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 "우리집 가훈은 걸레정신"
글 손명원(손컨설팅 컴퍼니 대표이사)
"내일 점심 약속 있니?"
"아니요. 고모님께 내일 인사 드리려 갈려고 했는데요."
"잘됐다. 소공동 LCI 식당에서 만나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어려서부터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던 손인실 고모님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손인실 : 1917-1999 적십자사 부총재, YWCA 회장, 여성 운동가, 시민운동가)
다음날 LCI 식당에 약속한 12시에 도착을 했다. 대학을 마치고 부모님들께 감사드리려고 귀국을 했다. 필수 과목들로 엮어진 대학 학사 과정을 끝마치고 나니 해방된 기분이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삶에는 어떤 원칙이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늘 높이 나르는 독수리같이 어디든지 가고픈 데로 가면 된다는 기분이었다.
식당에 들어서며 고모님 성함을 알렸다. 예약된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밝은 빛으로 꽉 찬 방은 나를 반기는 듯했다. 창밖을 내다 보고 서 있을 때 고모님이 들어 오셨다.
"명원! 잘 있었어? 대학 졸업해서 좋겠다."
"네, 마음이 편해요.
고모님. 이렇게 좋은 식당에 초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 앉아.
"이 집에서는 스테이크를 아주 맛있게 해."
"네, 그럼 저도 스테이크 할게요."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 고모님 얼굴은 그날도 인자하시고 편한 모습이었다.
웨이터가 들어와 주문을 받고 나갔다. 고모님과 사촌 동생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기다리던 스테이크가 들어왔다. 먹음직한 스테이크를 보며, 나는 포크와 칼을 양손에 잡고 스테이크를 막 공격하려고 할 때 고모님이 "잠깐, 기도하자" 하셨다.
지난 5년간 대학을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꾸려나갔었다. 그러다 보니 비싼 스테이크보다는 싼 햄버거가 더 가까웠었다. 또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와 가까운 생활을 하지 않던 나는 기도 보다는 스테이크가 더 가까웠다.
"네."
포크와 칼을 다시 상 위에 놓았다. 고모님이 따뜻한 기도를 마치셨다.
"아멘"
칼로 막 자른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막 몇 번 씹으려고 하던 그 때,
"명원아 스테이크는 그렇게 먹으면 안돼.
칼로 잘라서, 포크로 찍어 먹어야지, 그냥 칼로 찍어 입에 넣으면 안돼"
약간 창피해서 얼굴이 불거졌다.
“네 알겠습니다"하며 다음 것은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입을 다물고 씹어 먹었다. 내가 며칠 굶은 야만인 같이 행동했었나 보다. 속으로는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중요하지.’ 테이블 매너를 모르고 덤비던 나였다.
다시 칼을 들었을 때 고모님이
“명원아! 네가 우리 집에 장손이야.”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고모님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긴장감에 싸였다. 온몸의 귀는 다 열렸다.
“네가 우리 손씨 가문의 장손이기 때문에 너의 할아버님, 손정도 목사님의 가훈을 너에게 전하려고 오늘 나오라고 했어.”
나는 씹고 있던 고기를 꿀꺽 삼켰다.
"네. 고모님"
"아버님은 우리에게 걸레와 같이 살라고 하셨어."
“가훈은 ‘걸레 정신’이야.
남들이 더럽고 냄새 난다고 피하는 장소를 걸레는 깨끗하게 치워.”
“남이 피하는 어려운 일들을 우리들은 솔선수범해서 또 희생정신으로 일 처리 하는 것이 ‘걸레 정신’이라고 하셨어.”
"네. 알겠습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걸레 정신?’ 왜 걸레라는 단어를 쓰셨을까?
솔선수범, 희생정신 등 더 듣기 좋은 많은 단어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걸레’ 라는 단어를 쓰셨나?
마음에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고모님은 걸레 정신에 대하여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고모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할아버님은 정동교회 목사님이셨고, 또 독립운동가로서 상해 임시정부 2대 의장을 역임하셨다.
왜 목사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였나? 목사는 사랑과 용서의 상징이라면 독립운동가는 피와 싸움과 죽음을 기반하는 투쟁의 상징이다. 극에서 극이다.
왜, ‘사랑’에서 ‘피’로 생을 바꿨을까?
손정도 목사님의 설교에서 가장 많이 전하여진 메시지는 "하나님 사랑이 나라 사랑이다. 나라 사랑은 민족 사랑이다"였다고 한다. 주님이 주신 계명 중 가장 으뜸 계명이 사랑의 계명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이다.
주님은 이 계명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에 자기의 목숨을 바쳐 피를 흘리셨다. 이 피로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리셨다.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손 목사님의 사랑의 설교는 토탄에 빠져있는 민족을 어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목사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설교의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이 때문에 목사님은 온화한 사랑과 용서에서 피와 죽음을 전제로 하는 독립운동가가 된 것 아닐까.
이 변화는 자신이 따르던 ‘걸레 정신’을 실천에 옮기신 것이 아닌가 싶다. ‘걸레 정신’이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 계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의 삶에 걸레는 항상 필요한 것이다. 깨끗한 환경을 바란다면 걸레는 매일 필요한 필수품이다. 냄새 나고 더러운 장소에 걸레가 나타나 깨끗이 치우고 나면 모든 사람이 다시 그 장소에 모여 즐긴다.
허나 그 누구도 이 걸레를 응접실에 모시는 사람은 없다. 걸레가 다 사용되고 나면 깨끗이 빨아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보관하여 둔다. 그 깨끗 하게된 장소를 걸레의 주인과 친구들은 즐긴다.
다음날 다시 어떤 장소에 청소가 필요하면 걸레는 다시 나타나 자기가 맡은 일을 주인이 원하는 대로 마치고, 끝이면 또 다시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가서 기다린다.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기다리는 것이 걸레 정신, 걸레 철학이다.
어려운 일, 남이 싫어하는 일 들을 했으니 나를 존경하고 영웅으로 취급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는 나의 할 일을 했을 뿐 이라고 하며, 다음 필요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걸레의 참 뜻이다.
손정도 목사님의 주인은 한국 민족 이였고, 이 나라, 대한민국이었다. 손정도 목사의 걸레는 민족의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철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해방되기 15년전 49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50년 전 LCI 식당에서 고모님이 말씀하시던 ‘걸레 정신’의 참 뜻을 알게 된 것 같다. 왜 손정도 목사님이 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셨고 외 가훈을 을 ‘걸레 정신’이라고 하셨는지를.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사랑의 계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군사관학교 창립 70주년 행사를 보면서, 1945년 해군 창군과 1946년 해군 사관학교 창립도 모두 ‘걸레 정신’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싶다.
<필자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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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원(孫明源) 서울중·고등학교, Frankfurt American High School졸업(1959)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CUA)졸업(1965),토목공학학사/구조역학석사(1967) 기술사자격증(California State (1973), Maryland State (1974)) [경력] |
1965 ~ 1980 1980 ~ 2000 2004 ~현재 | Page communication, Engineer, Westinghouse, TCOM,토목부총괄부장, Sohn Consulting Engineering Company, Washington D.C.대표이사, International Industries Inc., CEO 현대중공업부사장,현대미포조선대표이사,쌍용자동차대표이사,맥슨전자대표이사, Korea Herald고문,숙명여자대학교겸임교수(Global Service),러시아철도역총개발공사(RZD-RV)사회이사, 손컨설팅컴퍼니(Sohn Consuting Company)대표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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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출처] 손정도목사의 걸레정신|작성자 아침이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