 으뜸은 치과. 진찰 후 약 처방이나 주사 한 방 정도로 가볍게 끝날 수 있는 여타 분야와 달리 방문해서 치료를 받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예리한 아픔, 말 그대로 뼈(사실 치아는 신체 부위 중 가장 단단한 부위지만 엄밀히 말하면 뼈는 아니다)를 깎는 아픔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물론 어른도 공포를 느낀다.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을 한 게임 <둠(Doom)>에 등장하는 지옥의 괴물들이 내는 비명 소리가 치과에서 환자들이 낸 소리를 녹음해서 쓴 것이라니 사람들이 치과를 지옥이라고 비유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무서워도 이에 문제가 생겼다면 치과에 가야 한다
그렇다고 치과를 피할 수만은 없다. 한번 망가지기 시작하면 치료 시의 아픔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되는데다 음식조차 제대로 씹어 삼킬 수조차 없게 되니 이에 문제가 생겼다면 치과를 가는 것이 현명하다.
치아 건강, 오복 중의 하나다
안 가도 아프고 가도 아픈 치과, 그것을 피할 방법은 단 하나. 평상시에 관리를 잘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과연 고대인들은 어떤 식으로 치아 관리를 했을까?’라는 물음이다. 치아 관리에 실패할 경우 뼈를 깎는 고통과 비용을 감수한다면 수복이 가능한 지금과 달리, 체계적 치과 치료가 불가능했던 옛날이라면 치아 관리의 중요성은 지금보다 더 강조되었을 것이다.
요한 리스가 1616-1617년에 그린 <치과 치료를 받고 있는 농부>
오죽하면 오복 중의 하나가 치아 건강이라는 이야기까지 있겠는가? 사실 중국의 <서경> 1편인 홍범(洪範)에서는 목숨(壽), 부(富), 몸의 건강인 강녕(康寧), 덕을 좋아하며 즐겨 행하는 유호덕(攸好德),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고종명(考終命)을 오복으로 꼽는다. 치아가 좋은 것을 오복 중 하나로 언급한 것은 청대의 <통속편(通俗編)>으로 한참 나중에 나온 말이다.
양치질의 어원: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서 이를 쑤시는 것
불교의 법전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이쑤시개를 쓰고는 땅에 던졌는데 그것이 곧바로 뿌리를 내리고 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석가모니 시대의 인도에서 이를 닦기 위해 이쑤시개를 사용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 이야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스님이 해야 할 일 중에 첫째가 이를 깨끗이 하는 것이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잘 잘라서 이를 쑤시는 것을 버드나무 가지를 말하는 ‘양지(楊枝)’를 따 양지질이라고 불렀다. 이후 양지질은 시대를 거쳐 양치질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된다(일본에서는 양지를 ‘요지’라고 읽고 ‘이쑤시개’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나이 드신 분들이 이쑤시개를 요지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최초의 양치법 : 치약을 손으로 직접 문지르는 것
어원이 아닌 실제 양치질의 기원은 그보다 훨씬 더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칫솔보다 치약을 만드는 데 좀 더 상위의 문명과 기술이 필요할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과 다르게 치약이 칫솔보다 먼저 사용되었다.
칫솔 사용법을 시연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
1899년
그 기원은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황소의 발굽, 몰약(수액), 구워서 부순 달걀 껍질, 화산재 등을 조합해 치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치약을 손으로 직접 문지르는 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최초의 양치법이었다.
칫솔의 기원 : 이빨로 깨물어 부드러운 섬유질로 쪼개놓은 나뭇가지
칫솔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애매한 점이 있다. 기원전 35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이쑤시개라 말하기에는 좀 큰 나뭇가지를 사용했다. BC 3000년경에 이집트에서 쓰였던 좀 더 발전된 형태의 도구가 발굴되었는데 나뭇가지를 이빨로 깨물어 부드러운 섬유질로 쪼개놓은 모양이었다.
칫솔나무
이쑤시개와 칫솔의 중간 정도 형태라고나 할까? 비슷한 도구는 기원전 1600년 중국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중국의 것은 좀 더 실용적이었는데 나뭇가지의 한쪽 끝은 이집트의 것처럼 씹어서 이빨을 문지르는 데 사용할 수 있고 반대편은 날카롭게 깎아 이쑤시개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다기능 도구였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사과만 먹으면 양치질 효과가 있다”
공연 중인 커트 코베인
1992년
옛날 사람들은 충치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충치는 문화병이라 설탕을 먹게 된 뒤부터 생겼고 때문에 설탕 발견 이전에는 충치가 없었을까?
100% 맞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타당한 이야기이다. 충치의 원인은 치아에 들러붙은 음식 찌꺼기이기에 이론상 치아에 음식물이 남지만 않는다면 양치질은 안 해도 된다(이런 논리를 신봉했는지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사과만 먹으면 양치질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닦지 않은 일화로 유명하다). 물론 탄수화물도 치아에 들러붙고 음료수도 치아에 남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무리한 일이다.
건강한 치아보다는 하얀 치아를 더 관심을 갖게 되다
이스터 섬의 주민들은 식량난을 겪게 되자 물 대신 사탕수수 즙을 많이 마시는 방식으로 영양을 보충하다 20세가 되자 이가 성한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대보다는 치아에 들러붙는 음식이 적었던 고대에는 이스터 섬과는 달리 지금처럼 철저한 양치질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이에 낀 음식물을 제거하는 정도로 치아 건강은 유지할 수 있었다.
잘라낸 사탕수수
그래서였는지 사람들은 치아의 건강보다는 미백 효과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런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1세기경 로마 의사들은 희한한 처방을 내놓았다.
로마시대: 치아를 하얗게 하려고 소변으로 이 닦다
마르셸 뒤샹의 작품, <샘>
“소변으로 양치질을 하면 치아가 하얘진다. 뿐만 아니라 잇몸에 이를 더 단단히 고착시키는 효과도 있다.”
소변으로 이를 닦다니 구역질이 나는 이야기지만 아름다워지기 위해 그 정도 역겨움은 참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방법은 로마에 널리 알려져 자신의 소변으로 이를 닦는 것은 유행이 되었다. 그러다 점점 더 나아가 포르투갈인들의 오줌이 미백 효과가 뛰어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보통 오줌보다 더 진하기 때문에 효과가 뛰어나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상류층의 로마 여인들은 포르투갈산 소변을 비싼 값을 주고 구입했는데 그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에 속은 것일까?
오줌, 미백에 효과 있었다
오늘 날의 학자들은 오줌이 효과가 있었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소변 속에 들어 있는 암모니아는 실제로 효능이 있었으며 현대식 치약에도 암모니아가 이용된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다. 포르투갈산 오줌 역시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인의 오줌이라고 딱히 성분이 진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육로를 통해 긴 시간 동안 수송되면서 소변의 성분이 발효되어, 점차 강한 성분을 가진 덕분에 보통의 오줌보다 더 강한 효과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의 의사들이 자신들도 이유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권장하던 오줌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1498년 중국 황제가 사용한 칫솔이 세계 최초
미국 치과 협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칫솔은 1498년 중국의 황제가 사용한 칫솔이었다. 동물 뼈에 돼지털을 박아서 만든 이 도구는 현대적 칫솔과는 조금 질적인 차이가 있을망정 구조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1223년 송나라에 유학했던 일본 승려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인들이 소의 뼈나 대나무에 말의 꼬리털을 끼워 이를 닦았다고 말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역사가 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듀폰사, 나일론 섬유를 이용해 칫솔을 개발하다
물론 돼지털이든 말꼬리든 털 하나하나를 일일이 심어서 만들어야 하는 칫솔의 가격은 만만하지 않았다. 황제를 포함한 소수의 귀족 외에는 구식 이쑤시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칫솔이 유럽의 귀족들에게도 도입이 되었는데 그들은 뻣뻣한 돼지털이 잇몸에 상처를 낸다고 싫어하며 사용하기를 꺼리고 대신 거위의 깃털을 이쑤시개로 사용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말의 털로 만든 칫솔
1789년에야 영국의 윌리엄 애디스가 야생 곰이나 말의 털을 이용한 칫솔을 만들어냈고 그의 후손이 19세기부터 대량생산하기 시작해 광범위하게 퍼졌다. 물론 그것도 동물의 털을 이용한 것이기에 값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1937년 미국의 화학회사 듀폰(du Pont)에서 나일론 섬유를 이용한 칫솔을 개발한 후에 소수 부유층의 전유물을 벗어나 대중의 물건이 될 수 있었다.
치약, 치아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발전하다
현대적인 치약도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화학과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제대로 효능을 가진 치약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돌가루나 도자기를 으깬 가루로 이빨을 마모시켜 오히려 이에 좋지 않은 치약들이 사용되었다. 점차적으로 의학과 화학의 발달에 의해 암모니아, 글리세린, 탄산염들의 성분을 추가해 치아 건강에 도움이 되는 진정한 치약으로 발전해 갔다.
1892년 가루형에서 튜브형 치약으로 발전하다
1873년에야 치약은 대량생산이 시작되었지만 역시 값이 비쌌고 그 당시까지 가루로 제작되던 치약은 쉽게 눅눅해져 보관하기도 힘들었다. 부유한 이들은 치약과 칫솔로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를 닦을 수 있었지만, 가난한 이들은 손가락을 이용해 소다와 탄산수를 섞어 이를 닦아야 했다.
1892년 영국에서 튜브에 치약을 넣는 방식이 미국의 워싱턴 셰필드 박사에 의해 고안되었다. 그때까지 가루 형태였던 치약은 현재의 모습처럼 젤 형태로 보관이 용이해졌고 점차 가격이 낮아져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1889년 우리나라, 치분치약이나 소금으로 이 닦다
우리나라의 경우 1889년 일본 라이온 사의 분말 타입 치약인 ‘치분치약’이 처음 등장해 판매되었으나 여전히 서민층은 소금을 사용했다. 그러다 1930년 럭키 사에서 ‘No 1’이라는 치분이 생산 시판되고 1954년에는 튜브 안에 연고 치약을 국내 최초로 생산하게 되었다.
칫솔과 치약 덕에 마음 놓고 음식을 먹다
점차 다양한 먹을거리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지금과 같이 발전된 양치도구가 없었다면 사탕수수 즙으로 연명하다 이가 다 상해버린 이스터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을까? 설탕을 함유한 음식들, 그리고 이에 달라붙는 많은 음식들과 치아 건강은 양자택일의 관계였지만 현재와 같은 칫솔과 치약 덕에 우리는 걱정 없이 어떤 음식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식후에 이를 꼬박꼬박 닦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연관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