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서적소개-
까마귀 날던 때
1. 까마귀 나는 곳
“까마귀 나는 오미, 日人들이 철도를 놓고 烏山이라고 부르던 장터이다. 나는 어려서 여기서 보통학교를 다녔다.
장터에서 공자묘(公子廟)가 있는 궐리사(闕理祠) 동리를 가자면 조그만 시내를 건너야 한다.
나는 곧잘 이 시내 외나무다리에서 가 놀았다. 나의 윗반인 은재란 부잣집 딸을 『은아 은덩어리!』하고 놀려 대었다.
은재는 학교를 졸업하기가 바쁘게 우리 보통학교 선생에게 시집을 갔다. 기차로 오산엘 가자면 서편 쪽에 여전히 그 조그만 시내가 흐르고 건널목에 외나무다리가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이곳에 갈 때마다 뇌리(腦裡)에 새겨진 어릴 때 놀이를 생생하게 되새겨 내곤 한다. 이 십년이나 지나서 나는 피난을 갔다가 오산서 중학교 일을 보게 되었다. 학교에 가고 오는 길은 큰 길이 있었지만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버릇이 들었다. 다시 서울로 오기까지, 아니 그 후에도 이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냇가에 깔린 버들강아지의 애쳐로운 모습이며, 둑 위 보리밭에 끌밋하게 돋아난 보리이삭의 싱싱함이며, 물가의 미나리며, 미나리아재비,... 청따라 지면(地面)을 장식하는 草木의 가지가지, 그 예쁨을 나는 어려서부터 좋아해왔다.
난리를 치르고 난 몇 해 후 나는 우연히 은재와 사는 선생을 만났다. 은재는 시집간 지 얼마만에 허파를 앓다가 세상을 떴다고 들었다.
서른 해가 다하도록 죽은 은재소식을 몰랐던 나이다. 나는 멀리 돌아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 중학엘 간 일이 있다. 어린 시절의 회상을 하기 위해서이다. 길도 그 때의 길이요 시내도 그 시내인데 외나무다리만은 동란 소산(動亂 所産)의 고철(古鐵)의 다리로 변하였다.
나는 옛 추억에 잠긴 채 발길을 옮겨 놓는 걸 잊고 있었다.
『은아 은덩어리!』 하고 발랄하게 목청 높여 부르던 어린 시절의 놀림을 얼버무리다가 고소(苦笑)를 짓고 발길을 옮겼다.- 1966년 10월- ”
"자작나무는 어린나무나 큰 나무나 그 줄기가 희다. ‘찰아즈 다아윈’은 사진 찍기를 싫어했는데 소프트 모자를 벗어 들고 망토 입은 차림으로 자작나무에 기대어 찍은 사진이 있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사진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는 자작나무를 좋아했다. 정원에 몇 그루 자작나무가 서면 그 운치는 그럴 듯하다. 우리 대학 일동 교사와 이동 교사 사이에는 많은 나무가 들어서 있다. 학교를 짓고 이사 와서 심은 것일 터이니 모두가 크다. 여기에 자작나무 숲이 있어 그 경치가 보기에 그럴 듯하다. 나는 유난히 이 자작나무 숲을 좋아한다. 강당 뒤 큰 벚나무의 삭아빠진 큰 가지에서 하늘소 암수가 한데 붙은 것을 포충망을 씌워 잡아 가지고 이 자작나무 숲 속으로 와 앉아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 곳은 벌레를 잡느라 피로했을 때나, 또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나, 무슨 계획을 꿈꿀 때에 찾아와 조용히 앉아 쉬는 곳이다. 자작나무 숲 속에서 이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그 간 틈틈이 써서 모은 수필, 아닌 수필이 모여 책 한권이 되었다. [자작나무 숲 속에서] 새교육, 새교실, 잡지에 실은 교육 수필도 여기에서 생각했다. 또, 벌레에 관한 수필도 여기에 썼다. 그리하여, 이 수필을 모은 책 이름을 [자작나무 숲 속에서]라 하였다.”
위 글은 수필가 구건(具建.1920~1975)의 [자작나무 숲속에서] 발문이다.
오산에서 수필가 구건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저서 [자작나무 숲속에서] 앞부분에 수록된 작품 「까마귀 날던 때」 때문일 것이다.
까마귀 날던 때
산발머리 양버들 울타리로 싸이어
검은 양철지붕 큰 도수장간이
윗동네 한복판에 홀로 섰을 때
무너진 콘크리트 큰 다리가
통나무 기둥 다리이었고
오산내 그 물이 섬둑가에 얼어붙고
그 큰 쇠장이 섬둑 거리에 섰을 때
검푸른 하늘 희 눈벌판 위를
시커먼 까마귀 떼가
까옥까옥 날았었다
한여름 몇 번 장마 붉덩물로 싸이어
시달래 오막살이 집 한 채가
사과밭 섬 속에 오똑 섰을 때
새탓말 새 학교 터가 똥집 사과밭이었고
밀머리는 장마물로 바다가 되고
사과 배 뽕 밭이 섬 안에 있었을 때
궂은 하늘 붉덩물 위를
시커먼 까마귀 떼가
까옥까옥 날았었다
남촌 사과밭 열매가 석양에 익고
양장누에가 비단 집 지을 때
곳곳 매가리간엔 소로 마차로
벼가마가 산에 산을 이루었고
오산내 넓은 모래밭엔 벼멍석이 깔리고
그 큰 가마장이 아랫장에 섰을 때
누런 벼 멍석 위엘
검은 까마귀 떼가
훨훨 날아들었다
박동 박후작(朴候爵)집 복사밭 개나리 노랗게 피고
보리밭 위 창공에 종다리 솟구칠 때
곳곳 앞뒤 도랑엔 맑은 물이 흘러
피라미 붕어떼 떼에 떼를 이루고
오산내 넓은 모래밭엔 봇삼군이 몰리고
넓은 들 운암들엔 햇모가 파아랄 때
아지랑이 봄 하늘엔
검은 까마귀 떼가
짓궂게도 넘나들었다
궂은 날 장안날엔 까마귀 떼는
도수장간 양버들 위에 우지져댓고
암산 화장터에 불꽃이 인 날엔
철다리에서 까옥까옥 울어댔었다
얄궂은 흉조(凶鳥)는 간 데가 없고
까악까악 까옥 소린 사라졌건만
들고 날고 이십 년에 설움만 느니
나 뛰놀던 날 옛날이
더욱 그립다.
1950년대 오산의 풍경을 담은 이 시는 1955년 오산중·고등학교 교지(校誌)인 청학지(靑鶴誌)에 게재되었던 작품으로 저자가 오산중·고등학교(1951~1959)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학교 교지에 올린 글이다.
작품을 보면 오산 여러 곳의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리고 있다.
지금은 아련히 남아 있는 지명(地名)과 여러 건물이름이 담겨 있어 시를 보면 정겨움이 묻어난다.
수필가 구건은 옛 TBC의 유명한 앵커였던 구박의 형이기도 하다. 그의 수필은 인포멀 에세이에 속한다. 유년의 추억과 소시민의 삶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고 자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새교육] [새교실] 등의 잡지에 교육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다. 1.4후퇴 때 경상도 피난 살이에서 간디스토마에 걸려 병을 얻어 결국 그 병과 18년간 투병하다 55세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고향인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북리 당하동 가족묘에 안장되었다.
2. 生涯
구건 수필가는 1920년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통삼리에서 태어나
1935년 성호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1942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 졸업
1942년 인천송림공립 국민학교 훈도
1945년 미군정청 경성 사범학교 부속 국민학교 전근
1946년 사범대학교 부속 국민 학교 근무
1951년 ~ 1961년까지 오산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63년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4년 졸업
1969년 경성농업대학 조교수 / 서울 시립 산업대학 교수 재직
1975년 8월 1일 수필집 [자작나무 숲 속에서] 발간 후 작고.
그의 수필집 [자작나무 숲 속에서]에서 오랜 기간 병마와 싸우며 겪었던 투병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1950년 12월,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40세 미남의 젊은 남자는 제2국민병이란 이름 아래 끌리어 천리 피난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내가 서울서 피난 와 있다가 龍仁 집을 떠난 것은 12월 25일이었다. 그 날 밤은 유난히 달이 밝았고 눈이 많이 쌓이 였었다. 밤중에 떠나 장호원 충주를 거쳐 상주에 닿은 것은 몇칠이 지난 후이었다. 여기서부터 군위, 삼랑진, 양산, 밀양 등지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기아와 추위와 싸워 가며 헤매이 어야만 하였다. 낙동강을 몇 번이고 건넜다. 꽁꽁 언 주먹밥 한 덩이가 한 끼니었다. 물 마시고 싶으면 닥치는 대로 마실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경주로 들어가 석 달 동안을 이루 다 말 못할 고생살이 끝에 마음죄며 기다리다가 다음 해 춘 3월 27일에 꿈속에 그리던 용인 집에 돌아왔다.
이 때의 감격, 그 기쁨을 누구에게 다 말하랴!
그러나 희비변곡은 언제나 있는 법, 내가 차지했던 기쁨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고, 4월부터는 소화불량으로 무진 애를 쓰게 되었다. 마침내 오른쪽 갈빗대 아래 부분이 붓고 굽히면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요색의 변화가 심하게 되었다. 서울 수복이 안 되어 큰 병원이 올라오지를 않아 하는 수 없이 매약과 한약을 바꾸어 가며 쓰기에 바빴다. 이러는 동안 내 스스로 간이 비대해 졌음을 알고 초조해 하였다. 1.4후퇴 경상도 피난살이에서 나는 결국 불행하게도 간디스토마에 의한 肝病을 얻었고, 그 후 거의 18년간을 이로 인해서 사람 구실을 다 못하면서 살아야만 했다. 나는 그 때 말없이 죽어 넘어간 限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래도 살아 남은 것만을 다행으로 알며 自慰를 삼았다.”
이렇듯 그의 투병기를 살펴보면 병을 얻게 된 이유와 그로 인해 18년간 병마와 싸우며 이를 극복해 나가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보게 된다.
3. 수필집 [자작나무 숲 속에서]
그의 수필집 [자작나무 숲 속에서]의 머리말에서 작가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시골에서 낳아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시골에서 여러 가지 것을 배우고 보았다. 어려서는 어린대로, 커서는 큰 대로 들은 것이 있고 본 것이 있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나, 살아서 무엇을 하나,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늘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자라나기까지 생각하고 기억한 것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하여 왔다. 이것이 나의 일기다. 이 일기 속에는 어려서부터 즐기던 벌레, 곤충들의 생김새, 사는 방법이 세세하게 기록되었다. 이 수필 속에는 자연 곤충에 관한 것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그 때 그 때 쓴 글을 모아 엮은 것이어서 체계가 잘 잡혀 있지 못한 점이 있으나 아무쪼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라고 자신의 수필집 발간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수필집 머리말에 나타나 있듯 작가는 곤충과 식물을 사랑하고 그 것을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친 곤충학자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집에는 그가 교육자로서 갖는 신념과 당시의 시대상이 올곧게 드러나 있다. 한편, 해방 후 오산 교육발전에 앞장섰던 윤학영(1898~1966)선생을 기리는 추모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글, 자료, 진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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