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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의 destiny 혹은 fate에 관하여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을 읽고
‘destiny’와 ‘fate’는 우리말로 흔히 운명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 담긴 의미는 같지 않다. 사전을 찾아보면 두 단어가 유의어에 속해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단어 모두‘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을 가리키며 초월적인 힘, 즉 신(God) 혹은 신과 같은 어떤 것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어떤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미래에 일어날 그 어떤 것이 위대하고(great) 중요한(important) 무언가라면 ‘destiny’로, 그와 달리 피할 수 없는(cannot be avoidable), 슬프고(sad) 불쾌한(unpleasant)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fate’로 정의된다. 우리말의 ‘운명(運命)’이라는 단어는 그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destiny와 fate는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중에서도 소포클레스는 인간에게 덧씌워진 불행한 운명, ‘fate’를 다루고 있다. 이 fate는 피할 수도 없이 온전히 당해야만 하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억울한 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라이오스왕도 오이디푸스왕도 신탁에서 주어진 불행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라이오스는 아들을 버렸고, 오이디푸스는 집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운을 피하지 못했다. 어차피 정해져 있는 것을 이름하여 운명이라 했으니,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까지 모두 운명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에 입력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꽤 오래전 사주를 보겠다고 철학관을 간 적이 있다. 혹 나쁜 말을 들을까, 쉬이 가지 않는 곳이었지만 궁금했다. 내 운명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인지, 혹 해답이라도 있을까, 답답한 마음의 마지막 열쇠라도 쥘 수 있을까 하여 나름으로는 큰마음을 먹고 방문한 적이 있다. 제법 큰돈을 내고 꽤 긴 시간을 앉아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사주팔자라는 것이 진정 정해져 있다면 과연 그것이 어떠한지 알기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듣고 보니 그래서 그랬던가 싶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개인사야 누구든 우여곡절이 있는 것일 테지만 내게 인상 깊게 남았던 스님의 말씀은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간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러한가. 운이라는 것은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 법, 그러니 좋다고 너무 좋아할 것도, 나쁘다고 너무 좌절할 것도 없다고 한다. 잘 안 풀리면 준비하며 기다리면 될 일이고, 좋으면 좋으니 더 잘 되도록 분발해야 할 일이다.
일면 새겨들을 만했다. 하지만 기어이 소화되지 않고 명치에 걸려 내내 나를 답답하게 했던 것은 인간의 삶이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는 그 말이었다. 정해져 있다는 것, 역학이라는 것이 결국 운명론과 맞닿아 있는 것인가. 그러면. 노력 따위 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제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참담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오이디푸스가 결행했던 부모님을 떠나는 행위도 모두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인간의 노력은 다 무용지물일 뿐인가. 그래서 이오카스테는 종종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미래사를 예언할 수 없어요. (710)
인간은 우연의 지배를 받으며 아무것도 확실히 내다볼 수 없거늘, 인간이 두려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977)
결국 오이디푸스는 신탁대로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제 어머니와 결혼하여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자식을 낳는다. 이오카스테가 말하듯 인간의 노력이란 부질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런 까닭에 이오카스테는 그저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왜’를 묻지 말자고 한다.
되는 대로 그날그날 살아가는 것이 상책이지요. (979)
일면 이오카스테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잔혹한 운명을 피할 방법이 정녕 없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이런저런 만약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만약 오이디푸스가 섣불리 제 양부모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출생의 의문이 생겼을 때 양아버지에게 그에 대해 직접 물어보고 사실을 명확히 알고자 했더라면, 만약 라이오스가 제 아들의 손에 죽을지언정 자식을 내치는 식의 천륜을 저버리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오이디푸스가 분노를 참고 삼거리에서 만난 노인 일행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등등의 만약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러한 만약이 만약이 아니라 실제가 되었다 할지라도 소포클레스는 그들을 ‘fate’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완벽을 꿈꾸지만 말 그대로 꿈꿀 뿐, 완벽할 수가 없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닌 존재이며 그러하니 불완전한 인간이 내린 결정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함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결정도 늘 결함이 내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쩌면 숙명적으로 우리는 ‘fate’를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돌고 돌고 돌아도 같은 결과를 맞닥뜨리고 마는 인간의 모습, 다들 잊고 살지만 마지막엔 결국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 말이다. 하지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나쁜 운명을 피하고자 노력한 오이디푸스의 ‘애씀’이 그토록 잔인한 결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 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 (1184)
그의 탄식이 너무나 아프게 와 닿는 것은 나 또한 운명 앞에 나약하기 그지없는 결함투성이의 인간인 탓일 게다. 그러나 인간사에 온통 어찌해 볼 수 없는 것들만 있다면 우리네 삶이 얼마나 팍팍할까. 나는 그 우울함과 답답함의 숨통을 틔워 줄 한 가닥 희망을 목자에게서 발견한다. 그리고 또 다른 희망의 한 가닥을 크레온에게서 찾는다.
그 아이가 가여워서였습니다, 주인님. (1178)
목자는 감히 왕의 명령을 어긴다. 아이를 죽여 없애라는 지엄한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리려 했던 목자는 그 이유가 가여워서라고 말한다. 신탁이 두려워 제 자식도 버리는 것이 인간인데 왕의 명령임에도 기꺼이 그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려내는 선택을 했던 것도 역시 인간이었다. 고작 가엽다는 이유로, 발각되면 제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를 일을 감행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가능한 또 다른 모습이다. 물론 그로 인해 오이디푸스가 살아서 그 참담한 현실을 맞이하게 된 것이 아니냐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 관점에서 바라본 해석이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사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안위보다 타인의 생명을 우선시했던 목자의 측은지심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소중한 덕목이다. 더구나 목자는 아이가 커서 그런 비극적 삶을 살 것이라 예상하고 살려낸 것이 아니다. 오이디푸스가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하는 문제는 목자가 오이디푸스를 살려낸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으로 절대적 권력인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결정을 한 목자의 선택은 신탁의 운명이 두려워 자식을 버리는 라이오스의 선택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이를 우리는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목자의 선택을 보며 두려움 가운데서도 선한 자유의지에 따라 삶을 일궈내려는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그 선택이 무척 고맙고 반갑다. 같은 의미에서 나는 또한 크레온의 의미심장한 발언을 되새긴다.
신탁은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난국에는 우리가 어찌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1442)
이제 모든 일은 벌어졌다. 인간으로서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은 이미 벌어졌고 그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오카스테처럼 자살해야 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 무기력한 인간으로서 그 선택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자살이라는 행위의 옳고 그름과, 그 연유의 안타까움은 차치하더라도 현실에서 자살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제 눈을 찌르는 처벌을 가함으로써 스스로 시력을 잃는다. 상황이 이러한데 크레온은 냉정하다 싶을 만큼 차분히 말한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보자고. 알아본다는 것, 비록 부족할지언정 인간의 힘으로 상황을 타개해보려는 의지, 그 의지 ‘알아보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일지 모른다. 더러 알아보는 것조차 힘에 겨운 사람들이 있다. 불행을 직면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살아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해 크레온이 말했듯 어찌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보아야 한다. 앞으로 짊어지고 나아갈 삶에 대하여 어쩌면 신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알아보았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fate’나 ‘destiny’가 아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은 정녕 없을까. 삶에는 반박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이런 저런 부모님 아래 태어났다거나 이 나라 대한민국에 태어났다거나 남자나 여자로 태어났다거나 이렇게 저렇게 생겼다거나 하는 외부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다거나 혼자 있는 게 좋다거나 하는 타고난 것도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필요나 노력 여하에 따라 다소 개선될 수는 있겠으나 대체로 타고난 것은 크게 바뀌지 않으며 더구나 외부적인 환경은 말할 나위도 없이 개인의 힘으로 바꾸기가 어렵다. 왜 나는 부유한 부모를 만나지 못했을까 원망하기보다는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쪽이 차라리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행히 ‘fortune’이나 ‘luck’과 같은 것이 있다. 인간사에 영향을 주어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운’이라는 것이 있단다. 이를테면 부유한 부모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는 것. 또한 당뇨를 관리하기 위해 하루에 한 시간은 반드시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 외국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매일 10개의 단어를 외우겠다는 각오, 적어도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겠다는 목표와 같은 것들은 스스로 정하고 해 낼 수 있는 것들이다. 너무 소소해서 한심한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뿐이라 실망스러운가. 하지만 고작 그런 것들이 모여 ‘destiny’가 되기도 ‘fate’가 되기도 하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로 두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이디푸스는 억울할 수도 있는 참담한 운명을 맞닥뜨렸음에도 이오카스테처럼 목숨을 끊지는 않는다.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제 눈을 찌르는 고통을 감수하지만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로 두고 주어진 운명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해 그저 걸음을 내딛을 뿐이었다.
내 너희에게 충고해줄 것이 많다만 지금은 이렇게만 기도해다오. 이 아비는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살아갈 것이나, 너희는 이 아비보다는 나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1513)
자살은 오히려 쉬운 선택일지 모른다. 죽지 않고 살아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것, 그것이 그가 선택한 살아냄의 모습이다. 자신의 잘못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담은 절절한 당부는 살아냄을 선택했기에 건넬 수 있는 조언이다.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그의 말속에서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담담한 의지가 느껴진다. 신의 명령‘fate’에 굴복하지 않고 끝끝내 살아내는 것, 오이디푸스를 살린 목자의 바람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이디푸스가 선택한 살아냄은 또 다른 운을 불러올지 모른다. 그 운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며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말이다. 꿋꿋이 내딛는 오이디푸스의 걸음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로 어쩔 수 있는 것을 찾아 애써 걸음을 내딛어 보는 것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그나마의 최선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더하여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오이디푸스들의 걸음에도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