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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문의 02) 717-3200 배우리 회장
141012 KBS1 북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묘향산1
1. 북한 나선시(라선시)에 관해서 많은 얘길 들었는데요, 오늘부터는 북한의 명산인 묘향산으로 가 보기로 하죠. 묘향산, 이 산은 북한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보는 산이죠? 북한 행정상의 위치로는 어디가 되나요?
한반도 북서부, 묘향산줄기의 중부에 있는 명산. 북한의 5대 명산 중 하나이다.
평안북도 향산군과 구장군, 평안남도 영원군, 자강도 희천시의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 있다.
면적은 375㎢이고, 둘레는 120여 km이며, 84,000봉이라 불린다.
2. 높이는 어느 정도나?
높이 1,909m. 지리산보다 조금 낮다.
묘향산맥의 주봉을 이루며 예로부터 동금강(東金剛)·남지리(南智異)·서구월(西九月)·북묘향(北妙香)이라 하여 우리 나라 4대 명산의 하나로 꼽혔다. 또한, ‘수이장(秀而壯)’이라 하여 산이 빼어나게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지닌 명산으로 알려졌다.
3. 이 산이 평안북도에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느 산줄기에 있는 산이죠?
묘향산줄기
북서북에서 남서남쪽으로 뻗어내리는 요동방향산맥(遼東方向山脈)이며,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도계를 이루고 있다.
묘향산은 묘향산맥의 중앙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데, 북쪽에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청천강 유역이 전개되고,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을 이룬다.
낭림산줄기 남부의 낭림산에서 갈라져 청룡산줄기의 북부 성지봉까지 뻗어 있는 산줄기. 길이 200km,
주요 봉우리는 웅어수산(2,019m), 소백산(2,015m), 향라봉(1,725m), 묘향산(1,909m), 천상대(1,482m), 무동산(1,762m), 용문산(1,180m), 월봉산(1,032m), 백탑산(1,199m), 묵방산(1,012m) 등. 최고봉은 웅어수산이다.
묘향산줄기는 청천강단열대와 대동강단열대 사이에 놓인 시생대의 결정기반이 신제3기에 청천강하곡지대가 침강하면서 융기된 단층산줄기이다.
4. 묘향산이란 이름은 어떻게 해서 나온 이름인지?
묘향산은 기묘한 봉우리와 수정을 드리운 듯한 크고 작은 폭포들, 웅장한 수림과 그 속을 뒤덮은 희귀한 식물과 동물들로 하여 예로부터 명산으로 유명하다.
일명 태백산(太白山-太佰山) 혹은 향산(香山)이라고도 한다.
묘향(妙香)은 불교용어로 기향(奇香)을 말하는데, 이것은 <증일아함경 增一阿含經>에 나오는 말이다.
묘향에는 다문향(多聞香), 계향(戒香), 시향(施香) 3종이 있으며, 이것은 역풍·순풍이 불 때 반대 방향에도 냄새를 풍기는 수묘(殊妙)한 향기를 말한다. 향목, 동청(冬靑) 등 향기로운 나무가 많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묘향산이라 지칭하였다.
태백산에서 ‘백(佰, 白)’자의 유래는 광명(光明), 양명(陽明)을 뜻하는 ‘’에서 나왔다.
이 산은 백두산의 장백산맥 줄기가 남으로 낭림산맥으로 내려와 서남쪽으로 달리는 묘향산맥의 주봉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의 신앙적인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5. 북한에선 이 묘향산이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탄생처라는 이야길 많이 하지 않나요?
선사시대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기 古記>를 인용해 옛날 환인(桓因)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둔 것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인간 세상에 내려가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壇樹) 아래 내려왔다고 하였다.
일연(一然)은 이때의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비정하였다.
이로 볼 때 늦어도 고려 중기 이후 묘향산이 단군 신앙과 결부되어 우리 민족의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행인국(荇人國)이 태백산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바, 고전(古典)에는 이 태백산이 묘향산으로 추정되어 왔다.
서기 전 18년 고구려 동명왕이 장수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어 행인국을 치자 왕은 패하여 석굴에 피하였다가 잡혀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그 석굴을 국진굴(國盡窟)이라 하며, 굴은 보현사 동쪽 4리에 있었다 한다.
6. 이 산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어 왔나요?
1012년(현종 3)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을 침입하였을 때, 강감찬(姜邯贊), 강민첨(姜民瞻)이 배후인 영변에서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2세기말 농민반란이 빈발하던 시기에 조위총(趙位寵)의 잔당으로 불리는 농민들이 1177년 9월 묘향산에 웅거하여 1년 이상 싸웠다.
1216년(고종 3) 거란의 금산(金山), 금시(金始) 두 왕자가 장수 아아(鵝兒)와 걸노(乞奴)를 보내어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여 들어오자 김취려(金就礪)가 이끈 고려 군사들은 거란병을 추격하여 묘향산까지 진격한 바 있다.
이때 거란병들이 보현사를 불태우자 관군은 그들을 참획(斬獲 : 잘라 죽이거나 생으로 잡는 것)하였으며 묘향산 서쪽에 있는 남강(南江)에서 크게 무찔렀다.
7. 묘향산은 임진와란 때 휴정과 유정 스님의 활약 무대이기도 했죠?
조선시대의 묘향산에 대한 역사에서 가장 저명한 것은 휴정(休靜)과 관련하여 조선 승병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1592년(선조 25) 왜적이 침입하자 절에 있던 73세의 고령인 휴정은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승(義僧)이 일어나도록 독려하였다. 휴정은 유정(惟政)을 중심으로 한 금강산의 의승과 처영(處英)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의승이 일어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묘향산을 중심으로 의승을 모아 평양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조로부터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승직이 주어졌으나,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다시 묘향산에 돌아와 입적하였다.
다비(茶毘) 때 나온 그의 사리는 보현사와 안심사 그리고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등지에 모셔졌다.
141019 KBS1 북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묘향산2
1. 묘향산에 관해서 이야길 하고 있는데요, 묘향산 하면 우선 경치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일 텐데요, 그렇게 때문에 사찰도 많이 들어서 있죠?
묘향산은 그 산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찰을 가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묘향산에는 7세기경부터 절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비로봉의 북쪽과 내향산의 깊은 골짜기에만 절들이 건설되었으나 11세기 이후에는 오늘의 보현사구역 내에도 절들이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지난날 묘향산에는 1028년에 세워진 안심사와 1042년에 세워진 보현사구역 안의 절들과 함께 여러 골짜기들에 보현사에 속하는 절들이 많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묘향산에 360여 개의 절들이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기록에 전해지고 있는 절간은 모두 150여 개다.
이 절들엔불상, 불화, 불경목판, 불교의식과 생활에 이용되던 도구,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화유산들은 1915년에 있은 홍수피해와 특히 일제들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하여 적지 않게 파괴 유실되었거나 손상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폭격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이때 20여 동의 건물과 7천여 점의 유물들이 불에 타 없어졌거나 파괴되었다.
전후에 보현사구역 내의 건물들을 비롯한 옛 건축물들이 원상대로 복구되고 수많은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2. 묘향산 이야기를 할 때는 북한에서 단군굴이 빠지지 않고 있는 것 같던데, 명칭이 단군굴이니 물론 단군과 관계가 있는 굴이겠죠?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화생(化生)하였다는 단군굴이 있다.
향산 향로봉의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동굴로 높이 4m, 너비 16m, 길이 12m이다.
이곳에서 곰이 사람으로 변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한 쑥 한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하였다. 범은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으나, 곰은 이를 참아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웅녀는 혼인해 주는 사람이 없어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축원하였더니, 환웅이 잠시 변하여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가 곧 단군이라 한다.
단군굴은 <삼국유사>의 단군 탄생처와 관련되어 단군 숭배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단군이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는 단군대와 과녁으로 쓰였다는 천주대가 있다.
3. 물론 사찰도 많을 거구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에 따르면(사실은 보현사 주지 스님에 따르면), 북한에는 스님이 약 300명에 불교신도가 1만 5천명 있고, 불편 없이 신앙생활을 한단다. 이곳 스님들은 대개 대처승으로 절에서 기거 않고 아랫마을에 살며 출퇴근한단다.
묘향산은 아름다운 자연경치와 함께 귀중한 문화 유적과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묘향산에는 7세기경부터 절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비로봉의 북쪽과 내향산의 깊은 골짜기에만 절들이 건설되었으나 11세기 이후에는 오늘의 보현사구역 내에도 절들이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지난날 묘향산에는 1028년에 세워진 안심사와 1042년에 세워진 보현사구역 안의 절들과 함께 여러 골짜기들에 보현사에 속하는 절들이 많았다. 옛 문헌에는 묘향산에 360여 개의 절들이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기록에 전해지고 있는 절간은 모두 150여 개이다. 이 절들에는 불상, 불교그림, 불경목판, 불교의식과 생활에 이용되던 도구를 비롯하여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매우 많았다.
4. 그 많은 절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보현사겠죠? 이 절은 어떤 절이죠?
임진왜란 때 의승을 일으켰던 휴정과 유정의 원당(院堂)이 있으며, 이 산의 동남쪽 영변군에는 보현사, 윤필암, 금강굴(金剛窟) 등이, 북쪽인 희천군에는 원명사(圓明寺), 광제사(廣濟寺) 등이 있는데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대표적인 사찰이다.
보현사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사비(寺碑)에 의하면 1042년(정종 8) 화엄종의 승려 탐밀(探密)과 굉확(宏廓)에 의하여 절이 창건. 언전(諺傳)에는 행인국이 도읍한 유지라 한다.
이곳에 옛날 보현보살이 머물렀다는 설화에 따라 보현사라 하였다 한다.
그 규모는 고려 말에는 240여 칸에 달하였으며, 1761년(영조 37) 실화로 절이 모두 불타버리자 남파(南坡), 향악(香岳) 두 대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이곳에는 석가여래상을 비롯하여 양대보살상, 16보살상이 있어서, 보현사에는 극락전과 함께 나한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역대 실록을 이 묘향산에 옮겨 보관했다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소장되었던 역대 실록은 일단 정읍 내장산(內藏山)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겨졌다가 더욱 험준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겨졌다. 그 뒤 다시 정읍현을 거쳐 왕의 행재소인 해주로 옮겨졌다. 그러나 실록의 안전 문제가 대두되자 1597년(선조 30) 멀리 묘향산의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610년 영변객사로 옮겼으며, 1603년 강화도로 옮겨 이 전주사고본을 재인쇄하여 새로이 5본(本)의 실록을 만들었다. 1605년 새로운 소장처의 하나로 묘향산이 선정되었으며, 1606년 신인본(新印本)을 두어 사고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뒤 묘향산사고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시 실록의 안전 문제로 무주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일어났으며, 후금(後金)의 위협이 가중되자 1633년 적상산성 내 사고를 마련하고 실록을 옮겨 위난을 피하였다.
6. 묘향산은 다른 어느 사실보다도 신화적인 이야기와 많이 결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 왔던 셈이겠죠?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묘향산의 면모는 고대 신화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묘향산은 일명 태백산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부른다(卽太伯今妙香山).”고 주석해 놓은 데서 확인된다.
이 묘향산은 단군신화가 펼쳐지는 가장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신비스러운 존재로 일컬어져왔다. 곧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천제인 환인의 허락을 받아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묘향산의 정상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산에 있는 신단수 아래서 신시(神市)를 열어 정사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우리의 민족적 기원으로 해석되고 있기도 하다. 고대 신화시대에 있어서의 산은 일반적으로 신이 그 정상에 내려와 깃들여 사는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신화 속에 등장하는 산은 대부분 이러한 의미를 지녔다.
이와 같은 성격의 산들을 일컬어 명산으로 칭하였는데, 이 명산으로 불린 산은 예사의 산들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과 주위의 환경들이 있었다.
예컨대 그 정상에 우뚝 솟아오른 바위가 있어야 하고, 또 정상 주위에 널찍한 바위와 평지, 동굴, 옹달샘 등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음으로 해서 그 산은 영험시되고 외경(畏敬)의 대상이 되었다. 묘향산도 이 명산들 가운데 하나였다.
신화 세계에 있어서는 신격과 인간,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우뚝이 치솟은 산봉우리, 특히 그 정상이 교류장소로 생각되었는데, 환웅이 묘향산 정상에 내렸다는 것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묘향산은 말하자면 신산으로서 신성-영험시되던 신앙적 대상물로서의 상징성을 지녔다 하겠다. 요컨대, 고대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묘향산은 신화 특유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신화적 사유의 대상물이었던 묘향산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그 신화적 사유방식에 변화가 오고 합리적 사유방식이 팽배해짐에 따라 보다 현실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묘향산은 특히 승려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문헌 기록들을 통하여 전해오는데, 다분히 민담적인 차원에서의 형태로도 널리 유포되었던 것 같다.
그 몇 예를 들어보면, 먼저 <동문선>에 있는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 惠陰寺新創記>에는 절을 짓게 된 내력 가운데, 고려 예종 때 호랑이의 피해가 심한 어떤 교통 요지에 그 호랑이의 피해를 없애고 원활한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절을 세우게 되었는바, 그 부역을 맡을 이들로서 자진 동원된 이들이 묘향산 승려들이었다는 것이다.
7. 묘향산은 특히 스님들의 활동이 유달리 컸던 지역이라고 볼 수가 있겠죠?
민간의 부역을 없애고 선행을 한다는 뜻에서 규합된 이들은 처음에 그 일을 제안한 승려가 일부러 묘향산을 찾아가, “옛날 스님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지 않는 희생정신을 발휘하였는데, 누가 나를 따라 저곳에 가서 일을 해보겠는가?” 하고 말하자 모두들 쾌히 응하여 절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묘향산이 특히 나라의 곤란함을 보고 희생정신을 발휘한 승려들의 수도처로 표상되었음을 알 수 있겠거니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권24의 기(記)에도 “비구인 학주(學珠)는 참으로 거짓 없이 성실한 자이다. 그는 일찍이 묘향산 보현사에 거하여 초의(草衣)를 입고 한가히 앉아 홍진을 멀리한 지 오래였다.
보현사는 세속을 떠나서 진리를 탐구하는 집결장소이다.”라고 한 데서 보듯,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의 은거지로 이름났던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이끌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던 휴정과 유정이 바로 이 묘향산에서 수도하던 승려였음을 상기시킨다.
<대동야승> 권36 재조번방지 권2에는 특히 서산대사의 의거에 대한 한시가 전한다. 그 한 구절을 보면, “끼쳐온 은택은 다 같이 입었으니/ 나라생각은 유·불이 다를 소냐/ 묘향산 휴정대사를 보아라/계율의 칼 휘두르는 곳에 장삼이 가볍도다(由來恩澤曾均被 却喜儒禪不異情 請看香山靜老宿 戒刀揮處衲衣輕).”라고 하여 그 충의정신을 높이 기리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지어진 군담소설로 널리 알려진 <임진록 壬辰錄>에도 당시 서산대사의 행적을 “임진란이 일어나고 왜적들이 평양성을 점령하여 임금이 의주로 몽진(蒙塵)을 하자 나라를 위하여 왜적을 물리칠 결심을 한 서산대사는 묘향산에 있는 중 일천오백명의 제자들에게 활쏘기, 창쓰기, 칼쓰기를 가르치고 병서도 대강 가르쳤다. 팔도의 승병을 일으킬 계획인 것이다.”라고 서술하여 묘향산 승려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 밖에도 묘향산과 고승들이 관련된 민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문헌에 전한다. 주로 묘향산에서 어떤 범상치 않은 중을 만났는데, 비록 스스로 남루한 걸객 노릇을 하지만, 형용이며 행동거지가 범속한 중의 그것이 아니어서 이상히 여기고 후일 다시 찾아가 보니,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식의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대동야승> 권23 해동잡록 6의 <소문쇄록 ?聞?錄>과 권13의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에 정희량(鄭希良)과 관련된 일화로 전해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동야승> 권23 해동잡록 6의 <척언 ?言>에서는 유명한 복술가 김륜(金倫)이 젊었을 때 묘향산에서 그 신통력을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묘향산은 또한 고승들이 은거하던 곳 또는 오묘한 이치를 수도하던 곳으로 상징되고 있음을 알겠다. 이 점이 신화시대 사유방식의 일면인 영험과 신비로서의 명산사상과 다소 통하는 면이라고 하겠다.
141026 KBS1 북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묘향산3
1. 경치가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묘향산, 오늘은 묘향산을 찾아본 사람들의 느낌 같은 것을 알아볼까 합니다. 우선, 우리 작품 속에서는 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나요?
묘향산은 북쪽의 절경으로서도 매우 유명하였음이 확인된다. <속동문선> 권16에 전하는 김종직(金宗直)의 <석계징유지리산서 釋戒澄遊智異山序>에서는 “서방의 성인으로는 석가보다 더 높은 이가 없고, 동쪽의 산으로는 두류산[智異山]보다 더 높은 곳이 없다.”고 말한다.
다음에 덧붙여 “우리 나라에서 산을 구경하는 사람도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금강산은 동쪽에 웅장하고, 묘향산은 북쪽에 웅장하고, 구월산은 서쪽에 웅장하지만, 남쪽의 두류산에 오르게 되면…….”이라 하여 산 구경하면 북쪽의 경우 묘향산임을 말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가 김종직의 <유산록>(遊山錄)에도 전하는데, 이 경우에 있어서의 묘향산은 절경으로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유람지로 상징되고 있다.
이렇듯 절경으로 상징된 묘향산은 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과 유적들 및 명승지로 우리의 가사문학 작품 속에서 그 세부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묘향산을 대상으로 하여 그 전체적인 면모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는 <향산별곡>(香山別曲)과 <향산록>(香山錄)을 들 수 있다.
2. 향산별곡과 향산록, 이 두 작품은 작자가 밝혀져 있나요? 그리고 어떤 내용이 실려 있는지...
이 두 가사작품은 아직까지 그 작자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향산별곡>의 경우 백광홍(白光弘)이 지었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먼저 <향산별곡>을 보면 그 문장이 진부하지 않으면서 자유자재로 옮겨지는 붓끝과 화려하고 도도하게 흐르는 문맥이 친밀감을 준다. 전체 330구로 되어 있으며, 묘향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각 사찰의 사적들을 중심으로 노래하고 있다.
작자는 작품의 서두부에서 “어젯밤 비가 개니 사산(四山)의 봄빗치라/ 청풍각 낫잠깨야 춘복(春服)이 거의이니”로 시작하여 유람에 따르는 행장을 갖추었음을 말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그 이름난 경치를 차례로 노래하게 되는데, 특히 묘향산을 잘 그려내고 있는 부분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석경의 막대쇼래 오나이 어대중고/ 묘향산 봄풍경을 너다려 무러보자/ 시절이 삼춘이오 피나니 뫼꼿치라/ 봉봉이 푸른 빗츤 봉래산 금광초오/ 골골이 흐르는 물은 무릉의 낙화로새”라고 읊은 부분이다. 묘향산의 흥에 겨운 경치를 금강산의 한 모습과 무릉도원을 연상하는 가운데 술회하고 있다.
작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긴 시내 진안개에 동문(洞門)을 다시나셔/ 말잡고 도라보니 만학천봉이 구룸빛 뿐이로다.”라고 하며 묘향산 유람을 마치는 담담한 감회를 시적인 여운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향산록>은 조선 후기 작자 미상의 국한문 혼용체의 평민 가사이다.
역시 묘향산의 절경을 노래한 유람 기행가사이다. 작품 서두부에서 우리 나라 산악의 흐름과 묘향산의 지리적 배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천지 개벽하고 산천이 생겨시니/ 오악은 조종이오 사해난 근원이라/ 백두산 일지맥이 동으로 흘러나려/ 묘향산 되여시니 북방의 제일이라/ 일국지 명산이오 제불지 대찰이라.”
그리하여 ‘북방의 제일’임과 ‘일국지 명산’, 그리고 유명한 보현사가 있음으로써 ‘제불지 대찰’임을 밝힌 다음, 기대에 찬 묘향산 구경의 행장과 들뜬 기분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평생의 먹은 마암 향산보쟈 원이더니/ 춘삼월 호시절의 친구벗과 기약하고/ 행장을 급히 차려 낙양성 버들길노/ 청려장 들너집고 북향산 차자가니”
그리하여 산 속 절경들을 하나하나 노래하게 되는데, “계변(溪邊)의 우난 새난 춘흥을 노래하고/ 암상(巖上)의 픠난 꼿츤 원객을 반기난듯”에서의 자연물의 조화로운 공간, “남산의 웃난 꼿츤 춘색을 띄여잇고/ 청계예 맑은 물은 경광(景光)이 야거난듯”에서의 꽃과 시냇가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은 것 등은 그 대표적인 묘사이다.
작자는 그 형색들에 대하여 또한 “선인(仙人)의 조작인디 인간재조 아니로다.”라고 감탄하였으며, “오날날 친견할 줄 엇디하야 아라시리” 하며 감격해 하였다.
그렇듯 절경인 묘향산을 완상(玩賞)하고 떠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작자는 “진토의 걸닌 몸이 세연(世緣)이 미진하야, 두견성 한 소래예 고향생각 절노난다, 명산을 하직하고 고향으로 어셔 가쟈.”고 하여 다시 현실 세계로 그 시선을 돌려 여정을 마치고 있다.
이와 같이, <향산록> 또한 기행가사 특유의 여유있고 담담한 정서의 술회 속에서 봄의 정취와 유람의 즐거움을 묘향산 골골의 정경들을 통하여 차례로 노래하였다.
그 여정에 등장하는 사적(史蹟), 경관(景觀), 인물들은 <향산별곡>과 매우 비슷하며, 그런 의미에서 묘향산이 상징하는 의미 역시 <향산별곡>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3. 근자의 소설 속에서도 묘향산의 경치를 묘사한 것이 있는가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당대의 문제적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하거나 시대적 삶의 애환을 그린 현대소설 가운데도, 묘향산이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른바 대하소설로 알려진 황석영(黃晳暎)의 <장길산 張吉山>이나 박경리(朴景利)의 <토지>(土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장길산>에서는 장길산과 입국(立國)의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구월산에서 첫 모임을 가진 이후 역질과 흉황과 침학과 굶주림의 고통에 놓여 있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각 지역별로 조직을 확산, 정비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묘향산은 그들의 중요한 하나의 거점, 곧 북쪽 산채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장길산의 출생 신분과 내력을 밝혀 가는 가운데, 그가 아버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명근스님을 만나러 가는 가운데 묘향산이 서술되며, 명근스님을 만나 직접 그의 아버지임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에서 명근스님으로부터 “허 잔망스러운 것, 묘향산에 와서 묘향산을 못 보는 놈이로다. 그런 놈이 어찌 무엇을 새로 바꾸겠단 말이냐!”는 나무람을 듣게 되는 상황에서도 묘향산이 드러난다.
4. 그러고 보니 묘향산이 문학적 가치도 있고, 역사적 의미를 크게 지닌 곳인데요. 이와 관련한 박물관도 있겠죠?
역사박물관이 있다.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보현사 건물.
1947년 5월 3일에 개관되었다. 묘향산 보현사 건물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박물관은 보현사의 대웅전과 만세루, 영산전과 수충사, 종각, <팔만대장경> 보존고 등을 포함한 총부지면적이 5만여 ㎡의 대로천박물관이며 국제관광지이다.
박물관은 묘향산 보현사의 대웅전과 만세루, 13층탑과 9층탑,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유적, 유물들에 대한 보존관리 및 연구사업과 이에 대한 해설을 통하여 박물관을 찾는 근로자들에게 북한의 역사와 문화를 더 잘 이해하게 하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보현사 4각9층탑과 만세루, 보현사 8각13층탑, 대웅전이 차례로 서 있다. 이 탑은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고려 초기의 돌탑이다. 턱 진 경사면에 서 있는데 정면절반은 2층으로, 후면절반은 단층으로 된 합각집이다. 만세루와 대웅전 사이 뜨락에 있는 보현사 8각13층탑은 고려 말기의 탑이다.
보현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장중하고도 화려한 건물이다. 대웅전 동쪽에는 관음전이 있는데 조선 초기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관음전 서쪽에 있는 만수각은 조선 말기인 1894년에 당시 왕실을 위해 세웠다고 한다. 관음전 동남쪽에는 1983년에 건설된 <팔만대장경>보존고가 있다.
5. 묘향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비로봉이라 하셨죠? 쉽게 올라갈 수 있는가요?
묘향산 하비로골 어귀에서 백운대를 거쳐 비로봉에 이르는 등산길. 천태폭포, 이선남폭포를 비롯한 이름난 폭포들과 하비로암 등 역사 유적들, 그리고 원만봉, 비로봉 등 고산지대의 절경을 볼 수 있는 명소들이 많다.
이 노정은 묘향산에서 제일 산세가 험준하여 등산자들로 하여금 탐승의 보람을 맛보게 하는 인상깊은 먼 노정이다. 그리고 고산지대의 식물들을 비롯하여 동식물분포가 매우 다양하여 청소년들과 근로자들이 자연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는 좋은 등산 노정이다.
이 노정에서는 천태동의 계곡을 답사한 다음 백운대를 거쳐 비로봉까지 올랐다가 그 길로 되돌아 내려오게 된다. 혹은 비로봉에서 칠성동쪽으로 돌아 내려올 수도 있다. 비로봉에서 하비로암까지 내려온 다음에는 금강굴을 거쳐 비로문 휴식터에 이르게 된다.
6. 이렇게 좋은 묘향산, 북한에서는 묘향산을 갈 때 어떤 교통 기관을 이용할까요?
도로는 평양~향산간 관광도로, 평양~강계간 1급도로와 향산~창성, 향산~석창, 향산~운봉 간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평양~향산 간 관광도로는 노반이 고른 고속도로로서 폭이 넓고 시원하게 열려 있어 교통이 매우 안전하고 편리하다.
철도는 만포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여기에 묘향산역이 설치되어 있다. 묘향산을 가는 사람들은 향산군의 이 역을 주로 이용하는데, 만포선의 중간역이다.
하루에도 묘향산을 찾는 많은 답사단과 참관단, 야영생들 휴식의 한때를 즐겨 찾는 근로자들, 북한을 방문하는 각국 국가수반들과 사람들이 이용한다.
향산군, 운산군, 동창군 등에서 나는 농산물과 통나무, 광석들도 수송한다.
향산읍에서 다시 묘향천을 따라 8km 더 달리면 향산호텔에 이른다. 여기에서 묘향산의 탐승길이 시작된다. 평양~향산 사이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여객열차가, 향산~묘향산 사이에는 관광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141102 KBS1 북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묘향산4
1. 묘향산이 위치한 곳이 향산군이라 하셨죠? 향산군의 군청 소재지는 어디가 되죠?
향산읍. 평북 향산군 1읍 20리의 하나. 군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읍.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영변군 북신현면 월림리를 개편하여 향산군에 신설한 읍. 군 소재지 명칭을 군지명에 따라 명명하는 원칙에 따라 향산읍이라 하였다.
1954년에 향암리 일부가 편입되었고, 1984년에 묘향산구 향산읍으로 되었다.
1985년에 묘향산구가 폐지되면서 다시 향산읍으로 되었다.
오래 전부터 ‘주민지’로 되어 있었으며 묘향산이 명승지로 널리 알려지면서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었다. 특히 만포선이 부설되고 운산, 동창 일대에서 금광이 개발되면서 ‘주민지’가 더욱 확장되었다.
광복 후 군 소재지로 되어 군급 기관들과 학교, 도서관, 문화회관, 병원 등 교육문화보건기관들이 들어서고 향산호텔, 향산상원여관, 향산청천여관, 향산식당을 비롯한 편의 봉사망이 구축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명승지 묘향산과 어울리게 관광시설들과 조선식 건물들이 신축되어 아름다운 관광도시가 되었다.
2. 군청 소재지니 만큼 기관들도 제법 있겠죠?
주요 업체로는 묘향산의료기구공장, 향산종합식료공장, 향산기념품공장, 향산협동농장 등이 있다.
향산호텔
향산호텔은 피라미드를 닮은 15층 건물로 지어졌다.
부속건물로 식당인 5층 건물이 있다. 향산읍에서 5km 거리에 떨어져 있으며, 묘향산의 아래쪽에 있다.
향산호텔은 2010년에 리모델링을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0년에 호텔을 방문하였다.
청병여관
2급호텔이다. 향산읍에서 12km 상거한 향산천 기슭에 위치해 있다. 2층으로 된 한옥식 전통건물로서 침실은 총 42개가 있다. 여관에는 식당, 목욕탕, 상점 등 손님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구전하게 갖추어져 있으며 침실은 한옥식 온돌방으로 아담하게 갖춰져 있어 호텔을 이용하는 손님들에게 더없는 친근감을 주고 있다.
청천여관
2급호텔이다. 청천강 기슭에 위치해 있다. 주변에 수림이 우거진 산줄기가 솟아 있고 드넓은 정원에는 여러 가지 꽃들과 나무들이 아름다운 풍치를 연출하고 있다. 3층으로 된 조선식건물로서 침실은 63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1등실이 2개, 2등실이 4개, 3등실이 57개가 있다. 여관에는 중앙홀을 비롯하여 식당, 오락실, 목욕탕 등 손님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침실에는 민족의 향기가 짙게 풍기는 가구비품이 비치되어 있으며 자기집 안방처럼 다정한 느낌이 들도록 모든 것이 조화롭게 잘 배치되어 있다.
향산혁명사적관
향산읍에 있는 사적관. 1982년 2월에 개관되었다. 연건평 3,100㎡의 2층으로 된 조선식 기와집. 18개 호실로 되어 있다. 사적관 앞에는 1983년 10월에 세운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있다. 혁명사적관에는 향산의 발전과 관계되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김정숙 여사의 사적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향산종합식료공장
향산읍에 있는 기업소. 주로 고급 식료품들과 어린이 식료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특히 이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등을 이용하여 만든 천연의 조미료는 그 독특한 맛으로 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향산종합식료공장은 여러 차례의 설비갱신, 시설확장을 통하여 현재 원료투입으로부터 제품포장에 이르는 모든 생산공정이 흐름식으로 기계화, 자동화되어 있다.
하서닭공장
하서리는 군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1985년에 운산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에 다시 향산군에 귀속되었다.
과수업이 발달하여 군에서도 손꼽힌다. 축산업에서는 주로 닭을 사육하고 있는데, 전문 닭공장이 설치되어 있다.
3. 향산군은 묘향산 자락을 끼고 있는 산지 고을이니 만큼 산과 관련한 지명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소개해 주신다면....
법왕봉
묘향산 상원동 등산길의 종점의 봉우리. 1,388m. 향산군 향암리와 자강도 희천시 부흥리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부처를 법왕이라 한다는 불교교리에 따라 부처를 상징하여 법왕봉이라 하였다. 법왕봉은 묘향산에서 가장 높은 비로봉(1,909m)에서 갈라져 향산읍 부근의 청천강 기슭까지 뻗은 산줄기에 솟아 있으며 동쪽으로는 오선봉(1,365m), 서쪽으로는 관음봉과 잇닿아 있다. 산마루 일대는 암석이 거의 드러나 있다. 특히 절벽을 이룬 산마루의 남쪽에는 기암괴석들이 줄지어 있어 이곳을 묘향산의 만물상으로 일러온다.
법왕봉 마루에는 나무가 적으나 그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다.
법왕봉의 남쪽 경사면에는 상원동(상원골)로 불리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에는 인호대를 비롯한 기암들과 천신폭포, 용연폭포, 산주폭포를 비롯하여 묘향산에서 이름난 폭포들, 옛 건물인 상원암-능인암이 있다.
전망이 좋은 이 봉우리에 오르면 영변의 약산동대를 감돌아 흐르는 구룡강이 굽어보이며 서쪽으로는 민족형식으로 아담하게 건설된 향산읍이 내려다보인다.
멀리로는 운산, 동창 일대의 높고 낮은 산발들이 안겨오고 북쪽으로는 멀리 부챗살처럼 뻗은 낭림산줄기의 험산준령이 아득히 펼쳐져 있으며 가까이로는 공업도시 희천시가 보인다. 법왕봉은 묘향산에서 이름난 탐승지로 되어 있으며 상원동 입구에서 법왕봉까지는 6.3km, 상원암에서 법왕봉까지는 3km이다.
형제봉
묘향산 내향산지구 나무재고개 서남쪽에 있는 1,230m의 봉우리.
향산군 북신현리 동남쪽 구장군 상초리와의 경계에 솟아 있다. 모양이 똑같은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마주서 있다. 묘향산줄기의 주요 봉우리의 하나. 산세가 매우 험준하며 곳곳에 벼랑들과 바위들이 드러나 있다.
돛대봉
묘향산 내향산지구에 있는 봉우리. 1,120m.
칠성동 골 안을 따라 올라가다가 오른쪽에 배의 돛대처럼 뾰족하게 솟았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뻗은 묘향산의 산봉우리들을 뱃전으로 보고 보현사지구를 배의 바닥으로 하여 하나의 배 모양으로 본다면 이 봉우리가 배의 돛대 위치에 있다 하여 돛대봉이라 하였다.
두릉봉
향산군 임흥리 동남쪽 향산읍과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 두리둥실하게 생겼다.
각시바위(보현바위)
묘향산 내향산지구 탐밀봉 중턱에 있는 바위. 여자가 치마를 두르고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앉아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보현보살이 앉아 있는 듯하다 하여 보현바위라고도 한다.
거북바위
묘향산 내향산지구 향산천 상류 기슭의 바위. 거북처럼 생겼는데, 옛날 서해바다에서 살던 300살 난 거북이가 묘향산 경치를 보러 왔다가 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돌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신계골 묘향산샘물
향산읍 신계골에 있는 샘터. 향산읍에 이르기 전 신계골 안의 야산 밑에서 솟는 물맛이 좋은 샘물이다. 신계골묘향산샘물은 옛날부터 이 지방주민들에 의하여 소중히 이용되어 왔으며 2000년 4월에는 조선의학과학원의 전문과학일꾼들에 의하여 현대적으로 조사분석되었다.
작은연막골
향산읍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1219년 거란군이 묘향산으로 침입해 왔을 때 고려군사들이 이용하던 경비용 신호막이 있었다.
망적골
향산읍 동쪽 향암리와의 접경에 있는 골짜기. 골 안 막장 높이 솟은 벼랑바위에 군사들의 감시초소가 있었다. 현재 사과나무밭이 조성되어 있다.
영감굴(令監窟)
묘향산 내향산지구 향산천 건너편의 자연동굴. 불교적 관념에서 사자 영감이 묘향산의 불교를 지킨다 하여 영감굴이라 하였다. 굴 안 벽에 사자그림이 있다.
사자굴
묘향산 내향산지구에 있는 자연동굴. 굴 안 벽면에 불교적 관념에서 묘향산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자할미라는 암사자가 그려져 있다.
처녀굴 / 할미굴
묘향산 내향산지구에 있는 자연동굴. 내향산지구 어귀에서 10리 정도 상거한 산기슭에 있는 자그마한 자연동굴이다. 전설에 의하면 향미라는 처녀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굴에서 살면서 무예를 익혔단다. 처녀굴 또는 할머니와 함께 와서 살았다 하여 할미굴이라고도 한다.
4. 고개나 마을 이름들 중에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솔고개
향산읍의 동쪽에 있는 고개. 구장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성황봉 기슭의 통솔나무가 우거진 둔덕에 고갯길이 나 있다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나무재고개
향산군 향암리. 향산군 향암리의 남쪽 나무재골 막바지에 있는 고개. 구장군 백령으로 넘어가는 길이 나 있다. 옛날 탐밀이라는 중이 처음으로 묘향산으로 올 때 이 고개를 넘으며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을 외웠다 하여 나무재고개로 불렀다고 한다. 남무현이라고도 한다.
세우개고개
향산군 노현리의 동북쪽 향산읍으로 넘어가는 고개. 가파롭고 험한 영길이어서 고갯길이 곧바로 서 있는 듯하다.
닥밭고개
향산군 관하리의 동쪽 양지마을에서 향산읍과 임흥리로 넘어가는 고개. 닥나무가 자라고 있다. 옛날 개평방 소재지로 넘어가는 기본 고갯길이 있었다.
바깥사자목 / 외사자목
묘향산 내향산지구 입구에 있는 좁은 길목. 옛날 묘향산에서 하늘나라 8선녀의 맏이인 유선이와 묘향산의 나무꾼 총각이 옥황상제가 보내 준 하늘소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던 중 묘향산에 침입한 한 쌍의 사자와 격투하여 승리했는데 암사자를 물리친 곳을 암사자목, 숫사자를 물리친 이곳을 숫사자목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암사자목보다 바깥쪽에 있어 바깥사자목 또는 외사자목이라고도 한다.
동켠마을
향산읍의 동쪽에 있던 마을. 아래배사터로 가는 길 옆에 위치해 있었다.
지난날 동기와집 몇 채가 널려 있던 마을이었는데, 현재 조선식 살림집이 늘어선 큰 거리로 전변되었다.
웃배사
향산읍의 서쪽 조산천 기슭에 있는 마을. 운산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에 위치해 있다. 읍지구의 위쪽에 나루터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웃배사라 하였다. 1935년에 원림다리가 건설되면서 나루터가 없어졌다.
태향리
향산읍 영역에 있던 폐리. 본래 영변군 북신현면의 지역으로서 콩을 많이 심고 향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태향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동제를 실시하면서 북신현면의 하행동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5. 북한에는 김일성 동상, 김정일 동상 등이 많은 걸로 아는데, 이 향산군에도 그런 동상이 있겠죠?
향산읍 주석 동상 세운 로익화
향산읍에는 1983에 세운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로익화라고 한 사람이 세운 것이다.
그는 평남 남포시 와우도구역 지산동에서 출생하였다. 1955년에 평양미술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여 1961년에 학부과정까지 마쳤다. 그후 조선미술가동맹 조각창작단에 배치되였고 중앙미술창작사를 거쳐 현재 만수대창작사 조각창작단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기념비조각분야에서 가장 뛰여난 조각가로 세계에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대기념비조각창작에서 특출한 성과를 이룩한 공로있는 조각가이다.
그가 창작한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1967년 건립)에서 선두에 있는 주석상, 장연군, 원산시, 강계시에 세운 김일성 주석의 동상(1970), ‘만수대 대기념비’에서 중심에 조각한 주석의 동상(1972), 신포시(1973), 희천시(1977), 대안중기계 련합기업소(1978), 향산읍(1983), 보천보(1986)에 있는 주석의 동상, 청봉숙영지에 있는 항일혁명 투쟁시기의 주석의 동상(1976), ‘삼지연 대기념비’의 중심에 있는 주석의 동상, 인민 대학습당에 있는 주석의 대리석상(1980), 만수대 의사당에 있는 주석의 대리석상(1984) 그리고 김일성 주석 석고상(1967), 김정일 지도자 석고상(1977, 1호상), 김정일 지도자 석고상(1988, 2호상) 등은 조각가로서의 그의 영예로운 창작활동과 뛰어난 재능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그는 대기념비 건립사업에서 이룩한 특출한 공로로 하여 1974년에 공훈예술가, 1979년에 인민예술가 칭호를 그리고 1972년에 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김일성상 계관인이며 제6~10기에 이르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다. 이밖에 국가미술전람회에도 적지 않은 작품들을 출품하였다. 조각 ‘고난의 행군’(1961), ‘안중근’(1966), ‘만풍년을 안아 오신 어버이 수령님’(1978), ‘노는 순간도 멈출 수 없다’(1979), ‘불굴의 신념’(1985), ‘장군님의 품’(1986), ‘끝까지 지키리라’(1990) 등이 그 대표작이다. 1990년에 진행한 2인전람회에도 많은 작품들을 내놓았다.
현재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집행위원, 문예총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조형 예술협회 민족미술 위원회 집행위원회 위원이다.
6. 남북 통일이 된다고 하면 남한 사람들도 묘향산을 가 볼 사람이 많을 텐데요. 묘향산을 가면 어디어디를 둘러보는 것이 좋을까요?
묘향산 만폭동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묘향산 만폭동등산길 향로봉 남쪽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폭포가 연달아 있어 만폭동으로 불린다. 만폭동은 상원동과 함께 묘향산 절경 가운데서 으뜸가는 곳이다. 특히 폭포의 경치로 하여 더욱 유명하다.
만폭동에는 서곡폭포, 무릉폭포, 은선폭포, 유선폭포, 비선폭포, 구층폭포, 은하폭포 등 서로 다른 모양의 폭포들과 팔담을 비롯한 수많은 푸른 담소들 그리고 주위의 경치와 어울려 하나의 황홀한 절경을 이루고 있는 만폭대, 장수바위, 비선대를 비롯한 전망이 좋은 기암들이 있다.
만폭동의 7개의 폭포 가운데서 가장 큰 구층폭포의 높이는 99m이다. 이 폭포들은 중생대로부터 신생대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거쳐 지각의 복잡한 구조운동과 암석의 침식, 풍화작용으로 생긴 것이다.
물이 골짜기와 절벽들을 따라 흐르므로 폭포는 각기 다른 모양을 이루고 있다. 폭포수는 화강암지대를 흐르므로 더욱 깨끗하고 상쾌한 감을 준다. 만폭동 등산 노정은 입구에서 구층폭포를 거쳐 단군굴까지 오르는 길과 화장암을 거쳐 내려오는 내리막길이 따로 설정되어 있다.
이 등산 노정은 먼 길이 아니지만 가파른 벼랑길을 돌아 올라야 하며 폭포를 보는 재미로 하여 비선폭포 혹은 구층폭포에 이르면 한낮이 된다.
묘향산 소나무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1980년 1월 국가자연보호연맹에 의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소나무는 묘향산의 상원암 등산 노정을 따라 3km 정도 올라가서 있는 상원암 마당에서 자란다. 소나무 옆에는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가 있고 주변에는 천고밀림이 우거져 있다.
묘향산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토양은 화강암지대에 생긴 산림갈색토양이고 기계적 조성은 사양토이며 땅 누기가 충분하고 거름기가 많은 편이다. 이 지대의 연평균기온은 6℃ 정도이고 연평균강수량은 1,300mm 이상이다. 현재 묘향산 소나무는 높이 15m, 뿌리목 둘레 3.82m 가슴높이 둘레 3.07m, 수관 직경 12m이다. 줄기는 비교적 매끈하고 불그스름한 색을 띠므로 적송이라고도 한다
하비로 묘향산 샘물
향산군 묘향산 하비로에 있는 샘터.
이 샘물은 묘향산 하비로골 안 산중턱의 옛날 광산굴 안에서 나오는 좋은 물이다. 이 샘물의 발견 연대는 잘 알 수 없으나 오랜 옛날부터 이 지방주민들에 의하여 널리 이용되어 왔다. 근년에 여러 차례에 걸쳐 국가적인 산천수 탐사사업이 진행되었으며 2000년 4월에는 조선의학과학원의 전문과학 일꾼들에 의하여 현대적으로 조사 분석되었다. 이 샘물은 수소이온농도(pH)가 7.1이고 유리탄산 31.6mg/ℓ로서 물맛이 좋고 시원하다.
주요 이온성분들 가운데서 기본은 유산이온(47.18mg당량%), 수소탄산이온(37.54mg당량%)과 칼슘이온(66.45mg당량%), 마그네슘이온(26.58mg당량%)으로서 수질분류학상 유산, 수소탄산-칼슘, 마그네슘천에 속한다. 광물질총량이 206.32mg/ ℓ로서 소화기에는 그리 좋지 않으나 건강 지표값 35, Mg/ Camg 당량비 0.4이다.
심장혈 질환에 예방 효과가 있는 좋은 물이다.
유선다리(遊仙~)
묘향산 만폭동 등산길 유선폭포 위쪽에 가로질러 놓여 있는 줄다리. 길이 30m, 높이 20m로서 묘향산지구에 가설된 줄다리 중 가장 높고 길다.
·유물 손실
묘향산의 문화유산들은 1915년에 있은 홍수피해와 특히 일제들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하여 적지 않게 파괴 유실되었거나 손상되었다. 특히 6·25전쟁시기 폭격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이때 20여 동의 건물과 7천여 점의 유물들이 불에 타 없어졌거나 파괴되었다. 전후에 보현사구역 내의 건물들을 비롯한 옛 건축물들이 원상대로 복구되고 수많은 유물들이 보존되었다.
현재 묘향산에는 보현사를 비롯하여 보현사에 속하는 암자들인 상원암, 능인암, 불영대, 보윤암, 화장암, 금강암, 하비로암 등 30여 개의 옛 건물(절건물 29개)들과 여러 개의 탑, <팔만대장경>목판활자를 비롯한 유적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산세가 기묘하고 수려한 묘향산에는 외적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우리 선조들의 애국적인 투쟁이야기도 많이 깃들어 있다. 13세기 초 압록강을 넘어 서부 벌방지대의 여러 고을을 강점하고 날강도 행위를 감행하던 외적들은 고려군의 타격을 받자 영변과 묘향산에 기어들었다.
이때 고려군의 후군사령관이었던 김취려와 광유, 영린 등 아홉 장수의 지휘밑에 고려 군대와 선조들은 영변의 약산에서 적들의 우두머리었던 아아를 비롯하여 760여 명의 적을 소멸하였다. 약산에서 큰 타격을 받은 적패잔병들은 묘향산에 기어들어 보현사에 불을 지르고 귀중한 문화재들을 파괴 약탈하였다. 적을 추격해 온 고려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적장 지노를 비롯한 2,400여 명의 적을 살상포로하고 살아남아 도망치던 1,000여 명의 침략군을 청천강에 몰아넣어 익사시켰다. 이밖에 임진왜란시기 왜군들을 대항하여 싸운 서산대사를 비롯한 중들의 애국적인 투쟁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오래 전부터 조선침략을 준비해오던 왜군들은 1592년 4월 근 2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침입하였다. 부산에 상륙한 적들은 5월에 서울을 강점하였고 6월에는 평양에까지 기어 들었다. 이때 보현사에 있던 서산대사는 73세 고령으로 왜적을 물리치는 싸움에 용약 떨쳐나섰다. 서산대사는 전국의 제자들에게 통문을 띄워 의병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자신도 보현사를 비롯한 평안도지방의 여러 절에 있던 1,500명의 중들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그의 호소에 호응하여 금강산 유점사에 있던 중 사명당은 7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였고 처영은 전라도에서 1,000여 명의 부대를 편성하였다. 서산대사가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1592년 8월에 평양성을 강점한 왜적을 격멸하는 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적을 격멸하였다. 다음해 1월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평양성 해방작전에 참가하여 전투의 승리를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평양성이 해방된 후 서산대사는 중의병대장의 지휘권을 그가 가장 신임하는 제자였던 사명당에게 인계하고 묘향산으로 돌아와 있다가 1604년 원적암에서 85살에 세상을 떠났다.
·향산군
평안북도 동부에 위치해 있는 군. 남쪽은 구장군, 서쪽은 운산군, 북쪽은 자강도 희천시, 동쪽은 평안남도 영원군과 접해 있다. 동서(향암리~석창리) 간의 길이는 39km이고, 남북(상로리~운봉리) 간의 길이는 26km이며, 면적은 482.6㎢로서 도 전체면적의 3.81%를 차지한다. 현재 행정구역은 1읍 20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 소재지는 향산읍이다.
1952년에 평안북도 영변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군을 설립하면서 층암절벽으로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산세, 향기 그윽한 향나무로 아름다운 풍치를 돋구는 묘향산을 끼고 있는 군이라 하여 향산군이라 하였다.
·역사
향산군 지역은 본래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의 지역이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영변군의 태평면(泰平面)·북신현면(北薪峴面)의 전체 리와 남송면(南松面)의 11개 리를 병합하여 평안북도에 향산군을 신설하였는데, 이때 북신현면의 월림리는 향산읍(香山邑)으로, 남송면의 석창리·신창리를 병합하여 석창리(石倉里)로, 남송면 사천리는 사천리(沙川里)로, 남송면의 불무리는 불무리(佛舞里)로, 남송면 수양리는 수양리(水陽里)로, 남송면의 천수리·흥송리를 병합하여 천수리(天水里)로, 남송면의 입석리는 입석리(立石里)로, 남송면의 석흥리는 석흥리(石興里)로, 남송면의 구두리·신흥리를 병합하여 구두리(龜頭里)로, 태평면 운봉리는 운봉리(雲峯里)로, 태평면의 조양리와 약수리를 병합하여 조산리(造山里)로, 태평면 신화리는 신화리(新化里)로, 태평면의 상서리는 상서리(上西里)로, 태평면 관북리는 관북리(舘北里)로, 태평면의 하서리·중서리를 병합하여 하서리(下西里)로, 태평면의 관상리·상흥리를 병합하여 관상리(舘上里)로, 태평면의 관하리·신포리를 병합하여 관하리(舘下里)로, 북신현면의 향초리는 향초리(香草里)로, 북신현면의 임흥리는 임흥리(林興里)로, 북신현면의 덕성리와 상행리를 병합하여 덕성리(德城里)로, 북신현면의 화산리는 화산리(華山里)로, 북신현면의 노하리는 노하리(蘆下里)로, 북신현면의 노현리는 노현리(蘆峴里)로, 북신현면 가좌리는 가좌리(加佐里)로, 북신현면의 용성리와 용응리를 병합하여 용성리(龍城里)로, 북신현면의 향산리는 향암리(香巖里)로, 북신현면 상로리는 사로리로 각각 개편하여 1읍 26리를 관할하였다.<br><br>1954년에 사천리가 수양리에, 향초리가 향암리에, 석흥리가 입석리와 가좌리에, 덕성리가 노현리와 화산리에, 노하리가 노현리와 사로리에 각각 편입되면서 폐지되었고, 입석리 일부가 천수리에, 향암리 일부가 향산읍과 임흥리에 분리 편입되었으며 화산리가 북신현리(北新峴里)로, 사로리가 상로리(上蘆里)로 개칭되었다. 동시에 관상리·관북리를 병합하여 태평리(泰平里)를 신설하였다. 1984년에 향산읍·향암리·북신현리·임흥리를 병합하여 묘향산구(妙香山區)를 신설하였고, 1985년에 묘향산구가 다시 향산군에 소속되면서 폐지되었다. 동시에 향산군의 운봉리·구두리·입석리·조산리·상서리·하서리가 운산군에, 노현리·용성리·상로리·가좌리·천수리·불무리·석창리·수양리가 구장군에 각각 이관되었다.<br><br>1989년에 운산군의 구두리·상서리·하서리가 다시 향산군에 귀속되었으며, 1996년에 운산군의 운봉리·입석리·조산리와 구장군의 노현리·용성리·상로리·가좌리·천수리·수양리·청송리(靑松里)·석창리가 다시 향산군에 귀속되었다. 2003년 현재 행정구역은 1읍(향산읍), 20리(가좌리, 관하리, 구두리, 노현리, 용성리, 임흥리, 입석리, 북신현리, 상로리, 상서리, 석창리, 수양리, 신화리, 운봉리, 조산리, 천수리, 청송리, 태평리, 하서리, 향암리)로 구성되어 있다. 향산군 소재지는 향산읍이다.
평안북도 동부에 위치해 있는 군. 남쪽은 구장군, 서쪽은 운산군, 북쪽은 자강도 희천시, 동쪽은 평안남도 영원군과 접해 있다. 동서(향암리~석창리) 간의 길이는 39km이고, 남북(상로리~운봉리) 간의 길이는 26km이며, 면적은 482.6㎢로서 도 전체면적의 3.81%를 차지한다. 현재 행정구역은 1읍 20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 소재지는 향산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