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보라’로 번역한 ‘이데테’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원형은 ‘에이돈’이다.
2) 귀신의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살(사르카)과 뼈들(오스테아)이 있다.
3) ‘에이돈’의 ‘이데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보라’는 내용으로 ‘데오레이테’는 ‘이데테’만큼 깨어서 보라는 의미다.
나. 본론
1) ‘보라’로 번역한 ‘이데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원형은 ‘에이돈’이다.
원문에서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로 오역한 부분이다.
‘보라’로 번역한 ‘이데테’는 동사, 명령법, 과거, 복수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으로서 원형은 ‘에이돈’이다.
- ‘에이돈’은 ‘보다’로 328회 쓰였다.
- ‘호라오’는 ‘보다’로 115회 쓰였다.
두 다른 단어를 하나로 정하였다.
스트롱(미국 신학자)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단어마다 번호를 정할 때 ‘호라오’와 ‘에이돈’ 두 단어의 뜻이 같다고 해서 하나로 정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을 성경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다. 어떤 문장에서는 두 단어가 전혀 다른 뜻을 나타내고 있다.
2) 귀신의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살(사르카)과 뼈들(오스테아)이 있다.
신약에 ‘호라오’가 나와 있는 문장은 많은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거의 대부분 ‘호라오’는 속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깨달음으로 보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호라오’다.
그래서 이 ‘호라오’가 나오는 문장은 주의를 기울여서 보아야 한다. 시제 또한 없다. 시상에 있어서 현재 시상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호라오’ 단어가 나오면 내 안에서 깨달음의 눈이 열리는 내용이다.
‘영’으로 번역한 ‘푸뉴마’는 귀신의 영이다(눅 24:39).
그러므로 귀신의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살(사르카)과 뼈들(오스테아)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너희 보는 바와 같이’에서 ‘너희 보는’으로 번역한 ‘데오레이테’는 현재 2인칭 복수로 식별하다. 지각하다, 인지하다의 뜻이다.
3) ‘에이돈’의 ‘이데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보라’는 내용으로 ‘데오레이테’는 ‘이데테’만큼 깨어서 보라는 의미다.
‘에이돈’의 과거 능동태 복수 2인칭, ‘이데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보라’고 하는 것이고, ‘데오레이테’는 ‘이데테’만큼 깨어서 보라는 것이다.
‘데오레이테’는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뼈를 만질 수 있는 내용이다. 제자들이 이 정도의 상태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겉 사람의 눈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뼈를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그런데 눅 24:45절에 이르러서야 온전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오레이테’로 보고 만지는 것은 흐릿하게 보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