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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장
제11장 입성(入城)
[대 지]
一. 예수께서 나귀 타고 입성하심(1-11)
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12-14)
三. 성전을 정결케 하심(15-19)
四. 무화과나무가 마른 데 대한 교훈(20-26)
五. 예수님의 교권 문제(27-33)
[본문강해]
一. 예수께서 나귀 타고 입성하심(1-11)
. 11:1-6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사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벳바게는 감람산 기슭에 있으며 예루살렘과 베다니에서 가까운 동네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면서"너희가 가면 나귀 새끼가 매인 것을 볼 터인데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보내줄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아시고 나귀 임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를 사랑하는 마음과 주께 바치고자 하는 마음을 주어 준비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주를 위하여 무엇이나 바쳐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 받기로 예정된 사람이다.
. 11:7-10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원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 옷을 벗어서 편 것은 예수님이 왕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 것이다. 옷을 벗어 펴는 것은 왕으로 대접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왕하9:13참조). 다른 사람들은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라고 찬송하였다. 이 나무 가지는 종려나무 가지이며(요12:13) 승리를 상징한다.
호산나 "원컨대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장엄한 모습인가! 많은 사람이 몰려 나와 예수님을 앞뒤에서 호위하며 호산나를 부르고, 예수님은 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이 날은 고난 주간의 첫째 날이며, 니산월 8일(일요일)이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에게는 선지자와 왕과 제사장의 세 직분이 있다. 예수께서 일찍부터 진리를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신 것은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신 것이요, 나귀 타고 입성하신 것은 왕의 직분을 행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우주의 왕이시오 영적 왕이시며 진리의 왕이시다.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가?
첫째,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짐승이요, 말은 전쟁을 상징하는 짐승이다. 요한계시록19:11 이하에 예수님이 말을 타고 나온 것은 복음 전쟁을 상징하는 것이다.
둘째,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21:5에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겸손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멍에를 메시고 순종하셨다. 이사야53:2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다. 나귀는 짐승 중 아무 보잘것없는 짐승이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예수님이 겸손한 왕이요 진실한 왕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세째,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가랴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했다. 이 성경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찬송한 것이다. 이 때는 예수께서 공적으로 널리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 반면에 적그리스도 운동도 극도에 달하여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계획하였다. 마가복음10:32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고 하였으니 적기독 운동도 극도에 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세상 끝에는 곡식도 익고 포도도 익어서 둘 다 거두게 된다(계14:14-20 참조). 곡식은 성도를 가리키고 포도는 악한 자들을 가리킨다. 말세에는 성도의 믿음이 성숙해지므로 열매가 맺히고 영이 자라나는 반면에, 악의 세력도 포도가 익는 것처럼 점점 극에 달하여 적기독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말세가 된 이 때에 우리는 많은 신앙의 열매를 맺혀 잘 익은 곡식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첫날에는 성전을 둘러보시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베다니로 가셔서 주무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km쯤 떨어진 동네이며 그곳에 예수님의 숙소가 있었다.
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12-14)
. 11:12-14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흑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고난 주간의 둘째 날에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시장하신지라 예수께서 시장하셔서 열매를 얻을까 하여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가서 보신즉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 여기에 신령한 교훈이 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나라(유대교)를 가리킨다(렘24:2-6 참조).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만 무성한 것처럼 당시 유대교가 외부적인 의식만 굉장하였고, 내적인 열매가 없었으므로 유대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무화과의 열매를 거둘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화과의 수확기가 되었다면 그 열매를 다른 사람이 따내었으므로 무화과 열매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무화과를 딸 때가 아님에도 열매가 없는 것을 보면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교훈이거도 하다. 잎사귀만 무성한 것처럼 기독교가 양적으로 크게 부흥되고, 외부적으로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의식과 제도 면이 발전되어도 신앙의 열매가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교회가 양적으로 늘어나고 외부적으로는 발전하더라도 내적 열매인 생명의 역사가 없으면 반드시 예수님이 심판하신다. 예수님은 교회에 대하여 언제나 잎사귀와 같은 외부적인 면보다 내적(영적) 열매를 요구하고 계신다. 교회의 교인이 많아지고, 세력이 커지고, 여러 가지 사업을 잘하는 것은 잎사귀가 무성하게 된 것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잎사귀 뿐 아니라 충실한 열매를 많이 맺혀야 한다.
그 열매는 다음과 같다.
① 도덕적인 열매이다. 도덕적인 열매는 의로움과 진실함이 다(엡5:9). 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다(갈5:22-23). 이러한 것들은 모두 도덕적인 열매이다.
② 지적인 열매이다. 골로새서3:10에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하였다. 신령한 지혜와 지식은 귀한 열매이다.
어떤 성도가 성경대로 바로 가르치는 교회에 출석하여 오랫동안귀한 진리를 많이 배웠으나 자신이 그 진리대로 만들어진 것이 없어 오히려 신신학주의로 나아가는 대회의 신자보다도 도덕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느껴 현실주의로 나가는 교회에 나가 보니 그곳에서는 또 성경 말씀에 어긋난 것이 너무 많아 도저히 신앙에 맞지 않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교회에서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것을 분별한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는 부족하나 신령한눈과 신령한 귀가 열린 것을 알 수 있다.
바른 진리를 배우는 동안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귀가 열리고, 눈이 터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도덕적인 면은 신신학자만 못하다고 해도 지혜와 지식 면에서는 그 사람들보다 앞서 있다. 도덕적인 면만 보면 신신학자 중에도 성자가 맏이 있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는 신신학자이지만 세계적으로 성자의 칭호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이 떠지고 영적 귀가 열려서 진리를 옳게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지적인 열매이다.
③ 능력의 열매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영권이 커지는 열매가 맺혀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고자 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려고 갈망하며 힘썼다(빌3:10).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큰 교회들이 늘어나고 큰 교단을 이루어 외부적인 잎은 무성하지만 과연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를 얼마나 맺혔는가 반성해 보아야 할 때이다. 만일 주님이 요구하시는 열매가 없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三. 성전을 정결케 하심(15-19)
. 11: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이 두 번 있었다. 예수님이 성역(聖役) 초기에 한 번 하셨고(요2:13-16), 본문의 것은 성역 말기 고난 주간에 하신 두 번째 일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왕이 될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궁으로 가시지 않고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이는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말라기3:1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성전으로 들어 가셨으므로 예수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이 실망을 하였다. 그리하여 며칠 후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때에 그들도 찬성을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보니 돈 바꾸는 사람과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데나리온"이라는 돈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가이사의 화상이 있는 이 돈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하여 성전에서 사용하는 "세겔"이라는 돈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바치도록 가르쳤다. 그리하여 성전에서 데나리온을 세겔로 바꾸는 일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돈을 바꾸어주면서 얼마씩의 환전료를 받아 그 돈이 종교 지도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렇게 돈을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다치게 하여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을 바치도록 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 그 이면에는 타락한 종교가들이 돈을 벌어 탐욕을 채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시장에서 사다가 하나님께 바치면 좋지 않고 어려서부터 구별하여 잘 기른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기른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성전에서 팔면서 시장보다 비싸게 쏟아 그 이득이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일반 백성들은 이러한 내막을 알지 못하고 종교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양이나 소나 자기가 기른 것 중에서 흠 없는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된다고 했다(레5:15-18; 6:6 참조).
소나 양 중에서 십일조를 바칠 때에도 막대기를 갖다 놓고 소나 양들이 그 아래로 한 마리씩 통과하게 하여 열 번째마다 한 마리씩 취하여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였다(레27:32-3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에 제사를 드릴 때에는 자기가 먹이는 것 중에서 흠 없는 것을 바치는 것이 성경적이다. 또 멀리서 오는 사람은 양을 가지고 올 수 없으므로 돈을 가지고 와서 시장에서 흠 없는 것을 사다가 바쳐도 된다(신14:24-26).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시장에서 사온 것은 더럽다고 하여 그들이 직접 구별하여 깨끗하게 잘 기른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의식을 좀더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식주의의 전산이다. 또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보기 위한 탐욕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또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한 일을 교권으로서 강행하였으므로 교권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의식면으로는 깨끗하고 거룩한 모습을 갖추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고 생명이 없었다. 이와 같이 종교가 의식주의와 탐욕주의와 교권주의로 기울어지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돈벌이의 장소로 이용하고, 백성들에게서 돈을 빼앗는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았으므로 예수님이 정결케 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유대교가 의식주의와 탐욕주의와 교권주의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것을 심판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외모를 깨끗하게 하고, 제도를 엄중하게 한다고 해서 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되며(요4:24 참조),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섬겨야 하고, 신령한(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인들에게 돈을 많이 내게 하려고 여러 가지 수단을 맏이 쓰고 있다. 예를 들면 돈만 많이 내면 주일을 잘 지키지 않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집사, 장로의 직분을 주는 일이다. 지금 교회 안에 이러한 장로, 집사가 많이 있다.
. 11: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 내용은 4복음 중 마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기사이다. 그들이 의식과 제도를 복잡하게 만들어 거기에 맞추느라고 성전 기구를 가지고 소란하게 다니므로 예수님이 권위로 그것을 금하신 것이다.
.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은 두 곳의 성경을 들어서 그들을 책망하시며 교훈 하셨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56:7을 인용한 말씀으로 성전은 누구나 와서 기도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이것은 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누구나 믿기만 하면 만민이 부담 없이 나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뜻이다. 교회는 믿음 안에서 만민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며 그들이 부담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을 한다든지 당파를 만드는 것은 악한 일이다. 또 교회 지도자들이 축복 받는다는 미명하에 교인들을 속여 연보를 강요하고 그것으로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 것은 강도와 같은 행위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교회가 있다면 교회가 아니라 강도의 굴혈이며, 예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강도의 굴혈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이용하여 그들의 탐욕을 채우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 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교권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책망과 교훈을 듣고 오히려 마음을 강퍅케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그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기며 좋아하였으므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다.
. 11:19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밖으로 나가더라
그날이 저물었으므로 예수님은 성밖으로 나가 베다니에서 주무셨다.
四. 무화과나무가 마른데 대한 교훈(20-26)
. 11:20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아침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본즉 전날 예수님이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 있었다. 마태복음21 : 19에는 저주하신 즉시로 말랐다고 했다. 아가복음의 것이 더 자세하다. 그 이튿날 마른 것도 즉시로 말랐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저주받고 그 이튿날 죽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저주받아 즉시 죽었다고 할 수 있다. 뿌리부터 마른 것은 그 나무가 아주 소망이 없게 된 것을 가리킨다.
. 11:21-22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께서 능력 있는 신앙과 능력 있는 기도에 대하여 교훈 해 주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화과나무에게 되어진 일분만 아니라 산이 들려 바다에 던지우는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릇된 신비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무엇이나 믿고 구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의 자른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한 말이다. 이 말씀의 바른 뜻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다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바른 믿음이요, 말씀을 믿으면 그 말씀이 만능으로 성취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그 저 믿사오니 하는 것은 미신이요 맹신이다.
.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사람의 마음대로 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한 것을 가리킨다. 산이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에 그 말씀을 순종하여 산이 옮겨질 것을 믿고 명령하는 것은 다 이루어진다.
.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 말씀대로 기도하며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을 때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도가 의심하거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받지 못한다(약4:1-3).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도한 것은 반드시 그 말씀대로 성취될 것이므로 이미 받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치 아이 없던 집에 아이가 잉태되었으면 그 집은 이미 아이 있는 집이 된 것과 같다.
. 11:25-26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엔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없음)
이 말씀은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를 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그 사람과 막히게 되고 사람과 막히면 하나님과도 막힌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무슨 허물이 있으면 용서해 주고 기도해야 하나님과 교통이 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를 해야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
五. 예수님의 교권문제(27-33)
. 11:27-28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 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결케 하신 권세에 대하여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두 가지로 질문하였다. 첫째, 그것이 무슨 권세이냐 하는 것이다. 둘째, 그 권세를 누가 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인정하여 준 권세만 참된 권세로 인정했다. 산헤드린 공의회에서는 예수님에게 그러한 권세를 준 일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이렇게 질문하였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이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재판권이 있는 유대 나라 최고 의결 기관이었다. 이공의회는 한 지파에서 6명씩 72명으로 구성되어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죽게 하며, 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아 들어오실 때에 많은 사람이 "호산나 다원의 자손이여"하고 찬송한 일들을 보고 들었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 권세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는가를 따져 물은 것이다.
. 11: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예수께서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먼저 너희가 나의 묻는 말에 대답하면 나도 너희에게 대답하여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 11: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 내게 대답하라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신 것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게 되면 예수님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것을 당연히 알게 되며 또한 예수님의 권세는 ① 영적 왕의 권세이며 ② 진리의 권세이며 ③ 생명을 살리는 권세이며 ④ 성전을 정결케 하는 권세요 ⑤ 죄를 심판하는 권세인 것도 알게 될 것이다.
. 11:31-33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 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그 사람들이 사실(아는)대로 대답하려면 하늘로서 왔다고 대답해야 한다. 이는 온 백성이 다 그렇게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례 요한이 헤롯왕을 면책하다가 순교 당한 다음이므로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서 온 것이 확실히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왔다고 말하면 요한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였으므로 그 말씀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하기 때문이요, 만일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모든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에 백성들이 자기들을 돌로 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인 답변이었다. 실제로 알지 못해서가 아니고 안다고 하면 결과가 자기들에게 불리하므로 치밀하게 계산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펀을 택하여 답변한 것이다. 정치적인 답변은 언제나 양심을 버리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대답하는 것이다. 누구나 선한 양심을 버리고 자기 유익을 따라가는 것은 신앙과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다. 종교인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세상 정치가들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외식이다.
세상 정치가들이야 자기들 입장이 곤란하면 아는 것도 모른다고 대답하고, 또 자기에게 유리하면 모르는 것도 안다고 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하여 옳은 것은 옳다 하여 따라가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여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 성도가 양심을 쓰지 아니하면 믿음이 파선된다(딤전1:19 참조). 무슨 일에 있어서나 목적과 방편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한다.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맞더라도 방편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업는다면 그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하여도 결국 마귀의 일을 해 준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과 방편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해야한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일이 되어 지도록 하여야 한다. 따라서 무슨 일이나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분별하여 옳은 일만 행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양심을 버리고, 자기들의 유리한 쪽을 택하여 거짓말로 답변하였으므로 예수님이"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말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그들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셨다.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지 않으시고, 이르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모른다고 하시면 예수님도 거짓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예수님의 권세의 출처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지 않은 것은 그들이 양심을 버리고, 욕심만 따라가므로 진리를 말하여 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진리를 말해주는 것은 마치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결과가 되어 그들이 진리를 물고 찢어 손해만 줄 것이므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