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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이 하나도 없는 계유정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세조와 그 책사 한명회, 세조는 평생 피부병에 시달리다가 죽고, 한명회는 죽으면 한줌도 안되는 권력을 탐하다가 죽어 자기 육신도 간수하지 못하고 부관참시 당한 것을 보면 인과응보라는 옛 선인들이 말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그 후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1. 개요
조선 전기의 권신이자 외척이며 정치가다. 수양대군으로부터 "나의 장량이로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조선 초기 세조 ~ 성종 시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호(號)는 그 유명한 압구정의 압구(狎鷗).
예종의 첫번째 왕비인 장순왕후와 성종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의 아버지가 되어 두 왕의 장인이라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손자 한경침(韓景琛)은 성종의 서녀인 공신옹주(恭愼翁主)와 혼인했다.
2. 생애
대표적인 칠삭둥이 인물. 7개월만에 태어났으며 배 위에 별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태어났을 때는 칠삭둥이답게 사람의 형체마저 갖추지 못해 부모는 아이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서 꿈틀대기에 차마 버리지는 못해서 유모로 내정되어 있던 여종이 몰래 이불을 둘둘 말아 따뜻한 방에 뒀다. 놀랍게도 아기는 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 사람의 모양새를 다 갖춘 뒤에야 비로소 유모는 집안 어른들에게 한명회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보통 이렇게 조산하여 태어난 아기들은 일찍 죽거나 건강이 좋지 못한데 기적적으로 건강하게 컸다고 한다.
굉장한 명문가 출신으로, 7대조 한강(韓康), 6대조 한사기(韓謝奇), 5대조 한악(韓渥), 고조 할아버지 한공의(韓公義), 증조 할아버지 한수(韓脩) 등은 <고려사> 열전에도 입전된 고려 말기의 정치적 권력이 강성한 유력자였다. 특히 한수는 고려 공민왕 대의 정치가이며 대학자였고 학문 실력 및 과거 급제 연령으로 보면 목은 이색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색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인지도가 낮은 편. 거기에 고려 말 권문세족이자 대신이었던 경사만(慶斯萬), 권적(權適), 원경(元卿)의 외손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한상질은 명나라에 가서 조선 국호를 허락받은 개국공신이며 한상질의 동생, 즉 한명회의 종조부인 한상경도 역시 개국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대부분의 사극에서 초년기엔 별 볼일 없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실은 당대 손에 꼽는 금수저 출신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40살까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곳곳의 명산을 둘러보기 위해 전국을 유람하느라 해가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등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였고 아무래도 소위 말하는 공부머리와 잔머리가 따로 노는 인물이었는지 번번이 낙방했다. 결국 문종 2년인 1452년 음서로 관직에 들어가 개성에 있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 살던 집인 경덕궁의 관리직을 맡았다. 이 때 개성에 와서 벼슬하는 서울 출신 사람들끼리 송도계(松都係)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는데 한명회가 이 자리에서 가입을 희망했으나 말단직에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단순한 거절 정도가 아니라 "경덕궁직도 벼슬이냐?"라고 한바탕 비웃음을 당해 아주 개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기 시작한다.
과거 공부 때부터 친했던 권람의 추천으로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던 수양대군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참모가 되어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많은 깡패 무뢰배들을 포섭하고, 홍달손을 비롯한 무장들을 끌어들였으며 수양대군의 정적인 김종서와 안평대군 일파의 정보를 수집해서 마침내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계유정난의 주역으로 공신 반열에 오르면서 일약 인생 역전에 성공한다. 또 수양대군이 무사들을 불러놓고 거사를 종용하자 무사들의 의견이 서로 분분하게 갈라져서 생각보다 호응이 신통치 않았다. 수양대군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한명회가 "길가에 집을 지으려면 3년이 지나도록 다 짓지 못합니다."라면서 결단을 촉구했고 홍윤성도 "군사를 내어 적을 치는데 가장 큰 문제가 결단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라고 거들었고 이에 수양대군이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다. 떠날 자는 떠나고 따를 자는 따라라."라고 외치고 김종서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이는 세조의 결단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움직임을 간파한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별운검을 폐하여 사육신의 계획을 좌절시켜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 이런 지대한 공 때문에 세조는 그를 "나의 장자방이다."라고 평가했다.[16] 이후 왕실에 두 딸을 시집보내고 정승이 되면서 최강의 권력자로서 권세를 휘둘렀다. 세조 사후 예종, 성종 초반까지 그 권세가 계속되었다.
야사에는 술자리에서 취한 나머지 세조의 팔을 꺾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신숙주를 도운 일화도 남아 있다.
세조가 먼저 신숙주의 팔을 잡아 비튼 후에 "경(卿)도 따라해 보라"고 하자 신숙주가 정말로 세조의 팔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어찌나 세게 비틀었는지 세조가 비명을 크게 질렀을 때 동석하고 있던 세자가 심기가 뒤틀렸는지 신숙주를 쏘아보자 세조는 분위기상 세자에게 "나는 이러고 놀지만 너는 이러고 놀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원복의 만화 <사랑의 학교>에서도 나오는데 비명을 지른 세조가 정색하고 굳은 얼굴로 쳐다보는 걸 한명회가 보고 '주상께서 정말로 기분이 상하셨군!'이라고 알아차린다. 신숙주는 술에 취해도 조금만 깨면 책을 읽는 습관이 있었는데 연회가 끝나고 한명회가 신숙주의 하인에게 "오늘 들어가서 주인이 드러누우면 꼭 옆에 있는 촛대를 전부 치우거라."라고 당부했다. 술에 정말 취한 신숙주는 헤롱헤롱거렸지만 버릇대로 자다 깨서 책을 읽기 위해 어둠 속에 초를 한참 찾다가 불을 켜려 했지만 촛대를 찾을 수 없어서 도로 누워서 코를 골면서 잤는데 세조가 신숙주가 정말 취해서 벌인 행패였는지를 확인하려고 신숙주의 집에 내시를 보낸 상태였다. 만일 신숙주가 깨어서 책을 읽고 있었다면 내시는 신숙주가 술이 안 취하고 멀쩡히 깨어서 책을 보고 있더라고 보고를 올렸을 것이고 의심이 많은 세조는 "신숙주가 제정신으로 취한 척을 해 왕인 나를 능멸했다!!!"라며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한명회의 기지 덕에 몰래 찾아온 내시는 코고는 소리와 같이 불이 꺼져있는 걸 보고 신숙주가 술에 취해 자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면서 세조는 "신숙주가 그렇게 취했으니 그랬겠지."라며 피식 웃으면서 넘어갔다고 한다.
백수 시절부터의 친구인 권람이 미녀였던 젊은 여종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아내 눈치를 보느라고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한명회가 권람에게 상사병을 앓는 것처럼 하라고 한 후 회화나무 꽃을 삶은 물을 권람에게 줘서 "이걸 온몸에 바르고 황달 걸린 것처럼 해."라고 했다. 그리고는 권람의 부인에게 우는 척하면서 "아이고. 부인께서 계집 하나를 아껴서 내 친구 죽게 생겼다!"고 통곡하는 연기를 하자 권람의 부인은 길일을 택해 여종을 권람에게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한명회가 권람을 찾아가니 권람이 "대사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자 두 사람이 껄껄 웃었다는 야사도 남아 있다. 야사에는 한명회의 꾀나 지혜와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사극 등지에서 꾀 많은 책략가처럼 묘사되는 것은 이런 면모 때문인 듯하다.
훈구파의 영수로 정국을 이끌었고 한명회의 도움으로 재상이 된 인재도 많았으며 도량도 컸다는 평가를 당대에 들었고 사재를 털어 성균관의 도서 및 시설 등 보충에 도움을 줘서 당시 선비들이 "비범하다." 평하기도 했다. 보스 기질이 강했던 인물답게 통도 컸던 대인배 기질도 있었다. 한명회의 권세가 어찌나 막강했는지 대간들이 한명회를 비판하지 못했고 사간원의 간원 1명이 한명회가 몸담고 있던 원상제 폐지를 권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대간들이 "너 미쳤냐? 원상제가 얼마나 좋은 제도인데 그걸 왜 없애? 왜 네놈이 멋대로 한 일 때문에 우리까지 피봐야 하는 거냐고?"라고 몰아세웠고 대사간까지 "죽기 싫으면 당장 철회하라."고 협박했는데 이 과정이 공개되면서 사간원이 죄다 갈려버리는 사간원 입장에서 망신살스러운 사태까지 있었다.
예종 때는 왕도 못 보는 <조선왕조실록>의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이 대신들의 비행을 적기가 두려워 이미 제출된 사초를 빼돌려 대신들의 허물을 감추는 식으로 수정하다가 들켜서 목이 달아나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이 경우는 케이스가 다른게 왕은 사초나 실록을 볼 수 없지만 대신들은 실록 편찬을 위한 기구가 구성될 때에 감독관으로 임명되어서 편찬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왕이 죽은 아버지의 잘못을 바꾸는 것을 방지하며 여러 사초의 내용들을 당시 국정에 흐름을 알고 있었던 대신들의 기억으로 하나로 묶기 위한 것이었다. 사관들 입장에서는 왕보다는 직접 사초를 확인할 수가 있는 대신들이 더 무서웠던 셈.
그러나 성종에게 시집보낸 막내딸 공혜왕후가 후사없이 요절하고 성종이 장성하면서 한명회의 권세도 수그러진다. 특히 수렴청정을 거두고 성종에게 친정을 시키겠다고 언문교지를 내린 정희왕후에게 "대비마마께서 물러나시면 우리가 불안해서 술 한 잔도 못 한다니까요."라고 오버하는데 성종이 "그럼 날 못 믿는다는 거냐?"라고 정색하면서 상당히 궁지에 몰렸다. 대간의 탄핵이 시작되면서 결국 한명회는 좌의정 직에서 자진해 물러나 보통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와중에 생겼던 압구정 사건으로 직첩이 거둬지는 수모를 당했으나 쓸쓸하기는 해도 영화롭게 살다가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성종에게 한 유언은 명언. 이 말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말을 마치고 생을 마감했다.
한명회의 묘는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데 묘역 밑에 한명회의 사당인 충모사(忠募寺)가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묘역 바로 앞을 지나가고 있어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지나치게 되는 셈. 서울에서 부산 갈 때 천안휴게소에서 차로 5분 정도 지나면 좌측에 큰 무덤이 2개가 있다. 앞의 것이 한명회 부인의 묘소이고 뒤의 것이 한명회 묘. 그 뒤 연산군 때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헤쳐졌고 시신의 목이 베어져 해골이 부서진 채로 길바닥에 내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한명회의 사후는 비참했다. 이후 중종 때에 신원된다.
3. 가족관계
정실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는 단종비인 정순왕후의 모친인 여흥부부인과 사촌지간이다.
정실 부인 민씨와 여러 첩이 있었으나, 첩실의 존재는 네 명이 확인되고 있다. 이 중 정종화(鄭宗和)의 딸 연일 정씨와 전주 이씨는 세조가 형수라고 부르며 특별히 정경부인에 봉작하였으므로, 이후 정식 부인으로 대우하게 되었다.
장녀는 신숙주의 며느리, 차녀는 정현옹주의 며느리이며 그 중에서 3녀는 예종의 왕비인 장순왕후, 4녀는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로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인 국구(國舅)로서도 군림했다. 그러나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요절하는 바람에 외손을 전혀 얻지 못하여, 대대로 외척은 되지 못했다.
아들로는 적자는 한보(韓堡)이며 장순왕후의 동생, 공혜왕후의 오빠이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서 처형될 뻔했으나 살아남아 중종 때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한보는 측실이 많아 거기서 본 아들들도 많아서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한보의 장남인 한경기(韓景琦)는 젊은 나이에 여자를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병에 걸려서 여성들과의 접촉을 일체 피하는 바람에 후손을 두지 못했다는 말이 있지만, 한경기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 협(勰)을 뒀다. 그런데 김안국이 쓴 한경기의 묘지문을 보면 "아들 협은 정실인 두 부인에게서 낳은 게 아니라 측실을 통해 얻었다(其配曰先娶李氏 宗室鶴林君頤之女 後娶金氏 肅川府使克鏘之女 皆無子 只側室生一子曰勰)"라고 되어있다. 충성공파는 이 서자를 통해 현재까지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3.1. 가계도
조상
고조부: 한공의(韓公義) - 호부상서(戶部尙書)
증조부: 한수(韓脩) -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조부: 한상질(韓尙質, 1350 ~ 1400) - 예문춘추관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
조모: 창화군부인 경주 이씨 (昌化君夫人 慶州 李氏) -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이성림(李成林)의 딸
조모: 창화군부인 청풍 송씨(昌化夫夫人 淸風 宋氏) - 청풍도사(淸風都事) 송신의(宋臣議)의 딸
아버지: 한기(韓起, 1393 ~ 1429) - 사헌부감찰 증 영의정(司憲府監察 贈 領議政)
어머니: 정경부인 여주 이씨(貞敬夫人 驪州 李氏) - 예문관 대제학 이척(李逖, 1370 ~ 1419)의 딸
동생: 한명진(韓明溍, 1426 ~ 1454) - 서원군(西原君), 불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선조
제수: 안동 권씨(安東 權氏) -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의 딸, 길창부원군 권람의 동생
배우자와 자녀
정부인: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黃驪府夫人 驪興 閔氏) - 민대생(閔大生)의 딸
적장남: 한보(韓堡, 1447 ~ 1522) - 낭성군(琅城君)
며느리: 한산 이씨(韓山 李氏) - 한성군 이훈(李塤)의 딸
손자: 한경기(韓景琦)
손자: 한경종(韓景琮)
손자: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 - 공신옹주의 남편
손자: 한경환(韓景環)
손자: 한경순(韓景珣)
손자: 한경함(韓景{王+咸})
손녀: 이광(李光)에게 출가
손녀: 조은량(趙殷良)에게 출가
손녀: 이경손(李敬孫)에게 출가
적장녀: 신주(申澍)의 처
적차녀: 영천군(鈴川君) 윤반(尹磻)의 처
적3녀: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 ~ 1461) - 예종의 정비(正妃)
적4녀: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 ~ 1474) - 성종의 정비(正妃)
첩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 정종화(鄭宗和)의 서녀,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
서장남: 한복(韓福)
며느리: 흥덕 장씨(興德 張氏)
서차남: 한림(韓林)
며느리: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한기(李漢奇)의 딸
서3남: 한수(韓壽)
며느리: 안동 권씨(安東 權氏)
첩부인: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선천 공조의 딸
서4남: 한목(韓睦)
서5남: 한석(韓碩)
서6남: 한서(韓恕)
서7남: 한우(韓佑)
서8남: 한온(韓瘟)
서장녀: 강희건(姜希蹇)의 처
서차녀: 신승손(申承孫)의 처
서3녀 : 홍갑생(洪甲生)의 처
첩부인 : 연일 정씨(延日 鄭氏) - 정종성(鄭宗誠)의 서녀,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庶孫女)
첩부인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성수량(成守良)의 서녀
4. 평가
실록의 사관은 "도량이 크고 성격이 활달했으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열정과 능력은 지략가로서 대단히 출중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한명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가 있는데 세조 대에 오가작통법을 만들면서 면리제를 실시했고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리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일제강점기와 현대 남한과 북한의 행정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그 능력을 악용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으고 비정상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수완은 뛰어나지만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는 계유정난의 실질적 설계자였다는 것 때문에 해당 사건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역적 취급을 받는다.
공신을 무려 4번 그것도 모두 1등을 수여받았지만 모두 부정적으로 볼만한 소지가 높은 공신이다.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해서 받은거라 오히려 역적으로 볼만하고 익대공신은 후대에 비운의 인물로 숭상받는 남이의 옥에 참여해 받은거라 멀쩡한 사람 잡은 간신 취급 받기 좋은 일이다. 좌리공신은 성종을 잘 보필했다는 도저히 객관적 기준이 없는 뜬구름 잡는 사유로 수여한 공신이라 당대에도 말이 많았던 퍼주기식 공신이기에 역시나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 세조 ~ 성종 연간의 공신 중에서 그나마 반란군인 이시애를 토벌한 공으로 수여한 공신이라 찝찝한 것 없는 진정한 국가 공로자라 할 수 있는 건 적개공신인데 정작 한명회는 여기엔 명단을 올리지 못했다.
또 한명회는 단종과 관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난언죄등으로 참소했다. 이들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참소된게 아니라 단종에 대한 충을 지키기 위한 것 때문에 참소된 것인지라 명분이 전무한 정적 공격일 뿐이다. 결국 숙종 때 정몽주의 후손들이 신원되고, 정조도 정몽주 후손의 절의에 대해 살아있는 사육신이라고 인정했다.
한명회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기에 이에 관련해서도 부정적 인식이 있다. 그러나 한명회는 본인 실력이 아닌 잘나신 조상을 두었다는 것 하나로 특혜를 받고 관직에 진출한 사람으로만 평가절하하긴 어렵다. 음서로 얻은 관직 이래봐야 한양도 아닌 개성의 경덕궁직이라는 미관말직에 불과했으며 음서로 관직에 들어와야 주요 요직과 고위직에 진출이 가능했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의외로 현대사회와 비슷하게 실력이 아닌 금수저식 특혜 짓거리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가 엄청난 출세가 가능했던건 잘나신 조상덕보단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와 같은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설계하고 진두지휘한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러모로 평가가 엇갈리지만 뭔가 캐릭터가 튀는 인물이고 책사의 대명사 같은 이미지 때문인지 사극 작가들에게 예전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온 인물이였다.
삼국지 인물에 비유하자면 사마씨 밑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한편, 황제에게 딸을 시집보내 국구(國舅)의 자리에 오른 가충과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5. 기타
음흉한 계책을 잘꾸미는 책사라는 이미지, 미숙아(칠삭동이)로 태어났다는 전승, 한명회를 연기했던 사람의 외모 때문에 키가 작고 목이 꺾인듯한 외모가 볼품 없을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의외로 기록에 보면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청주 한씨 집안답게 키도 크고 잘생겼다고 나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키가 큰 미남이라고 기록된데다가 야사인 <신도비명>에서는 "얼굴이 잘나고 키가 커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대하였고 규모와 기개가 우뚝 서 무리에서 돋보였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드라마에서는 미남 배우들이 맡기도 하지만, 만화에서는 대중적인 인식을 따른 것인지 추남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그의 일가 친척이자, 성종의 외할아버지인 한확 역시 당대의 미남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한확의 누이 2명 역시 빼어난 외모를 가진 미녀라 각각 영락제와 선덕제의 총비가 되었다.
술을 못했다고 한다. 술고래들인 세조, 신숙주와 이 분야에서의 본좌인 홍윤성과는 반대 성향. 하지만 술자리는 꼭 끼었다고 한다.
말년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압구(狎鷗)라는 이름처럼 갈매기 보기 좋은 한적한 한강 남쪽의 풍치 지구였지만 1970년대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시작되어 압구정 현대아파트, 압구정 한양아파트와 같은 고급 아파트들이 대거 건설되면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부촌 중 1곳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그가 유자광과 작당해서 남이를 모함했다고 하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코미디다.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한건 사실이지만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남이가 유자광에게 반역에 가까운 언변을 내뱉어 스스로 자초한 화이다. 유자광은 한명회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한명회는 명문가에 조정을 장악한 구훈의 대표격이고 유자광은 구훈을 견제하기 위해 육성한 신훈 중에 출신이 서자 출신이라고 여러 사람에게서 차별을 받았다. 유자광이 성종에게 한명회의 비리를 고한 상소를 올리고 이에 한명회가 반박하는 상소문을 올려 유자광은 파직됐다.
2013년 한명회의 17대손인 한 모씨가 자신의 직계(?) 조상인 한명회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한 언론인을 고소했지만 승소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