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을 그리다
김현주
그림을 배우면서 어떻게 그리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그리느냐가 중요한 걸 알게 되었다.
처음 유화를 배울 때 선생님이 고흐의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고흐의 그림을 모사하는 일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림이 뱅글뱅글 도는듯하고 너무 강렬해 왠지 그것을 따라 그리고 싶은 맘이 없었다. 고흐의 그림 중에 가장 고흐의 그림답지 않은 '아몬드 나무' 그림을 선택했다. 색깔 흉내를 내다보니 고흐가 참 색깔을 잘 썼구나 감탄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린 고흐 그림에서 강렬한 색깔과 구도에 조금씩 감동을 느꼈다. 강렬한 빛과 모양이 좋아졌다. 언젠가 고흐를 그리게 되면 많이 배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그리기에 초보지만 그리고 싶은 풍경 사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려보고 싶은 게 많았다. 어느 날 버리지 않고 모아둔 오래된 달력 사진 중에 가마솥이 눈에 띄었다. 옛날 한국 시골에서 흔히 보던 가마솥 두 개가 얹혀있는 시골 부뚜막 사진이었다. 지저분한 땟국이 솥 가로 선연하고, 문풍지를 바른 창은 세월의 냄새가 물씬 풍겨 본래의 흰 색깔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진작가는 낡은 부뚜막 위에 있는 가마솥 두 개를 찍어 놓았다.
어떻게 시꺼먼 가마솥을 주인공처럼 찍었을까 싶었으나 그 사진에는묘하게 끌리는 데가 있었다.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많은 추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송편 찐다고 신이 나서 솔잎을 따던 일, 뽀얀 무명천을 깔고 정성스레 빚은 송편을 찌던 것이 기억났다. 솥뚜껑은 얼마나 무겁던지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들었다. 그때 가마솥에 삶은 밤과 고구마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가마솥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었다.
조그만 캔버스에 밑 작업으로 배경이 될 회색 칠을 하고 구도를 잡아 보일락 말락 선을 그었다. 가마솥 두 개를 똑같은 느낌으로 그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나가 더 커 보이거나 한쪽 길이가 더 높아 보이기도 했다. 거기다 김이 잔뜩 서린 건 어떻게 표현하지 아 큰일났네 하며 유화물감을 이렇게 섞고 저렇게 섞기를 수없이 했다. 드디어 형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때 묻은 벽, 지저분한 부뚜막이 모습을 보이고 아궁이 속에는 장작불이 활활 탔다. 까만 가마솥이 푸른 쇳빛을 내는 걸 발견해 남색 빛도 살짝 입히자 그럴싸했다.
유화반에서 고흐의 그림이 아닌 다른 그림을 들고 온 사람은 나 하나였다. 나는 멈칫거리며 가마솥 그림을 이젤 위에 올려놓았다. 한 사람 두 사람 몰려와 보더니 환성을 질렀다. 드디어 선생님까지 오셨다.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잠자고 있던 그리운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일깨운 것일까. 선생님은 칭찬과 함께 큰 캔버스에 다시 그렸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흐뭇했다.
가마솥보다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더 진하게 베어나오는 그림을 보며 다음엔 어떤 따뜻한 기억이 떠오르는 이야기를 그릴지 고민해 보아야겠다. 나는 그림속에서 돌아가보고 싶은 옛 기억을 쫒고 있었나보다.그림은 그리움을 그리는 걸까.
첫댓글 멋져요.
현주샘의 가마솥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아요.
글도쓰며 그림도 그리시는 현주샘의 열정에 박수를 치며 응원합니다.
추억을 담아 켄버스에 옮기는 과정이 생각만해도 행복해보여요.
멋진 노후를 보내니 행복한 삶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