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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G.I. 윌리암슨, 나용화역, 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 1993.
제 1 장 성경
1장 9조.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 구절의 완전한 의미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 때에는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뿐임),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구절을 통해서 연구하고 알아내야 한다.
p.37.
코넬리우스 반 틸 박사는 우리를 일깨워 말하기를, “성경과 성경을 읽는 사람 사이엔 어떤 사람도 해석자로 끼어들 필요가 전혀 없다.”고 했다. 이 견해는 성직권주의와 반대된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이 견해는 성경의 권위 아래 우리와 함께 있는 말씀 선포를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성직을 수여 받은 자들이, 우리가 성경을 더욱 잘 이해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이같은 개혁주의의 입장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다 이해하기에 쉽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누구든지 통상적인 지능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부터 그가 알 필요가 있는 것들에 대한 핵심 요점을 얻어 낼 수가 있다.”(반틸, Intro. to Systematic Theology, p.140)는 것이다.
(p.38) 물론, 이 교리는 악용될 수도 있다. “교의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외치면서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것 역시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것 역시 교묘한 방법으로 성경의 명료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상 우리 이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포함된 진리를 능히 알아 볼 수 없었다고 하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조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경의 명료성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신조들은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신조’란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를 나타낸 것이다. 즉, 그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동일 진리를 그들이 분명하게 알아보았다는 것을 그 신조로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신조가 성경과 동등하다는 말은 아니다. 신조는 성경의 말씀보다는 언제나 하위에 있어야 한다. 신조는 무오한 것으로 간주될 수가 없다. 무오성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갖고 있는 속성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명백한 진리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았고 그리고 그 진리를 신조 형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신조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들은 대단한 권위를 갖게 된다. 정확히 말해서 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작성된” 경우에는 그 신조는 유용하고 권위가 있다. 그러나 성경이 참된가 아닌가를 알아보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만일 성경이 명료하지 않거나 성경 자체로 해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조를 이같이 작성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성경이 성경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도 신조가 체계적으로 작성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제 3 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3장 6조.
p.64.
한편,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은혜를 어떤 사람들에게만 부여해 주신다는 것과 그들만이 구원받게 되리라고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구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인 구원하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주장은 일관성이 없는 말이다. 그리고 그같은 주장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불충분한 교리를 낳고 만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죄 많은 인간의 욕망이 너무나도 강한 까닭에, 이 진리에 관한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그릇된 주장이 계속 반복되어 왔다.
이에 대한 두드러진 실례는 북미의 연합 장로 교회에서 일어난 신조 수정에서 찾을 수 있다. 1858년으로부터 1925년에 이르기까지 연합 장로 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리(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를 주장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자신의 은혜로우시고 자원하시는 행위로 말미암아,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 안에서 택함을 입은 일정 수의 사람들을 대신함으로써, 그들의 참되고 합당한 법적 보증인이 되셨으며, 그러한 보증인으로서, 그들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셨고, 율법이 그들에 대하여 요구한 모든 것들을 충족시키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위해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선언하는 바이다.”
그러나 1925년에 연합 장로 교회는 그 선언을 수정하였다(그것은 하(p.65)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자신의 은혜로우시고 자원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다는 것과, 죄인을 위한 대속으로서의 그의 죽음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화목 제물이었고,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만족시킬 만한 것이었으며, 용서와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과, 그리고 이 속죄는, 세상의 죄를 위해 되어진 것이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만 효과가 있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양자간에는 분명히 차이점들이 있다.
(1) 전자는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후자는 그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이었다고 하고 있다.
(2) 전자는 그가 어떤 사람들의 형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후자는 그가 모든 사람들의 형벌을 받았다고 하고 있다.
(3) 전자는 그가 성취하신 사역에 의하여 그가 대표했던 자들을 위해 영원한 구속을 이루어 놓으셨다고 말하고 있으나, 후자는 구속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단지 그가 마련해 놓았으며, 이 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묻기를, “어찌하여 모두가 아니라, 몇몇 사람들만이 결국은 실제로 구원을 얻게 되는가?”라고 하게 되면, 그 대답이 전자의 경우는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을 것이나, 후자의 경우는 절망적으로 모순될 것이다. 1858년의 교리가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행동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25년의 교리를 유의하여 볼 것 같으면, 성령의 사역이 성자 하나님의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만이 실제로는 구원받게 된다고 하는 특별한 진술이 첨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p.66)대속물로서” “세상 죄를 위해” 제물로 드려졌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언할 수 없이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소량의 구원하는 은혜(하지만, 구원하지 못하는 은혜임)을 주기 위해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격위 간에 대립되는 불화가 있는 하나님(a God)은 성경이 말하는 참되시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아님에 틀림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성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으나, 성령께서는 몇몇 사람만을 인도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이같은 하나님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아무런 성과도 없는 보편적인 구원하는 은혜를 위해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완악함과 어두움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제 5 장 섭리
5장 2-7조.
p.86.
신앙고백서 「제 7장 2-7」은, 본장의 1에 진술된 교리에서 사람들이 끌어낸 그릇된 추론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유의 완전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2) 그 주권으로 말미암아 제 2 원인들의 활동이 부인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3) 하나님은, 자신은 아무 죄악도 행하지 않으시면서도 인간의 타락을 명하셨다는 점과
(4) 하나님의 주권은 죄에 참여함이 없이(구원받은 자와 버림 받은 자 모두에게 있어서) 인간의 마음의 내면적인 활동들에까지 미친다는 점 등이다.
제 6 장 인간의 타락, 죄, 형벌
6장 1-2조.
p.92.
“인간의 타락은 창조만큼 강조될 필요가 있다”(코넬리우스 반 틸). 반틸의 이 말은, 신정통주의 신학이 널리 득세하고 있는 까닭에 특별히 오늘날 참으로 더욱 귀한 말씀인 것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구“합리주의”가 영적으로 퇴락함으로써 수십년 전 유럽에서 생겨났다.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왕좌에 (p.93)올려놓고, 성경을 그것에 예속시켰다. 칼 바르트(신정통주의 신학의 주창자임. 그래서 그 신학은 “바르트주의”라고도 불리움)가 구합리주의의 공허함을 힘차게 반박하면서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창조”, “타락”, 그리고 “선택”에 대해서 말하면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술어까지 재생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교회에 정통 신앙을 되찾게 해 줄 선지자로 알고 환호하여 맞아들였다.
그러나 사실은 바르트(그리고 그를 곧 추종한 다른 사람들)가 인간 이성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 아래로 대치시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단지 인간 이성의 최고성을 믿는 구형(舊形)의 악을 신형의 동일한 악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예컨대 신정통주의는 타락의 교리를 확언하였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시간에 지상의 어떤 장소에서 금지된 과일(실재하는 과일)을 먹은 역사적인 실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했다. 그 신학은 타락의 교리가 “참되다”는 것을 확언했으나, 그 신학에 의해 의미된 것은 그 타락 안에 비역사적 또는 상징적, 또는 신화적)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이솝의 우화들이 “참된”것처럼 타락의 교리도 “참되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말한다. “창조와 타락은 역사 배후에 있다.”
제 7 장 하나님의 언약
7장 4-6조.
p.114.
신앙 고백서의 이 항이 증거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되는 전형적인 그릇된 견해를 우리는 현대 세대론주의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세대론주의는 오늘날 많은 교단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심지어는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을 준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대론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교리, 육체 부활등 많은 신앙의 근본 문제들을 일반적으로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대부분의 세대론주의자들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신봉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심에 있어, 역사상 여러 다른 세대에서, 전적으로 성질이 다른 독특한(심지어는 상반되는) 원리들을 사용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는 점에서는, 세대론주의자들이 신앙 고백서와 분명히 정반대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심에 있어서 각기 다른 목적과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세대론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세대론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언약들을 말한다. 《스코필드 관주 성경》은 에덴 언약,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팔레스틴 언약, 다윗 언약, 그리고 신약을 말한다. 이에 의하면 역사는 여러 세대들-무죄 시대, 양심 시대, 인본 정치 시대, 약속 시대, 율법 시대, 은혜 시대, 왕국 시대-로 나누이(p.115)며,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들을 베푸시는 방법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갑’이라는 세대에서의 하나님의 구원하는 방법이 ‘을’의 경우에는, 본질적인 점에서마저 같지 않을 만큼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세대론주의와 이와 유사한 모든 그릇된 견해들에 반해아여, 우리의 신앙고백서는, 타락 이래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다르신 바 하나(유한한)의 은혜 언약의 절대적 단일성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약의 집행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세대주의 견해에서의 소위 “진리의 요소”란 언약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취소와 혁신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성장과 진보에 의한 변화였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세대에서의 언약의 단일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각종 “세대”가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1)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 곧바로, 한 구속자에 의한 구원의 계획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인류에게 주셨다(창3:15). 이때에 또한 그는 인간의 죄악된 수치는 대속물의 생명을 희생시킴으로만 가리워질 수 있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계시해 주셨다(창3;21, 4:1-8).
(2) 그 후로 계속해서 하나님은 그의 구속 계획의 범위와 웅대함을 노아에게 더욱 충분하게 계시하셨다9창9:8-17, 25-27). 그러나 이미 계시되었던 것을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었다(창8:20-22).
(3) 아브라함 시대에는 (창17:7이하, 22:18등) 더 많은 것이 계시되었다. 한 구속자에 대한 약속이 더욱 확실해지고 한정되었다. 하나님의 계획의 웅대함이 더욱 명백하게 알려졌다. 그리고 할례의 표호에 의하여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됨으로 해서 분명한 유형조직을 갖게 되었다.
(4) 그리고 나서 모세를 통하여 은혜 언약의 내용이 더욱 자세하고 풍부하게 계시되었다. 피의 제사(처음부터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이었던)에 대한 간단한 주제가 성막과 성전에서 행해지는 의식들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윤리적 규(p.116)정들이 도덕법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세대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여 오직 그리스도 한 분안에 있는 구원을 찾게 하셨다. 그리고 속죄하는 피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는 방법이외의 다른 구원의 방법이 전혀 생각된 바가 없었다. 오히려 계시가 많이 주어지면 질수록, 구원을 얻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있을 뿐이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이 더욱 분명하다는 점을 우리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속주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하신 그 구원의 방법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상의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들에 이르게 한다.
(1) 모든 세대에 걸쳐서 이 한 언약을 근거로 하여, 하나의 참 교회가 있을 뿐이다(행7:38, 엡2;11-20, 롬11장 등). 성경이 교회에 대해, 모든 역사를 통하여 계속 존속되는 조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약의 단일성의 당연한 결과이다.
(2) 구약의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예견한 것들이었으므로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 신약의 의식들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모든 세대들에 걸친 언약의 단일성 때문에 사도 바울은 구약과 신약 시대의 의식들에 대한 술어를 섞어서 사용할 수가 있다(고전5:7, 골2;11,12등). 할례와 세례, 그리고 유월절과 성만찬이 동일한 언약의 표호요 인호인 까닭에, 사도는 전자를 후자의 이름으로 부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언약의 본질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면 사도가 이렇게 용어를 섞어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변화가 집행하는 과정에서만 있었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기에 유일한 “차이”란 성장과 더불어 완성에 이르는 그것이었다. 은혜 언약은 변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충분하게 계시되고 온전하게 성취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의 어떠한 시대의 경우에서보다도 훨씬 더 간단한 명료하게 충분하고도 효과적으로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제 8 장 중보자 그리스도
8장 1조.
p.118.
신앙고백서 제 8장 1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1)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일정수의 아담의 후손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구원 받도록 선택하셨다는 점과,
(2) 그는 또한 만세 전에, 이 택함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그가 당하시는 고난에 대한 상급으로 주시기로 약속하셨다는 점과,
(3) 그리스도는 그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며 당하실 것을 약속하였다는 점과
(4) 이 메시야 사역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구주로서 택한 백성의 선지자, 제사장, 왕이 되셔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는 점과,
(5) 그가 또한 만유의 후사와 세상의 심판자가 되셔야 한다는 점등이다.
8장 6-8조
p.141.
우리는 앞에서 언약의 통일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었다(제7장4-6). 우리는 거기에서 구원이 모든 “세대”에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과, 거기에 나타난 변화들이란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성으로 말미암은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었다.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제사들을 그 자체가 효과있는 것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였다(시51:16). 구약의 제사 제도의 본연의 계획은 제사 제도들이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히9:9)는 것을 부분적으로 보여 주어 “거룩하게 된 자를 영원히 온전케 하신”(히10:14) 그 한 제물인 그리스도를 신자들이 고대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율법은 단지 그림자이었다(히10:1). 그러나 그것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역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전에 그가 주시는 유익들을 신자들이 받는 수단이었다.
제 9 장 자유 의지
9장 1-5조.
p.145.
개혁주의 신앙이 “자유 의지”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서는 개혁주의 신앙에 대하여 폭언을 퍼붓고 비난하는 일이 많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예정은 그 주권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으로 말미암아, 모든 참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소멸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까닭에 개혁주의(칼빈주의)신앙을 곧장 거부해 버린다. 그렇지만 반어적으로, 어떠한 다른 신학 체계도 개혁주의 신앙만큼 참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자유 의지이고 무엇이 자유 의지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잘 살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자유 의지”란 인간의 의지가 강요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기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행하도록 자신보다 더 큰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외에 자유를 달리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자유란 능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자유와 능력은 분명히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둘을 혼동함으로 해서 자유의지에 관하여 그릇된 사상이 많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말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실상은 사람들에게 선이나 악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면서도, 선이나 악을 행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명백하게, 그리고 시종일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1) 인간에게는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어느 것이나 자유로이 행할 수 있다.
(2) 그러나, 그가 타락한 상태에 있는 까닭에 오직 악을 행할 능력밖에는 없다(신30:19, 요6:44등). 많은 사람들이 흔히 혼동하는 (p.146)이 요인은 마12:33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의하여 해결된다. 그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치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의지는 인간 영혼 또는 인격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인간의 영혼(자아, 인격)에 의해 결정된다. 의지는 그것의 원천이 되는 도덕적 성격을 떠날 수 없다. 만일 영혼이 완전 부패하여 그것의 지식과 소원이 불완전하고 불건전하다면, 결국 영혼은 악한 것을 항상 행하려 할 것이다. 이렇듯 절대적 자유는 선을 행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경우일지라도 존재한다.
인간은 본래 무죄한 인격을 소유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그가 기뻐하시는 것만을 소원하였다. 그는 그 자신의 소원에 일치하는 것을 행할 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본성이 전혀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소원들은 선할 뿐이었다. 그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절대적 자유와 또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있던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는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과 대동소이하나, 그는 타락한 인간에게는 전혀 없는 완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죄가 들어옴으로 해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자유를 상실하지는 않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던 대로 한번의 범죄가 선한 열매인 의로운 행위만이 나올 수 있었던 순전한 본성을 멸망시키는 데 충분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타락하기 이전에 인간은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나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인간은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는 남아 있었으나, 능력면에서 다만 악을 행할 능력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창6:5, 비교8:21, 고전2:14, 시14편, 53편).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죄 많은 인간은 자기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선을 하나도 행할 수가 없다. 아무도 그리스도에게로 올 수가 없다(요6:44).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본성 때문이다. 외부의 힘이나 압력에 의하여 그가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부패한 성격의 바로 그 “율(p.147)법에 의하여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체에는 팔, 다리 등이 있으나, 그것들을 사용했던 자가 죽어 있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몸을 부활시켜 생명을 얻게 하시는 때에는 다시금 사용되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 그는 그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기꺼이 행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을 다시금 갖게 될 때에만 선을 행할 능력이 있게 되는 것이다(엡2:1이하, 요3:3, 빌2:13).
거듭난 사람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타락 이후의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절대적 소유하고 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거듭난 사람간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이지, 자유면에서의 차이가 아니다. 양자 다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한쪽만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그는 능력이 있다(엡2:10 요일5:18, 겔36:26).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갈6:15). 그러므로 그는 선한 것을 원하며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능력은 아담이 본래 갖고 있었던 것과 같지 않다. 한때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행할 능력이 아직은 없다. 이것은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한다. 그는 의의 길로 일관하여 나간다(요일3:9이하). 죄가 더 이상 이전처럼 그 안에서 이길 수 없다(요일3:3, 엡5:9, 롬6:14). 그러나 죄가 그와 함께 있다(롬7:21). 이렇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자들이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본질적으로 완전히 변화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완성품들”이 아니다. 그들은 “원리면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언젠가는 “속속들이”완전하게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일이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 그들 안에서 일하시어, 그 자신의 선하신 뜻을 더욱 더 많이 행하며 행하게 하신다.
점차적으로 그들 안에서 행하시는 그의 일이 성취되어, 그들은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가서도, 인간은 그가 지금 가지고 (p.148)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자유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차이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정도에 있으며, 자유에 있지 않다. 그는 그때가 되면 옳은 것만을 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그때에 그의 본성이 완전히 거룩해지고 전적으로 모든 악한 것과는 반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죄의 유혹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추호도 악한 것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저자와 독자가 그날을 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시기를…
제 10 장 유효한 부르심
10장 3조.
p.154.
신앙고백서 제10장 3조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p.155)(1) “말씀의 전도에 의하여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능력이 없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점과,
(2) 그러한 사람들도 택함 받을 수 있다는 점과,
(3) 그러한 경우에는 성령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을 따라 역사하신다는 점등이다.
이러한 경우에선 예외이지만, 중생은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은혜의 수단을 이용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영적 무능력 때문 뿐만 아니라 선천적인 무능력으로 인하여 성령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즉, 영아기에 죽거나 아니면 정신으로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비록 거듭나 있다 할지라도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의 구원에 관하여는 다른 많은 주제들에 비하여 그 자료가 심히 빈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애들과 아주 작은 영아들일지라도 하늘 나라의 회원들인 것을 말씀하셨다(눅8:15,16). 다윗도 영아기에 죽는 영아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삼하12:23). 몇 안되는 이같은 말씀들과, 성경에서 끌어낼 수 있는 선하고 필연적인 추론들을 넘어서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에 엄격한 제한이 가해져 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이 제한을 세심하게 간취하고 있는 것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 고백서는 그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지, 또는 적을 지에 대해서 억측하려 하지 않고 다만 “택함을 받은 영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의 전도에 의하여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없는 다른 모든 택함을 받은 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생각건대 이같은 사람들은 그 수효가 아주 적든지, 아니면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가장 줄여서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미국 장로 교회에 의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첨부되고 오늘날 연합 장로교회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는, 소위 “선언문”은 아주 보증이 없는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칼빈주의가 가끔 엄격하고 무서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과 전적 무능력교(p.156)리를 듣고서 소름끼침을 느낀다. 알미니안주의의 구원 교리(구원은 만인이 자기가 원하면 받을 수가 있고,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 실제로 받게 된다.)가 칼빈주의의 구원 교리(인간은 무능력하기 때문에 어떤 수의 사람들에게만 확실하게 주어진다. 즉, 택함 받은 자들의 경우에만 구원은 확실하게 주어진다.) 보다 더 좋아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칼빈주의가 더 은혜롭고, 반대 견해가 더 잔인하다. 왜냐하면 반대 견해인 알미니안주의는 약하고 무력한 자들에게는 구원을 부인하고, 강하고 능력있는 자들에게만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아기에 죽는 영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단”할 수 있겠는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들은 말씀의 의미를 이해조차도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들이, 자기 자신의 의지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구원 얻는데 필요한 것을 자신의 힘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알미니안주의가 아주 달콤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 자신에게는 아무 힘도 없고, 그리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알미니안주의는 아무 위로도 주지 못한다. 칼빈주의가 참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이같은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소망의 근거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점에서 즐거워한다. 그리고 순수한 개혁주의 교리를 근거로 할 때만이 영아기에 죽는 영아들과 그처럼 무력한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쁘게 확언하는 바이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선언문의 경우에서처럼 터무니없게 이 소망을 확대시켜서 그러한 사람들을 전체적으로 다 포함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 선언문의 기본 사상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무력한 사람들을 정죄하면 공정하지 않다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개혁주의 사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신앙 고백서(그리고 성경)는 이같은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고, 그와 함께 그가 처음 범죄했을 때 타락했다(롬5:12).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정죄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정한 처사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영아기에 죽은 영아들이 인간이라고 하면, 그들 또한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들이요, 따라서 유죄하며 정죄받아 마땅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구원받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p.157)께서 그들을 정죄하면 불공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고, 그들이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그들을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기 때문일 뿐이다.
우리는 영아기에 죽은 택함 받은 영아들이 있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또한 영아기에 죽은 성도들의 영아들은 그같은 택함 받은 영아들일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눅18:15,16 삼하12:23, 행2:38,39, 겔16:20,21). 우리는 이 한계를 넘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는 이 이상의 것을 바랄 수는 있으나, 요구할 수는 없다.
제 11 장 칭의
1-2조.
p.177.
그런데 전가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것)순종과 수동적인(죄에 대한 율법의 형벌을 온전히 받으시는 것)순종 때문에 “이중적”이다. 하나님은 그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우리의 죄책을 그의 것으로 간주하셨다. 이 두 가지의 전가(우리의 죄책을 그에게, 그리고 그의 의는 우리에게)가 없었더라면 칭의의 근거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근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보시기에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선언적 행위가 칭의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의 칭의의 유일한 근거가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결코, 우리 자신의 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같은 사상이 바울에 의하여 아주 잘 표현되었다.
3-6조.
p.182.
로마 가톨릭주의의 근본적인 오류들 중의 하나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데 있다. 즉, 법적인 의와 본래적인 의를 혼동하는 데 있다. 로마 교회는 어떤 특정한 시간에(세례 받은 직후, 또는 다른 성례들 중의 하나를 받은 직후) “의로와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견해의 진정한 의미는, 성례를 받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냥 법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내면적으로 거룩하여진다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거룩은 나중에 사소한 죄나 또는 죽을 죄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파괴될 수가 있다. 결국 의로운 상태가 중단될 수가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자주 성례전적인 은혜를 통하여 새롭게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주기적으로 거듭이 된다. 죄로 말미암아 성례전적 은혜가 소멸되고, 성례전적 은혜로 말미암아 또 죄가 소멸되는 것이다. 이것은 심령에 아무런 평강도 주지 못하는 교리이다(참고,롬5:1).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해서 확신감을 결코 가질 수가 없게 된다. 그러기에 사실 카톨릭의 이같은 견해는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성례전적 은혜로 말미암아 내면적인 거룩이 실제로 생겨나게 되었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그 사람이 다시금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인가? 만일 칭의가 완전한 내면적인 거룩을 의미한다면, 더 이상 아무 죄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나무는 온전한 과실을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견해가 안고 있는 이같은 난점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게 되면 곧 제거되고 만다. 의롭다 칭함(칭의)이란, 죄인이 단번(p.183)에 거룩하다고 선언되며, 원죄나 본죄, 과거의 죄나 미래의 죄등 모든 죄책과 형벌을 법적으로 사면 받는 것을 뜻하는 반면에 “성화”란, 죄인이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죄의 모든 오염된 것과 습관을 깨끗이 씻어 냄으로 해서, 죄가 점점 약화(결국은)되고, 본래적인 거룩이 점점 강해져 가지고, 그가 법적으로만 오래도록 의로왔던 것이 마침내는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죽을 때) 것을 뜻한다.
제 17 장 성도의 견인
1-3조.
p.212.
참 신자들은, 바울의 말대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벧전1:5). 우리는 여기서 개혁주의 신앙과, 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주의간에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체계들(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주의간에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체계들(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주의)은 하나님의 능력뿐 아니라 인간의 능력에 의하여서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인간의 능력에 의하여서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인간의 능력에 의하여 구원받은 자들이 타락되지 않게 된다고 똑같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그들의 가르침은 시종일관되어 있다. 처음에는,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죄인 자신이, 그 자신의 힘으로,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주유소 주인과도 같다. 그는 커다란 능력의 창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부어 줄”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차를 몰고 와서 “능력을 채워 주시(p.213)오”라고 말하는 것은 죄인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죄인이 “행동을 취하기”까지는 그 주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무기력한 것이다.” 이 견해가 죄인들에게는 아주 대단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능력까지도 죄인이 마음대로 관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매력있게 들이는 것이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실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출발하자마자 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주의는 비관적인 소식을 알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와 능력에 의하여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즐거웠지만, 곧 “연료가 바닥나 버릴”수도 있고, 바로 그 자유 의지와 능력에 의해서도 “우리의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수 있다는 쓰라린 사실을 알게 된다. 저들의 말대로 하면 결국 죄인이 처음에 행동을 취하기까지에 무력한 그 하나님의 능력은 나중에도 마찬가지로 무력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은 죄인을 위한 모든 소망을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속죄의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개혁주의 신앙은 죄인이 전적으로 무력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끝까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개혁주(p.214)의 신앙은, 죄인들이 흠 없는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분에 찬 저들 죄인들의 감정을 서슴지 않고 거스리게 한 것이다. 그 구원은 결코 실패할 리가 없다. 이는 구원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하면, 결코 실패할 리 없는 구원을 우리가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구원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의 이 견인 교리가 가르치는 바 그 내용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또한 “영원히 저희가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는 것을 보증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참된 신자들의 경우, 구원에 대한 무오한 확실성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견인이 훨씬 용이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되고, 팽팽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에 인생의 난관과 시련을 간단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견인을 위한 싸움에 대한 참된 표현을 시편 기자의 고뇌에 찬 외침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p.215)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시38:9,10,12,16,17). 그것은 끊임없는 투쟁이요, 젖 먹던 때의 힘까지 다 쏟아야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그러나 참 신자인 체하는 자와는 성별되는 참 신자라면, 싸움에서 이기고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이기도 하다. “끝까지 견디는 바로 그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원문대로의 번역-역자 주).
성경에 보면, 참된 신자들은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결코 은혜에서 타락하지는 않지만, 잠시 타락할 수가 있고 또 타락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타락에 대한 성경의 교훈이며, 그에 대한 실례는 노아, 모세, 다윗, 베드로와 같이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에서마저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들은 그들이 참된 신자들이 된 이후에, 잠시동안 모두가 애통한 죄에 빠졌었다.
제 19 장 하나님의 율법
1-2조.
p.233.
(8) 여덟째 계명은 사유 재산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계명은 상속에 의하거나, 아니면 돈 또는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재산 소유만을 인정하고, 그 외에 재산 소유권을 주장하는 모든 종류의 개인적이거나 공적인 노력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성경에는 부가 반드시 나쁘다고 가르치는 교훈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맑스주의를 포함하여 많은 유토피아적인 사상 체계들은 사유 재산이 만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만일 사유 재산이 힘이나 폭력 또는 세금에 의해 몰수하여 근절시켜 버린다고 하면 인간의 불행이 경감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 20 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2-3조.
p.250.
침례 교회들은 세례 방식에 있어 침례만을 주장한다. 침례에 의해 세례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으나, 세례가 오직 침례에 의해서만 베풀어질 것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법으로 양심이 속박 받는다면 비록 (p.251)침례 자체는 그릇되지 않을지라도 그릇된 것이다.
제 21 장 예배와 안식일
1-2조.
p.264,
참된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은 3위, 곧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신다. 이는 제 2 장 3조에서 다룬 하나님의 교리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드려져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A.A.Hodge)가 지적한 대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점을 이론과 실제 양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로마 교회는 가르치기를,
(1) 동정녀 마리아와 다른 성자들과 천사들에게 일종의 종교적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며,
(2) 곤경에 처한 때는 그들에게 간구하여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하고,
(3)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게 중재할 수가 있다고 하며,
(4) 하나님께 성자들의 공로를 근거로 하여(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우리의 구원을 구하고 또 도와 달라고 간구할 수가 있고,
(5)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그림들, 형상들과 유골들은 교회에서 보존하고 또 숭배되어야 한다고 한다(트랜트 종교회의의 신조들을 참고할 것). “로마교회는 우상 숭배의 비난을 면키 위하여 (a) 라트리아, 즉,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는 최고의 종교적 예배와, (b)둘리아 (p.265)즉, 등급에 따라 성자들과 천사들에게 정도에 맞게 드려져야 하는 열등한 종교적 예배를 구별한다(어떤 사람들은 동정녀 마리아게만 드려져야 하는 예배는 하이퍼둘리아로 표기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a) 하나님과, 동정녀와, 또는 성자들과 천사들에게 각각 드려야 하는 직접 예배와,(b) 예배의 대상을 예배자에게 상기시켜 주는 그림이나 형상에 근거하여 드리는 간접 예배를 구별하고 있다.”(The Confession of Faith, p.273).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건전한 논증들이 주어질 수가 있다.
(1)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 신6:13)고 하셨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는 이유로 말미암아 여타의 다른 존재를 예배하는 것이 논박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그만을 경배하라고 명하셨다.
(2) 성경은 또한 사람들과 천사들에 대한 예배를 분명하게 금하고 있다(행14:14,15, 골2:18, 행10:25,26등).
(3) 제 2계명은 그리스도를 나타내거나 또는 우리가 그를 숭배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그림들이나 형상들을 사용하는 것을 명백하게 금하고 있다(참고,《대요리 문답》109).
(4) 성자들은 그들이 하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초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배를 받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하는데 필요한 신적 속성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5)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고 말씀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중보자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그 자체가 벌써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절대적인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해 두는 바이다. 우리가 만일 참된 예배가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 의하여 제한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일단 인정하게 되면-만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단 한가지 요소라도 첨가해도 괜찮은 것으로 일단 허락하게 되면- 라트리아와 둘리아, “직접”예배와 “간접”예배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사곡한 논증들과 구별들을 반박하기가 심히 어렵게 되고 만다. 오늘날 개신교가 성화나 예식들(p.266)과 같은 것에로 점차 되돌아가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참된 예배의 규정하는 원리를 굳게 고수하지 않은데 있다. 그러므로 이 원리, 즉, 명하여진 것은 옳고, 명하여지지 않은 것은 그릇되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끝까지 고수하지 않을 것 같으면 예배의 순수성이 보존될 수가 없는 것이다.
3-4조.
p.270.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는 그와 함께 있었던 자기의 제자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도를 통하여 그를 믿게 될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요17:20).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고려해 볼 때(행2:39), 위대한 뉴잉글래드의 청교됴였던 죠나단 에드워드가 규칙적으로 했던 대로, 우리의 후손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죽은 자를 위해서는 하등에 기도할 이유가 없다. 만일 그들이 신자들이라고 하면,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그들을 위하여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신자들이 아니라고 하면, “큰 구렁이 끼어”있기 때문에(눅16:26) 그들에게 유익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다윗은 그의 아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를 위해서 기도했으나, 그 아이가 죽자, 그는 금식하며 기도하던 것을 중단했다(삼하12장). 그는 말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삼하12:22,23). 그 아이가 죽기 전에는, “여호와여 당신의 뜻이라면 그 아이를 살려 주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 아이가 죽으매, 그 아이를 살려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의 아이는 죽음으로 해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장소와 상태에 처하여졌으며, 그런 까닭에, 위하여 기도할 것이 못되는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자들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4항의 끝맺음하는 말은 참으로 난해하다. 만일 그것이 죽을 때까지 죄와 불신앙 가운데 남아 있었던 사람을 뜻한다고 하면,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하고 한 것을 단지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하(p.2710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것이다. (a) 사망에 이르는 죄란 무엇인가? (b) 어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였을 경우 어떻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가? 만일 집요한 불신앙과 구별되는 그러한 죄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성령 훼방죄일 것임에 틀림없다(마12:31,32). 이것은 복음을 받고서도 죄 사함을 고의적으로, 그리고 악의적으로 거부하는 죄이다(히10:29, 6:6). 진리를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며(히10:26) 하나님께서 미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면 그것은 최후적이요 고칠 수가 없다(살후2:11,12). 바울은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딤후3:9). 우리가 믿기로는 “사망에 이르는 죄”로 마땅히 칭해져야 하는 죄가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틈騁?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진리를 (유다처럼)알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하고, 주의 백성들과 한 무리가 되어 동행하였던 사람이 의도적이고도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하여,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실이 명백한 경우에는, 그러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보다는 저주하여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시69:22-28). 물론, 모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시69:22-28). 물론, 모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요일5:16).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같은 죄가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일이 없다.
5-6조.
p.274.
참된 예배의 또 다른 요소는 “마음에 은혜로 시편들을 노래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신앙 고백서가 현대의 찬송가들이 예배에 사용되는 것을 합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구약의 시편들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로 교회와 개혁주의 교회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성경 시편의 영감된 시와 찬미와 노래들만을 본래 사용했다는 것을 오늘날 흔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러했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시편들만을 예배 때에 노래해야 한다는 확신을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시편의 운율을 보완 작성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문제를 논할 처지가 못된다. 다만 신앙고백서가 이 점에서 옳다는 우리의 확신을 우리는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가 믿기에, 그것이 옳은 것은, 하나님께서 예배 드릴 때 시편의 영감된 노래와 찬미와 시들 대신에, 또는 병행하여 사람들의 영감되지 않은 작곡들을 자기의 교회에게 노래하라고 명하신 일이 전혀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제 22 장 합당한 맹세와 서원
1-4조.
p.287.
장로 교회 목사가 안수 받고 취임하게 되는 때에 맹세를 하는 일이 있다. 즉, 목사로 임직하는 자는, 공적인 맹세를 통해서,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 무오한 법칙임을 확언(p.288)하고, 신앙 고백서와 대소 요리 문답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하며, 그 말씀에 근거하는 줄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과, 그 자신이 그 고백서와 요리 문답 안에 가르쳐져 있는 교리 체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익숙하게 서약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같이 공적인 맹세를 하여 놓고서도, 동시에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거나, 신앙 고백서의 교리들(예컨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육체 부활, 선택 교리 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거짓 맹세하는 것이 일반화된 관례가 됨으로 해서, 더구나 그것도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그렇게 됨으로 해서 교회들의 영적 상태가 형편없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맹세는 맹세하는 자에게 참된 신실성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게 된다. 그는 “자기가 진리라고 완전히 확신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공언하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맹세를 해놓고 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것임을 후에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그같은 맹세는 신실하게 되어졌었고, 맹세한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아니면, 적어도 그릇되지 않다고)믿었으며 또한 그가 맹세한 대로 행할 결심을 굳혔기 때문에 그 맹세가 구속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맹세란 약속한바 그 내용이 선하고 정당하여야만,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해야만 구속력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하는 것은 죄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따라서, 죄를 범할 것을 맹세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가 없으며, 또한 그것을 이행할 의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엄숙하게 맹세하여 약속한 것이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때에 그가 제일 먼저 할 것은 그러한 약속을 한 것에 대하여 용서를 빌고, 그리고는 그 맹세를 파기하는 것이다(마14:2-12).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같은 맹세를 한 것이 잘못이다. 그러한 맹세가 죄되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그것을 이행하는 것은 이중으로 그릇된 것이 된다. 그렇지만, 그릇된 것과 단순히 고통스러운 (p.289)것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죄가 되지 않는 것을 맹세하게 된 때에는 자신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시15:4)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같이 엄숙한 행위의 책임성에 유의하여 자기가 행할 능력이 있거나, 하기로 결심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에 대해서도 맹세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고난과 환란이 수반된다 할지라도, 죄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어긋나지 않는 경우에는 거부할 수가 없다(겔17:19, 수9:19).
5-7조.
p.292.
우리는 비성경적인 것은 무엇이나 서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행23:12, 삿11:30이하). 이같은 서원들에 대한 실례들을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자유주의 교회들과, 심지어는 근본주의 교회들에서조차 찾아볼 수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모든 사제들에게 독신생활의 서원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19:11)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12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이같은 독신 생활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가 가르치셨다. 그리고 아무튼 성경은 교회의 직원들을 포함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러한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남자는 자기 아내를 두라.”(고전7:2)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독신생활의 짐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에는, “혼인하라”(7:9)는 것이 규칙이다. 그리고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것은 예외 규정이 아니라, 일반적인 규칙인 것이다(딤전4:1,3). 궁핍 생활에 대한 서원은 모든 사유 재산의 포기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의 가르침에 모순이 된다(행5:4). 순종에 대한 서원의 경우는, “너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8)고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에 대한 직접적인 위반이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오직 하나님만이 신자의 주이시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이 요구하시거나 인정하시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서원하거나 약속하는 것은 죄인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개신교도들 가운데서도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형태의 이같은 죄가 흔히 행하여지고 있다. 일례로, 사람들을 자극하여, 흔히 심리적인 감정의 유도에 의하여 얼떨결에 순간적으로, 서약 카드에 서명케 하는 일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p.293)슬픈 것은, 흔히 어린이들이 희생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 서원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비록 서원한 바가 그 자체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것일지라도-희생물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서원이, 맹세처럼,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한해서만 올바르게 행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a) 그같이 엄숙한 행위의 책임성을 충분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b) 그같은 서원이 지킬 능력과 결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린이가 서약 카드에 서명하거나, 또는 서원을 하게 되는 경우, 이같은 필요 조건들이 전혀 충족될 것 같지가 않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고, 또 죄를 범하게 하는 어른들의 경우 현저히 죄가 되지만, 어린이들의 경우 또한 죄가 되는 것이다. 이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죄가 되기 때문이다(롬14:23). 그러나 이것은 어린이들이 그들의 부모들의 언약적 서원에 의하여 매이게 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내용의 말이 아니다. 신자들의 자녀들은 언약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들은 부모들의 서원에 의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일들에 있어서 매이게 된다. 그러나 부모라고 해서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일들에 있어서 매이게 된다. 그러나 부모라고 해서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어떤 것에 자녀를 영구적으로 매이게 할 수는 없다(마4:10). 하지만 자녀들을 권하여 그들이 아직은 자력으로 서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서원하게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제 24 장 결혼과 이혼
1-3조.
p.298.
아무튼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게 되면 필시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는 교회의 권징이 분명히 요구되는 것이다.
제 25 장 교회
1-2조.
p.305.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떤 특정의 교파나 단체에 결코 완전하게 나타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어떤 교파나 단체도 하나님의 무형 교회 자체가 지니고 있는 것과 동일한 분계선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교회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즉,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신자들이요, 그것도 참 신자들뿐인 교회를 실현시키려는 노력)결국 실현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목표가 실현(p.306)되는 때라야 만이 우리의 눈에 보이게 될 그러한 의미로는 그 교회가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6조.
p.31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을 때 제일 먼저 충돌을 빚은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로마 교황의 주장이었다. 영국 교회의 종교의 형식으로서 참 개혁주의 종교를 정립할 분명한 목적으로 영국 국회에 의하여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만 해도, 왕이나 여왕이 교회의 최고의 머리로 불리울 위험성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사건들로 인하여 교황만이 유일한 적그리스도(즉,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정통 장로 교회에 의하여 주장된바, 신앙 고백서의 이 항에 대한 개역이 본래의 진술에 비하여 한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임을 자처하는 자의 주장은 비성경적이요, 사실상 아무런 보증도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욕(p.314)되게 하는 권리 침해인 것이다.”......
(p.316)교황 무오 교리(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말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우리의 신앙 고백서가 작성되고 나서 오랜 후에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로마 교회의 교리적 선언은 이전 것보다 더욱 적그리스도적(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교리들처럼)이고 불법적(비성경적)이다.
제 26 장 성도의 교통
1-3조.
p.321.
역사적으로 재산 소유권등을 포함하여, 모든 물건을 공동 소유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많은 시도가 있었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로, “믿은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행2:44)라고 되어 있는 사도행전의 유명한 구절을 내세운다. 이 구절의 말씀에 관해서는, 세 가지로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첫째로, 이 관례가 신자들에게 규범적인 것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명령되었다고 하는 아무런 말이 없다. 둘째로, 사유 재산권이 사도들에 의하여 인정되었다고 하는 증거가 있다(행5:4). 그리고 끝으로,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이 시도는 사도 교회에서마저도 만족스럽게 성취되지 않았다(행6:1이하).
제 27 장 성례
1조.
p.324.
성례는 “은혜 언약에 대한 거룩한 표호요 인호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로, “할례의 표”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었다(롬4:11). (1) 표호란, 어떤 것을 알려지게 하는 수단이다. 모세의 지팡이는 그것이 던져졌을 때 뱀이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출4:1-5).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와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표호이었다(마24:29,30,34). 아브라함의 할례로 말미암아 “무할례시에 그가 가졌던 믿음으로 된 의”가 나타나게 되었다(롬4:11). 성례가 표호라고 하는 말은 그것이 선언하여 드러낸다는 것을 뜻한다. 표호란 표호 자체에 관한 선언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어떤 것의 표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성례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은혜를 알려지게 하고 선언하여 드러내기 때문에 표호인 것이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구원하는 은혜가 그것을 선언하여 드러내는 성례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로마 교회는 세례로 말미암아 거듭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표호와 그것에 의하여 상징되는 것을 혼동하고 있는 까닭이다.) (2)인호란, 그것이 붙혀지거나 첨부되어지는 것을 확증해 주는 어떤 것이다. 에스터3:12에는 조서(공문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아하수에로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 대학 졸업생은 직인이 찍혀 있는 졸업장을 받는다. 인호는 받는 자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지, 주는 자에게 유익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직인이 그 졸업장 받는 자를 식자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고, 학교 당국이 그를 그렇게 간주한다고 단지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하수에로왕의 메시지의 경우도, 그것이 실제로 왕의 조서이었던 까닭에 인(印)이 없어도 신빙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참으로 그의 것이었다는 것을 왕의 신하들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해 인(印)이 첨부되었던 것이다. 성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례로 말미암아 은혜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은혜가 성례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성례는 은혜를 받은 자인 그 사람에게만 유익이 된다. 이는 신자가 받는 구원이 성례로 말미암아 알려지게 되거나, 또는 공언하여 (p.325)드러나기 때문에 유익되는 것이다. 인호로서의 성례는 신자가 이미 받은 것에 관하여 신자에게 확증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2-5조.
p.329.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여 개혁주의 기독 신자가 성례를 통해서 신적 은혜를 받는 경우보다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더 확신감을 가지고 받게 될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따르면,
(1) 성례는 “교회가 성례를 베풀 때 행하는 것을 행한다고 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의하여 집행되어야 하고,
(2) 성례는 “올바른 마음가짐” 또는 “바른 동기”를 가지고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신적 은혜가 사람들의 불확실한 상태들에 의하여 조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올바른 마음가짐과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올바른 의사를 갖지 않는 유다 같은 사람의 손에서 성례를 그가 받지 않았다는 것을 결코 확신할 수가 없을 것이다(요4:2)......
(p.330)개혁주의 견해 역시, 합법적으로 안수를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 외에는 아무도 성례를 집행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견해는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를 사제주의적으로나 미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싶겠지만, 개혁주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다. 신앙 고백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이같은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하나님의 비밀 맡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4:1).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히5:4). 사도 시대의 교회들에서 교회 직원들 외의 다른 사람들이 성례를 집행했다는 증거가 성경에는 전혀 없다.
(2) 성례가 자동식 은혜의 용기와 운반 기계가 아니고, 회심의 도구도 아니라는 사실이 이 견해를 지지해 준다. 복음이 없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을 부르셔서 증거하라고 하셨다. 만일 성례의 경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대로, 원죄를 제거하고 우리의 영혼에 새 생명을 주는 본래적인 능력을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회 있는 대로 성례를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신앙 고백서의 입장은, 성례란 하나님께서 그것에 전혀 의탁함이 없이 부여하시는 그의 은혜의 표호와 인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고수하고 있다. 성례가 없다고 해도 구원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p.331) 끝으로, 교회 역사상 신구약을 망라하여 오직 두 가지의 필수적인 성례가 있을 뿐이라고 신앙 고백서는 가르치고 있다. 즉, 할례와 세례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것들은 영적으로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유월절과 성찬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구약의 규례들인 할례와 유월절은, 신약 시대에 세례와 성찬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새 것이 옛 것에 감추어져 있고, 옛 것이 새 것에 나타나 있다. 피 있는 표호들이 피 없는 두 표호들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의의는 아래의 표가 보여 주는 대로 그대로 남아 있다.
구약과 신약의 규례들에 대해 이같이 동일시한 것을 지지하는 논증은 성례들을 개별적으로 고찰하는 가운데서 제시될 것이나, 여기서는 흔히 간과되고 있는 성경의 사실들에 유의코자 한다. 사도 바울은 사실상 신약의 성례만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구약의 성례의 명칭을 가끔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으나 (고전10:2),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사실상 할례를 받았었다. 또한 골로새 교인들이 사실은 세례를 받았는데도 그들이 할례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골2:11). 그는 유월절을 고린도교인들이 행한 것으로 (p.332)말하고 있으나(고전5:7),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 가운데서 행하여졌던 것은 유월절이 아니라 성찬이었다. 유월절은 우리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던 그 밤에 단번에 성찬이 되었던 것이다(마26:17이하, 눅22:15이하).
제 28 장 세례
1-2조.
p.336.
우리는 여기에서 왜 세례가 누구에게나 개인적으로 단 한번에 걸쳐 집행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다. 또한 세례 의식이 성찬 예식과는 달리, 능동적으로 받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세례가 가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그 사역과 일치한다. 중생은 하나님이 혼자 이루시는 것이다. 죄인은 죽은 상태다. 중생은 죽어 있는 죄인을 살리는 것이다. 죄인이 중생함에 있어서 능동적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중생하는 순간 살아나게 된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회개와 신앙에 있어서는 능동적이다. 그러나 이미 중생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하여 그 안에 회개와 신앙의 씨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그러한 사역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도들도 특별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가 장사지낸 바 된”것이지, 우리 자신이 연합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것이지, 우리의 옛 사람이 자(p.337)신을 십자가에 못박은”것이 아니다. 세례가 마치 그것이 인간에 의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되어진 연합이라기보다는)행하여진 행위의 상징인 것처럼 기술되어 있으나 그것의 참된 의미는 그와는 반대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규례에 대한 침례 교회의 견해에 대한 본원적인 반론을 발견할 수 있다. 침례교 견해에 의하면,
(1) 세례는 성인들에게만 베풀어져야 하는데, 이는 성인들만이 세례가 의미하는 그 행위를 수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2) 세례는 어떤 사람이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그 행위를 의미한다. 침례교 신학자인 스트롱은 말하기를 “세례의 본질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사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연합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3-4조.
p.338.
신앙고백서 제28장 3,4조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1) 침례가 세례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과,
(p.339)(2) 세례에 대한 어떤 특정한 양식도 성경에 명령된 바 없다는 점과
(3)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라는 점등이다.
어떤 기독교 교파는 침례 없이는 세례는 없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침례를 극구 주장한다. 그들은 신약 성경의 헬라어 단어가 “물에 잠근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단어(밥티조)는 침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어가 침례하는 행위를 전적으로 배제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그 단어가 그같은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이 점은 성경 자체로 미루어 보아 쉽게 알 수가 있다.
(1) 고전 10:2에 이스라엘인들이 애굽을 떠나던 때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성경은 이스라엘인들이 물에 잠긴 것이 아니라, 마른 땅으로 바다를 통과한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경우 그 단어(?V티조)가 침례만을 의미할 리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출14:22등)......
(p.341)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특정한 명령들을 항시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환언하면, 사도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그들의 책에 반복하여 기록하지 않으면 그 계명들이 아무 효력이 없는 것처럼 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사도들은 아무 데서도 제 2계명을 명시하여 기록한 일이 없다(롬1:2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아 세례를 명하지 않은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족장 시대의 초기에, 은혜 언약의 표호와 인호를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베풀 것을 명령하셨다(창17:1-14). 더욱이나, 이것이 영원한 필요 조건이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아 세례에 관하여 아무런 계명도 주신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말이 아니다. 침례교파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해서 할례가 폐기되었기 때문에, 이 명령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할례가 그 외양만 바뀐 채, 지금은 “세례”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골2:11,12). 침례교의 주장은, 유아들은 신약의 계명이 없으면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하게 제정해 놓으신 것을 금하는 “신약”의 계명을 침례교인들이 제시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주님께로 데려와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마19:14)고 (p.342)말씀하셨다. 우리의 주장은 이렇다.
(1)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명하여 자기의 자녀들에게 언약의 포호와 인호를 주도록 하셨으며,
(2) 세례는 하나님이 이 명령을 주신 바 그 언약의 포호요 인호이고(갈3:16,17),
(3) 하나님이 그 표호와 인호의 형식을 바꾸었을 뿐 영원한 언약을 바꾼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은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표호와 인호를 주라는 그의 명령을 폐기하신 것이 아니다.
(4) 신약의 증거가 이 입장을 확증해 주고 있다.
신약 성경에는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언약의 표호와 인호를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문자적으로 반복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명령의 지속적인 효력을 지지하는 견해와 일치되는 증거가 신약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 몇 가지 예증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행 2:38, 39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하신 것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표현의 말씀은 신자들에게 주어진 약속 가운데 자녀들이 포함되며 따라서 할례를 받게 된다고 하는 구약의 “언약적 자녀 개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바로 이같은 이유로 세례를 권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약 시대에도 그 개념이 계속되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3) 고전 7:14에서 바울은, 불신자와 결혼함으로 해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교훈을 주고 있다. 분명(p.343)코 고린도에는 이 “멍에”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 신분면에서 감수하게 될 차별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크게 불리함을 느끼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다. 침례교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어린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밖에 있으며, 따라서 세례를 받을 수가 없다. 침례교인들은 신자들의 자녀들과 불신자들의 자녀들 간에 아무런 구속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 하셨다. 환언하면 사도는 신자들의 자녀들과 불신자들과 결혼한 상태에 있는 신자들에게 확신시키기를, 그들의 경우는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세상에서 확신시키기를, 그들의 경우는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분보다 더 크시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녀들은 양친이 다 믿는 자녀들과 같이 거룩하다. 그런데 이 본문의 말씀에 관하여 침례교인들이 완전히 언급을 회피하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설사 “거룩하다”는 용어가 이 자녀들의 경우에 언약의 표호와 인호를 단지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에 이의가 제기된다고 할지라도, 아무튼 그것은 침례교 견해와는 전적으로 불일치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5-7조.
p.346.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에 보면, 세례가 표호와 인호가 되는 바 그 구원하는 은혜를 실제로는 체험하지 못하지만 옳게 집행되는 세례를 사람들이 받을 수가 있다. 시몬은 사도에 의하여 적법하게 세례를 받았었다(행8:13이하). 그렇지만 그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되어 있었다(23절). 그러나 그리스도와 참으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은 불법에 매일 수가 없다(롬6:10,14)......
에서의 경우도 이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할례 받았다. 그렇지만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는 그리스도와 결코 연합될 수 없으리라는 것이 계시되어 있었다(롬9:11-13). 이 경우에 있어서 에서가 할례 받은 것은 부당하였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또한 에서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거나 또는 있을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에 그가 할례 받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다만 신자들의 자녀들이 설사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 또는 연합될 것으로 가정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명하여 그들의 자녀들에게 언약의 그 표호와 인호를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만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세례 의식이 옳게 집행되려고 하면 그것을 받는 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사실상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지 않다. 달리 말하자면 세례의 정당한 집행과 구원하는 은혜의 사역간에는 모순이 있다. 즉, 모든 참 신자들에게 세례를 다 제공해 주지 못하면서도 (눅23:33,43),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제공하는 그러한 명령들을 하나님께서 하셨던 것이다.
세례의 효력을 집행의 순간만으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즉, 세례가 집행되는 그 순간에 그 효력이 반드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해서(p.347)는 안된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세례를 받을 때 당장 그 자리에서 세례의 효력이 결실을 맺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자.
(1) 둘 다 하나님의 계명에 의하여 성례를 받았다.
(2) 에서는 은혜의 표호와 인호는 받았으나 그 은혜는 결코 받지를 못했다.
(3) 야곱이 성례의 효력을 체험한 것은 여러 해가 지나서 그가 회심한 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창25-32장, 특히 32:24-28).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아로 세례를 받았던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의 증거가 아주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전혀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을 흔히 지적한다. 그들은 유아들이 세례를 받는 때에 그같은 유아들에게는 세례가 아무런 구원의 효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오도되어서는 안된다. 세례가 세례 받는 그 순간에 아무 효력도 없다고 하는 말은 효력이 전혀 없다고 하는 말은 아닌 것이다.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능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례에는 그같은 효력은 전혀 없다. 또한 그것은 세례의 목적도 아니다. 세례의 목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연합을 확증하고 증거하는데 있다.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세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그 효력이 증가되며, 그 의식이 집행되는 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그같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때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을 세례가 증거해 준다. 세례의 효과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이 가능케 된다는 데 있지 않고, 이같은 연합이 증거된다는 데 있다. 세례는 할례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같은 효과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아 세례는, 유아 할례처럼 그들이 세례 받은 지 오랜 후 회심하는 때에 커다란 효과를 준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순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1)세례, 그 다음에 유효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됨, 그리고 나서 세례의 효력이 있게 됨. 또는 (2) 유효한 부르심, 그 다음에 세례, 그리고 나서 세례의 효력이 있게 됨. 이상의 두 가지 외에 다른 순(p.348)서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 받기 이전에 세례의 효력을 체험할 수가 없고, 유효한 부르심을 받기 전에 세례의 효력을 체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 29 장 성찬
1조.
p.352.
성찬은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은혜의 수단이 되지 않는다(고전11:27-29).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는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한 자들에게 은혜의 수단인 것이다. 아무도 그가 복음을 듣기 전에는 주님의 몸을 분별할 필요가 없다. 이 필요 조건에 의하여 성찬이 회심시키는 규례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룩하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에게 힘과 확신을 이룩하는 수단인 것이다.
3-4조.
p.358.
“종교적인 명절에 관한 한,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 간에 오늘날 팔레스틴에서 행하여지는 관례에 의하면, 성찬에 사용된 포도주가 발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The New Bible Dictionary, Eerdmans, Grand Rapids, 1962,p.1331). 에더샤임은, “그것이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였다고 하는 주장은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Vol. Ⅱ, p.485) 고린도 교회에서 이 성례가 집행되던 때에 술취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것은 발효된 포도주였음에 틀림없다(고전11:21). 그리고 무교병과 발효된 포도주가 사용되었던 구약 시대 교회의 관례는 이 증거와 일치된다.
그렇지만 무교병과 발효된 포도주가 아니면 성찬 예식이 효력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형편상 유교병이나 포도즙을 불가피하게 사용해야 되는 때가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가 있는 일이다. 이것은 기술적으로 변칙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같은 조건하에서는 성례가 지켜져서는 안된다고 할 수는 없을 줄로 안다. 편의상 유교병과 포도즙을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사용키로 한 결정이 금주 운동의 영향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 결정이 금주 운동의 영향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 결정을 심히 비성경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5-7조.
p.364.
미사는 가톨릭 교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우상 숭배가 미사의 책임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 고백서가 가톨릭 교리를 우상 숭배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제24장 3조).
루터파의 공재교리는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이적적으로 살과 피의 실체로 변화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의 화체 교리와는 다르다. 이로 인하여 그 교리는 심히 그릇된 이단이자 미신이라고까지는 불리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교리 역시 그릇된 견해이다. 루터파 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신체적 또는 물리적 실체가 문자 그대로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또는 밑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해면(스펀지)이 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것은 해면의 실체에 물의 실체가 첨가되어 있는 때에, 외관상으로는 해면만 보(p.365)이지만 물의 실체가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같은 견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사실상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수없이 많은 곳에서 동시에 문자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참 인성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소유할 수 있겠는가?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편재”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편재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빵과 포도주는 살과 피로 보이거나, 만져지거나, 맛이 있거나 냄새가 나지 않는 살과 피로 변화된다고 하는 교리를 가르치는 반면,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참 인성과는 달리, 일정한 크기와 모양을 갖추고서 일정한 장소에 위치해 있지 않다고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16:7,28). 이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의 인성은 이 지구상에 신체적으로는 부재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일정한 파운드의 참 인간의 육신(새로운 성질의 것이기는 하지만) 이, 목격자들의 증거대로 땅에서 올리워 갔던 것이다. 성례에 그리스도께서 신체적으로 임재하고 있다고 하는 루터파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참 인성이 실제적으로 부인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혁주의 견해는 성경과 일치하는 견해를 가르치며, 그것은 감각의 증거와도 직접적으로 상충하지 않는 견해인 것이다. 성경은 감각이 확증하는 바를 가르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성찬 예식에 결코 신체적으로 임재해 계시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영적으로만 임재해 계신다.
8조.
p.367.
신앙 고백서 제 29장 8조 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1) 이 성례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표호는 받으나 그 표호가 의미하는 것은 받지 못한다는 점과,
(2) 이로 말미암아 그러한 자들은 죄를 좌초한다는 점과,
(3)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빙성 있는 신앙 고백을 하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점등이다.
유다는 주님과 더불어 떡은 먹었으나 떡과 더불어 주님은 먹지 못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4,55,58)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례의 떡과 포도주를 받되 영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무지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성례의 외적 요소를 받을 수 있으나” “그 요소가 의미하는 바의 것”은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누구든지 그 외적인 표호와 인호를 받게 되면 반드시 중대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 명백하게 지시되어 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판단)을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9). 사람의 내면적인 마음의 상태에 의하여 그 사람이 성례에서 받는 것(예컨대 은혜 또는 죄)이 결정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성품에 의하여 성례의 본질이 결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언약의 표호와 인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러기에 비록 그것을 죄인들이 받음으로 해서 그들에게 판단(죄)이 임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제 30 장 교회의 권징
1-2조.
p.371.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 안에 정치를 제정하셨다고 하는 사실은 성경(p.372)이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고전12:28,29).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던 때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참고, 마18:17, 요20:23). 이것은 선지자 아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정치이다. 그것은 사도적이요 장로제이다.
교회 내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사도들의 직분으로 말미암아 입헌적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 정치는 사도적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있다(엡2:20). 하나님이 교회 안에 세우신 자들 중에서 사도들이 첫째이다. 사도 시대 동안에는 교회 안에서 최종적이었던 이 권세가 사도들에게서 직접 구현되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14:37). 아무도, 심지어는 다른 사도까지도, 사도의 공적 선언에 대하여 문제 삼을 수가 없었다(벧후3:17). 선지자들의 구약의 증거마저도 사도들의 증거와 관련하여서만이 권세가 있었다(히1:1,2, 눅24:27, 특히 벧전 1:10-12). 사도들이 죽음으로 해서, 이 권세는 성령에 의하여 영감되고 신약에 기록되어 잇는 사도적 진리에 주어졌다. 사도들의 권세는(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사도들의 어떤 후계자들에게 위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도’라고 하는 인물들로부터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옮겨졌다. 신약이 사도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신약만이(전통이나, 다른 “계시들”은 아님) 사도적이기 때문에 신약은 구약(신약이 구약의 완성임)과 더불어 다 같이 기독교 교회의 헌법인 것이다. 이 헌법(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그의 권세를 세우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항구적이고 유일한 최고의 권세이다.
그러나 이 권세의 관리(행정)는 성경에서 “장로”또는 “감독”이라(p.373)고 불리우고 있는 교회 직원들의 손에 의한다. 사도들의 시대에서도 이 점은 사실이었다(행15장). 바울이 말했던 대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한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5;17). 이들은 「성령이 ……감독자를 삼은 교회의 장로들이다.」(행20:17,28). 교회 안에서 합법적인 통치권(다스리는 권세)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성경에 언급된 유일한 인물은 장로 또는 감독이다. 그리고 장로가 감독이요, 감독이 장로이므로, 성경적인 정치 형태는 장로제-즉, 다스리는 장로들의 행정에 의한 정치-임이 분명하다. 사도 시대에 사도들 역시 치리권을 행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3) 장로 정치 형태
(p.375)장로 형태의 교회 정치가 이같은 성경의 원리들에 부합하는 유일한 교회 정치 형태이므로, 그 형태만이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신 것이요, 다른 형태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단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장로 정치를 채택하지 않는 교회들은 다 거짓 교회들로 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또한 장로 정치를 실시하는 모든 교회가 다 참 교회들이라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교회 정치에 관한 한, 장로제가 가장 순수하다.
교회가 정치에 있어서 국가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제25장 6조). 그러므로 여기서는 “열쇠의 권세”에 대하여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다음의 말씀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말씀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모사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이 말씀들이 여러 가지로 해석된 것에 대해서는 하등에 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같은 해석들 간의 차이점들을 다 들추어 여기서 다룰 수도 없다. 다만 다음의 두 극단적인 해석들을 잘 살펴서 다룰 수도 없다. 다만 다음의 두 극단적인 해석들을 잘 살펴서 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두고자 한다. 첫째로, 베드로가 절대적인 권세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피해야 한다. 둘째로, 베드로가 거의, 아니 전혀 아무 권세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피해야 한다. 로마 가톨릭의 견해는 물론 그리스도가 여기서 그의 지상교회 안에서의 최고의 권세를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한 일이 없으며, 그같은 추측은 전혀 근거가 없다. 더욱이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권세가 베드로에게 주어졌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 권세는 그 열쇠 안에 주어져 있었다. 그 권세가 베드로의 수중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그 권세는 열쇠의 권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열쇠 관리권을 주셨다고 결론지을 수가 있다. 예수께서 “볼지어다 ……내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8)라고 말씀하셨다. 마18:17과 요20:23에는 다른 사람들도 베드(p.376)로처럼 동일한 열쇠들을 사용하여 동일한 결과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말씀되어 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의 그릇된 견해의 핵심은 그 권세를 열쇠들에서 ‘베드로’라고 하는 한 사람에게, 그 다음에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근거 없이 양도해 준데 있다. 사실은 천국문을 열고 닫는 권세는 본래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으며, 교회의 모든 제직들(장로들, 감독들)에 의하여 관리된다. 그러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다른 방향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땅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고 닫는 그러한 권세의 관리자들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8:18)고 하셨다. 그러므로 권세를 열쇠에게서 베드로에게 양도하는 오류를 피하려면 그 권세의 모든 관리권을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되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열쇠들이 지상에서 권세있게 관리되게 하셨고, 그 “열쇠”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권징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1:16). 그것이 능력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가 (직역하면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권세 있게 전해지는 때, 그것은 죄인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이같은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게 주신 열쇠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 교회 권징의 집행이 또 하나의 다른 열쇠이다. 그것에 의하여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내어쫓아 버린다(딛3:10). 죄인이 교회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야 한다(마18:17). 그리고 이 권징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집행되는 때에는 그것은 단순한 형식이나 무기력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한, (p.377)그리고 회개할 때까지는 그에게 천국문이 실제로 닫혀지게 되는 그리스도의 권세의 실제적인 집행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충실한 말씀 전파의 열쇠의 의해서만이 천국문이 열리고, 충실한 권징의 열쇠에 의해서만이 천국만이 닫힌다는 뜻은 아니다. 복음이 충실하게 전파되는 때에, 그 복음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하는 자들에는 그 ?음 전파로 말미암아 천국문이 닫히게 되고, 교회의 권징이 충실하게 집행되는 때에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그로 말미암아 천국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고후2:6-8). 그러나 요점은 일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천국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대한 오류이듯이, 이 열쇠들에 아무런 권세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대한 오류라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성례는 천국의 열쇠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에 의하여서는 사람들에게 천국문이 열어지지도 않고 닫혀지지도 않는다. 성례는 그 열쇠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는가 아니면 배척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표호요 인호인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이 두 열쇠들을 함께 결합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이 열쇠들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다(계1:18, 2:5, 3:7,8). 열쇠를 충실하게 사용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지 않고서도 말씀 전파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결코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교회가 아무런 엄격한 권징을 부단하게 시행한다고 할지라도, 충실한 복음 전파가 없이는 그러한 권세를 결코 가질 수가 없다.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또는 권징을 충실하게 시행하지 않게 되면, 천국문을 열고 닫는데 있어서 교회 직원들이 수중에 갖고 있어야 할 열쇠를 상실하는 것이 된다.
제 31 장 대회와 협의회
1-2조.
p.393.
신앙 고백서의 이 부분에서 우리는 심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편에선, “위정자는 말씀과 성례를 집행하는 일이나, 천국 열쇠의 권세를 떠맡아서는 안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다른 편에는 “교회 안에서 통일과 평화가 보존되게 하며, 하나님의 진리가 순수하게 온전하게 보전되게 하고, 모든 불경건한 것들과 이단들이 억제되게 하고 예배와 권징에 있어서 모든 부패한 요소와 악습이 예방되고 개혁되게 하며,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이 정당하게 결정되고 집행되며 준수되도록 명령을 발하는 것은 위정자의 권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이를 위하여 “종교 회의들을 소집하고 거기에 참석하며 무엇이든지 그 회의에서 처리되는 것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처리되도록 주선하는 권한이 위정자에게 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제 30장 1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왕이요 머리”로서 “위정자와는 구별된 교회 임원들의 손에 교회의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정해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31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자신들만으로 그들의 직책에 따라 그들의 교회에서 파견된 다른 적합한 사람들과 더불어 그같은 회의들을 소집할 때에 한해서만 독자적인 행위가 가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직접적으로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같은 난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돌트 회의에서 개정된 《벨직 신앙 고백서》36항에는 위정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그들의 직책은 세속 국가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일을 보(p.394)살펴 모든 우상 숭배와 거짓된 예배를 제거하고 예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모든 개혁주의 장로 교회가 이같이 상충되는 난제를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언급하여 왔던 것이다. 예를 들면 북아메리카의 개혁주의 장로 교회와 같은 몇몇 교회들은 신앙 고백서의 원문을 고치지 않고서 본 주제에 관하여 특별한 선언을 해 놓았다. 개혁주의 장로 교회의 선언과 증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교회의 어떤 권세도 각 기독교인이나 세속적인 위정자들의 손에 있지 않고, 교회의 재판소는 그들 자신의 회합과 휴회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23,4). 이 진술을 신앙고백서와 조화시키기는 상당히 어렵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같은 장엄한 문서의 본문을 수정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부정확하거나 불완전한 것으로 밝히 드러나게 되는 때에는 그것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신앙 고백서 자체가 우리에게 신중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대로 “최고의 재판관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는 다른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이 재판관에 의하여 종교에 관한 모든 논란이 결정되어야 하고 모든 교회 회의의 신조와 고대 교부들의 학설과 사람들의 교훈과 개인의 사상이 검토되어야 하고 모든 교회 회의의 신조와 고대 교부들의 학설과 사람들의 교훈과 개인의 사상이 검토되어야 하며, 그의 판결에 우리는 순복해야 한다.”(제1장 10조)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서 이 부분에 나타나 있는 난제에 대한 유일하고 합당한 해결책은 대부분의 개혁주의 장로 교회들이 채택한 신앙 고백서의 이 부분에 대한 개정판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정통 장로 교회의 것과 같은 개정판에는 모든 애매 모호한 것과 오류가 제거되고 다음과 같은 원리들이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다. (1) 교회의 정치는 국가의 정치와 구별되며 별개이다. (2) 국가의 위정자들은 교회가 하는 일들이 교리 논쟁이나 권징에 관한 것일지라도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간여할 수가 없다.(3) 교회 임원들만이 회의나 협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있으며, 세속 정부는 이에 대해 간여할 수 없다. 우리는 (p.395)이같은 개정판이 훨씬 더 훌륭하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우리가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그것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참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참될 때에 한해서 존귀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앙 고백서가 극히 사소한 것을 빼놓고는 더 이상 수정을 요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 표준 문서가 한 가지 특별한 문제에 있어서 오류를 범한 것이 드러났다고 해서 이 문서의 무결성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이 감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부분의 오류를 들추어 내는 성경의 빛으로 이 신조를 그처럼 주의깊게 조사할 때 나머지 부분은 참되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는 수정되었다. 그리고 참된 장로교인들은 그것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때에는 수정할 수가 있었고 또 그렇게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믿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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