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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기도로 돌파하십시다.
돌파라는 단어가 잘 안 쓰는 단어라서 잘 안 되죠. 그래서 연습이 필요합니다. 제가 돌파하면 여러분 돌파 크게 한번 따라해보시기 바랍니다.
돌파
감사합니다. ‘기도로 돌파하자’ 2024년 목회 표어입니다.
제 앞에 참 많은 장애물이 있는 것 같아요. 이걸 돌파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견뎌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목회를 해온 것 같아요. 원래는 2024년 내년이죠. 한 해는 돌파 해겠다는 각오로 누구랑 싸우겠다는 게 아니에요. 돌파해야 되는 각오로 한 해를 묵상하려고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미 기도에 대한 설교가 진행이 됐어요. 오늘도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할 것이고 또 2024년도에는 아마 여러분이 최소한 새벽 기도까지 다 포함해서 50일 기도까지 다 포함해서 60번이나 70번 정도 되는 기도에 대한 설교를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정말 원리들이 참 많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데 기도의 원리를 몰라요. 그래서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고 상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거예요. 원리대로 기도해야 하나님의 기도를 기뻐 받으시는데 우리는 마치 무속 세계에 있다가 무속에 젖어 있던 삶을 살았잖아요. 우리나라 자체가 아직까지 무속의 영향력이 있어요.
여러분 세상에 가장 무서운 종교가 무속이에요. 캐톨릭과 무속 신앙이 맞닿아도 캐톨릭이 무속화가 되고요. 이 무속과 불교가 만나도요. 불교가 무속화가 돼요. 기독교와 무속이 만나도 무속화되는 경향이 엄청나게 많아요.
정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곧 기독교도 무속 신앙이 돼요. 우리가 무속 신앙을 근거해서 기도할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원리를 알 필요성이 있어요.
여러분 기도의 원리를 알기 위해서 누구의 기도를 알면 가장 잘 알 수 있을까 봐요. 예수님이죠. 왜냐하면 예수님 우리의 구주이자 또 예수님 우리의 선생이자 우리의 스승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기도를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도의 방법인 것입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하루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이 잠깐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어땠을까? 감람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어땠을까?’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첫 번째로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습관에 따른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의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계셨어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간 것도, 겟세마네에 올라간 것도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도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34절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의 기도입니다. 많은 사역을 뒤로 하고 그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어요. 34절입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앎으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많은 사역으로 인해서 피곤했어요. 피곤했지만 습관을 따라 기도의 자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만 예수님의 기도가 세 번이 나와요. 이 예수님의 세 번의 기도는 모두 다 예수님이 중요한 사역을 앞두고 있을 때 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에 기도가 있었던 거예요.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 그러니까 예수님도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으면 이 땅에 십자가의 삶을 종의 삶을 감당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습관을 따라 한적한 걸 찾아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중요한 믿음의 포인트 때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기도가 삶에 자리 잡지 않는 것 이건 되게 불행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고 삶에 자리 잡을 때부터 그때부터 기도의 능력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지 않으면 기도가 삶의 1순위가 되지 않으면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불편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이 불편해야 돼요. 기도하지 않는 것이 답답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괴로워야 돼요. 이게 정상인 거예요. 이게 정상적인 기도에 대한 여러분과 저의 반응인 것입니다.
기도를 영적인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흡이 중단되면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기도가 중단이 되면 영혼의 호흡도 영혼의 생명도 끝이 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이라고 하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인 거예요.
하나는 양식이고 하나는 호흡이고 우리의 몸이 그렇게 유지가 되는 거잖아요. 여러분과 저의 몸은 밥을 먹어야 그 먹은 밥들이 에너지가 되어서 몸을 유지하게 하고 호흡을 해야 또한 우리의 생명이 유지가 돼요.
동일하게 말씀과 그리고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양식인 거예요. 필수 불가결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먹고 기도를 해야 생명을 유지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 중에 내가 영적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별문제가 없어요. 밥을 먹지 않으면 금방 표시가 나요. 숨을 쉬지 않아도 금방 표시가 나요. 큰 문제가 생기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는 것을 중단하는 것, 호흡을 하지 않는 것은 되게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호흡을 안 하려고 하지 않아요. 여러분과 제가 우리 중에 누가 나 오늘 부터 호흡 안 할 거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죽겠다는 거죠. 내가 오늘부터 밥을 안 먹을 거야 죽겠다는 거예요.
그처럼 기도도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의 영혼에 동일한 거라는 거예요.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원히 죽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죽는다는 거예요. ‘나는 기도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내 영혼은 죽겠습니다.’라는 말과 선언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도 당장 별 문제가 생기지 않으니까 세상 사는 데 별 문제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말씀을 먹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씀을 먹는 것을 중단하는 것에 대해 별 두려움이나 별 염려나 별 생각이 없어요. 그러나 사실상 그 사람은 그런 성도는 그런 목회자는 죽은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예배를 드리지만 죽는 것이고 사역을 하지만 죽은 거예요.
좀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모든 영적인 신경이 무더져 있기 때문에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몰라서 내가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별 반응이 없는 거지 실상은 영적 영은 죽은 거예요. 영혼의 반응이 없잖아요. 말씀에 반응이 없잖아요. 기도에 반응이 없잖아요. 호흡하지 않잖아요.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을 수 있어요? 살기가 불가능한 겁니다. 기도는 영혼의 후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에 이것은 습관화되어야 되는 거예요. 습관을 넘어서 체질이 되고요.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이 돼야 돼요.
기도는 그냥 내 삶의 자연스러움이에요. 그냥 시간이 나면 무릎 꿇어 엎드려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기도의 마음을 주시면 기도의 자리에 엎드리고 하나님이 철야의 마음을 주시면 철야를 하고 금식의 마음을 주면 금식을 하고 이게 어려운 것이 아니어야 된다는 거예요.
물론 막 10일 20일 이렇게 기도하는 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한 두 끼 금식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해도 돼요. 죽지도 않아요. 오히려 몸은 더 좋아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기도해야 된다. 그리고 내가 내가 말씀을 늘 뭘 먹어야 된다 이 사실에 대해서 별 감흥 없이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호흡을 하게 되면 산소가 온몸에 들어와서 우리 몸에 온갖 작용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호흡이 멈추면 우리 몸의 모든 기능도 멈춰져요.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손을 흔들어서 할 수 있는 것도 눈을 깜빡이고 머리를 흔들고 몸을 흔드는 이 모든 것은 산소가 내 몸에 공급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제가 소리를 내어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도 산소가 내 몸에 공급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영혼도 똑같다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으면 영혼의 호흡이 중단이 돼요. 그래서 영적인 그 어떤 작용도 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영적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하게 되면 우리의 영이 자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영이 활성화되고 영혼이 활동적이 돼요. 우리의 영혼이 온전히 기능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호흡을 중단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 업을 계속해야만 우리가 우리의 영혼이 반응하면서 일하면서 온전히 기능하면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업인 기도가 중단되어 우리의 영혼이 온전하게 기능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기능하지 못하면 영혼이 활발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기기가 어려워요.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몸의 모든 기능이 활성도가 신진대사가 떨어져서 몸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도를 하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영적인 반응도 내게 나올 수 없는 거예요.
모든 내 영혼의 반응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거예요. 예배를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기도자가 예배자가 될 수 있어요. 기도자가 순교자가 될 수 있고 기도자가 순교자가 될 수 있고 기도자가 헌신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기도를 해야 내 영혼이 반응하고 내 영혼이 깨어 살아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을 올려드릴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있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게 아니라 내 영이 깨여 있고 내 영이 살아있고 내 영이 온전히 기능해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들을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우리가 호흡하지 않으면 걷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는 영혼을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우는 작업이에요. 기도는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우고 무력해 있는 영혼을 깨우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기도를 강조하는 거예요. 목회자들이 기도를 강조하고 기도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여러분 쓸데없는 일들을 왜 교회가 강조하고 쓸모없는 일들에 대해서 왜 목숨을 걸고 외칠까요? 이거는 우리의 호흡이기 때문에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에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살아있는 영혼의 호흡을 아는 이들이 있어야 교회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육체로도 일할 수 있지만 육체가 일을 하면 곧 육이 나타나요. 그러나 영혼이 일을 하면 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들이 자꾸자꾸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에 의해서, 영혼에 의해서 온전하게 지배받는 육체가 되어야 내 육체가 하나님이 쓸만한 육체가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혼이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역의 현장에 육이 나타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만 이런 일들이 우리의 영혼이 기도가 자동적으로, 기도가 자동적으로 되어야만 우리가 영원히 살아서 교회와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도함으로 내 영이 깨어 자는 열심은 따라갈 수 없어요. 내가 아무리 수고를 해도 기도함으로 내 영이 깨어서 깨어난 나의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로 우리의 영이 깨어나야 되는 겁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은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기도자가 순종할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기도하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인 거예요.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세상을 향해요. 육적인 것을 좇아 따라가요. 그러나 기도하면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만드신 이를 향해서 고개를 들게 되어 있어요. 기도하는 자가 있어야 그 고개를 들고 만드신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원히 하나님을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음성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음성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떨어져서 기도하셨어요. 제자들에게 부탁하기를 ‘유혹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 말은 기도하면서도 얼마든지 유혹에 들 수 있고 기도하지 않으면 더 큰 유혹에 든다는 말이에요. 유혹은 다른 말로 하면 시험이에요.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고 시험에 들면 순종하기 어렵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순종할 수 있도록 시험에 들지 말라고 해요.
여러분 교회에 시험에 든 성도들은 순종하지 못해요. 그럼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이 뭘까요?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시험에 들어요. 여러분 제가 정말 조심하고 조심하게 해도 저한테 시험 드는 성도가 있고 저도 시험이 들어요. 그럼 시험은 여러분이나 저나 누구나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게 시험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기도가 그 시험을 이기게 만들어요. 기도가 유혹을 이기게 만들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라고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시킬 때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를 순종하게 하는 거예요.
근데 왜 순종하지 못하느냐 시험에 들어서 순종하지 못하는 거죠. 하나님의 명령 앞에 저와 여러분이 왜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냐 하면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기도하면 우리의 영혼이 활력을 얻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고 우리의 영혼이 온전해지고 강건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거예요. 내 영혼이 강건해지면 내 영혼이 온전해지면 내 영혼이 힘을 얻으면 하나님의 어떤 명령에도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하라고 명령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이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하다가 결국에 순종하셨습니다. 이 말은 기도가 없으면 순종이 어렵다는 거예요.
교회의 기도자가 줄어든다는 이건 비극과도 같아요. 교회의 기도 소리가 줄어든다는 것, 기도 음성이 줄어든다는 것, 기도 자리에 서 있는 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비극과도 같아요. 왜요? 순종할 사람이 자꾸 없어진다는 거죠. 여러분 기도해도 순종하기 어렵잖아요. 저도 기도해도 순종하기 어렵더라고요. 기도해도 순종 안 되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기도 안 하면 더 순종할 수 없어져요.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곧 비극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교회에서 보는 비극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보는 이 비극은 기도자가 사라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남의 교회 이야기한다고 여러분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제가 기도학교 사역에 함께 동참하고 있잖아요. 물론 교회가 엄청 커요. 새벽 기도를 3500명 나올 정도면 얼마나 큰 교회겠어요. 그런데 아무런 헌금을 준비하지 않고 기도학교를 무료로 다 섬겨요. 저희가 세미나를 가도 다 무료고 식사만 한 3천 원 외에는 모든 게 다 무료예요.
정확하지 않지만 성도들이 무명으로 1년에 또 비교한다고 여러분 기분 나빠하시면 안 돼요.
10억 정도를 헌금을 한대요. 무명으로 무명으로 합니다. 그러면 부유한 사람 돈이 막 100억 천억 되는 사람이 할까요? 그렇지 않아요.
누가 해요? 결국 기도하는 사람이 새벽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거예요. 저녁에 기도하다가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된 거예요. 금식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순종하게 됐고 그 결과 그런 일들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품이 좋아서 순종을 잘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성품이 정말 너무 좋아서 순종을 잘하는 성도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을 성도를 만나는 것도 목회자에게 큰 축복이에요.
그러나 성품은 금방 한계가 와요. 성품이 뚫어내지 못하는 뚫지 못하는 순종의 한계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딱 할 만큼 해요. 내 성품이 견딜 만큼만 해요. 딱 할 만큼만 그래서 교회는 의외로 딱 할 만큼만 하는 성도가 많습니다. 왜요? 기도하지 않으니까 기도를 해야 한계를 넘은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한계를 넘은 순종이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는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옥 이런 수치는 있을 수도 없어요. 예수님은 이 수치와 이 지옥을 기도로 이겨내셨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협상이 아닙니다. 가끔 기도가 협상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순종이 있어요. 예수님의 기도를 잘못 비우면 이게 협상처럼 보여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처럼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 막 항의하고 따지고 하잖아요. 그래서 기도가 협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도는 협상이 아니라 순종인 거예요.
하나님의 기도를 시킨다는 건 결국 순종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제가 가장 많이 순종을 해야 할 사람이에요. 제가 가장 많이 순종해야 될 사람.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 기도를 계속 시키거든요. 아직 그게 뭔지 뚜렷하게 내 앞에 다 등장하지 않았지만 계속 기도를 시켜요. 그러면 순종해야 될 것이 많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정상이고 목사가 가장 많이 순종해야 성도들도 순종할게 할 것입니다.
목회에는 순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왜 순종하지 못할까요? 기도하지 않아서 순종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기도를 시킨다는 건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그 계획에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건 기도 순종할 몫도 많다는 거예요. 기도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이들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땀이 땅에 떨어져 핏방울처럼 되는 기도였습니다. 혈안증이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이 질병의 원인은 대개 여러 가지예요. 어떤 거냐 하면 이게 땀 속에 혈액이 섞여서 나오는 증상을 혈안증이라 그래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대표적인 이유가 스트레스예요. 그러니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핏줄이 터지고 그 터진 빗줄이 이렇게 땀과 함께 이렇게 흘러내리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인간 여러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고통을 겪을 때 터질 수 있는 것이 핏줄이잖아요. 가장 괴로울 때 눈에 핏줄이 터지는 사람이 있고 몸에 핏줄이 터져요. 그게 가장 괴로워야 가능한 거예요.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도였는지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떻게 보면 간절하면 기도의 크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기도가 크다는 것은 큰 사역이 예비되어 있다는 거예요. 기도가 간절하다는 것은 큰 사역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셔야 질 수 있는 십자가였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만 예수님께 있었던 게 아니에요. 존재론적인 고통도 예수님께 함께 있었어요. 그리고 이 기도하는 모습이 정확한 해석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은 좀 없지만 하나님께도 마음에 드셨던 것 같아요. 43절에 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면 천사도 하나님의 사자도 예수님의 간절함에 감동이 되어서 예수님을 돕기 위해서 내려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우신 거예요. 예수님의 기도를 하나님이 도우신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이 기도가 인류 구원의 길을 열게 된 것입니다. 이 기도가 대속의 사역을 열게 된 것입니다.
간절함은 기도의 크기고 기도의 크기는 곧 사역의 크기입니다. 더 간절하게 기도하게 하신 것은 더 소중한 사역이 우리 앞에 눈앞에 있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기도를 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라는 거죠.
여러분 여러분 앞에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가 있을 거예요. 이미 기도로 다 해결됐고 남은 것들은 더 많은 기도, 더 간절한 기도, 더 합당한 기도가 있어야 해결될 문제인 거예요.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있죠 가족 구원의 문제가 있고 물질의 문제가 있고 질병의 문제가 있고 관계에 문제가 있고 온갖 문제가 여러분의 가정에 있어요. 이미 해결된 것은 다 해결돼 남은 것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는 것만 차곡차곡 쌓여서 남아 있어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더 기도해야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해결될 문제라는 거예요. 지금의 수준으로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의 수준으로 기도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목장 교회에 기도와 관련된 표어를 주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고 싶은 일들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내면과 우리의 교회 안을 위한 기도였다면 이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여야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일을 완성하는 기도였고,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기도였습니다. 44절에 보면 애쓰고 힘쓰고 간절히 땀이 땅에 떨어져 핏방울같이 이렇게 기도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신데 힘을 쓰고 기도하셨다는 거예요.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거예요.
애쓰고 기도하셨다는 거예요. 땀이 빗방울 되는 것처럼 정말 극한의 간절함으로 기도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가 간절하면요. 온몸에 온몸에 근육이 탁 힘이 들어요. 온몸의 근육이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노동, 그리고 가장 최고의 노동은 그리고 그 가의 노동은 기도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알 수 있는 가장 힘든 노동이 뭐냐라고 했을 때 답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정말 기도하는 기도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기도를 명하는 거예요. 다 할 수 있는 일이면 어떤 성도도 할 수 있는 일이면 어떤 교회도 할 수 있는 일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면 이렇게 성경 곳곳에 기도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여러분이 듣기를 바라고 있을까요? 아니죠.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여러분의 자신을 위해서 어떤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우리 교회 기도실 이름 중에 겟세마네의 언덕이라는 기도실이 있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기도 기도실 제목을 지었냐 이름을 지었냐 하면 그곳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실에 이름을 지었어요.
혹시 여러분은 다른 방의 이름도 아시나요? 한나의 성전 야곱의 얍복강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우리 교회에 있는 기도실에 이름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그곳에서 한나의 기도가 있기를 바랐던 거예요.
우리 권사님들이 우리 어머니들이 한나처럼 기도하기를 바래서 한나의 성전이라고 기도실 이름을 짓고 저게 이렇게 만들어 놨어요. 야곱의 기도가 다시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야곱이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과 씨름을 했어요. 그 간절함으로 씨름하듯이 기도하라고.
여러분 씨름해보셨어요? 한 번 하면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온몸에 근육이 뭉쳐서요. 며칠이 아니라 매주을 고생해야 돼요. 운동하지 않는 사람이 씨름을 하면 하루 지나면 근육이 풀린 게 아니라 몇 주를 힘들어야 이 몸에 근육이 다 풀릴 만큼 씨름은 그렇게 힘든 거예요.
야곱이 그렇게 기도했던 거예요. 여러분 어쩌면 여러분과 저는 너무 편한 기도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제 새벽 기도실에는 어떤 성도님이 따뜻하게 기도하라고 전기장판을 주셨어요. 그래서 새벽에 가면 항상 꽂아놓고 엉덩이 따뜻하게 기도해요.
이제 치울까 봐요. 이제 긴 시간 앉아 있으니까 되게 좋은 방석이긴 해요. 이제 치울까 봐요.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으로 기도실에 이름을 적은 것은 그곳에 아브라함의 순종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순종을.
이런 순종을 세상에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따지고 보면 거의 이런 말을 쓰면 안 되는데 하나님과 근접한 사람 아닐까요? 하나님도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우리에게 주셨잖아요. 이삭도 제물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어요.
다시 기도할 때입니다. 습관이 되도록 기도의 횟수와 기도의 시간이 늘어나야 합니다. 다시 기도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해야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가 있어야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교회를 살리는 영혼을 살리는 순종을 할 수 있어요. 교회가 이렇게 잘 서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영혼이 회복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에요.
우리가 구원의 방주가 되어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한 일인 거예요. 하나님 우리 교회가 회복되고 살아나길 바라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하셨고 여기까지 하나님이 오셨어요.
겟세마네의 순종이 있어야 겟세마네의 기도가 있어야 우리 교회가 더 크고 놀랍게 살아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소망이 아니라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는 대학교 때부터 너무 사는 게 형편이 없어서 기도를 했어요. 이런 거죠. 기숙사에 못 자니까 강당에 자야 돼요. 그러면 강당은 늘 새벽 기도를 드린다니까 새벽 기도를 드려야 돼요. 기숙사가 없으니까 교회에서 잤어요. 교회도 맨날 기도하면 되잖아요. 잠자리가 없어서 학교. 요즘은 그 기도실이 없어졌더라고요. 학교 뒷산에 기도실을 가요.
여러분 자다가 사람이 지쳐요. 그럼 기도실은 뭐 하겠어요? 거기서 이상한 짓을 할 일도 없고 기도 외에 제가 목회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어떻든 그런 기도들이 지금까지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다시 여러분 기도의 자리로 오셔야 돼요. 목사님 다리가 아파요. 그래도 오세요. 목사님 내 몸이 너무 힘들어요. 그래도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원하심입니다. 함께 음성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