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시기 민여운의 의병활동
김만호(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
Ⅰ. 머리말
Ⅱ. 민여운의 의병 창의
Ⅲ. 제2차 진주성 전투와 민여운
Ⅳ. 맺음말
Ⅰ. 머리말
태인(현, 정읍시 태인면) 출신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인물이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민여운의 의병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11월 전후로 전북의 운봉과 경남 함안 인근에서 싸운 것이다. 다음으로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한 사실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정읍 출신 의병장 민여운을 다룬 단독논문은 한 편도 없으며, 그만큼 그의 생애와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민여운의 개인 문집이 남아 있지 않고, 그와 관련된 기록이 소략하기 때문에 지금껏 연구의 첫발을 떼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본 발표에서는 민여운에 대한 기록의 편린들을 충실히 모아 그의 삶과 의병활동에 대해 밝혀보고자 한다.
호남절의록은 임진왜란 시기 호남지역 출신 인물 중 주요한 의병장을 중심으로 편제를 해 두었다. 그런데 이 편제 상에도 민여운의 이름이 확인된다. 호남절의록의 대략적인 편제는 “○○○事實”, “同殉諸公事實”, “同倡諸公事實”로 구성되어 있다. 즉, 호남 출신 인물 중 주요한 의병장의 행적을 먼저 서술한 후, 그와 함께 순절한 자, 함께 창의한 자를 연이어 기록해 둔 것이다. 이렇게 보면, “○○○事實”에 포함된 인물들은 호남의병장 중 주요 인물에 해당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의 표는 호남절의록의 편제상 “○○○事實”로 기록된 인물의 이름과 출신지를 정리한 것이다.
권 1 상 : 송상현(고부[정읍]), 고경명(광주)
권 1 하 : 김천일(나주), 황진(남원), 최경회(화순), 고종후(광주), 심우신(영광),
장윤(순천), 민여운(태인[정읍]), 최경장(화순)
권 2 상 : 김덕령(광주), 김제민(고부[정읍]), 이정란(전주), 임계영(보성),
변사정(남원), 박광전(보성), 임환(나주), 기효증(광주), 변이중(장성)
권 2 하 : 一道殉節諸公事實, 一道擧義諸公事實
권 3 상 : 조헌, 권율, 이순신, 이복남, 이억기
권 3 하 : 大駕扈從諸公事實
권 4 상 : 宗廟扈從任公事實, 眞殿扈從諸公事實, 異域全節, 他道附錄
위의 인물들을 현재의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구분해보면, 광주광역시는 고경명 등 총 4명이고, 전라남도는 김천일(나주) 등 총 9명이다. 그리고 전라북도의 경우에는 송상현(정읍) 등 총 6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렇게 보면, 민여운은 임진왜란 시기에 주목할 만한 호남 의병장 19명 중 한 명에 포함되며, 전북 지역으로 한정해보면 6명 중의 한 명에 해당한다.
또한, 한국사 29권(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의 임진왜란 부분 <표 1> “의병의 봉기” 부분을 보면, 전국의 의병장에 대한 정보가 정리되어 있는데, 그중에 민여운의 이름도 확인된다. 아래의 표는 호남 지역의 인물들만 발췌한 것이다. 한국사 29(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국사편찬위원회, 2013, 43쪽.
20명의 인물 중 전북지역 인물은 음영으로 표시한 것처럼 8명이며, 그 중의 한 명이 민여운인 것이다.
봉기장소 이 름 신분 봉기장소 이 름 신분
光州 高敬命 전부사 寶城 任啓英 전현감
光州 高從厚 현 령 寶城 朴光前 전현감
羅州 金千鎰 전부사 和順 崔慶會 전부사
玉果 柳彭老 전학유 和順 崔慶長 전제독관
南原 安大模 유 학 南原 楊士衡 전현감
南原 梁大樸 전학관 南原 梁 樹 참 봉
南原 邊士貞 전참봉 南原 金得池 진 사
順天 姜希說 무 사 靈光 沈友信 전첨정
靈光 任希進 첨 정 海南 成天祗 전판관
泰仁 閔汝雲 전주부 호남 處 英 승 려
즉, 민여운은 관련 기록이 풍부하지 않았던 때문이지, 조선후기의 평가나 최근의 연구성과에서는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던 전북 출신 의병장 중 열 손가락안에 포함되는 인물로 민여운을 매번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사료의 부족함 때문에 구체적으로 민여운의 행적을 파악하기는 어렵겠지만, 그의 생애와 임진왜란 당시의 창의, 그리고 의병활동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의병활동이 갖는 역사적인 의의에 대해서도 조망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정읍 의병장 민여운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Ⅱ. 민여운의 의병 창의
이 장에서는 민여운의 가족관계, 관력(官歷) 등 임진왜란 이전 행적과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 어떻게 창의했고, 누구와 함께 싸웠는지, 또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임진왜란 이전의 행적
민여운의 자(字)는 용종(龍從), 민여운의 자를 종룡(從龍)으로 오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족보를 보면 모두 용종으로 되어 있으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문인공(文仁公) 영모(令謨)의 후손이고 찬성(贊成) 제인(齊仁)의 손자이다. 민여운이 태어난 해는 관련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참고로, 민여운의 조부 민제인은 여흥민씨 16세로, 입암공파(立岩公派)의 파조(派祖)에 해당한다. 즉, 민여운은 여흥민씨 18세에 해당하며, 입암공파에 속했던 인물이다. 閔庚燮 편저, 驪興閔氏人物史集, 범아출판사, 2009, 305쪽.
한편, 아버지는 봉사(奉事) 민은관(閔恩寬)으로 전해지는데, 驪興閔氏世系譜(1권), 驪興閔氏世系譜 刊行委員會, 1973, 453쪽; 井邑郡史, 井邑郡文化公報室, 1985, 1358쪽; 新編 井州 井邑 人物志, 井邑文化院, 1990, 154쪽; 全羅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全北大學校 全羅文化硏究所, 1990, 498쪽; 井邑市史, 井邑市史編纂委員會, 2003, 3434~3435쪽; (사)한국고전문화연구원 편, 전북인물사전, 전라북도⦁(사)한국고전문화연구원, 2018, 283쪽.
참고로 정읍군사(1985)에는 “1596년(선조 29)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황진, 심우신 등과 같이 진주성에 입성”했다고 적혀있으나,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의 일이므로 잘못 서술되었음을 밝힌다. 정읍시사에는 “1558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민여운이 이조참판에 추증된 것은 “1858년”으로 바로잡는다. 또,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1990)에는 민여운의 몰년이 “1592년”으로 되어 있는데, “1593년”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민여운의 아버지 이름을 “사관(思寬)”으로 정확히 기록해 두었다.
여흥민씨세보에 따르면 아버지는 “사관(思寬)”로 되어 있다. 驪興閔氏世譜 1권, 驪興閔氏大宗會, 2022, 339~356쪽; 2권, 912~913쪽.
세보에 따르면 민제인에게는 사용(思容)과 사관, 사안(思安), 사선(思宣), 사환(思寰), 사의(思宜)까지 총 여섯명의 아들이 있었다. 다만, 사관의 동생인 사안의 진사합격 관련 기록을 보면, 가족사항 중 형제관계에 형은 사용, 동생은 사선 이렇게 두 명만 기록되어 있어서 의문이다. 『가정31년임자사마방목(嘉靖三十一年壬子司馬榜目)』(성균관대학교 존경각[B13KB-0006]) 민사안
사환이나 사의가 어려서 누락되었다고 이해하더라도, 작은형인 사관이 빠진 것은 자못 이해되지 않는다. 여하튼, 기존에 민여운의 아버지를 “은관(恩寬)”이라고 표기했던 것들은 모두 “사관(思寬)”으로 수정되어야 옳을 것이다.
민여운의 아버지 사관은 자가 언유(彦裕)이고, 예빈봉사(禮賓奉事)를 지낸 인물이다. 민여운의 부모님의 묘는 고양군 행주(幸州)에 있고, 민여운의 묘부터 태인 산외면(山外面)인 것으로 보아, 여흥민씨 입암공파의 태인 입향조를 민여운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참고로 민여운에게는 격(格), 집(楫), 익(榏)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은 민격은 무후(无后)이고, 민집과 민익이 대를 이었다.
민여운은 성격이 강직하였으며 절개가 있었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음직(蔭職)으로 두 고을의 현령(縣令)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고 했을 뿐, 두 고을에 대한 정보는 없다. 호남절의록 권1 하, 「임진란 때의 의적(壬辰義蹟)」, 비의장 민여운 사실(飛義將閔公事實)
민여운의 관직생활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강원도의 김화군읍지 선생안이 가장 빠른 경력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강원도 김화군은 현재, 북한의 김화군과 남한의 철원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읍지의 선생안에 따르면 민여운은 만력 기묘년에 도임하여 경진년에 체임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즉, 1579년(선조 12)~1580년(선조 13) 약 2년간 강원도 김화현령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洪 進 萬曆戊寅年間到任遞職年月不記(1578~?)
⦁閔汝雲 萬曆己卯年間到任庚辰遞去(1579~1580)
⦁徐應麒 萬曆八年庚辰到任壬午遞去(1580~1582)
김성일의 「북정일록(北征日錄)」 1579년 9월 23일자에 따르면, “김화(金化)의 원[倅] 민여운(閔汝雲)이 나와서 두 번째 운반하는 납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납의가 22일에 비로소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본현(本縣)으로 돌아와서 나의 일행을 영접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학봉일고(鶴峯逸稿) 제3권, 「북정일록(北征日錄)」 1579년 9월 23일.
민여운이 해당 시기에 김화현령을 역임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출처 : 김화군읍지 선생안
참고로, 정읍문화원이 펴낸 新編 井州 井邑 人物志(1990)에 따르면 용담현령을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용담현읍지(龍潭縣邑誌)(奎 17418) 선생안(先生案)에 따르면 “閔汝雲戊子到任庚寅罷歸”으로 되어 있다. 즉, 용담현읍지 기록으로 보건대 민여운은 1588에 용담현령으로 부임하여 3년 후인 1590년에 체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화현령을 역임한지 8년여 만에 용담현령을 지낸 셈인데, 그 사이의 기록이 없어서 민여운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덧붙여, 민여운 전후로 용담현령(종5품)을 역임한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洪 進 癸未到任戊子瓜逓(1583~1588)
⦁閔汝雲 戊子到任庚寅罷歸(1588~1590)
⦁徐應麒 庚寅到任癸巳病遞(1590~1593)
* 출처 : 용담현읍지 선생안
한편, 경상도 안의현(安義縣)의 환적(宦蹟)에도 민여운의 이름이 보인다. 안의현읍지에 따르면, 민여운을 전후로 안의현감을 역임한 자들은 박문룡(朴文龍) → 이유(李悠) → 민여운(閔汝雲) → 정호인(鄭好仁) → 박대용(朴大容)이다.
* 출처 : 輿地圖書 下(한국사료총서 제20집) 補遺篇 (慶尙道) 安義縣邑誌 宦蹟
하지만, 이상의 인물들이 언제 안의현감을 역임했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민여운의 근무 시기도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현감은 종6품의 관직이기 때문에 김화현령을 역임했던 1579~1580년 이전 시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결국 민여운의 관력을 최종적으로 정리해보면, 경상도 안의현감(근무시기 불명, 종6품) → 강원도 김화현령(1579~1580년, 종5품) → 전라도 용담현령(1588~1590년, 종5품)이었다. 그리고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1592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첨정(僉正, 종4품)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여흥민씨세계보에는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驪興閔氏世系譜(1권), 驪興閔氏世系譜 刊行委員會, 1973, 453쪽.
2. 임진왜란의 발발과 민여운의 의병창의
호남절의록에는 민여운의 의병창의와 초기의 의병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임진란 때 같은 고을의 정윤근(鄭允謹)과 함께 향병 2백 여인을 모집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군량을 모았으며 병기 등을 손 보았다. 의병을 일으켜 국가의 치욕을 갚자고 맹서하였는데 무리들이 공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정윤근은 부장으로 삼았다. 공이 대장이 되어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고 「웅(熊)」자로 군대의 표지(標識)를 삼으며 스스로를 비의장(飛義將)이라 칭하였다. 병사들을 이끌고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함안(咸安) 등지에 들어가 적과 만나면 반드시 이겨 참획 한 바가 무수하였다. 호남절의록 권1 하, 「임진란 때의 의적(壬辰義蹟)」, 비의장 민여운 사실(飛義將閔公事實)
위와 같이 민여운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향의 정윤근과 함께 향병 200여인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병력을 모으고, 군량을 모았으며, 병기 등을 점검하였다. 이때 모인 자들은 민여운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정윤근을 부장으로 삼았는데, 민여운의 의병부대는 삽혈동맹을 통해 전투의지를 굳게 하였다. 그리고 “웅(熊)”자를 군표로 삼았고, 민여운 자신은 “비의장(飛義將)”이라 불렀다. 호남절의록에는 민여운의 창의 시점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지만,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보면 1592년 10월 10~18일 사이에 창의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난중잡록 2, 임진년 하(1592년) 10월.
그렇다면 민여운은 어떠한 계기로 의병을 창의했을지 궁금하다. 관련 기록이 충분치 않아서 창의의 직접적인 동기와 창의 과정에 대한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안방준이 이귀에게 쓴 글에서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은 있다. 그에 따르면, “제봉이 이미 죽자 그의 아들 임피현령(臨陂縣令) 고종후(高從厚)가 복수장(復讎將)으로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오유(吳宥)가 부장(副將)이 되었고, 진사 문홍헌(文弘獻)이 능성(綾城, 능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담양 부사(潭陽府使) 최경회(崔慶會)를 대장으로 추대하였으며, 소생의 죽은 스승[박광전]이 보성(寶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병으로 군대를 이끌 수 없게 되자 진보현감(眞寶縣監) 임계영(任啟英)을 대장으로 삼고 전 만호(萬戶) 장윤(張潤)을 부장으로 삼았으며, 참봉(參奉) 변사정(邊士貞)이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잠(李潛)을 부장으로 삼았으며, 강희열(姜希悅)이 광양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강희보(姜希甫)가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 외에 정충훈(丁忠勳)⋅민여운(閔汝雲) • 이계련(李繼璉) 등 이루 다 셀 수 없으니, 이들은 모두 제봉의 막하에 남았던 병졸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은봉전서 제3권, 「서(書)」, 연평 상공 이귀에게 보낸 별지[與延平李相公貴別紙]
이상에서 보듯이 고경명의 제1차 금산전투 전사 소식은 당시 호남 사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고경명의 죽음을 계기로 연이어 창의하였는데, 민여운의 거병 역시 그러한 호남지역 사림들의 공감장(共感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민여운이 실제로 고경명의 막하 인물이었는지의 여부, 인적 연망(連網)의 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불분명해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민여운이 창의하게 된 계기에 고경명의 죽음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듯싶다.
1592년 10월 하순에 거병한 민여운의 의병부대는 전라도과 경상도의 경계에 있던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함안(현, 경상남도 함안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많은 승리를 거둔 것으로 나온다. 참고로, 팔량치는 현재 전북 남원시 인월면(引月面)과 경남 함양군 함양읍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소백산맥의 연비산(鳶飛山, 843m)과 그 남쪽의 삼봉산(三峰山, 1,187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팔량치의 높이는 513m인데,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어서 군사상, 교통상의 요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옛날부터 경남의 북부 산간 지방과 전북의 남동 산간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조선시대에는 호남지방의 곡창지대를 지키는 관문인 팔량관(八良關)이 설치되어 있어서 팔량재 혹은 팔량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비변사인방안지도」에 따르면, 팔량치는 “極險峻 艮方 距二十五里 咸陽界”로 되어 있다. 이를 보면 팔량치는 매우 험준한 고개로 동북 방면을 통해 함양의 경계와 15리 떨어져 있었다.
* 출처 : 비변사인방안지도 운봉현
이후 민여운의 활동은 최경회와 함께 우지령(牛旨嶺)에 주둔하면서 일본군과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성록에 따르면, 민여운은 최경회와 함께 호서의 의병장인 한명윤(韓明胤)⦁박이룡(朴以龍)과 합세하여 우지령 아래에 진을 치고 김산과 지례에 남아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막았다고 하는데, 참고로 우지령은 지례(현,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와 황간(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화순 출신의 최경회 부대[전라우의병]의 활동상을 보면, 장수 → 남원 → 함양 → 산음(현, 산청)을 거쳐 1592년 10월 5~11일 제1차 진주성 전투때 외곽에서 일본군을 견제하면서 김시민의 진주성 수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10월 하순부터 11월 중순까지는 주로 전라좌우의병과 김면군이 연합하여 개령 공격전을 전개하였고, 11월 중순 이후에 전라좌우의병이 분리되면서 최경회의 전라우의병은 김면군과 함께 개령에서, 임계영의 전라좌의병은 정인홍군과 함께 성주에서 수복전을 펴기 시작했다. 趙湲來, 「全羅右義兵과 崔慶會 一家의 義兵運動」, 和順地方의 壬亂義兵活動, 和順郡, 1988, 114~128쪽.
일성록의 기록과 최경회의 활동상을 합치해보면, 민여운의 부대는 11월 경 최경회와 함께 개령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김면(金沔, 1541~1593)의 송암유고(松菴遺稿)에 수록된 「임진창의시동고록(壬辰倡義時同苦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의사(諸義士) 두 번째 인물을 보면, “閔汝雲 前僉正”으로 간단히 이름과 관력만 나와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민여운이 1592년 11월 경 김면-최경회 등과 함께 개령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음이 분명해진 셈이다.
* 출처 : 임진창의시동고록(壬辰倡義時同苦錄)
한편, 난중잡록 1593년 1월 8일자 기록에을 보면,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또한 태인(泰仁)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성주(星州)ㆍ지례(知禮)의 경계에 주둔하여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 등과 더불어 협력하여 적을 쳐서 누차 접전하여 적을 죽인 것이 심히 많으니, 적이 자못 기운이 꺾여 숨고 나오지 못하므로 한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뢰하여 거의 의각(猗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앞에서 검토한 것처럼 민여운은 10월 중순경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곧바로 팔량치를 넘어 함안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 이후 개령 방면으로 북상하여 우지령 인근에서 최경회 및 호서의병들과 함께 싸웠다. 이후 11월 중순부터 민여운은 전라우의병장인 최경회와 김면의 연합부대와 함께 1593년 2월까지 약 4개월간 개령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와 싸워 그들을 개령 지역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공을 세웠던 것이다.
경남 함안에서 경북 김천(개령)이라면 지금도 직선거리로 100㎞ 정도 떨어져 있을 만큼 원거리이다. 이렇듯 장시간 먼길을 이동하면서 200여명의 의병부대를 운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의병장 민여운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주변에서 함께 싸우고 도왔던 이들이 없다면 불가능 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제부터는 민여운 의병부대의 구성이나 후원세력을 검토하여, 민여운의 의병활동에 대한 실상에 더 접근해 보도록 한다.
민여운과 함께 창의한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정윤근(鄭允謹)이다. 호남절의록에도 민여운과 함께 순절한 자로 기록된 자는 정윤근이 유일하다.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중흠(仲欽)이다. 정언직(鄭彦直)의 아들로, 태인 고현내(古縣內, 현 정읍시 태인군 태남리)에서 태어났다. 井邑郡史, 井邑郡文化公報室, 1985, 1358쪽; 新編 井州 井邑 人物志, 井邑文化院, 1990, 156쪽; 정읍의병사, 정읍문화원, 2006, 73쪽; 井邑市史, 井邑市史編纂委員會, 2003, 3435~3436쪽.
참고로, 정읍군사와 신편 정주 정읍 인물지, 정읍시사에는 정윤근이 1597년(선조 30) 정유란에 민여운과 같이 진주성에 입성했다고 했으나,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의 일이므로 잘못 서술되었음을 밝힌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기국(器局)이 컸고 궁마(弓馬)에도 능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민여운과 함께 창의하였고, 제2차 진주성 전투까지 함께 하였다. 민여운이 대장이었고 정윤근은 민여운의 부장이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는데, 7일째 되던 날 민여운이 화살에 맞아 죽자 민여운을 대신하여 의병부대를 통령하였다. 하지만, 결국 기운이 다하고 손목도 부러져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정윤근의 아들 창문(昌文)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전투에 나아가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려 했으나 그 역시 전사하였다.
정윤근 외에도 민여운의 가족과 가노(家奴)들도 의병부대에 함께 했다. 특별히 민여운의 노(奴) 추동(秋同)의 이름이 호남절의록에서 확인된다. 추동은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민여운이 가는 모든 싸움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제2차 진주성 전투 때에도 적장 두 명을 사살했으며, 민여운이 전사할 때에 추동 역시 운명을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
다음은 민여운을 도왔던 인물들을 살펴볼 것인데, 호남절의록에 협력자들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 민여운을 도운 사람으로 주목되는 인물은 태인 출신의 안의(安義)이다. 그는 손홍록(孫弘祿)과 함께 경기전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에 피난시켜 보존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이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병량미 등을 모아서 선조와 민여운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에 대해 발표자 역시 이번 기회에 처음 접하였다.
정읍문화원에서 발간한 정읍의병사(2006)에 따르면, 안의는 임진왜란 때 의곡(義穀) 300석(石), 목화 1천근(斤), 이 밖에 명주배와 종이 등을 거두고 스스로 쌀과 포목을 내어, 절반은 의주의 행재소에 보내고, 나머지는 민여운의 군진으로 보냈다고 한다. 井邑郡史, 井邑郡文化公報室, 1985, 1340쪽; 新編 井州 井邑 人物志, 井邑文化院, 1990, 166쪽; 정읍의병사, 정읍문화원, 2006, 68~70쪽; 井邑市史, 井邑市史編纂委員會, 2003, 3438~3439쪽; (사)한국고전문화연구원 편, 전북인물사전, 전라북도⦁(사)한국고전문화연구원, 2018, 433~434쪽.
태인 고현내 출신의 송창(宋昌)이라는 인물도 안의, 손홍록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거두어 고경명, 최경회, 민여운의 병영에 나누어 보냈다고 전해진다. 新編 井州 井邑 人物志, 井邑文化院, 1990, 156쪽; 정읍의병사, 정읍문화원, 2006, 102쪽.
이상의 내용은 태인군읍지(泰仁郡邑誌)(奎 17410)와 태인현읍지(泰仁縣邑誌)(想白古 915.140-T122) 인물(人物)조 의사 안의와 손홍록편에 확인된다.
안의와 손홍록 외에도, 태인 출신 인물인 김대립(金大立), 김후진(金後進) 등이 함께 민여운을 도왔다. 김대립은 본관이 강진(康津)이고, 자는 신부(信夫), 호는 월봉(月峯)이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정란(李廷鸞)과 창의하여 의병과 군량을 모았는데, 행재소에 보내고 또 최경회와 민여운의 의병소에도 보냈다. 참고로, 김대립은 나중에 장성 남문창의 활동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된다. 新編 井州 井邑 人物志, 井邑文化院, 1990, 152쪽; 정읍의병사, 정읍문화원, 2006, 93쪽.
다음으로 김후진은 김대립과 인척 관계에 있었는데, 자는 정승(正承)이고, 호는 원모당(遠慕堂)과 연담(蓮潭)을 썼다. 김대립과 마찬가지로 일재 이항의 문하에 있었다. 그는 아들 김지백(金知白), 재종(再從)인 김복억(金福億), 재종질(再從姪)인 김대립(金大立)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였다. 장성 남문의청에 일부 보냈으며, 의곡 수백석을 행재소에도 보냈고, 고경명과 민여운의 의병소에도 보냈다고 한다. 新編 井州 井邑 人物志, 井邑文化院, 1990, 153쪽; 정읍의병사, 정읍문화원, 2006, 94쪽; 井邑市史, 井邑市史編纂委員會, 2003, 3131~3432쪽.
이렇듯 민여운과 함께 싸우고, 그의 의병활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던 주변의 인물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그를 후원한 자들 대부분은 민여운과 같은 태인출신 인물이었던 점이 주목된다. 특히 후원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병량미를 모았으며, 이를 의주의 행재소와 호남 출신의 주요 의병장들에게 나누어 보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요한 것은 태인 출신의 후원세력들은 고경명, 최경회, 남문창의 의병청 등에 의곡을 나누어 보낼 때 잊지 않고 민여운을 도왔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후원을 기반으로 200여명의 부대를 이끌었던 민여운의 부대는 경남 함안, 경북 김천 지역을 거쳐 나중에는 다시 경남 진주로 와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Ⅲ. 제2차 진주성 전투와 민여운
호남절의록 민여운 관련 기록의 후반부에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민여운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계사년(1593) 6월, 적들이 다시 대거 몰려 와 진주성을 포위하니 이때에 공은 휘하의 의사(義士)가 3백 여인이었다. 공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함께 죽기를 맹서하고 이로써 충의(忠義)를 격려하니 사람들이 모두 죽을 마음을 내었다. 공은 이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충청병사 황진(黃進)·표의장(彪義將) 심우신(沈友信) 등의 제공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수성하기 7일 동안 독전을 그치지 않았으며 참획(斬獲)함이 매우 많았다. 몸에 10여 곳 상처를 입었는데 이를 싸매고 다시 싸웠는데 왼손이 끊어지고 오른 손이 잘리면서도 장사들을 독려하며 싸우기를 더욱 힘껏하니 군사들이 모두 더욱 힘을 내었다. 27일에 성을 돌아볼 때 갑자기 날아온 적의 화살에 맞고 죽었다. 정윤근(鄭允謹)이 대신하여 무리를 통령하였는데 자신의 아들 창문(昌文)을 시켜 공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가 정씨의 선산에 장례 지내게 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좌승지(左承旨)를 증직 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세주: 노(奴)인 추동(秋同)은 또한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았는데 공을 따라 다니며 모든 싸움에서 참획함이 매우 많았다.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적장 2인을 사살하였다. 공이 전사함에 또한 적에게 죽었다.] [태인(泰仁)] 호남절의록 권1 하, 「임진란 때의 의적(壬辰義蹟)」, 비의장 민여운 사실(飛義將閔公事實)
이렇듯, 민여운은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황진, 심우신 등과 함께 수성을 결의하였다. 7일간 독전을 그치지 않으며 싸웠는데, 1593년 6월 27일 갑자기 날아온 일본군의 화살에 맞고 전사하였다. 이에 정윤근이 민여운을 대신하여 의병부대를 통령하였다.
태인삼강록(泰仁三剛錄)을 보아도 민여운은 1593년 6월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황진, 심우신 등과 함께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킨지 7일째 될 때까지 독전을 멈추지 않았으며, 일본군을 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몸에는 10여 곳에 창상을 입었고, 왼손은 끊어지고, 오른손은 부러졌으며, 홀연히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에 민여운과 함께 창의했던 정윤근은 그를 대신하여 병사들을 거느리고 최경회와 합진하여 싸움을 독려하였지만, 그 역시 기운이 다하고 손이 부러진 상태에서 적을 만나 죽었다.
민여운이 이끌었던 병력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어서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앞서 제시한 호남절의록에는 진주성 입성시 민여운 휘하의 의사는 3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선조수정실록 1593년 6월 기록과 선조실록 1593년 7월 16일자 기록에 따르면, 민여운은 군사 200명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입성했다고 되어 있다. 선조수정실록 27권, 1593년(선조 26)년 6월 1일(갑신); 선조실록 40권, 1593년(선조 26)년 7월 16일(무진).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도 “태인(泰仁)의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향병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웅(熊) 자로써 장표(章標)를 삼고, 기계를 마련하고 양식을 마련하여 영남으로 향하다.” 난중잡록 2, 임진년 하(1592년) 10월.
라고 했다. 안방준의 은봉전서 「진주서사(晉州敍事)」에도 “이계연, 민여운, 강희보, 강희열 등의 군이 각각 200여 명”이었다고 했다. 은봉전서 권7, 「진주서사(晉州敍事)」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해 보건대,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에 입성한 민여운의 부대 규모는 200여명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호남절의록의 기록에 주목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이해도 가능할 것 같다. 민여운이 최초로 의병을 창의했을 때는 200명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함안-개령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일본군과 접전하면서 공을 세웠고, 이에 영남 지역의 백성들 일부(100여명)가 민여운의 휘하에 편입되었지 않았을까 한다. 때문에 호남절의록에서는 이들까지 모두 포함한 300명으로 기록하였고, 다른 기록에서는 순수한 태인 출신의 병력 200명만을 헤아렸던 것은 아닌가 한다.
민여운이 참전한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조선군의 편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하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에 활약했던 호남의병 관련 내용은 지난 2023년 6월 16일(금)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에서 주관하고, 해군사관학교와 국립진주박물관이 공동주최한 “2023년 충무공 학술세미나 –경상우도의 지역적 중요성과 진주성 전투의 재조명-”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호남의병과 제2차 진주성 전투」라는 원고를 인용했음을 밝힌다.
김천일, 최경회, 황진, 고종후, 장윤, 민여운 등이 이끄는 호남의병은 진주목사 서예원 등과 함께 진주성을 지켰다. 이들 중 현직에 있거나, 진주성 수성 당시의 직책이 확인된 자는 28명이다. 이들이 아마도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출신지만 놓고 보면 호남 출신 인물이 19명, 타지역이 6명, 불명자가 3명이다. 즉, 호남 출신 의병들은 제2차 진주성 전투의 핵심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특히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 호남 출신의 의병장들은 수성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참고로, 제2차 진주성 당시 민여운의 직책은 부장으로 확인되며, 그 역시 큰 활약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 직 수성(守城) 시 직책 이 름 병 력 출신 비고
창의사(倡義使) 우도절제사(右都節制使) 김천일(金千鎰) 300~500명(300명) 나주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좌도절제사 최경회(崔慶會) 500명 (600명) 화순
충청병사(忠淸兵使) 도(都)순성장,독전장(督戰將) 황 진(黃 進) 700명(400명) 남원 황희 5대손
진주목사(晉州牧使)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3,000명 서울
진주판관(晉州判官) 진주판관 성수경(成守璟) - -
거제현령(巨濟縣令) 부장(部將) 김준민(金俊民) - 산청
태안군수(泰安郡守) - 윤구수(尹龜壽) - 예산
결성현감(結城縣監) - 김응건(金應健)
사천현감(泗川縣監) 좌의병부장(左義兵副將) 장 윤(張 潤) 300명 순천
김해부사(金海府使) 부장(部將) 이종인(李宗仁) - 남평(나주)
당진현감(唐津縣監) 전투대장 송 제(宋 悌) - 흥양(고흥)
남포현감(藍浦縣監) - 이예수(李禮壽) - 부천
황간현감(黃澗縣監) - 박몽열(朴夢說) - 김천
해미현감(海美縣監) 전투부대장 정명세(鄭名世) - 장흥
보령현감(保寧縣監) - 이의정(李義精) - 금산
공조좌랑(工曹佐郎) 부장(部將) 양산숙(梁山璹) - 나주
복수(復讐)의병장 복수대장(復讐大將) 고종후(高從厚) 400명 광주 고경명 장남
봉사(奉事) 전투부대장 오 유(吳 宥) - 보성 고종후 부장
비(飛)의병장 부 장 민여운(閔汝雲) 200명 태인(정읍)
웅(熊)의병장 전투부대장 이계련(李繼璉) 100~200명(100명) -
표(彪)의병부장
방의대장(方義大將) 부 장 강희보(姜希甫) 200명 순천 강희열 형
도탄복병징(陶灘伏兵將)
적기(敵氣)의병부장
적개(敵愾)의병장 전투부대장 이 잠(李 潛) 300명 강진 변사정 부장
적(敵)의병부장
분(奮)의병장 전투대장 강희열(姜熙悅) 50~200명(200명) 순천 강희보 동생
우(右)의병부장 변사정의 부장 고득뢰(高得賚) 남원
해남의병장 전투대장 임희진(任希進) 해남 임계영 종숙
영광의병장
표의장(彪義將) 전투대장 심우신(沈友信) 12명 영광
의병장 재외운량장(在外運粮將) 변사정(邊士貞) 남원
군량운송 방처인(房處仁)
남원
김천일 계열
<표 >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군사 조직
* 오종록의 「진주성전투의 지휘체계와 전투과정」 104~105쪽 <표 3>, 박성식의 「1,2차 진주성전투의 실상과 그 영향」 152쪽 표 <조선군 관ㆍ의병장 및 그 병력>, 김강식의 「충렬록에 나타난 癸巳晉州戰 전자사의 추숭과정과 의미」 327쪽 <표 2>를 통합하여 편집하였음. 세 편의 논문은 모두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국립진주박물관, 2010)에 실린 것을 기준으로 하였음.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날짜별 전투상황 개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변곡점은 6월 28일로 보이는데, 폭우에 의해 일부 성벽이 붕괴되었으며, 충청병사 황진이 조총에 의해 전사하게 되면서 전세가 크게 기울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수정실록에도 “황진은 역전의 제장 중에서 으뜸이라고 칭해졌기 때문에 온 성 안이 그에 의지하여 중히 여겼으므로, 황진이 탄환을 맞고 죽자 온 성안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날짜별(양력) 접전 조선 측 일본 측 출처
6월 21일(7.19) 전투시작
6월 22일(7.20) 총 3회
6월 23일(7.21) 낮3회,밤4회 해자 무력화 [포][난]
6월 24일(7.22) 마현(馬峴)에 추가병력(5~6천명), [난]
동쪽에 추가병력(5~6백명)
6월 25일(7.23) 낮3회,밤4회 일본군의 토옥에 대비하여 토산을 건설, 토옥(土屋) 건설, 성내 가옥 연소 [포][백][난]
현자총통 발사
6월 26일(7.24) 낮 3회,밤4회 서예원(진주목사) → 장윤(가목사) 가죽 씌운 나무궤 등장 [선][난]
6월 27일(7.25) 김준민, 강희보, 민여운 전사 동ㆍ서문에 5개의 언덕을 쌓고 죽책(竹柵) 건설,
나무궤를 사륜거 위에 장착한 귀갑차 운용,
항복을 요구하는 글을 보냄 [포][난][은][호]
6월 28일(7.26) 황진 전사 [선][난]
6월 29일97.29) 순성장 교체(황진→서예원→장윤) 동문(오후 2시) 함락, 서문과 북문도 함락
장윤 전사 [포][선][난]
오후에 성 함락, 6만명 사망
* 선 : 선조실록, 백 : 백사집, 포 : 포저집, 난 : 난중잡록, 은 : 은봉전서, 호 : 호남절의록
** 음양력 변환은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우주지식정보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음양력변환계산”에 의함.
제2차 진주성 전투는 6월 21일에 시작하여 22일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전개되었다. 민여운은 7일간 열심히 싸웠으나 27일 결국 일본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하게 된다. 같은 날 전사한 인물로는 거제현령 김준민과 광양출신 의병장 강희보가 있다. 민여운이 전사한 다음날인 28일에 황진이 전사하고 이어 장윤까지 전사하면서 수성군이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동문, 서문, 북문이 차례로 뚫리면서 진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당하였고 수성군들은 일본군에 밀려서 촉석루 쪽으로 모였다가 결국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6만 여명의 우리 병사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제2차 진주성 전투시에 전사한 인물 164명을 분석하여 호남의병의 성격을 재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대표적인 의병집단과 그 출신지에 따른 분류이다.
계열(출신지) 인 물 인원수
김천일 계열(나주) 강귀지, 강희보, 강희복, 강희열, 강희원, 김공간, 김두남, 김상건, 김지남, 김천일, 김축, 박승남, 38명
박승성, 박운, 박치경, 박흡, 배몽성, 범기봉, 범기생, 서응두, 서정후, 양산숙, 유한량, 유휘진,
윤성립, 이계년, 이광주, 이의정, 이인민, 이종인①, 이종인②, 임희진, 전룡, 정감, 차승륙, 최구,
최희급, 허협
최경회 계열(화순) 고득뢰, 구희, 김예수, 김의갑, 김인갑, 노성니, 노언경, 노희상, 문홍헌, 문정, 박혁기, 송대창, 23명
안기남, 안기중, 오방한, 옥정륜, 이영근, 채희징, 최개, 최경회, 최억룡, 최희립, 허일
고종후 계열(광주) 고경신, 고경원, 고경형, 고종후, 귀인, 김언희, 김응복, 김인혼, 배승무, 봉이, 서홍도, 오빈, 오성, 20명
오유, 오주, 오춘기, 전덕인, 전의생, 조곤남, 홍계훈
황 진 계열(남원) 공시억, 김사종, 박기수, 박흥남, 소제, 송제, 수이, 양응원, 오영념, 오잠, 정명세, 지득룡, 최호, 황진 14명
심우신 계열(영광) 김보원, 김부행, 박언준, 심우신, 임두춘, 정충훈, 최인 7명
장윤 계열(순천) 김대민, 김신민, 남응개, 장윤 4명
민여운 계열(태인) 민여운, 정윤근, 추동 3명
기타 및 불명 강희민, 금이, 김개, 김극순, 김극후, 김기경, 김몽해, 김신호, 김영호, 김응건, 김응방, 김준민, 55명
김태백, 김홍렬, 박몽열, 박세항, 박안도, 서계성, 서예원, 성수경, 손승선, 송건도, 송국평, 양제,
오응길, 오죽령, 유복립, 유함, 윤구수, 윤사복, 윤의, 윤탁, 이계련, 이영로, 이예수, 이욱, 이원춘,
이잠, 장윤현, 전사의, 정구룡, 정국상, 정대보, 정대수, 정명원, 정여덕, 정운호, 정원한, 정유경,
조경형, 조인호, 최기필, 최언량, 춘년, 하계선
위의 표에 따르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병력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쪽은 김천일 계열로 보인다. 김천일을 따라 진주성에 입성하여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인원이 38명이나 된다. 다음은 최경회 계열로 볼 수 있는 23명인데, 김천일과 최경회 계열의 인물만 하더라도 61명이나 된다. 그 다음은 고종후 계열(20명), 황진 계열(14명), 장윤 계열(4명), 민여운 계열(3명) 순서이다. 특정 의병장의 계열로 분류할 수 없는 경우는 대부분 진주 출신의 인물이나 관군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이름이 확인되는 164명의 인물 중 호남의병은 109명으로 전체의 66%를 차지한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의 출신지와 그 계열을 중심에 놓고 설명하자면, 나주 출신의 김천일, 화순 출신의 최경회, 광주 출신의 고종후 등이 이끌었던 의병들이 가장 많은 희생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인물별 출신지를 중심으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164명을 다시 표로 정리해 보았다.
출신지 인 물 인원 수
진주 김개, 김태백, 박세항, 박안도, 손승선, 송건도, 송국평, 옥정륜, 유함,윤사복, 이욱, 이인민, 장윤현, 정국상, 18명
정대보, 최기필, 최언량, 하계선
나주(남평) 김공간, 김몽해, 김상건, 김천일, 노희상, 서정후, 양산숙, 이광주, 이영근, 이종인, 전룡, 정감, 최희급, 15명
최희립, 허협
화순 구희, 김의갑, 김인갑, 문홍헌, 문정, 박치경, 박혁기, 안기남, 안기중, 오방한, 오죽령, 정충훈, 조곤남 14명
광주 고경신, 고경원, 고경형, 고종후, 귀인, 김응복, 박승남, 배승무, 범기봉, 범기생, 봉이, 유휘진, 최구 13명
남원 고득뢰, 김사종, 박기수, 박승성, 박흥남, 소제, 수이, 양응원, 양제, 황진 10명
장성 김극순, 김극후, 김신호, 김언희, 김인혼, 박운, 차승륙, 최인 8명
보성 김대민, 김신민, 남응개, 오유, 오주, 오춘기 6명
영광 김보원, 김응방, 서응두, 심우신, 임두춘, 정여덕 6명
순천(낙안) 강희복, 강희민, 노언경, 배몽성, 장윤, 허일 6명
무안 강희원, 김부행, 김영호, 김예수, 박연준 5명
고창(무장, 흥덕) 김지남, 노성니, 서흥도, 유한량, 4명
담양(창평) 김기경, 김두남, 김축, 오빈 4명
태인(정읍) 민여운, 정유경, 정윤근, 추동 4명
함평 강귀지, 윤성립, 전덕인, 전의생 4명
장흥 이종인, 정명세, 정명원 3명
흥양(고흥) 김홍렬, 송제, 이원춘 3명
강진 이잠, 홍계훈 2명
광양 강희보, 강희열 2명
영암 박흡, 최개 2명
임실 오성, 채희징 2명
여산(익산) 송대창 1명
전주 최호 1명
정읍 최억룡 1명
해남 임희진 1명
타지역 김준민(산청), 금이(서울), 박몽열(김천), 서계성(서울), 서예원(서울),윤구수(예산), 윤탁(합천), 이계년(용인), 12명
이예수(부천), 이의정(금산),
정구룡(함안), 춘년(서울)
불명 공시억, 김응건, 성수경, 오영념, 오응길, 오잠, 유복립, 윤의, 이계련, 이영로, 전사의, 정대수, 정운호, 정원한, 17명
조경형, 조인호, 지득룡
출신지별로 전사자를 분석해보자면, 우선 진주 출신 인물이 18명으로 가장 많은 수이다. 뒤이어 나주, 화순, 광주 출신 인물의 전사자 비율이 높다. 또, 이름이 확인되는 전사자 165명 중 71%인 117명이 호남 출신 인물이다. 117명의 호남 인물 중에서 광주ㆍ전남 지역은 79%인 93명이고, 21%인 24명이 전북 지역 출신 인물이다. 이러한 경향은 앞서 의병장의 계열별 분석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나주의 김천일, 화순의 최경회, 광주의 고종후(고경명의 아들) 등 당시 호남의병을 대표했던 이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민여운의 의병부대는 그 수가 매우 많지 않았고, 제2차 진주성 당시의 구체적인 담당구역이라든지 역할을 분명치 않다. 하지만, 진주성 혈전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민여운의 공적은 조정에 알려져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또, 1858년(철종 9)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으로 추증되었다고 전한다. 驪興閔氏世系譜(1권), 驪興閔氏世系譜 刊行委員會, 1973, 453~454쪽.
Ⅳ. 맺음말
지금까지 정읍 출신 인물인 민여운의 생애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민여운은 여흥민씨 18세로 입암공파의 파조인 민제인의 손자였다. 민제인은 총 여섯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중에서 민여운의 아버지 사관은 둘째 아들이었다. 민사관에게는 자녀는 민여운 뿐이며, 민여운은 세 아들을 낳았다.
호남절의록에는 민여운이 음직(蔭職)으로 두 고을의 현령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관련 자료를 망라해 본 결과 실제 민여운은 세 고을의 수령을 지낸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상도 안의현감(근무시기 불명, 종6품) → 강원도 김화현령(1579~1580년, 종5품) → 전라도 용담현령(1588~1590년, 종5품)이 그의 관력이며, 1592년을 전후한 때에는 첨정(종4품)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민여운은 10월 중순경 고향인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동향의 정윤근과 함께 200여명을 모아 창의하였는데, 의병의 운용에는 안의, 송창, 김대립, 김후진 등 태인 출신 인물들의 도움이 컸다. 민여운은 창의 초기부터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서 활약했다. 팔량치를 넘어 함안 지역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후 11월 경에는 최경회와 함께 호서의병장인 한명윤-박이룡과 함께 지례와 황간 사이에 있는 우지령에 주둔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또한 김면-정인홍 등과 함께 개령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1593년 6월에는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에 입성하여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된 지 7일째 되던 날 일본군의 화살에 맞고 목숨을 달리하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민여운은 전사하였지만, 임진왜란 시기에 보여준 그의 활약상은 높이 평가받았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민여운은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장 19명 중의 한 명이었고, 전북 지역만 놓고 본다면 주요 의병장 6명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 29권에서도 민여운은 호남의병장 20명 중에 속해 있으며, 전북 출신 8명 중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이렇듯 이제 대규모 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에 대한 관심에서, 중규모 단위의 의병장들의 활동상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민여운의 생애와 의병활동을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의병장의 행적들이 더 많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민여운의 창의와 주요 활동 지도>
* 참고문헌
⦁난중잡록, 백사집, 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 은봉전서, 일성록, 호남절의록
⦁驪興閔氏世系譜(1권), 驪興閔氏世系譜 刊行委員會, 1973.
⦁井邑郡史, 井邑郡文化公報室, 1985.
⦁新編 井州 井邑 人物志, 井邑文化院, 1990.
⦁全羅文化의 脈과 全北人物, 全北大學校 全羅文化硏究所, 1990.
⦁안방준 저, 안동교 번역, 國譯 隱峯全書(Ⅰ), 보성문화원, 2002.
⦁井邑市史, 井邑市史編纂委員會, 2003.
⦁정읍의병사, 정읍문화원, 2006.
⦁閔庚燮 편저, 驪興閔氏人物史集, 범아출판사, 2009.
⦁조원래 편집,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한국사 29(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국사편찬위원회, 2013.
⦁안방준 원저, 신해진 역주, 호남의록ㆍ삼원기사, 역락, 2013.
⦁(사)한국고전문화연구원 편, 전북인물사전, 전라북도⦁(사)한국고전문화연구원, 2018.
⦁김천일 지음, 김익두ㆍ허정주 옮김, 건재 김천일 전집, 문예원, 2018.
⦁조동수ㆍ홍영기ㆍ김만호ㆍ윤현석, 新 남도의병사, (재)한국학호남진흥원, 2021.
⦁驪興閔氏世譜(1~2권), 驪興閔氏大宗會, 2022.
⦁趙湲來, 「全羅右義兵과 崔慶會 一家의 義兵運動」, 和順地方의 壬亂義兵活動, 和順郡, 1988.
⦁김강식, 「임진왜란 시기 진주성전투(晋州城戰鬪) 참가자의 포상(褒賞) 과정과 의미 -『충렬록(忠烈錄)』을 중심으로-」, 지역과 역사 17, 부경역사연구소, 2005.
⦁조원래,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와 그 역사적 의의」, 『진주성전투의 재조명 - 국제학술세미나 자료집』, 진주문화원, 2005;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재수록).
⦁제장명, 「임진왜란기 제2차 진주성전투와 조선관군의 전술」, 軍事硏究 122, 陸軍本部, 2006.
⦁하태규, 「임란기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추이」, 전북사학 32, 전북사학회, 2008.
⦁김강녕, 「임진왜란시 제1, 2차 진주성전투의 군사사적 함의」, 군사논단 58, 한국군사학회, 2009.
⦁김동수, 「호남절의록의 사료가치 검토(1)」, 역사학연구 44, 호남사학회, 2011.
⦁신윤호, 「제2차 진주성전투와 일본군의 실상」, 해양문화연구 9,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2013.
⦁김영나, 「임진왜란 시기 2차 진주성전투 순절자의 참전과정과 활동양상」, 전북사학 45, 전북사학회,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