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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학
- 1920년대 한국 현대시의 정서적 특징 -
문병란
1. 시대적 배경 문학을 역사적 산물이라1) 말하는 속뜻은 인간의 삶이 문학 발생의 조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삶은 시공을 통하여 존재한다. 자의든 타의든 인간은 그 시대 속에 살며 그 한계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1920년대 한국의 문인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그들은 그 상황 그 역사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하나의 인간적 존재자들이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의 문인들 시인들은 어디 있었는가. 직간접 그 운동의 여파는 각개 인간의 삶과 관계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이광수 최남선은2) 선언서 초안자로서 직접 참여하였고 주요한 김동인 등은 그와는 달리 동경에서 창조3) 라는 잡지를 간행 신문예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보다 앞서 1918년 <태서문예 신보>를 간행 서양의 근현대시를 소개했던 김억은 벌써 19세기 서구의 신문예 사조를 그 시와 함께 소개하기도 하였다. 감각적으로 매우 예민한 시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시대의 촉수이다. 눈과 귀와 입 그 오관이 가장 민감하고 언어를 매개체로 하여 창작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 그 뉴스가 밑천이 되고 자극이 된다. 그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인의 오관이 질풍노도를4) 경험하지 않았을까. 역사 속의 3.1운동, 우리 입장에선 정당한 독립선언이지만, 식민지 지배국 일본의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선 불법에 의한 폭동으로 커다란 범죄행위였다. 연인원 수만 명이 동원되어 전 세계를 향한 거족적인 외침으로 전국이 벌집 쑤셔놓은 형국 만세 만세 서울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동서남북 전국으로 퍼져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5) 저항하는 최대 규모의 민족 저항운동이었다. 연인원 수백만 명이 동원되었고 읍 이상의 장터나 광장 작게는 50명에서 많게는 몇천 단위로 일 년여를 끈 운동이었다. 공식 비공식 통계만 하더라도 수천 명이 죽고 부상당하고 체포되었다. 그 엄청난 조선폭동을 진압한 일본 헌병대와 경찰의 무자비나 만행은 필설로 불가능 그것이었다. 3월에서 시작된 민중의 항쟁과 절규는 10월까지 이어졌는데 간단한 통계로써 재확인해 본다. 구속자 수 1만 8천여 명, 그 중에서 기소의 수속을 마친 피고자 보안법 위반 6472명, 소요죄 2289명, 내란죄 296명, 기타 232명 합계 9289명이었다. 사망자수는 일본당국의 통계는 허위였고 비공식 공식 집계로 박은식의 통사에 의하면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자(정식 재판도 없는 경우) 5만 명이었다. 영국의 기자 스코필드에 의해 보도된 제암리 만행은6) 세계를 경악케 하였다. 자주민이요, 조선이 당당한 주권국가 독립국가라는 기미독립선언서의 당위성은 운동으로 널리 전 세계에 알리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 피 흘림의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33인외 중요한 국사범 전원체포 실형을 언도받고 온 나라가 일본의 군홧발에 짓밟혔지만 독립쟁취는 못했다.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물결 밀려간 뒤 죄인 아닌 죄인들 감옥에 갇히고 죽고 남은 건 허무 그것이기도 하였다. 그나마 얻어진 성과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총독부에선 무단정치를 종식시키고 책임을 물어 데라우찌를 소환하고 사이또를7) 새로이 총독에 임명 문화정치를 펴겠다는 위화정책을 표명하였다. 총칼과 감옥과 채찍에서 엿과 아편으로 지배방식을 바꾼 것이다. 언론자유 인정 조선일보 동아일보 제반 잡지의 간행을 허용했다. 그러나 치안유지법에 따른 총독부 원고 사전검열을 강화하기도 했으니 표면상의 변화는 꿀일 뿐 내면 상으로는 하등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어이하랴. 2천만이 모두 감옥에 갈 수는 없는 것8) 3월의 폭풍이 밀려간 후 폐허에 선 당시 조선의 문인들 그 시인의 속마음을 헤아려보라. 사탕발림 문화정치 앞에서 원고지와 펜을 들고선 당시 문인들, 독립선언서 초안을 하고 감옥을 다녀온 사람들도 선언서와는 달리 허무와 탄식과 슬픔이 물밀듯 밀려 왔을 것이다.9) 이러한 인간의 절망과 비애 허무의식을 잘 이용한 그들의 문화정치라는 유화책 아편정책은 당시 문사들의 순문예주의나 탐미주의 데카당문학의 유입과 맞아떨어져 퇴폐적 낭만주의의 난만한 개화를 보기에 이르렀다. 2. 3.1운동 전후의 문학적 동향 1910년 한일합방 그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아 온 날로부터 1919년 3.1운동까지 10여 년, 한 편에선 친일 주구들의 출세주의와 황민화 내선일체에 동조한 지식인 문학인이 생겨났고, 한 편에선 혁명적 지사주의 항일민족문학의 뿌리도 여전한 채 계몽문학에 앞장선 최남선, 이광수도 그 당시까지는 틀림없는 민족적 애국문학의 선두에 있었다.10) 그 두 사람은 중요한 애국적 문장인 〈해외유학생 조선독립 2.8선언문〉과〈기미독립선언문〉을 초안하였다. 그리고 소년과 청춘지에 시와 소설을 썼고 춘원은 매일신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무정》을 연재하여 그 인기도 자유연애 사상과 함께 벌써 만인의 칭송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편, 선진 문예운동의 선각자 김억은 태서문예신보를 통하여 서구문학 서양의 낭만주의 상징주의 심지어 퇴폐주의적인 시까지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 평양갑부의 아들인 김동인은 스스로 출자하여 만든 〈창조〉라는 순문예지를 통해 새로운 소설 새로운 시를 소개 창작 직접 반이광수 노선에서11) 계몽주의를 뛰어넘는 순문예주의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새로운 인재로 자라나고 있는 염상섭은 이미 〈만세전〉이란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김억이 발굴한 김소월도12) 그 재능이 꽃피어나기 시작했다. 남모르게 가슴에 문학의 순정을 꽃피워내고 있었던 상화도 월탄도 모두 준비를 끝낸 이 땅의 새로운 문학가로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문단은 최남선 이광수 두 사람만의 2인 문단시대는 아니었다. 글 쓰고 싶은 문학청년들에게 1920년대의 문화정치는 긍부간에 새로운 창작의 장이었고 그 욕구에 불을 댕겨 주었을 것이다.13) 인간의 내면적 의지의 양면성, 그 강한 고리에 김구나 안중근 류관순이 있다면, 그 약한 고리에 최남선, 이광수, 김명순, 윤심덕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한 편은 사상가 애국지사 혁명가 한 편은 소설가 시인 가수 그런 것이 아닐까. 종달이 소리가 끝도 안 나서 청인의 집 낮닭이 운다 종달이 또 운다, 바람이 또 분다 동자군(童子軍)의 행군나팔이 들린다 아 사람을 곤(困)케 하는 강남의 봄이여. 〈1290년 4월 상해 망명지에서 쓴 이광수의《강남의 봄》 전문 춘원 이광수는14) 1917년 이미 《무정》이라는 소설로 조선 청춘남녀의 우상이 되었고 그 인기와 맞물려 도쿄의전 출신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이기도 한 허영숙(香山英子)과15) 밀애 북경도피도 한 경력, 그 글재주 때문에 일본 동경유학생 애국단체의 요청으로 동경유학생 조선독립 2.8선 언문을 초안한 시국사범 관련자, 그는 결국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동경을 탈출 상해로 망명, 안창호의 보호 하에 역할은 임시정부 독립신문 간행책임자였다. 검거망을 피하여 임시정부의 품에 안긴 이광수, 생사의 기로에서 삶의 의지는 혁명가 그것이었지만 도피처 강남 땅 곤한 봄 햇살 아래 하품을 씹는 이 시는 그가 이 망명자 혁명의 길을 오래가지 못할 것을 감지케 한다. 임시정부의 문지기를16) 자원하여 그 강한 주먹으로 조국을 지키겠다는 김구, 치아포에서 본명 김창수의 솜씨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쓰찌다 중위를 때려죽여 그 피를 마셔 복수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한 백범과는 전혀 다른 약한 고리의 성격임을 이 시의 분위기로 보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끝 구절 「아 사람을 곤케하는 강남의 봄이여.」 이 속에는 초조하고 착잡하면서도 나른한 봄기운을 못이기는 심란한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전형적인 약한 고리의 문사의 마음이다. 〈의거가〉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리를 천신만고 거듭하여 가시성을 더듬었다 혹은 윤선 혹은 화차 노국 청국 방황하고 너를 오늘 만나보니 너뿐인 줄 아지마라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놈 두 놈 보는대로 남의 나라 빼앗은 놈들 내 손으로 죽이리라 〈안중근의 의거가 전문〉17) 위의 시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제거하기 위해 거사할 때 우덕순 의사와 피로써 맹세하며 공음한 시이다. 이 시는 곧 행동으로 옮겨졌다. 이광수의 곤케하는 심란한 정서적인 시와는 그 의식 구조가 확연히 다르다. 한 사람은 인간성의 강한 고리, 혁명지사의 결의와 의지가 뭉친 애국시요, 한 사람은 인간성의 약한 고리 문사 기질의 감상(感傷)이 주조가 된 탄식의 시이다. 처처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청청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 일성으로 맹세하세. 〈윤봉길 의사의「홍구공원(虹口公園)을 답청하며」〉18) 거사일(1932.4.29)을 앞두고 그 행사장(천장절 경축식 행사장) 홍구공원을 사전답사하며 읊은 시이다.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그리고 김구 선생 같은 혁명투사나 지도자는 인간성의 전형적인 강한 고리라면, 이광수는 전형적인 문사기질 시인소설가 기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잠깐 신채호선생의〈문예운동의 예술주의를 비판함〉 이란 글을 인용해 보자. 「다만 3.1운동 이래 가장 현저히 발달한 것은 문예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경제 압박이 아무리 심하다 하나 금강산 구경 같은 문예작품의 독자는 없지 않으며 경성의 신문지에 끼어오는 책사 광고를 보면 다른 서적은 15년 전 그때 한 꼴이나 시인과 소설가 선생의 작품은 다수인 듯하다. 그래서 나의 난필이 한마디 하려 하나, 재료가 없어 남의 글이나 소개하고 모으려 한다. 중국 광동의 향도(響導)란19) 잡지에 중국의 신문예에 대한 글이 났었는데 그 대의를 말하면 이러하다. ‘중국 근대의 제1혁명, 제2혁명, 5.4운동이 모두 학생중심이었다. 그러더니 근일에 와서는 학생사회가 왜 이리 적막하냐 하면, 일반학생들이 신문예의 마취제를 먹은 후에 혁명의 칼을 버리고 문예의 붓을 잡으며 희생 유혈의 투쟁을 버리고 신시, 신소설의 저작에 고심하여 문예의 도원으로 안락경을 삼는 까닭이다. 몇 구의 시나, 몇 구의 소설을 지으면 이를 팔아 생활비가 넉넉히 될뿐더러 또한, 독자의 환영을 받아 시인이라 소설가라 하는 명예의 월계관을 쓰며 연애에 관한 소설을 잘 지으면 어여쁜 여학생이 그 뒤를 따라 염복을 누리게 되므로 혁명이나 다른 운동같이 체수(逮囚)와 포살(砲殺)의 위험은 없고 명예와 안락을 얻으며 연애의 단꿈을 이루게 됨으로써 문예의 작자가 많아질수록 혁명당이 적어지며 문예작품의 독자가 많아질수록 운동가가 적어진다’」하였다. 〈신채호 선생의 (문예주의 폐단을 논함)에서 인용〉20) 3.1운동 직후 우리 문단을 바라보는 단재의 걱정스러운 눈은 사실이었다. 무단정치는 총칼이 있어 타의에 의한 억압이 확실하므로 저항이라도 하지만 문화정치는 총칼의 억압 대신에 엿과 아편으로 직접 자신을 죽이고 있으므로 저항보다 스스로 좌절하고 절망하여 병든 줄 모르는 가운데 무너지고 마는 격이었다. 폐단으로 말하면 총칼 못지않은 지배방식이 문화적 아편이었는지 모른다. 이 아편 중의 하나가 병든 문학 병든 시가 아니었을까. 다른 분야에 비해 정서나 감정에 호소하는 문학의 기능이나 그 효용성 문제도 있지만, 20년대의 문학은 어느면 그 시대적 요청과 민족적 사명과도 동떨어진 역기능적인 면이 있었다.21) 애국주의적 계몽문학을 현대성으로 연결하지 못한 채 반계몽적 입장에서 순문예주의라는22) 서구 낭만주의 상징주의 탐미주의 허무주의 퇴폐주의 등 좌절의 문학 패배의 문학 감상의 문학에 젖었다는 부정적 평가는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의 한 반영이기도 하였다. 기생 출신 가수 이애리수가 불러 본인도 자살을 기도할 만큼 그 감격이 격한 센치멘탈리즘의 최고봉 가요〈황성옛터〉현해탄의 정사로 유명한 윤심덕의 〈死의 찬가〉 폐허파 백조파 일군의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는 백화난만한 문예의 꽃밭을 이루었으나 단재선생의 걱정스러운 그 폐단은 그리 쉬운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23)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가노라 〈가요 황성옛터 1절〉 7.5조의 이 가사는 전형적인 유행가의 애절한 멜로디와 함께 나라 잃은 2천만 동포의 심금을 울리고 남을 애절한 내용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지었을까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혁명가와 다르고 투쟁의 노래가 아니라고 배격할 수 없을 것이다. 분위기를 보아도 어느 우국지사가 달빛 아래 거닐며 잠 못 이루는 그 분위기와 엇비슷하다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요는 감상주의요 비장미를 통해 꿋꿋이 일어설 의지적 힘이 결여되고 있다. 저항적 생명 의지나 소생의 힘이 결여되고 있다. 술이요. 아편이요 망각제 진통제 그 다름 아니다.24) 1.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냐 쓸쓸한 이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서름 4. 잘 살고 못 되고 찰나의 것이니 흉흉한 암초는 가까워 오도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윤심덕의 (死의 찬가) 1절과 4절〉 세칭 20년대 페시미즘의 극치를 노래했다는 이 가사는 이바노비치의〈다늅강〉의 선율을 차용하여 대판의 레코드사에서 직접 취입하기도 했었다. 그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현해탄의 투신자살25), 과연 행복한 정사였는지 모르지만 당시의 허무주의를 짐작할 수 있는 시이다. 그러나 현실을 이기지 못한 문학 패배의 예술 그들의 종착역은 결국 죽음이었다. 3. 폐허, 허무, 감상, 죽음의 문학 창조(1919), 폐허(1920), 백조(1922), 3.1운동을 통해 그 핏값으로 얻은 문화정치의 혜택은 조선일보(1919.10), 동아일보(1920.4) 신문사 허가와 함께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문예지 동인지 잡지, 그 지면을 메울 문학가는 자연 바빠지게 마련이었다. 신문사 잡지사 허가의 속내는 진정한 한국인의 언론이나 표현의 자유가 아니었고 유화책으로 수많은 지하신문을 없애고 제도권으로 불러들여 감시를 하려는 의도와 아편식 길들이기 문화정책의 술수도26) 숨어 있었다. 어떻든 문인들은 수많은 지면에다 시와 소설 수필 온갖 글들을 발표하였다. 김동인에27) 이어 염상섭28), 현진건29), 나도향이30) 나왔고 이광수가31) 투항한 이래 본격적인 문학가로 그 성가를 날리기 시작했다. 주요한을 필두로 김억, 김소월, 이상화, 박종화, 박영희, 오상순, 황석우 저마다 서양의 문예사조를 받아들여 허무, 비애, 탄식, 영탄 그 무엇이든 예술주의로 장식하여 일견 시의 전성시대를 연출하였다.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면 1918년경에 이미 베를렌느나 보들레르를 소개했던 김억의 《오뇌의 무도》는 당시 상당수의 문인에게 《악의 꽃》이32) 전염될 정도로 데카당 문학도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온갖의 화복(禍福)은 입(口)으로 들어가고 온갖의 화복은 입에서 생겨라 그러하다, 나의 이 입으로 읊어진 노래는 世紀 끝에 생기는 Malady(질병. 병폐)의 쓰린 신음, 사랑의 死?를 파묻는 야릇한 숨소리여 〈해파리의 노래에 게재된 입의 전문〉 김억은 1918년〈태서문예신보〉간행, 번역시집〈오뇌의 무도〉의33) 간행으로 서구의 낭만시 상징시 소개,《해파리의 노래》로 최초의 개인시집을 간행한 20년대 초반 한국 시단의 로멘티스트였다. 그의 시적 율격은 민요풍이었고 사조는 낭만주의에 기질은 퇴폐주의였다. 그의 제자가 김소월이란 점은 좀 의외의 사건이기도 하다. 에스페란토어를 익혀 베를렌느 보들레르까지 소개한 대단한 선각자였다. 이탈리아의 작가 다눈치오34)의《사의 승리》에 자극되어 자살문학이 유행될 만큼 이 땅에는 허무주의나 페시미즘이 유행했다. 박종화의〈死의 예찬〉또한 그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 때 아니라 그러나 보라! 살과 혼, 화려한 五色의 빛으로 엮어서 짜놓은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우에 걸고 말없이 朱土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 해골! 무언! 번쩍거리는 진리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랴 아! 그렇다 영겁우에. 〈박종화의 死의 禮讚의 제1연〉 윤심덕의 〈사의 찬가〉가 센치멘탈리즘이라면 이 시는 그보다 약간 비장미를 곁들여 장엄한 분위기로 감싼 만가 미사곡을 올리고 있다. 죽음을 예찬한 그 의도에 당시 우리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 울분과 애수 탄식과 허무에 대한 파라독스(Paradox)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본색인 감상의 색조와 약간 위장하고 있는 퇴폐적 분위기는 보들레르에게서 슬그머니 훔친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사랑에 실연한 주인공이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함으로써 승리한다는 다눈치오의 사랑의 역설, 죽음의 역설을 빌어다가 보들레르의 퇴폐미로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1923년 10월 개벽 40호에 발표된 김동명의35)〈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신다면(보들레르에게)〉이러한 시는 일종 퇴폐문학 찬미요, 보들레르에게 바친 헌시였다. 오 님이여!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찬 이슬에 붉는 꽃물에 젖은 당신의 가슴을 붉은 술과 푸른 아편에 하염없이 웃고 있는 당신의 맘을 또 당신의 혼의 상흔(傷痕)에서 흘러나리는 모든 고흔 노래를 오 님이여! 나는 당신의 나라를 믿습니다 회색의 두꺼운 구름으로 해와 달과 별의 모든 보기 싫은 고혹의 빛을 모두 덮어버리고 지향없이 휘날리는 낙엽의 난무 밑에서 그윽한 정적에 불꽃 높게 타는 강한 리듬의 당신의 나라를 마취와 비장 통열(痛悅)과 광희(狂喜) 침정(沈靜)과 냉소 환각과 독존의 당신의 나라 구름과 물결 백작(白灼)과 정향(精香)의 그리고도 오히려 극야(極夜)의 새벽빛 출렁거리는 당신의 나라를 오! 님이여 나는 믿습니다 ..........중략.......... 오직 눈자라는 끝까지 쌓인 흰눈과 국다란 멜로디 비장하게 흔들리는 현훈(眩暈)한 極光이 두 가지가 한데 어우러서는 白熱의 키쓰가 되며 死의 위대한 서곡이 되며 푸른 웃음과 검은 눈물이 되며 生과 死로 씨와 날을 두어 짜내인 장미빛 방석이 되어 버림을 당한 곤비(困憊)한 혼들의 여윈 발자국을 지키고 있는 님의 나라로 오오 내 몸을 받으옵소서.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헌시 1,2,3,5연〉 설명이 필요없는 대단한 헌시로써 데카당 입당을 스스로 맹세하는 감격 어린 시이다. 이보다 더 열렬한 사랑은 다시 없을 것이며 거의 신앙적 경지에 다다른 예찬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퇴폐주의 데카당 문학의 비조 보들레르를 알아보고 넘어가자. Baudelaire(1821~1867)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비평가 미술비평가로서 6세 때 부친을 잃고 개가한 그 어머니를 따라 오피크 장군을 의부로 두었으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의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심한 갈등을 일으켜 고통스럽고 병적인 성장을 한다. 19세 때 망부의 유산을 받아 방탕과 퇴폐적 생활로 일관 혼혈녀 거리의 여인 잔느뒤발36)과 정교에 모든 것을 탕진, 거기서 모티브가 된 세기적인 금서요 문제의 시집인《악의 꽃》을 간행하였다. 톨스토이나 도덕가들은 배격하였으나 빅돌 위고는‘위대한 전율을 창조했다’고 극찬했다. 그 후 그 작품의 독창성과 예술성, 우울증, 아편중독(핫슈아편애용자), 탐미적 쾌락, 퇴폐적 관능미 등 후대의 상징파 현대시 운동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잔느 뒤발 외에도 정신적인 영향을 준 여인들도 있었지만 뒤발의 엉덩이야말로 한 마디로 그의 관능적 천국이었다. 아편 예찬의 책《인공낙원》산문시집《파리의 우울》《낭만파 예술론》《심미섭렵》등의 저서를 남겼다. 한때 우리나라에선《악의 꽃》을 사숙하는 시학도들을 ‘보들레르病’을37) 앓는다고 했다. 20년대 시인들은 이 병을 치러야 훌륭한 시인이 된다고 하였다. 어떤 시인은 신혼인 그 부부가 단칸방에서 사는데 찾아온 친구가 밤이 깊어도 돌아가지 않자 자기가 가운데 자고 친구를 재웠는데 새벽에 위치가 바뀌어 친구와 아내가 일체가 되어 있어 내쫓고 이 모든 것이 보들레르病 탓이라 탄식하고 그날 아침 보들레르 악의 꽃을 불살라 버렸다고 했다. 그 집에서 보들레르라는 퇴폐의 망령을 쫓아냈다는 뜻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독재자나 폭군이 저지르는 막된 분서행위인데도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백해무일익의 책이라 개탄 지구상에서 없애야 한다. 일련의 데카당 문학을 그의 저서〈예술론〉에서38)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보들레르 그의 성가는 올라갔으며 현대시의‘현대성’을 거기서 찾고 한때는‘시의 왕’칭호를 받는 등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모든 전위 이른 바‘물량끼 문학’‘포스트 모더니즘’등 새로운 문학은 모두 그를 비조로 하기도 한다. 우리 인류는 이상하게 톨스토이도 버리지 못하지만 보들레르도 버리지 못한다. 퇴폐성 그 부도덕성까지도 인간의 숙명인지 모른다. 문학은 선과 악, 미와 추 그것을 대별하여 선이나 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 속에 존재하는 모순 갈등의 비극적 존재, 보들레르의 말을 빌리면 원죄(Original sin)의 죗값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퇴폐성이나 부도덕 또한 우리 인간의 숙명 그 자체라고 말한다.39) 고대 프랑스의 범죄시인 프랑소아 비용 그《유서》의 시정신을 이어받고 미국의 현대시인 괴기미를 창조한 E?A?Poe의40) 시세계를 깊이 연구하여 19세기 말 상징파에 영향을 끼치고 방탕한 주정뱅이 시인 베를렌느와 동성애로 말썽을 일으킨 천재적 악동시인 랭보 등에도 그 제보를 이어 준 위대한 전율의 창조자 보들레르가 1920년 3.1운동 직후 식민지 치하 망국의 한을 품은 한국 시인들의 우상이 된 것은 모순 그 자체이지만 인간의 약한 고리, 문사 기질의 그 어떤 심적 현상으로 이해가 되고도 남는 일이다. 연기와 같이 아지랑이 같이 그윽한 정적이 더욱 더욱 엄습해 올 때에 아아 이 몸은 이 몸의 마음은 아편(阿片) 빠는 사람과 같도다 몽상(夢想)에 어리운 아편(阿片) 빠는 사람의 즐거움 같도다. 〈박종화 靜謐의 일절〉 〈死의 예찬〉에서 죽음을 찬미한 유학적 문사였던 월탄 박종화의 시〈정밀〉이란 시에선 끝내 비유이지만‘아편 빠는 즐거움’을 강조하고 만다. 「마돈나」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려는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오려므나 네 집에서 눈으로 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덴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1.2연〉 여기 나오는 분위기도 마돈나도 알고 보면 잔느뒤발의 엉덩이로 이어지는 밀실 속 관능의 도피처 그것이요, Sex와 아편의 상통하는 분위기 속에 이어지는 탐미적 데카당문학의 미학에 닿아있다. 3.1운동의 투쟁광장이 아니라 그 살벌한 광장에서 쫓겨나와 뒷골목 구석진 ‘골방의 은신처’ 그것이 다름 아닌 ‘밀실’이고‘마돈나’였을 것이다. 상화(尙火) 이상화의 18세 시의 작품이라 하면 무척 조숙한 낭만시로서 그 난만한 예술성을 높이 사고도 남는다. 그러나 중국 망명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맏형 이상무(李相武)41)를 만나러“지금 너 무엇하느냐”물어“시를 쓰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의 초기의 시〈나의 침실로〉나〈말세의 희탄〉을 말하였던 듯 싶다. 저녁의 피묻은 동굴 속으로 아 밑없는 그 동굴 속으로 끝고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거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 속에다 아 꿈꾸는 미풍의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취한 몸을 세우련다 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말세의 희탄 1.2연〉 격정, 울분, 정열, 영탄, 절망감이 과잉된 감정과 함께 분출하고 있다. 이런 시를 쓰고 있는 동생에게 형은 시를 쓰는 당위성과 그 지향점을 확실하게 해야 정열도 아름답고 보람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1925년 이후 그는 신경향파 문학에 참여하여〈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42) 밀실을 벗어나 민중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박종화도 소설로 전향하여 보들레르병을 잘 이겨내고 새로운 민족의 지향점을 찾는다. 이상화의 달라진 시, 확실한 민족적 지향점이 뚜렷해진 작품에 해당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초기 작품과 비교하며 감상해 보자.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 같이 구름뒤에서 반갑다 웃네 우선 그는 밀실에서 들판으로, 일하는 민중(농민)이 있는 현장으로 돌아왔다. 이와 같은 그의 자각이나 시적 변모는 1925년대 시대적 요청에 의한 시대적 깨달음일 수도 있고, 망명지의 혁명가 맏형의 충고에 의한 각성일 수도 있다. 1925년 이 땅에는 낭만주의 초기의 센치멘탈리즘이나 허무주의 창백한 백조파의 창백한 인텔리겐차의 밀실적 퇴폐적 병든 감상문학을 극복하려는 경향파 문학이나 좌파 카프계의 문학, 출옥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등장과 함께 제정신 가진 민족문학이 올바른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43) 《상록수》의 작가 심훈(1901~1936)은 짧게 산 그 생애 속에서‘브나로드(Vnarod:노서아어 민중 속으로의 뜻)운동’의 기수로서 농촌을 무대로 지식인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농촌 계몽운동가를 주인공으로 30년대 저항문학을 지향했던 탁월한 민족주의적 작가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시위에 가담 체포 기소되어 옥고를 치른 다음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원강대학에 입학 3년간 수학하고 귀국한다. 영화소설《탈출》《먼동이 틀때》는 직접 각색 영화 제작을 했다. 그 후 《동방의 애인》《불사조》《직녀성》등의 장편 신문연재 소설을 썼으며 사후 틈틈이 썼던〈조선은 술을 먹인다〉〈박군의 얼굴〉〈만가〉〈그날이 오면〉등의 항일 민족시를 남겼다.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입을 어기고 독한 술잔으로 들이붓는다 그네들의 마음은 화장터의 새벽과 같이 쓸쓸하고 그네들의 생활은 해수욕장의 가을처럼 공허하여 그 마음 그 생활에서 순간이라도 떠나고자 술을 마신다 아편 대신으로 죽음 대신으로 알콜을 삼킨다 가는 곳마다 양조장이요 골목마다 색주가다 카페의 의자를 부수고 술잔을 깨뜨리는 사나이가 피를 아끼지 않는 조선의 테러리스트요 파출소 문 앞에 오줌을 갈기는 주정꾼이 이 땅의 가장 용감한 반역아란 말이냐 그렇다면 전신주를 붙안고 통곡하는 친구는 이 바닥의 비분을 독차지한 지사로구나 아아,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뜻이 굳지 못한 청춘들의 골을 녹이려 한다 생재목에 알코올을 끼얹어 태워버리려 한다. 〈심훈의 조선은 술을 먹인다 전문〉 1929년 12월에 쓴 이 시는 사후에 간행된《그날이 오면(1949.한성도서주식회사간행)》 시집에 게재되었는데 20년대 잘못된 총독부 문화정책에 의하여 병들어가던 문인 젊은이들을 충고하는 내용을 비유로 읊고 있다.‘술’은 곧‘엿’이나‘아편’이요, 우리를 병들게 하는 문화정책에 대한 비유이다. 현대에도 독재국가나 후진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4S정책’이라44)하여 민중을 우민화시키고 그들의 불만을 해소시켜 대리만족을 갖게 하도록 ①Song ②Screen ③Sport ④Sex를 교묘하게 보급하여 마취제 대행을 시킨다고 한다. 1920년대 문화정책도 바로 이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심훈의〈그날이 오면〉〈박군의 얼굴〉은 민족시의 정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시이기도 하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에 담궈 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 오르는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인가? ..........중략..........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토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朴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져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朴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上海의 깊은 밤 눈을 뜬 채 동공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朴君의 얼굴의 1,2,4,5연) 고발, 증언, 저항, 비판 단 한 마디도 숨김없이 쓰여진 민족적 항일 저항시의 본보기이다. 마치 5.18당시 학생대표로 시위를 주도했다 하여 감옥에 갇혔다 다 죽은 목숨이 되어 병원 치료를 위해 가석방되었다 바로 사망한 광주의 젊은이 전대의 학생회장 박관현 열사 그와 흡사하지 않은가. 이상화 시인이 신경향파의 입장에서 그 시대 역사의 사명 앞에서 (나의 침실로)같은 탐미적 관능적 밀실의 문학을 버리고 빼앗긴 땅의 절규를 되찾은 것과 같이 그의 시는 역사의 소명감을 읊은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와주기만 할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가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限이 남으오리까 〈심훈의 (그날이 오면) 1절〉 목청껏 〈그날이 오면〉을 부르면 우리가 가야 할 길 불러야 할 노래 사랑할 사람이 누구인가 확연해지지 않을 것인가. 일제의 압제의 사슬이 ‘술’을 마신다고 ‘아편’을 찌른다고 그 고통 그 아픔이 사라질 것인가. 조국의 현실과 그리고 민중의 요구와 동떨어져 있던 문사주의의 시인들이 술주정을 풍류로 착각하던 그 몽환적 아편문학에서 깨어나 민족과 민중의 현장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랬을 때 1929년 광주에선 다시 한번 만세와 봉화가 올랐다. 그것이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 1935년이 되면 이상화는〈역천(逆天)〉45)이라는 시를 써서 거꾸로 솟구치는 피의 절규를 내뿜는다. 보아라 오늘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을 알았다 아니다 오늘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 알았다 〈역천의 끝행〉 이 ‘역천’의 싯구에 담겨 있는 ‘역설’을 되새겨 볼 때 그의 통곡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빼앗긴 들을 다시 찾았지만 또 외세가 갈라놓은 땅, 분단현실을 알고 있다면, 1943년 망국의 하늘 아래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작고한 그 원혼은 죽어서도 안주하지 못하고 한반도 휴전선 상공을 배회할 것이다. 4. 끝맺는 말 1929년 광주의 11월 3일, 그동안 설킨 민족적 차별 대우와 반일 감정이 쌓이고 쌓인 끝에 명치절 명절을 기하여 학생들이 궐기하였다. 야구시합의 불공정, 통학열차 내의 여학생 희롱사건 사소한 것들이 기폭제가 되어 성죽회 독서회의 민족의식 단체들이 계획을 세워 개천절과 맞물린 명치절을 거부하며 조선독립을 외쳤다. 무덕정을46) 임시 수용소로 수백 명을 검거 수감했다. 급기야 이 소식은 전국으로 메아리쳤다. 신의주에서 평양에서 함흥에서 서울에서 전국이 광주의 학생을 석방하라 연이어 일어났다. 3.1운동으로부터 10년 더 이상 참으려야 참을 수 없을 때 민중은 스스로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인 것이다. 광주 광산구 송정리 소촌리 출신 박용철 시인은47) 동경 유학 중 그 시위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출자하여 시문학을 만들고 역사의 부름 앞에 시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그 순수혼을 지키고 민족의 고결한 정신을 지키는 것이 바로 순수 아닌가. 그의 민족시〈떠나가는 배〉는 바로 그 마음을 대변했기에 광주엔 공원에 그의 시비가 서 있고 그 시는 1929년 젊은이들의 정신을 담은 노래가 된 것이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헤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거냐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 전문〉 역사의 밤은 점점 깊어갔지만 시인의 미망은 깨어났고 그의 육신은 병들었어도 조국에 바치는 헌가는 또렷하고 역력하였다. 1920년대의 낭만파 문학,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고 민족의 아침을 가져오기 위한 진실하고자 몸부림친 방황이었다.48) 1936년 생명파 1939년 청록파 지절파 이제 문학은 두 갈래길 친일파로 전락하느냐, 지조를 지키느냐, 후자의 길을 택한 감옥과 옥사와 절필과 낙향 은신 그러나 일제가 그리 쉽게 망할 줄 몰랐다고 변호 아닌 변명을 늘어놓은 원로문인이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시인은 역사 속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과 부끄러운 사람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다.49)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 전문(1941.11.20)〉 옥사한 지절시인 윤동주의 시, 그의 시는 습작 노트 속에 적혀 있다가 해방 후에야 간행되어 애송하게 된 것이다. 어찌 이 걸작이어서 온 국민이 애송하고 기억할 것인가. 그 순결, 때묻지 않은 모국어, 한없이 겸손한 자아성찰 속에서 하늘의 뜻에 따라 양심의 길을 걸어간 너무도 고결한 실천궁행의 위대한 순교정신을 보는 것이다. 저 암흑한 시절 총칼과 군화와 감옥 그리고 때로는 회유와 엿과 아편까지 서슴지 않았던 좌절과 절망과 타락 직전에서 다시 깨어난 민족혼 그 시혼을 지켜온 일제치하의 우리 문학은 그래서 가치가 더 높은 것이다. 우리는 다시 ‘진실하고자 하는 한 방황한다’는50) 그 말을 되새기며 캄캄한 밤길을 찾으려 애쓴 20년대 시인들의 고뇌와 그 작품에 다시 한 번 경의를 보낸다. <끝> (註) 1) 프랑스의 비평가 테느는 지정학적 결정론에서 문학의 형성 조건을 시대. 인종. 환경을 들었으며 문학을 역사적 산물로 보았다. 2) 1910~1919년까지의 기간 동안 소년과 청춘이라는 잡지를 간행한 최남선은 역사. 수필. 창가는 자신이 쓰고, 시험적 단편〈어린 벗에게〉〈소년의 비애〉등은 이광수가 썼다. 3) 創造는 1919년 2월 동경유학생이던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이 발간한 순문예지로 주요한의〈불놀이〉김동인의〈약한자의 슬픔〉등이 실려 반계몽적 순문예주의를 주장했다. 4) 질풍노도 독일의 낭만파 클링거의 작품명 Sturm und Drang, 격정, 정열 등 노도와 같이 과거의 인습이나 봉건적 잔재를 거부한다는 슬로건이다. 괴테, 실러 등도 동조했다. 5) 일제는 1910년 을사오적을 꼬드겨 거의 강제로 송병준 이완용 등을 내세워 합방하여 그 저항이 두려워 총칼로 무단 정치를 하였다. 교사가 교실에 들어올 때도 닛본또를 차고 왔다. 6) 천안의 제암리 교회는 류관순 누나의 근원지라 예배중 밖에서 문을 잠그고 방화하여 양민을 학살하였다. 옥에 갇힌 류관순은 재판을 거부하고 의자를 던지자 재판 없이 고문사 시켰다. 7) 총독은 일본의 무인 대장이 만년의 영광을 누리는 자리이다. 데라우찌나 사이또나 모두 장군인데, 문화정치란 일종의 사탕발림이었다. 사이또가 오는 날 경성역에서 강우규의사가 폭탄 투척했다. 8) 한국의 어떤 야당 지도자는 유신시대 전 국민이 감옥 갈 각오가 되어 있다면 반드시 민주화가 된다고‘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했다. 그러나 전씨가 불러도 장관자리 서로 동이 났다. 9) 실패한 운동 다음엔 좌절과 변절 전향의 비극이 오기 마련이다. 역사의 비극이지 좌절자 변절자를 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33인 중에서도 지조를 지킨자 보다 변절자가 많았다. 10) 이광수는 허영숙의 권고로 경시청에 자진출두 불기소 처분받아 친일로 기울기 시작했고 최남선도 역사 편수관이 되면서 그나마 그 조선주의는 퇴색 30년대 후반엔 모두 친일문학인으로 전락했다. 11) 김동인은 계몽문학을 배제하고 본격적인 순문학을 주장 이광수의 계몽성 기회주의자적 자세. 그의 출세지항적 변신술을 비판하는 〈춘원연구〉라는 책으로 강력히 비판했다. 12) 김소월은 김억에 사사 1922년 개벽지에 진달래꽃을 발표하고 1925년 동작품을 표제로 150편을 수록한 시집을 매문사에서 간행 20년대 대표적인 시집이 되었다. 13) 글이란 자기 표현 욕구에서 쓴다. 뚜렷한 목적이 없어도 그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누가 시키든 말든 글을 쓸 것이다. 20년대 문학가들도 그런 욕구의 소유자였다. 14) 春園은 이광수의 아호. 1925년 조선문단의 출자자 방인근은 공처가로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이광수의 후원자였다. 그래서 아호는 春海, 숭배자 노자영은 春城이었다. 그러나 모윤숙은 嶺雲이었다. 15) 이광수는 제일착으로 창씨 개명하며 그 소감에서 일본천황의 태생지 향구산(香久山)의 향산(香山)과 자기이름 광(光)자에다 일본식 남자이름 郞자를 써서 조금이나마 일본인에 가까워지고자 했다. 허영숙도 그래서 子에다 남편 성씨를 땄다. 16) 김창수 김구는 만주를 떠돌다 상해임시정부에 가서 자기 항일관록을 내세워 문지기를 자원했다. 훗날 경무국장 주석이 되어 상해의 호랑이 노릇을 했고 윤봉길의사를 통해 백천대장을 폭살시켜 투쟁했다. 17)이 의거가는 4.4조나 7.5조 가사풍의 시로써 예술성보다 그의 의분심과 결의가 잘 나타났으며 이것이 바로 싸우는 시 행동하는 실천시가 아니겠는가. 18) 문사의 시와 혁명투사의 시가 어떻게 다른가 대조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문인에게 혁명가를 권장하는 것은 무리지만 민족시인은 바로 혁명가여야 한다. 19) 5.4운동 이후 잠자는 사자를 일깨우고자 좌파 지도자들 젊은 모택동이 이끄는 진보적 잡지명, 아마 단재선생은 그 논리에 고무되어 우리나라 문사주의에(이광수 등) 일침을 가하기 위해 인용했다. 20) 이 문예주의의 폐단은 어찌 그 시대뿐이겠는가. 해방 후 이 땅에도 있었던 일이고 통일의 그날까지 문학가도 모두 그 정신적 무장이 필요하다. 21) 20년대의 창백한 낭만주의는 개인적인 풍류나 문학적 입장은 될 수 있으나 당시 민중적 욕구나 삶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 역기능적이다 할 수 있다. 22) 순문예주의란 서구에서도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 sakes)이라 하였고 그것은 결국 기교주의 탐미주의 퇴폐주의로 흘러 인생을 위한 예술(Art for human sake)과 대립되었다. (23) 단재 신채호는「시가 城하면 나라가 興하고 時가 衰하면 나라가 망(亡)한다」하였다. 이는 공리주의적 문학관으로 시를 한낱 계몽수단이나 교훈 전달의 도구로 삼는다는 비평을 받는다. 24) 4S정책 중 가요(song)(popsong)등은 대중의 위안적 진통제 역할을 한다하여 아달린(시간에 맞추어 먹는 진통제)에 비유하기도 한다. 25) 김우진 윤심덕의 현해탄 투신자살 사건은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하여 조작된 자살극으로 얘기되기도 하나 미화하려는 쪽과 불륜적 불미사건으로 보려는 쪽 반반이다. 26) 문화정책이 유화책이며 술수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사전 원고검열과를 두고 길들이기식 문화정책에 의한 출판문화는 엿이나 아편 같은 마취제에 불과하다. 27) 감자, 김연실전 기타 발표 28) 만세전 표본실의 청개구리 발표 29) 빈처. 운수 좋은 날 30) 벙어리 삼룡이 발표 31) 총독부 보장하에 동아일보 객원기자 이어 편집국장을 지내며 재생, 그 여자의 일생, 유정 발표 32) 〈악의 꽃〉은 나오자마자 판금형이었으나 위고는 ‘위대한 전율’이라 극찬 톨스토이는 악평했다. 그러나 독특한 미(퇴폐미)로 현대시 전위시의 비조가 된다. 33) 〈오뇌의 무도〉는 외국시의 번역,〈해파리의 노래〉는 민요풍의 시와 낭만적 상징적 시를 모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시집(1923)이었다. 34) D'annunzio(1863-1938) 이탈리아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 탐미적 신비적 악마적 경향의 예술지상주의적 성향이 짙다. 우파적 경향이었으며〈사의 승리〉에선 악마파적 요소가 강하다. 35) 김동명은 보들레르에게 헌사를 바치며 시인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수선화〉〈내 마음은 호수요〉등 가곡으로 불리는 노래〈파초〉〈진주만〉〈술노래〉등이 있고 정치 평론가로도 유명하다. 36) 잔느뒤발은 흑백혼혈녀 거리의 여자였는데 보들레르는 Sex로 엮어져 거의 중독상태의 관계였다고 한다. 거기서 얻은 시는 무척 많으나〈고양이〉〈유령〉등이 소개되었다. 37) 보들레르에 심취되어 그의 흉내를 내는 것을 일컫는다. 홍역과 같이 잘 치루면 다행이나 실패하면 퇴폐주의자 아편 중독자가 된다. 30년대 미당도 초기 그의 심취자였다. 38) 톨스토이의 예술론은 러시아 우파나 종교계에서도 싫어한 민중예술론이다. 베토벤도 악평했고 자연주의 소설가 졸라 보들레르도 악평했다. 39) 범죄는 법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본능의 문제이며 문학은 선과 정의의 편이거나 종교적 도덕적 부교재가 아니라 악과 선 양면을 지닌 인간의 관조라 한다. 40) 미국의 단편작가 추리소설의 원조〈헬렌에게〉〈아나벨리〉〈큰 까마귀〉시로도 유명하다. 괴기미 공포, 우울, 색다른 예술지상주의 창시자 보들레르는 그의 모든 것을 연구했다. 41) 이상무는 3.1운동 대구의 주동자로 옥고를 치루었으며 항일 지하단체 멤버였다. 합방 후 중국에 망명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상화는 형의 충고와 감화를 받았다 한다. 42) 이 작품은 신경향파로 전향 후 쓴 작품으로 초기의 낭만적 퇴폐성이 사라졌고 민족적 민중적 지향점이 확실해진 시를 썼다. 1925년 개벽에 게재했다. 43) 1925년 이후 민족주의적 항일문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상화, 한용운, 김소월, 심훈, 임화 등은 2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44) 4S정책 : 좌파 심리학자 마르꾸제 아도르노 등은 S자로 시작되는 4가지 문화요소(song, screen, sport, sex 등)를 아편이라 말한다. 45) 현대에 와서도 눈먼 하느님이란 비유가 나온다. 하느님도 정의의 편이 아닐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상화의 逆天은 하늘에 대한 도전이다. 46) 지금은 상무관이라 하고 5.18때는 신체안치소였다. 문화전당 짓는다고 헐릴 운명에 놓여 있다. 武德이나 尙武나 같은 뜻을 지닌 말인 듯하다. 47) 박용철 시인은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을 펴내면서 순수시 운동을 전개 좌파 카프문학을 계급주의 목적문학이라 배격했다. 떠나가는 배는 통합적 민족주의다. 48) 20년대 낭만파 문학은 한국 서정시의 일면 감상주의라는 병폐도 있지만 탐미적 요소나 보들레르의 퇴폐주의는 애국주의나 계몽주의를 극복시켰다. 49) 일제 말기가 되면 많은 친일작가 친일시인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은 대한민국의 반공주의 보호를 받아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직행 잘 살았고 온존했다. 50)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몇 살 때쯤 방황이 끝나는가. 孔子는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했다. 70 넘으면 철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