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말씀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심판(선악)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2) 좋은 목자는 아버지와 하나 된 에고 에이미(그리스도 예수)가 된 자다.
3) 휘장(몸과 마음)을 찢지 않으면 그 안에 뱀이 있어서 죄(하마르티아)에서 벗어날 수 없다.
4)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 장로 집사는 직분이 아니라 모두 성전 수리하는 자(디아코니아)다.
나. 본론
1) 말씀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심판(선악)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종교인들이 번역한 하나님은 선악 사상을 따라서 선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묘사해버렸다. 파로이미아(비사)로 된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기에 때문에 생긴 일이다. 말씀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심판하는 기능이 없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능 자체가 없다. 마음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은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을 초월한 상태다. 하나님이 환상으로 나타난다 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해도 모두 변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선악 개념은 마음(의식 무의식 잠재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개념이다. 종교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뱀을 하나님으로 오해하도록 번역하였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큰 오역이다. 영어로 번역한 good 또한 마찬가지다.
2) 좋은 목자는 아버지와 하나 된 에고 에이미(그리스도 예수)가 된 자다.
‘좋은 목자’는 그의 양들을 위하여 그의 혼(푸쉬케)을 아버지께 맡기는 자다. 아버지와 하나 된 에고 에이미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으로 자신 안에 이 좋은 목자가 이미 와 계시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창세기 1:1 내용이다.
‘베레쉬트(근본, 근원)를 드러내어, 하나 되기 위하여 엘로힘이 마음의 그 하늘들과 마음의 그 땅을 바라(개간) 하느니라(창 1:1)’
베레쉬트가 근본이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에고 에이미다. 그러므로 태초가 아니다. 베레쉬트가 양들의 근본이며 근원이다. 여기 등장하는 엘로힘은 좋은 목자다. 이 좋은 목자가 새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나투신다(되새겨진다).
창세기 1:1에 등장하는 엘로힘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자 안에 좋은 목자로 양과 하나 되어있다. 이 좋은 목자 엘로힘은 항상 베레쉬트(근본, 근원)를 향하여 계신다. 그 이유는 그 하늘들(하쇠마임)과 그 땅(하아레츠)을 바라(옥토로 개간)하여 베레쉬트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베레쉬트와 하나 되기 위함이다. 베레쉬트가 그 하늘들(허쇠마임)과 그 땅(하아레츠)에 의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휘장을 찢어야 한다. 이 휘장을 찢는 것이 ‘창조하다’로 오역한 ‘바라(개간)’다.
3) 휘장(몸과 마음)을 찢지 않으면 그 안에 뱀이 있어서 죄(하마르티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엘로힘(좋은 목자)에 의해 바라(개간)가 이루어진다. 이 휘장을 찢지 아니하면 이 안에 사는 뱀이 항상 강도로 돌변해 들어온다. 죄(하마르티아)를 계속 가지고 있게 된다. 만약 베레쉬트가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면 엘로힘은 그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바울 자신을 그렇게 그리고 있는 에고 에이미다.
이천 년 전에 역사적으로 오셨던 그 예수는 자신과의 그 역할을 다하고 사라졌다. 아버지와 하나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각자의 내면에서 부활을 이루었다. 이를 에고 에이미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음 안으로 돌이켜 들여다보아야 이 좋은 목자(에고 에이미)를 발견할 수 있다. 원어를 연구하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 하는 것이라 결국 버려야 할 것들이다. 자신 안에서 좋은 목자를 찾는 이들은 서로를 공경하는 도반들이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이런 것들은 종교인들이 오해하여 만든 것들에 불과하다. 뱀을 하나님으로 보고 만들어 낸 것들이다.
4)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 장로 집사는 직분이 아니라 모두 성전 수리하는 자(디아코니아)다.
성경 말씀에 등장하는 사도 장로 집사로 번역한 것은 모두 디아코니아(성전 수리)다. 디아코니아는 베레쉬트가 드러난 몸 된 성전이 겉 사람의 감각적 욕망인 도적과 강도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자신 안에 세워진 몸 된 성전을 지키는 자다. 파수꾼들이다. 디아코니아가 된 자들은 좋은 목자를 자신 안에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건물교회를 세우고 그곳으로 끌어모으는 몸 밖으로 나타난 목사들 또한 강도요 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도적들과 강도들도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 이유는 속은 아들도 참 아들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