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가타리 ‘안티오이디푸스’(새로읽는 고전:21)
◎‘자본’의 줄끝에서 춤추는 욕망의 시대.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사회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다. 후기자본주의 사회는 곧 욕망의 시대다. 그러나 욕망은 태초부터 우주를 이끌어온 힘이며, 인간이 세상에 등장했을때부터 세상사를 이끌어온 원초적 에너지가 아닐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개념을 가지고 우주와 역사를 설명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러 권의 책을 함께 썼다.그중에서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제목 아래 출간된 두 권의 책인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은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철학계가 창조한 최대 성과들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역사
책 제목인 ‘안티오이디푸스’는 곧 프로이트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겨냥한 것이다.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우주 진화와 역사적 과정의 근본 동인(動因)으로 본다.그러나 프로이트는 욕망을 ‘부모아(父母我)’의 삼각형(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가둬버림으로써 욕망을 가족드라마 안에 가둬버렸다.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생각을 비판하고,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 안에서 끄집어내 자연과 역사에 집어넣는다.다시 말해 욕망이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역사를 이끄는 근본 동력(動力)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연철학의 측면에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원자론을 따른다.우주는 원자의 집합이며,우리가 비(非)물질적인 것들로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 원자적 운동의 결과일 뿐이다.이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서구 담론사에 있어 유물론적 전통,자연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세계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단지 원자들의 ‘우발적인’운동이 있을 뿐이다.모든 것은 이 우발적 운동의 결과일 뿐이다.
○사회는 욕망통제의 체계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역사에도 어떤 이유나 목적이 없다고 본다.역사의 근본 동인은 욕망이다.한 사회는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고 살리고 분배하는 체계,즉 ‘코드’를 통해 이뤄진다.스포츠는 동물적인 쾌감을 느끼기 위해,도서관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영화관은 이마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다.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적절히 해소시키기 위한 체계다.이 체계는 때로 사회의 변동을 통해 무너진다.즉 ‘탈코드화’된다.그러나 인간사회가 완전히 카오스로 화하지 않는 한 코드는 재건된다.즉 ‘재코드화’된다.들뢰즈와 가타리는 세계사를 이 코드화-탈코드화-재코드화의 과정으로 해명한다.
지금부터 5천년 전에 시작된 역사시대로부터 근대 문턱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군주제시대’로 본다.이때 관료제도의 형성,강력한 사제계급의 등장,문자의 발명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했다.들뢰즈와 가타리는 마르크스에서 연원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바탕으로 이 군주제 사회를 분석한다.이 사회는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사회며,이 구조를 ‘초코드화’된 구조라 할 수 있다.
○탈코드에서 재코드화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탈코드화의 시대로 본다.즉 우리 삶을 규정하는 모든 룰들이 깨지고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모든 방향으로 흐르는 사회로 본다.전통사회를 지배하던 피라미드 구조는 무너진다.그러나 이 탈코드화의 시대에 다시 재코드화의 흐름이 등장한다.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코드들이 와해되지만,역설적으로 자본과 기술에 의한 모든 것의 재코드화가 발생한다.그러나 자본과 기술의 재코드화는 기존의 재코드화와 다르다.자본과 기술은 인간의 욕망을 누르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장부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고 모든 것이 자본의 흐름에 따라 재조정된다.기존의 모든 가치는 자본과 기술에 종속되고 ‘냉소주의’가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으로 자리잡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같은 자연관,역사관은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형상철학을 비롯해 우주를 비물질적 차원이나 이유,목적 등을 가지고 설명하려 했던 사유체계들과 부닥친다.이 점에서 미래의 철학이 휴머니즘이나 형상철학적 사유를 다시 제시하고자 한다면,그러한 작업은 들뢰즈,가타리와의 대결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정우 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