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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성문에서의 공의
룻 4:1, 2. 그 외 몇 구절
기억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요지
성경은 공의와 심판을 통하여 구원을 말한다.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법의 관념은 이스라엘 문화의 관습과 풍습에서 온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관념을 그들이 익숙해 있는 오늘날의 법률 제도를 통하여, 특히 형사법적 견지에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위로를 찾기보다 그 심판을 두려워한다. 심판의 목적이, 우리의 필요에 응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심판의 개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위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개관
성문 법정(룻 4:1,2)
심판이 아니라 화해가 목적임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심판
서론
공의, 심판 등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형벌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공의를, 마땅히 받아야 할 상벌을 정확히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심판을 생각할 때마다 형벌을 연상한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 전혀 다르게 보았다.
세계 도처의 각종 현대 법률 제도 중 자주 눈에 띄는 것들은 주로 형법과 관련된 것들이다. 불행히도 법과 규정들이 위반되었을 경우, 주로 죄상을 발견하고 형을 확정짓는 일에 역점을 두는 이러한 태도는 우리 신앙생활에까지 깊이 침투되었다.
당신은 룻과 결혼할 권리를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양도하기 위한 그 청문회가 오늘날 재판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재판들과 비교해 본다면, 룻의 경우 형사 재판이라기보다는 민사 재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사 재판이니, 형사 재판이니 하는 것은 오늘날의 분류이지, 성서 세계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성경의 법정들은 현대의 형사 재판처럼 처벌에 얽매이지 않는다. 고대의 법정은 땅 경계를 가지고 다투는 것이든, 오늘날 범법 행위라 부르는 종류의 것이든 간에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있었다. 그들은 그런 문제와 관련된 양편 혹은 양 집단의 조화를 회복시킬 만한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보아스는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그 당시 법률 제도, 그러니까 성경 저자가 인류의 기업 무를 자 예수께서 타락한 인간 남녀들을 하늘 거민과 융합시키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오셨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재판 제도를 죄다 알아보았다. 구약의 심판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개념은 이스라엘의 재판상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오해하거나 성서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기 위해 고대의 율법 제도가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잘 이해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이스라엘 법정의 긍정적 성격을 포착하기만 하면, 이런 이미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긍정적 확신을 얻게 될 것이다. 룻기 4장에는 우리의 하늘 ‘기업 무를 자’에 대해 말해 주는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우리는 그 기별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성문 법정(룻 4:1,2)
보아스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자 무엇을 하였는가?
답:
성곽 도시의 성문은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소송 절차가 행해지는 중요한 모임 장소이다. 성서 시대의 마을에는 법원으로서의 특별한 건물이 따로 없고 성문의 널따란 장소를 법정으로 사용하였다. 어떤 유적지에서는, 성문 벽을 따라 돌 의자들이 놓인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상거래나 사법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앉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성문에서의 농사에 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있다(신 21:19; 사 29:21; 암 5:10; 슥 8:16 참고).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를 찾아낸 후 그에게 판결을 위해 임석할 배심원들을 선택하는 일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을 것이다.
참고
뒤이은 절차는 지극히 민주적이었다. 사건은 뻔한 것이었고, 판결은 지체함 없이 모세의 율법에 기초하여 내려졌으며, 그 결정은 베들레헴에서 인정받는 지도자들에 의해 확정되고 목격되었다. 이리하여, 그 소송은 변호사나 과장된 논고 없이 해결되었다(본교 성경 주석 2권, 442).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 벽을 따라 놓인 낮은 돌 의자들을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문에 놓인 왕좌같이 생긴 두 개의 의자도 발견하였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한때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왕상 22:10) 넓은 곳의 보좌에 앉아 있곤 하였다. 시드기야 왕은 ‘벤야민 문’(렘 38:7)에 앉아 있었다.
압살롬은 백성들의 충성심을 자기 아버지로부터 탈취하기 위한 일환으로 성문에서 무슨 짓을 하였는가?(삼하 15:2~4)
답:
백성들에게 공의 베풀기를 원한다는 주장을 통해서 압살롬은 그 나라의 판결 제도를 손상시키고 있었다. 압살롬은 재판관이 되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알려진 공의를 뒤엎고자 하였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들은 정부의 순회 재판소 제도나 전문적인 변호사와 판사를 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왕도 그 나라의 수도에서는 재판관 노릇을 하였으나 그 밖의 지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적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는 제1의 구조자들이요 해방자들이었다”(아더 E. 컨돌, 사사기 개론과 주석, 15). 그들은 현대적 의미의 법무관들이 아니었다.
아모스가,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암 5:15)
답:
구약의 재판에서 그 법적 절차들은 간편한 것이었으며 공동체 지향적인 것이었다. 이스라엘 법정은 치안 기능 외에도 오늘날 우리가 사회 복지 활동으로 생각하는 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것은 논쟁과 싸움의 조정 역할을 하였다. 그 법정은 상속, 결혼, 거래 등의 문제들을 검토하고 처리하는 일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개인이나 사회 전체의 평화와 융합을 깨는 어떤 파괴 행위나 마찰 등을 그곳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참고
그 법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한번 살펴보자. 마을 사람 두 명이 잃어버린 가축과 옮기어진 밭 경계선을 놓고 티격태격 입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네들만으로는 해결이 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그들은 서둘러 성문 앞 광장으로 달려왔다. 보아스처럼 그들은 청문회를 구성하기 위해 유력한 남자들을 불러 모았다. 공의를 호소하는 행위가 곧 법정을 존재케 하였다. 현대의 법정과는 달리 이스라엘 법정은 계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필요하기 몇 분 전에는 그 법정이 없었으며 사건이 해결되면 그 법정은 곧 해산하였다. 그것은 필요할 때마다 재구성될 것이었다(한스 요한 보우커, 구약과 고대 근동의 율법과 행정, 33,34).
재판관으로 봉사할 자격이 누구에게 주어졌었는가?(신 19:12, 25:7)
답:
장로들은 유력한 시민이거나 족장들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근대의 유다 특히 헬라와 로마가 영향을 미칠 당시의 유다 역사에서 보다 체계화된 법정과 재판 제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 있는 것과 같이 복잡한 법률 제도는 아니었다.
형벌이 아니라 화해가 목적임
모여 앉은 장로들과 구경하는 이웃 사람들 앞에서 원고와 피고는 사건을 진술하였고, 옹호자들이나 다른 무리도 함께 참석하였다. 그러므로 이 즉석 법정은 판결을 내리고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증인을 세울 수 있었다.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최소한 몇 명의 증인들이 필요하였는가?
답:
장로인 증인은 자기가 증거 한 후에 또 판관 역할도 할 수 있었다. 고소자도 판관을 겸할 수 있었다(한스 요한 보우커, 구약과 고대 근동 율법과 행정, 34,35 참조).
이스라엘 법정 제도의 간결함은 보다 세분화된 법 구조에 익숙해있는 사람들을 당황케 한다. 한 사람이 차례로 증인과 판관, 원고와 재판관, 혹은 셋 다 될 수 있는 소송을 상상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어떤 법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늘날의 공판에서처럼 양측에서 물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가축을 탈취 당했다고 고소한 농부는 뽑힌 털이나 찢겨진 가죽, 고기 조각 등 나머지들을 가져와 보임으로써 약탈자가 그 가축을 훔쳐갔다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여야 하였다(출 22:13).
양편이 모두 사건의 진상을 말한 후에는 원고, 피고, 장로들이 일어선다. 그 때, 장로들이 유죄 혹은 무죄를 선언하거나 원고와 피고 사이의 논쟁을 해결할 대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선고는 처벌보다는 논쟁이나 문제를 종식시켜 양측이 다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법정은 도둑을 투옥시키는 대신에 무엇을 했는가?(출 22:1)
답:
심지어 살인자의 처형도, 그가 율법을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희생자의 족속이나 가족들과 살인자의 집안과의 긴장을 풀기 위해서 행해졌다. 손실이 즉시 보상되지 않으면 원한으로 인한 피 흘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전 가족이나 종족을 쓸어버리기까지 확대될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 재판의 주요 목적은 범죄자를 처벌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요 사이가 틀어진 두 집단을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숙고
고대 이스라엘 법정이 일을 처리한 방법과 대쟁투가 해결되는 방법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인간 모두가 우주 앞에서 공판을 받을 것인가?
참고
어느 저자는 이스라엘의 마을 법정을 ‘화해 기구’라고 불렀으며, 그 기구의 목적은 “분쟁을 가라앉히고 공동체의 복지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상동, 37, 38).
“성경에서의 판관은, 단지 사건을 조사하고 형을 선고할 지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역시 부정이 행해질 때는 고통을 당하고 곤란을 겪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아브라함 헤스켈, 선지자들 2권, 63).
이스라엘 법정의 존재 목적은 문제들이 풀리는 것을 보고, 도움을 제공하며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회의 각 개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권리를 부여받았다. 법정의 의무는 거기 오는 사람들이 천부의 권리를 누리는 것을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부나 고아는 그들을 보호해 줄 가족이 없기 때문에 공동체가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만약 공동체가 그 책임을 회피하면 과부나 고아는 공의가 시행되는 것을 보기 위해 법정이 문을 열도록 장로들을 소집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문제가 있는 이스라엘 인은 자연히 그 해결을 위해 성문의 법정으로 향하게 되었다.
참고
아브라함 헤스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경의 공의는 법조항에 따라 판사가 법을 집행하는 그런 법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다 적용되는 요구와 책임, 권리와 의무를 포함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선지자들, 1권 210).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남들에게 짓밟히고 괴롭힘과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재판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길을 기대할 것이었다. 그들은 법정이, 그들을 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서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성문 법정은 매정한 곳이 아니었다. 재판석에 앉아 있는 자들은 고소인과 그들의 필요를 잘 아는 같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법정은 특별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들과 이스라엘 법정의 관습을 어떻게 지방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답:
시편 7편 8절을 읽어라. 시편 기자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심판해 달라고 확신 있게 간청할 수 있었는가?
답:
많은 사람들 중에 다윗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시 7:8)을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필요에 응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타락한 죄인의 절박한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인류와 당신 사이에 죄가 만든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쓰신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과부와 고아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법정으로 갈 수 있었던 것처럼, 현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법정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에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신약의 심판
신약의 저자들이 재판의 처벌 면에 좀 더 관심이 많았던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형사법이 더 필요한 세상에 살았기 때문이다. 팔레스틴은 오랫동안 부정과 범죄가 난무하던 역사의 결과로 고통당하고 있었다.
르호보암이 법정에서 판관으로 봉사하던 노인들의 충고를 거절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왕상 12:6~16)
답:
이방 종교의 영향이 커짐에 따라 부와 권력이 소수의 부유한 지주들 손에 들어갔다. 이것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전연 반대되는 것이었다. 영적 ·도덕적 부패와 함께 사법 제도의 몰락이 왔다. 뇌물 수수와 부정 행위가 법정에 만연하였다. 아모스와 그 밖의 선지자들은 “성문에서” 공의를 존중할 것을 호소하였다(암 5:10, 12,15; 슥 8:16). 그러나 그런 경향은 멈추지 않았다. 예수께서 초림하실 당시 인구의 절대 다수가 비참한 가난 속에서 공의에 대한 희망도 없이 허덕이고 있었다. 헤롯 정부와 로마 정부는 시민 법정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고, 일부는 제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그들의 이상과 허락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찰
다음 절들을 찾아보고, 심판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여러분의 말로 요약해 보라.
ㄱ. 마 5:21 | ㄹ. 눅 12:2 |
ㄴ. 마 12:36, 37 | ㅁ. 요 9:39 |
ㄷ. 마 23:23 | ㅂ. 요 16:8, 11 |
악한 자들의 보응에 대한 신약의 몇몇 말씀들은, 1세기경의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물질적 번영을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라고 생각하던 세상에서,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예수의 말씀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물질적 번영을 이룩했던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그들도 또한 사랑하셨다. 신약은 계속해서 심판을, 바랄만 한 것이며 위해서 기도할 만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심판은 이 세상에서의 악의 문제에 대해 유일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그것은 구약의 남녀들의 희망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심판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요일 4:17)
답:
연구와 명상
다음 성경절들에서 바울이 심판에 관해 언급한 내용들을 공부하라. 롬 14:7, 10, 12; 고전 3:8, 13
“우주의 심판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발생과 존속에 대해 전연 책임이 없이 서실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들은 죄악의 종범(從犯)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정치에는 아무런 결함이나 불만의 이유가 없었다”(시대의 소망 1권, 59).
심판 때에 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실 자들은, 신학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을는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원칙들을 소중히 한 자들이다.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저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다.(시대의 소망 3권, 112).
요약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문 법정을 그들의 권리와 안전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곳으로 보았다. 그 법정은 그들이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제공하였으며, 공의가 행해지는 것을 지켜보고 그 공의를 보존하였다. 그 법정은 멀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다. 법정이 열리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복과 화해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 법정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기만 하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심어 주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가치를 설명해준다.
적용
재판장께서 우리 편이시므로 하늘 법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친근한 곳이다. 재판장이신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데, 그분이 날 구원하실 수 있을까 하고 염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한편, 나의 죄가 용서되고,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내가 죄를 극복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특별한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최후 심판의 마지막 순간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며 볼 때, 나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심판에 설 준비를 하도록 돕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