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달 밟기
이정숙
9층에서 내려와 출입문을 벗어난다. 오른쪽에 있는 자전거 집에서 시선을 잡아당긴다. 집이라고 해야 천장 까대기가 전부인 한 데다. 그곳에서 나의 분홍색 자전거가 비바람을 맞아가며 몇 년째 살고 있다. 살고 있다는 표현은 양심에 가책을 받기 때문이다. 저것도 한때는 내 몸이었지 않았던가. 아니, 자전거에 몸을 싣고 달리면서 마음도, 생활도 그리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저 자전거는 내 삶의 영토에서 추방당해 흉물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은 참 좀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필요하면 악착같이 거머쥐고, 그렇지 않으면 해진 양말 버리듯이 그러니 말이다.
자전거를 초등학교 5학년 때쯤 탔다. 비산비야의 외딴집에 살았던 나는 이웃 마을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오는 심부름을 하곤 했다. 왕복 10리가 넘는 길을 술주전자를 들고 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조심해도 집에 당도했을 때는 주전자에 반절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이건 절대 내가 솔래솔래 마신 게 아니다. 술 심부름이 싫어 일부러 주전자를 흔들어댔을 뿐이다. 당연히 된통 야단을 맞았다. 나는 속으로 자전거가 먹었는감요. 하며 입안엣말을 뱉었다. 뭐가 어째? 자전거가 먹어야? 두 번째 꿀밤이 들어온다. 아니면 길바닥이 먹었을까? 중얼거림에 날라오던 꿀밤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말이란 하고 봐야 한다고 그때 느꼈다. 하여튼 나는 술 심부름을 하기 위해 자전거를 배웠다. 뒤에서 밀어주거나 옆에서 잡아주지 않아도 용감했다. 논고랑에 빠져가며 마구잡이로 배웠지만, 곧잘 술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페달을 밟지 않은 채 손을 놓고도 굴러갈 정도가 되었다. 그때마다 손아귀에 바람이 뭉텅 잡히곤 했다. 그 덕에 결혼해서는 아이 셋을 자전거 앞⸱뒤에 태워 키웠다. 시내든 그 어디든 자신 있게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크고, 자동차가 생기면서 자전거는 시나브로 눈 밖에 나앉았다. 편리함은 불편의 얼굴로 역습하기 마련이다. 페달을 밟아가며 씽씽 달리면 건강도 좋고, 환경도 보호하니, 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닌가. 그래서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참 좋겠다는 생각이 일어날 즈음, 내 마음이 들켰는지 새 자전거가 생겼다.
어언 등단 20여 여년이 지났다. 당구집 개 삼 년이면 스리쿠션을 친다는데 몇 곱절의 세월을 보내고서도 허우적거리며 쩔쩔맨다. 어쩌자고 글을 쓰려 했을까? 타고난 재주도 없을뿐더러 생生이 힘들어 끄적거리던 낙서가 한 채 집이 되었다. 그래, 해보자. 발심한 게 초년생 글쓰기 시작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보우로 문단에 입성했다. 봐라! 나는 글쟁이다. 어깻죽지에 황금 날개가 돋친 듯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황금 날개로 허공화를 붙잡으려 바둥거렸다. 있지도 않은 도구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 대상을 욕망했다. 이름값을 하려고 몸이 달았다. 그러나 어찌하리. 저 높은 곳은 정말이지 높아도 너무 높았다. 봉황이나 앉을 자리에 참새가 시늉한다고나 할까. 가뜩이나 문재文才가 없다고 자탄했던 터라 더럭 겁이 났다. 한 데서 추레하게 누워있는 자전거가 떠올랐다. 저것이, 흉물이 되어버린 저것이 가슴을 쳤다. 자전거는 무죄다. 다만 페달을 밟지 않아 죽은 척할 뿐이다. 그렇구나! 계속 페달을 밟지 않으면 자전거는 만사휴의萬事休矣, 글쓰기를 실행하지 않아 동동거리는 나의 욕망도 만사휴의,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밟아야 한다. 그래야 자전거도 살고, 나도 산다는 절박함으로 쓰러진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내 마음도 함께 기립시켰다.
그러나 동산을 덮을 만한 오지랖은 여러 문단 활동에 몸을 던지게 했다. 그림자가 본체에 우기면서 제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글쓰기와 친교 활동이 앞뒤 바퀴처럼 달리면 좋으련만 헛헛한 구름일 뿐, 글쓰기는 온데간데없다. 오롯한 마음이 찰나의 연기 기둥으로 부서지니 마음만 동동거렸다. 글쓰기는 자기 외에는 좋아하지 않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임이 틀림없다.
글쓰기의 열정은 정오의 태양을 무색게 했다. 하지만 저 높은 곳에 오르기엔 요원해 주눅 든 마음은 자꾸만 난쟁이가 되었다. 아니, 강박으로 내리눌렀다. 단 한 줄의 글도 일어나지 않아 무시로 찾아오는 가위눌림. 빽빽한 시간에 구멍이라도 내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답답함. 내장된 생각들이 솟구쳐 폭발할 것 같은데 출구는 어디 있지? 거대한 절벽 앞에서 점점 작아져만 갔다. 이제 더는 작아질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아예 존재 자체가 무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외면하고 살기엔 내 영혼을 이미 문학이 장악했다. 나는 문학의 식민지다. 식민지인의 숙명처럼 순종했다. 그 덕에 그나마 몇 권의 책을 낼 수 있었다.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피에로가 된다. 웃음과 눈물이 입에서 출입하기 때문이다. 글이 형편없어 울고, 한편으로는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내가 이런 수많은 언어를 쏟아냈다니, 은밀한 나의 속내를 타인들과 소통할 수 있다니, 단답형인 내가 서술형 인간이 되어갔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라 웃는다. 냉소도 웃음일까? 그렇다면 내 글에 대한 나의 차갑고 헐거운 웃음도 포함시키자. 여전히 나의 글쓰기는 초승달이다. 많은 부분이 어둠에 숨어있지만 분명 언젠가는 환한 얼굴로 지상을 밝히리라. 페달 밟기가 심장의 고동처럼 지속된다면 필시 그러리라.
자전거와 글쓰기, 바퀴를 돌리지 않으면 자생할 수 없다. 페달을 밟고 달릴 때만이 생명이 푸드득 살아난다. 건너다보니 절간이라는 말은 틀렸다.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팽이도, 자전거도 굴려야 살아나고, 명태도 때려야 제맛이 우러난다. 하물며 지상의 가장 지적인 작업인 글은 말할 나위가 없다. 팽이, 자전거, 마른 명태가 그럴진대, 항차 글은 스스로 되먹임하면서 가동하지 않으면 존재 상실이다. 겉보기는 황금 날개 같아 보이지만 글쓰기는 고통을 잡아먹어야 비로소 성숙해지지 않은가.
어떤 소설 문장이다. ‘작가의 길은 가시밭길이다. 그런 길을 작가는 맨발로 걸어야 하는 비극적 인물이다. 상처가 생기고 피가 나지만 그 길은 축복의 길이다.’ 동의한다. 두렵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너, 너도 나를 사랑하라! 목울대를 세워 보지만 여전히 붓은 누운 채 곤한 잠에 빠져 있다. 그래도 붓을 든다. 쉽사리 실행되지 않은 글일지라도 보기 좋은 한 채의 글 집을 장만해야만 한다는 조급한 생각이 비수처럼 심장에 꽂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글 감옥에 갇힌 수인이 되어버렸다. 무엇을 해도 즐겁지를 않다. 마음이 없으면 지천도 천 리라고 한다지. 즐긴다? 이건 차라리 사치다. 옴짝달싹하지 못해 영어囹圄의 신세다.
한 데서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버린 자전거를 다시 봤다. 아무리 흔들고 두드려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젠 종말인가 싶다. Y자 갈랫길 앞에서 궁싯거린다. 포기할 것인가. 밟을 것인가. 우두망찰 서 있는데 따르릉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소리를 더듬거렸다. 어디지? 또다시 따르릉 소리가 났다. 내 안에 들어있는 자전거 소리였다. 그래! 다시 닦고 조이고 기름칠을 하는 거야! 사용하지 않는 자전거는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관리실 안내 방송. 나는 부리나케 뛰었다. 녹슬고 힘아리가 없는 자전거를 부여잡았다. 내 발은 재바르게 페달 위에 놓여 있었다. 관성의 법칙인지, 돌아가는 게 바퀴의 운명이라서 그런지. 바퀴는 생각보다 잘 굴렀다. 좋아, 이제 지상을 날아보는 거야!
첫댓글 동산을 덮을만한 오지랖 덕분에 여럿이 풍족하게 잘 지냅니다
좋아요 이제 지상을 누벼보시기 바랍니다.
기대할께요.
자동차로는 어디든 마음대로 가는데
길 좁은 곳에서는 자전거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지금이라도 배울까 하다가도 그저 생각으로만 그치고 마네요.
궁즉통이라 했던가요?
어려서부터 저 살길을 마련한게죠.
슬픈 일이었죠.
살면서 느끼는 것이 잃는 것 속에는 얻어지는것이 분명 있더라구요.
싸이클 선수로 뛸수 있을 정도로 한때는 세상을 누비고 다녔지요.
아, 옛날이여!
두 분 고맙소이다.
동글새가 선생닌 이셨군요
제글에 답글 감사합니다
바퀴 달린것을 어찌지 못하는 나로선 선생님이 경이롭습니다
물론 자전거도 못타지요
선생님의 치열한 문학적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최화경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