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이원희 교수
수필은 경험을 밑감으로 삼기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쓰는 글이다. 대개의 수필이 과거를 회상하는 회고적 언어인 것은 이 때문이다. 생에 슬픔과 기쁨이 갊아들듯이, 살아왔던 삶을 반추하면 뿌듯함과 부끄러움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바람직한 수필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지게 하고 미래로 전진해야 한다. 그렇다면 회고의 언어가 숫제 뿌듯함으로 채워질 수는 없다. 누구나 실수는 하기에, 누구나 완전한 삶을 살 수 없기에 자랑스러움보다는 용렬하고 반성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반성은 어찌 보면 살면서 먹어야 할 정신적인 밥이 아닌가 한다. 소크라테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반성은 후회가 낳은 자식이다. 후회는 현재 시점이 거울이 되어 지나간 일들을 비춰보는 일일 터, 하여 거울에 어른거리는 것들에서 발견된 얼룩이다. 말과 행동을 뒤져 그 무늬가 상지수로 씻은 듯 말끔하다면야 그 누가 후회의 가슴을 치겠는가. 하지만 생은 그렇지 않다. 타자와 끊임없이 인연을 맺고 부수며, 내가 진짜 나를 속인다. 환경과 양심을 기만하기도 한다. 생각하노라니 참으로 용렬하기 짝이 없었던 나를 발견한다. 하여 후회하고 반성한다.
그렇다면 오해 후회하고 반성하는가? 앞서 현실을 살지게 하기 위해라고 표현했다. 이는 보태기 삶, 즉 추가하려는 욕망이 작동한다. 후반생은 털어내고 탈 소유적 면모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남저지를 쥐고 삶을 둘러봐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이가 되고 싶어서 그런다. 아이는 사회적 관계와 지식이 아닌 직관과 본능에 충실하다. 잘 놀고, 잘 웃고, 잘 까분다. 한마디로 기쁨이다.
바다의 동서에서 슬기 언어가 한결같이 가르치는 게 있다. 동양은 낙(樂)과 유(遊)이고 서양은 기쁨이다. 여기서 기쁨은 쾌락이 아니다. 기쁨은 안에서 차오르는 희열이다. 말초적인 감각의 충족에 그치는 쾌락하고는 질적으로 영판 다르다. 기쁨은 원초적인 본능이다. 니체의 말로 하면, 낙타의 모진 단계를 거쳐 세상을 제 뜻대로 호령하는 사자의 들판을 지나 이제는 고요히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아이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다. 최종적인 도달점인 아이는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수필은 이런 의미에서 작동되어야 하지 않을까? 채울 게 없다고 살아왔던 일들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아이다움을 유지했는가 여부를 따져 보는 일, 이 작업은 바로 후회와 반성 기제로 나온다. 따라서 전반생이 사자였다면 후반생은 아이의 단계로 진입해서 다시 순수를 위해 땀을 흘려야 한다. 진땀은 속죄에서 오는 부끄러움의 표상이다. 노동으로 흘린 그게 아니다. 에덴인 자궁으로 되돌아갈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지점 혹은 그 근처라도 가서 자연에 밀착된 존재인 아이 세계에 머물도록 수필이 채워져야 한다. 태반의 수필이 반성과 참회인 것은 그리해야 할 진짜배기 이유가 바로 아이의 단계로 진입해야 함을 모른다. 큰 것은 보이지 않고 큰 기교는 졸렬하며 큰 맛은 무미다. 바로 이런 질박하고 웅숭깊음으로 전진하는 글쓰기가 바로 수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