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산행기
도봉산역을 하차하여 도봉산 방향 출구로 나가 한길 건널목에 이르자, 1호선과 7호선 전철역에서 밀려 나오는 산행 인파는 그야말로 대오의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지금이 썩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근대화 초기부터 정신없이 달려오던 우리 역사에서 위기마다 뭉쳐서 군사, 정치, 경제, 사회,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어려움들을 하나, 하나 넘기고 그것을 기회로 만들어 오던 저 민초들의 스크럼이 아직도 바람 차게 불고 주름진 허리 다 펴지 못하였지만 더 넓고 큰 기상과 정서의 진정한 건강, 그리고 그 질적 향유를 위한 대오에 나섰다. 실로 최근 늘어나고 있는 산행인파의 현상을 아직 특별한 사회적 변화의 시발로 보는 평가나 연구는 없지만 그저 경제발전이나, 사회적 안정에 따른 레저인구의 증가로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또 하나의 한국적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의 주요한 현상으로 생각할 만 하다고 느껴지는, 그들 대오에 섞여서 입구를 향하여 밀려갔다.
"북한산은 기가 세서 약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도봉산은 기가 색쉬하다."는 이야기, "수도의 어느 곳에서나 수려한 하루코스의 산행지에 근접할 수 있는 서울 같은 도시가 세계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는 등 함께 산행을 하신 분들의 귀한 말씀들을 들으면서 "역시 좋다."라는 느낌으로 양지쪽 능선을 타고 오른다. 오늘따라 눈발이 날리고 추울 것이라던 산 밑에서의 걱정과는 달리 오르는 힘겨움에 흐르는 땀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정도의 겨울바람이 고마웠기에 "도봉산이 북한산보다 그 기세가 오밀조밀하고 편안하여 보다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는데 더욱 동감이 되고, 계곡 측 코스 보다는 능선 쪽을 선택하여 오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산에서의 양지와 그늘은 체감되는 온도차가 격심하고 발에 밟히는 지면의 험한 정도가 다르기에 겨울 산행은 그날의 목표치에 맞추어 적절한 코스의 사전 선택도 중요하다. 오늘의 타깃으로 잡은 곳에는 헬기착륙장이 있고 그곳에서는 유명한 도봉의 명봉들이 한껏 자태를 내보이고 있다. 머리에 짐을 하나씩 지고 가는듯한 오봉과, 손오공이 권두운을 타고 가다 부딪혔을 부처의 편 손바닥 같이 깎아 세운 만장대 등을 세워 두고 점심을 꺼낸다. 김밥, 컵라면에 싱그러운 야채도시락, 그리고 서울 막걸리와 포천막걸리 간의 맛 대 맛의 산정 대결. 늘 하는 점심이라지만, 하늘 가까이 절경의 암벽들과 의제, 소치, 남농선생 등의 수묵화에서 빠져 나온 듯 저마다 유유히 산의 인파를 지켜보는 구름, 겨울의 동여맨 바람이 설산의 귀한 곡谷을 벼루삼아 붓질한 그림처럼 펼쳐진 화선지 한 편 하늘 속에서 여유로이 즐기는 오붓한 점심. 후식으로 나누는 따뜻한 커피는 그야말로 오늘의 등반의 절정에서 찍는 낙관의 맛이다.
내려오는 코스는 계곡, 그리하여 눈에 덮인 얼음계곡에 둥둥 뜬 바위의 각양의 얼굴들을 보면서 "나는 어떤 얼굴로 속세의 한 곳에 서 있는 것일까. 저 작은 바위만큼 정결하고, 저 바위만큼 믿음직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세상에 어울려서……." 얼어서 군데군데 솟아 흘러내린 계곡의 물 속에 무릎에서 허리까지 담그고 버틴 크고 작은 바위들은 그야말로 인위적으로 지어낼 수 없이 우연의 위치에서 정돈된 자리 잡음을 하고 있다. 바위뿐이랴. 힘주어 내려밟는 등산화 밑을 받치는 무수한 잔 돌들과 지난해를 살다 간 푸른 숲 이파리들의 유서와 같은 부서지고 빻아진 낙엽에 뒤섞인 푹푹한 흙, 그리고 얼음송이처럼 가지에서 떨어지는 눈, 꽃들 모두, 저마다 산의 중요한 한 구석을 지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으니. 논밭을 경작하고 성곽을 쌓고, 집과 집으로, 마을과 마을로 길을 내고, 길과 길을 그려 다시 사람이 살 땅의 용도를 구획하는 우리들. 그 잘라진 필지마다 지번을 정하여 이해관계를 정리하고 사는 우리들. 산의 저 구석구석의 아름다움을 번호로 매겨서 기록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발달된 기술로 언제든지 필요하면 필요한 곳에 산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결코 산의 아름다움은 슈퍼컴퓨터로도 기록하거나 재생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불확정성과 불규칙성, 자연의 자연스러움 그러나 그 가치를 측량할 수 없는, 자연은 위대한 유산이다. 인위적인 인식의 범위 내에서 자연을 생각하는 우리들. 사고의 이전에 그 사고의 씨앗을 발아시킨 자연을 우리가 얼마나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산들은 그렇기에 이리도 다시 변화하는 시대에 민중의 대오를 부르고, 우리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자신 스스로 소중한 위치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산 길의 말미에서 구봉사龜峰寺라는 암자 같은 소담한 절을 보았다. 시골집 장독대가 그대로 단아한 암자를 버티고 그 뒤뜰을 지키고 선 키높은 석불의 머리 위, 보관寶冠의 네 귀퉁이에 청음으로 매달린 풍경의 울림은 오늘 하루의 건강한 산행과 행복한 자연 만나기의 끝에서 산행인파와 산 전체를 열반의 음률로 휘감아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