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6장 1-3절에 관한 왜곡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이 본문은 대표적으로 우리네 교회의 강단에서 우리네 식으로, 곧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되고, 그렇게 설교되고 있는 본문이다.
일단 이 말씀은 회개에 매우 적절한 은총이 베풀어지는 말씀으로 설교되기도 하고 사용되기도 한다. 더불어서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도, 이어지는 새벽빛과 땅을 적시는 늦은 비까지 굉장한 은총의 메시지로 전하곤 한다.
그러나 그 표면적인 글귀의 내용은 그럴지 몰라도 그 배경은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이다.
곧, 이 본문은 호세아 선지자가 백성들과 하나님의 대화 속에서 백성들이 표면적이고 상투적인 말투로 신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하나님이 비꼬는 내용으로 전하고 있는 부분이다.
앞서 5장 말미를 보면, 백성들이 죄를 제대로 회개하지 아니하여서 하나님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백성들을 떠나 있겠다는 내용이 나오며, 그 뒤에 이어서 6장 1-3절은 백성들이 ‘자기네들끼리 하는 말’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 ‘자기네들끼리의 말’ 다음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대꾸되는데, 그 대꾸의 첫 마디인 4절이 바로 이스라엘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는 말이다.
곧, 이스라엘이 회개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 같아도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애를 행하는 척하다가는 금세 다시 불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5절의 심판 선고가 이어진다.
더욱이 '자기네들끼리 하는 말' 중에서 3절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비’의 비유로 설명되는 일은 바로 바알 신이 주는 다산의 풍요로움을 섞어 쓰는 것이다. 바알 신화에서 바알은 그 배우자와의 성적 관계로서 이 세상에 비를 내리며, 그 성적 관계를 통한 제의 구현이 바로 다산 숭배의식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신이 주는 다산 의식을 하나님께 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참된 회개에 대한 언급과 결단이 없이, 그저 곤고한 처지에 빠지게 되자 하나님께 돌아오는 척하면서 이방 신이 주던 것을 얻고자 하던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이스라엘의 신앙이 잘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호세아서의 이 말씀은 철저한 회개와 결단이 없이, 하나님이 무조건 자비를 베풀 것을 당연시 여기는 오늘날의 잘못된 교회 신앙을 적용하고 질타하는데 들어야 할 말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왜곡되고 잘못 선포되는 이유는,
첫째, 문맥을 따라서 그 본의를 이해하고 읽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첫째 이유에 추가하여,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소리로만 해석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교인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탐하던 설교자들의 공급으로 일어난 현상일 것이다.
셋째, 성경의 배경에 대한 전제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의 말씀이 몇 천년 전 문화와 생활 관습과 언어적 배경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무시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신앙을 얼마나 철저히 믿고 있는지 한국식의 사고방식으로 몇 천년 전의 문화적인 배경을 초월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는 듯하다.
넷째, 우리의 신앙이 호세아 선지자의 선포 당시의 이스라엘의 거짓되고 기만적인 신앙으로 그만큼 전락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교회 몸체 전체가 그렇게 되었고, 그렇게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가치관과 패러다임이 그렇게 되어 있으며, 그들이 전하는 설교가 온라인 속에서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며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설교자들이 혹여 이 본문의 자기네식의 백성들의 말처럼 신앙 패러다임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사족이지만, 심지어 2절의 ‘이틀 후’와 ‘셋째 날’을 시간적인 순서로 이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시간이 순식간이라는 식의 설교도 있는데, 이는 히브리인들의 ‘수 잠언’, 곧 ‘두어 가지와 서너 가지’라는 식의 수사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 결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