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주점’에 이르는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여정
박 진 희
이상수 작가의 수필집 라그랑주점(에세이문학출판부, 2022)을 읽는다. 수필집 제목도 독특하고 표지도 인상 깊다. 디자인도 감각적이지만 특히 앞표지에 책 제목과 작가 이름이 놓인 자리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이 그러하다. 흔히 작품집 표제가 가장 크게, 상위 중앙에 자리하고 작가명은 작은 포인트로 그 아래 오른쪽에 적힌다. 그런데 이 수필집은 ‘이상수 수필집’이 제목처럼 크게 쓰여 있고 저자명이 적혀있을 법한 자리엔 영문 제목 ‘Lagrangian point’가 작게 쓰여 있다. 주체적이랄까, 어떤 자신감, 자기애 같은 것이 느껴진다.
글에 대한 느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힘 있는 문장을 걸음 삼아 목적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머뭇거림이 없다. 그렇다고 의미를 직접적으로 발화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상수 작가의 글은 주로 형상화의 작업을 거쳐 탄생한다. 삶의 의미를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속성에 빗대어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이다. 문학은 돌려 말하는 것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미적 공간이, 의미의 깊이가 담보된다. 형상화는 이를 수행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수필집에서 형상화의 구도를 자주 접하게 된다는 것은 작가가 그만큼 형식적 의장을 통한 문학성 담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수 작가의 글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작가의 성실하고 투철한 작업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작가의 기질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글에서 보면 작가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이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현실에 대한 감각도 실천하는 능력도 있어서 결과도 좋았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꿈꾸고 성취하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의 진취적인 기질을 잘 보여주는 글로 「굽」이 있다.
이상과 꿈만으로 뭉쳐진 높은 굽을 신고 또박또박 사회로 걸어 나왔다. 규모가 작은 학원에서 수업의 기술을 터득해 독립했다. 내 이름을 걸고 개인적으로 하는 수업이 입소문을 탔다. 타인의 인정과 평가를 통해 존재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겼다. 굽은 조금씩 높아졌고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위치에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욕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새로 맡은 영업직은 자신만만이었다. 계약은 순조로워 스무여 명의 입사 동기 중에 선두 그룹에 들었다. 주위의 칭찬과 내 욕구가 맞아떨어져 승승장구했고 마약과도 같은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한껏 높아진 굽은 구름 위를 걷는 듯 아찔했지만 거기서 내려올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가리라.
그러던 어느 날 무리한 계약으로 그만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믿음은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물질적 피해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공황이 찾아왔다 성공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야멸차게 등을 돌렸고 내 굽은 그만 높이를 잃고 말았다.
-「굽」 부분
이 글에서 ‘굽’은 사회, 경제적 지위, 타인의 인정, 그에 비례하는 자아의 자존감 등을 표상한다. 작은 학원의 강사로 시작해 개인 학원을 열고 여기에서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작가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위치에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욕망을 꿈꾸기 시작”한다. “이상과 꿈만으로 뭉쳐진 높은 굽”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실질적인 내용을 함의하게 된 셈이다. 굽은 점점 높아간다. 그러다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삶의 과정을 작가는 단 세 문단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상수 작가의 글은 이처럼 경제적이다. 군더더기가 없다. 필요한 묘사는 하되 상황과 상황 사이 건너뛸 부분은 과감하게 건너뛴다. 문단과 문단 사이의 간극이 크게 느껴지지만 그것은 글의 긴장감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수필은 일인칭 자기 고백적 글인 만큼 그 어느 장르보다 작가가 드러나는 글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상수 작가의 글에는 유난히 자신을 규정하는 표현이 많다. 가령 “내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게 나의 셈법”(「천사채」)이라든가 “이제까지 나는 자신의 결단과 의지, 선택에 따라 삶을 이어왔다. 누구의 결정에 따르기보다 주체적으로 살고자 노력했지만 전력질주엔 끝내 지치고 말았다.”(「나비포옹법」),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따르지 않으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한다. 무엇보다 대가를 치르고도 정당한 권리를 찾지 못하는 걸 참기 어려워해 단체에서는 별로 내켜 하지 않는 타입이다.”(「히비스커스를 마시다」) 등이 그것이다. 그만큼 치열하게 자신을 탐색 내지 성찰하고 있다는 의미일 터다.
이와 같은 표현들에서 작가의 성실하면서도 주체적, 이성적, 합리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글의 형식적인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라그랑주점’, ‘끙게’, ‘우갱이’, ‘감또개’ 등 수록된 작품 제목만 보아도 생소한 소재가 많다. 작가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범주가 넓을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글에 드러나고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실한 자료조사에 의한 것임을 글에서 느낄 수 있다. 어떤 명제가 나오면 이에 해당하는, 혹은 이것이 참임을 증명하는 다양한 사례가 제시되는 구도도 자주 보인다. 이상수 작가의 글이 논리적이고 설득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글의 형식적 특징들은 작가의 주체적 이성적 합리적인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엄마는 괄호가 넓은 품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엄마라는 이름을 처음 가졌을 때, 남편과의 알력이 만만치 않았을 때, 서툴고 상처 난 마음을 모두 부려놓고 나면 편안해졌다. 집안일이 만만치 않게 많았지만 네 일과 내 일을 가리지 않는 천성 때문에 길을 가다가도 일손이 필요하면 외면하지 못했다.
시골 이웃들의 품도 마찬가지로 넓어서 엄마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들깨밭의 잡초를 말끔히 정리해준 적이 있었다. 들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보고는 아껴둔 술과 안주를 들고 와 대접해주었다. 비와 바람에 마음을 맡기고 벌레나 풀과 함께 지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밥을 지으면 찾아오는 사람에게 권하고 밭에 나는 푸성귀는 주인 없는 마루에 슬쩍 두고 가기도 한다.
-「괄호를 열다」
수필이 일인칭 고백적 글이라고 하지만 작가와 수필적 자아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 거리가 자아에 대한 관찰, 성찰을 가능하게 하며 자아와의 관계를 구축하거나 수정하게 한다. 라그랑주점에서 작가는 자아를 치열하게 탐색함과 더불어 타자를, 그들의 삶을 차분히 들여다본다. 작가가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는 타자의 삶은 이채롭게도 대부분 작가의 성질 즉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것과 반대편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엄마’이다.
‘엄마’에게 “서툴고 상처 난 마음을 모두 부려놓고 나면 편안해”진다는 사실은 그리 특별할 게 못 된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엄마’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괄호가 넓은 품”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엄마’의 “네 일과 내 일을 가리지 않는 천성”에 있을 것이다. 자식에게 “괄호가 넓은 품”이라는 것이 ‘엄마’의 보편적 성질이라면 ‘네 일’과 ‘내 일’에 경계가 없다는 것은 개별적 존재의 특수한 성질이기 때문이다. 수필적 자아의 ‘엄마’는 자신의 집안일이 많은데도 일손이 필요한 곳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것은 “내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작가와는 다른 면모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것과도 거리가 먼 행위이다.
그런데 위 글에서 이와 같은 일원적 감각은 통합과 유대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 드러난다. “엄마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들깨밭의 잡초를 말끔히 정리해준”다거나 “들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보고는 아껴둔 술과 안주를 들고 와 대접해주”는 마을 사람들의 행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받은 만큼 돌려주는 합리적 사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작가는 이를 두고 “비와 바람에 마음을 맡기고 벌레나 풀과 함께 지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쓰고 있다. 자연에 동화된 존재들 간의 서로 스미는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의식했든 아니든 라그랑주점에는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모호한 전근대적 세계와 주체 중심의 근대적 세계가 충돌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에 속해 있고 대상 간의 상호 동일화가 가능했던 세계가 전근대적 세계라면 인간이 주체가 되어, 주체 중심의 동일화를 지향하는 세계가 근대적 세계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밝혀둔 바와 같이 작가는 근대적 세계에 속한 존재다. 타자와의 경계가 분명하고 그 선을 넘는 것을 불편해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또한 자신이 주체가 되어 대상을 주체에로 환원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이와는 달리 위 글에 그려지고 있는 ‘엄마’와 마을 사람들, “자신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필요한 쓰임에 먼저 양보하는” ‘언니’(「천사채」)는 근대적 세계에 속하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남편과도 일찍 사별하고 금지옥엽 기른 딸도 허망하게 보내야 했던 ‘이모’, 이처럼 한 많은 세월을 살면서도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을 더 살뜰히 챙”기는 ‘이모’(「끙게」) 또한 동일한 맥락에 자리하는 존재다. 「오래된 미래」에서는 자연에 기대어 사는 전근대적 세계의 모습과 자연을 지배하는 근대적 세계의 모습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무한 경쟁의 세계에서 고투하던 작가는 비합리적이고 손해만 보는 것 같은 전근대적 존재들에게서 쉼과 위로를 얻는다.
그렇다고 전근대적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 그럴 수도 없다. 작가는 끊임없이 균형을 탐색한다. 자신을 치열하게 성찰한 작가는 자신의 반대편에 놓인 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둘의 조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했던” 자아, “심지어 자신에게까지도 마음이 닫혀 있어 내면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던(「히비스커스를 마시다」) 자아는 먼 길을 돌아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것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어스름은 스스로 깊어지는 법을 안다. 높이와 넓이만을 추구했던 욕망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순간, 먼 것들은 조금씩 곁을 내어준다. 움켜쥐려 했던 손은 늘 비어있고 밖을 향했던 걸음은 어느새 내 안으로 돌아와 있다. ‘나는 나를 떠나서 너무 먼 곳을 배회했구나.’ 하루의 고단함을 발아래 내려놓자 그제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어두워져 가는 강가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강물에 비친 얼굴 하나가 천천히 지워진다. 산 그림자가 스러지고, 조약돌이 사라지고, 가로등 불빛마저도 흐릿해진다. 자신의 경계를 미련 없이 버리는 저 모습이야말로 아름다운 망언사(忘言師)가 아닐까.
누군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돌아보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기르는 개일 수도 있고 야성의 늑대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 농담(濃淡)을 받아들이리라. 익숙한 것들은 익숙한 대로, 낯선 것들은 또 낯선 대로. 지금은 그런 이분법들까지 다 허용하는 시간이니.
멀리 수묵화 걸린 풍경 너머로 저녁이 소실점으로 눕는다.
-「목탄화 속으로」
이 수필집의 표제인 ‘라그랑주점’이란 천체 사이의 힘이 평형을 이루는 지점을 이르는 말이다. 수필집을 읽고 제목을 보니 제목에서 이미 이 수필집의 의미랄까 방향성이 제시되어 있었던 셈이다. 자아와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를 조율하며 그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이 라그랑주점을 관류하는 의미 내지 정신이기 때문이다. 균형점을 찾아가는 작가의 여정은 매우 치열하면서도 아름답다.
작가는 먼 길을 돌아 “자신의 경계를 미련 없이 버리는 저 모습이야말로 아름다운 망언사(忘言師)가 아닐까”라는 인식에 다다른다. “익숙한 것들은 익숙한 대로, 낯선 것들은 또 낯선 대로” 있는 그대로 수용하리라 결의한다. 그 무조건적인 수용에는 작가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터이다. 자신에 대한 치열한 탐색에서 타자와 세계에 대한 이해를 거쳐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신과 포옹하는 여정이 바로 라그랑주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여정이 아름답게 전달되는 것은 내용과 의미의 깊이가 담보되어 있고, 문장과 글의 형시적 의장에 대한 작가의 성실한 탐구가 뒷받침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