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6
상남 성춘복 시인
1980년대 초반, 심상해변시인학교에서 담임시인을 맡은 나를 누가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땡볕이 쬐이는 운동장 끝머리 풀라타나스 그늘에서 한 무리의 시인들이 앉아서 시에 관한 토론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에는 그때 인사를 나누고 알게 되었지만, 문협『월간문학』출신들인 ‘미래시동인’ 김남환, 이충이, 장 렬, 김종섭, 박진숙, 김현숙, 이희자 시인 등이 있었고 그들의 좌장이며 스승인 상남 성춘복(尙南 成春福) 시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시에 그는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을 하면서 문협 4인방(성춘복 오학영 황명 김시철)으로서 문협의 조직과 인맥을 관리하고 『월간문학』의 신인 심사와 작품 게재 등에 관여하는 문단 실세였다.
나를 찾은 것은 그가 박동규 교수와 황금찬(당시 해변시인학교 교장) 선생과의 친분이 돈독해서 『심상』출신들과 교류를 위해 미래시 시인들과 인사를 나누고자 함이었다고 생각된다.
그후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문협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서 더 많은 시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현대문학』주간 감태준, 목포대 허형만, 문예진흥원 조정권, 박주관, 박제천, 제주대 윤석산(尹石山), 문협 사무국장 유한근, 동아대 차한수 등 모두 나보다는 문단 선배들이었다.
그는 전국 문학행사에 나의 동행을 권했다. 당시 출판사 일을 하던 나는 어렵게 시간을 내어 동참했다. 주로 문협과 PEN클럽 행사로 심포지엄과 강연회, 시낭송회 등 전국을 순회하면서 많은 문인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또한 그는 외국 여행을 자주 했다. 1987년에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시인대회, 그후 일본에서의 시낭송교류회, 문협 해외심포지엄으로 중국과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독일 등을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내가 개인 출판사 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당시 예총회장 조경희 선생에게 소개하여 예총 직원으로 채용될 수 있도록 적극 배려도 해주는 자상함을 알게 되었다. 그가 문협 부이사장이 되고 후에는 이사장과 예총 부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한 건물에서 매일 만나게 되어 식사 모임 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교분을 쌓게 되었다.
오랜 가뭄을 적시는 / 보슬비는 향그럽다 / 시든 풀꽃 쓰다듬는 / 따사로운 손 끝에 / 한 권의 복음서가 펼쳐지면 / 멀리서 혹은 곁에서 들리는 / 둔탁한 음절도 녹아 흐르고 / 오지에 비 젖는 날 / 숨 막히는 어린 자벌레들 / 그의 부드러운 정원에서 / 넉넉한 사랑을 손질하고 / 젖은 마음들을 말린다 // 순백의 깃 드리운 찻잔 속에 / 일렁이는 멋 가득 채우고 / 아, 내 마음 끝간데를 몰라 / 더듬어 보는 언어들 / 저만큼 앞서 걷는 / 그림자만 따라 가느니 / 쌓인 어둠 속에 우리들 사랑을 위해 / 시를 위해 / 오지를 밝힌 저 등불.
나는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奧地에 켜진 등불-시인 尙南」이란 헌시를 한 편 썼다. 그의 첫 시집『奧地行』이 절판되어 보관본을 빌려다가 복사판으로 만들어 누군가와 나누어 가졌다. 거기에서 발상한 것이 이 작품이다.
그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보내고 성균관대에서 문학의 기초를 닦아 1959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공원 파고다』,『산조』,『복사꽃제』,『네가 없는 이 하루는』,『혼자 부르는 노래』,『해적이기 해작이기』,『혼자 사는 집』등 20여권의 시집과 10여권의 수필집을 간행하여 월탄문학상, 한국시협상, 동포문학상, 한국펜문학상, 서울시문화상 등을 수상하는 영예도 안았다.
그는 외모를 잘 단장하는 멋쟁이로 문단에 소문이 났다. 하얀 머리카락에 눌러 쓴 시인의 모자와 안경, 목도리와 셔츠, 신발에 이르기까지 멋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형과 더불어 해박한 지식을 동원한 문학적 가르침에 심취한 후학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르면서 ‘성춘복 사단’이란 말도 생겼다.
그리고 그는 정이 넘쳤다. 후배나 동료들의 생일을 챙겨준다거나 집안일(돌, 입학, 졸업, 결혼 등)에도 신경을 써서 그냥 넘기지 않았다. 나의 딸이 중학교에 입학했다는 소문을 듣고 책가방을 사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다. 틈틈이 스케치한 것을 모아 몇 차례의 시화전을 개최하였다. 우리 문인들이 그림을 그리는 예는 그렇게 흔치는 않다. 조병화 선생과 김영태, 유필근, 신순애 선생 등이 기억된다. 나는 표구된 시화를 몇 점 구입함으로써 그의 인정에 보답하기로 했던 적이 있다. 이 그림은 아직도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고 있다.
언젠가 대학로에는 민주화 투쟁이란 이름 앞에 매일 최루탄이 터지고 근처 직장들은 조기 퇴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대학생 두 명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는 다시 사회적인 정의감으로 언성을 높인 적이 있었다.
한강성심병원에서 있은 학생의 영결식에 동료학생들이 헌화하는 애달픈 장면을 보았다. 가슴을 쥐어뜯는 슬픈 광경이었다. 그렇다면 군산수산대의 동급학생도 애간장을 끓는 헌화의 모습이 경찰병원의 영안실에서 연출되어 마땅할 일이다. 왜 이 두 젊은 죽음이 이같이 전혀 달라야 하는지 그 답을 얻는다면 우리의 민주훈련도 꽤나 앞선 자리에 와 있을 것이 뻔하다.
그는 한 재학생은 데모대로, 다른 한 휴학생은 전투경찰로 서로 상응한 위치에서 데모대와 진압경찰로서 불행을 맞이한 두 죽음을 두고 사려깊은 언성이 자신도 모르게 높아진 것이다. 이는 그의 수필집『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도 실려 있다.
그도 이제 고희를 훌쩍 넘겼다. 그는 김영태 선생도 떠나고 없는 혜화동『문학시대』(전『시대문학』)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독서와 집필로 지금도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언제든지 혼자 훌쩍 떠나는 외국여행도 그가 살아가는 한 방식이다. ‘모든 시선과 관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자유의 천지 그 바깥세상이 1년에 두어 차례 정도 내게 주어져도 좋다고 믿기에, 또 그것이 나의 숨통을 터놓는 일을 하기에(수필「바깥세상을 찾는 이유」중에서)’ 그는 여행을 즐기고 있다.
그가 매일 새벽 문안인사를 나누던 조병화 선생도 떠난지 오래고 동고동락하던 김영태 선생도 떠나보냈지만, 아직도 황금찬, 김후란, 허영자, 이경희, 전옥주 선생 등 원로문인들과의 정다운 교분은 계속되고 있다.
성춘복 시인의 순정적인 체취는 자아에서 파생되는 인식(주관)과 행위(주체)를 합쳐서 우리는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그는 ‘나’라는 대상에 대하여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사유를 포괄함으로써 자아에 대응하는 객관성을 질감 높게 승화하고 있는 점이다.
나는 그의 시집『혼자 부르는 노래』에 대해서 ‘自我와 對我의 주정적 화해’라는 서평을 썼다. 언젠가 ‘성춘복 시학’이 누군가에 의해서 새롭게 정리되어 후학들이 그를 기리고 탐구하는 날이 오기만을 기대한다.
(문학공간 08.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