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 종으로 번역한 ‘둘로스’는 ‘종’이 아닌 근본에 의해서 ‘하나 됨’이다.
나. 사도 바울 자신이 좋은(토브) 하나님 말씀을 소유한 데오스(하나님)라 정의하였다.
다. 자신이 하나님(관사 없음)과 하나 되어 전하는 것이 바울의 모든 서신 기록이다.
라. 복음’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지만, 기록된 그라페 말씀은 내면에서 파라볼레(그리스도 예수)가 임하는 내용이다.
2. 본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함을 입었으니(롬 1:1)”
(바른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말씀에 헌신 됨, 말씀과 하나 됨, 말씀과 한 몸이 됨)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하나 됨)을 받아 하나님(관사 없음)이 된 좋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이미 선택을(아포리조) 입었나니)다.
가. 종으로 번역한 ‘둘로스’는 ‘종’이 아닌 근본에 의해서 ‘하나 됨’이다.
종으로 번역한 ‘둘로스’는 ‘종’ 이 아니라 자신의 근본으로부터, 근본에 의해서 ‘헌신 된’ ‘하나 된’이다. 말씀의 흐름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종의 개념으로 오역한 것은 큰 잘못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데오스, 관사 없음)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 됨에 헌신(둘로스) 한다.
나. 사도 바울 자신이 좋은(토브) 하나님 말씀을 소유한 데오스(하나님)라 정의하였다.
‘데우(하나님, 소유격)’ 앞에 관사가 없다. 호 로고스가 데오스(주격, 관사없음)라고 정의하고 있다(요 1:1).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로 오역한 ‘에이스 유안겔리온 데우’는 ‘하나님(관사없음)의 좋은 말씀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 되다’의 뜻이다.
대상인 ‘하나님 복음을 위하여’가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나 자신) 말씀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는 일을 감당하는 사도(아포스톨로스)가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좋은(유) 하나님 말씀을 소유한, 좋은(유) 말씀과 하나 된 데오스(하나님)라 정의하고 있다.
다. 자신이 하나님(관사 없음)과 하나 되어 전하는 것이 바울의 모든 서신 기록이다.
사도 바울 자신은 하나님(데오스, 관사없음)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 서신 전체가 하나님이 되어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중간에 하나님 됨을 놓치게 되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번역된 한글 성경은 사도 바울이 자신보다 먼저 오신 역사적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하는 자가 된 것처럼 번역하였다. 크나큰 오역이다. 그러나 원문은 바울 자신은 이미 말씀으로 이루어진 하나님(관사 없음)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자신이 하나님(관사 없음)이 된 것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모든 서신 기록이다. ‘복음’으로 번역한 유안겔리온(좋은 하나님 말씀, 하나 되게 한 말씀)의 뜻이다.
라. 복음’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지만, 기록된 그라페 말씀은 내면에서 파라볼레(그리스도 예수)가 임하는 내용이다.
‘복음’으로 번역을 하면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쳤던 그 내용으로 오해하게 된다. 기록된 그라페 말씀은 반드시 자신 안에서 파라볼레(그리스도 예수)가 임해야 열리게 된다. 내면에 파라볼레(그리스도 예수)가 임하지 아니한 자는 여전히 수수께끼가 되어 그 의미가 숨겨져 버린다. 이래서 입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 말씀과는 전혀 관련이 없게 된다. 자신이 하나님(대오스)으로 변화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복음’은 우상화되어 있어서 원래의 그 의미에서 떠나 있다. 복음으로 번역한 ‘유안겔리온(좋은 하나님 말씀)’은 사도 바울과 하나 되어 있으므로 대상이 아닌 깨달음이다.
초창기부터 번역하던 이들이 이 핵심을 놓친 것이다. 종교인들이 번역하였기 때문에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기록이 대상이 되어 오해를 가져 온 것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