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원종2등공(宣武原從2等功) 찬양사
공의 휘는 봉상(鳳祥) 자는 치서(致瑞) 호는 괴암(槐庵)이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화산군
권응수 장군과 함께 경상도 영천성을
복성했는데 그 해 5월에 대동(大洞 :지
금의 화남면 안천2리 큰골), 화남면
한천(漢川 :지금의 삼창)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는등 7월 14일 적은 '봉고어사'라
속이며 300여 명이 군위에서 영천쪽으로 내려왔다.
이에 권응수 의병 대장과 신령 의병 이온수, 정응거(丁應据), 박응기(朴應璂)
등 박연(朴淵:지금의 화산면 석촌)에서 적과 대적하여 참수 30여급, 총통 25자루,
창검 40여 기와 말들을 뺏으니 군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22일에는 달아난 적을 의홍 소계(召溪)까지 쫓았고, 또 화남면 사천리에서 최인제
(崔仁濟), 전삼익(全三益)형제와 함께 적이 강을 건너야 하는 지형지세를 이용
하여 언덕위에 기다리고 있다가 적을 크게 물리쳐서 북상하는 적의 주력부대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당시의 의병활약이 관군을 능가하는 전공을 이룬 일은 애국
충정에 불타는 정신이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公)은 수많은 공적으로 선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고, 통훈대부사복시정에 제
수되었다.
공은 구산군(龜山君) 朴碩輔의 9세손으로 명종 신해년 3월에 태어나 어릴적부터
총명함이 뛰어나 이미 7세에 소학을 익히는 등, 한학을 수학하고,자라서는 효행을
실천하며 임진왜란에 임하여 큰 공로를 세워 정부와 향원에 공신의 찬양을 받았다.
임진왜란 7년전쟁이 끝나고 향리에 돌아와 노모 봉양과 후학에 힘쓰다가 돌아가심
에 묘소는 화남면 죽곡리 선영아래 안장되고, 숙부인 영천이씨는 화남면 사천리
화남초등학교 뒤 동산에 봉안되었으며,공의 후손으로 훈련원봉사 남계공(夢濂),
통정부호군(全仁),예조판서(種德)등이 있다.
다음은 모성공회 찬양사다
慕聖公會讚揚事
선조 정해년에 상을 당하여 읍혈로서 소례를 행하고 3년 동안 묘소 여막에서 지
내며 날마다 성묘했다. 임진왜란에 군량을 수송하고 병사를 모집하여 충의공 권응
수와 함께 병사의 이해를 논하는 작전회의를 도모하였다.
임진년 6월 밤에 삼여점이라는 곳에서 왜병 첨병 5명을 베고, 추격하여 박연에
이르러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무찌르니, 화산군 권응수 공이 과연 국난을 막을 재
목이라고 극찬하였다. 또 영천전투에서는 군량이 결핍하자 밤에 창암으로 달려가
서 일백 여섬의 곡식을 군량미로 마련하기도 했다.
권공과 함께 경주로 진격했는데,조치가 매우 주밀하니,경주부윤 변응선과 판관
박의장이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선도산에 올라 적진의 동정을 살피는데, 적들
이 몰래 북문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말을 달려서 경상도병사 박진에게 보
고하고, 이튿날 적을 모두 무찔렀다.
9월에는 행재소에서 朴公에게 주부(主簿) 직책이 내렸다.
계사년 2월에 문경에 가서 적 6명을 베어, 왕세자 행궁에 바쳤으며, 7월에 권공과
함께 창암에서 적을 격파하고 또 명나라장수인 경리양호와 더불어 적을 격파할 것
을 도모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향리에 돌아와 노모를 봉양했다.
무술년에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제수되었는데 이 사실이 숭현록에 실려 있다.
후에 훈련원봉사 남계공 몽렴과 부호군 매원공 全仁의 后 泰文. 時植이 선대의 위
의를 계승하여 남의 모범이 되었다.
아! 공이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뭇 사람들의 우러러봄이 오랠 수록 더
욱 새롭다. 공의 실재 행적을 살펴 보건데 마땅히 나라에서 증려를 내려서 드러내
어야만 하겠으나 시대의 제도가 옛날과 다르니 마땅히 알려질 기회가 없어 안타까
울 뿐이다. 그러므로 본 회에서 그 행장을 살펴보니 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기
에 먼저 인쇄에 붙여서 전국에 공의 아름다운 행적을 전파하고, 비각을 세워 전면
에 아름다운 행적을 오래전하여 선행을 더욱 표창하고 미속을 깊이 돈독하려는 뜻
으로 유론에 따라 찬양한다.
慕聖公會
회 장 판서 김종한
부회장 승지 김병홍
찬성장 판서 박기양
고 문 보국 민병석
고 문 판서 민영린 등
≪慕聖公會讚揚事 원문≫
宣廟丁亥遭艱泣血行素三燧居湮深日省墓當壬辰亂輸糧募兵赴忠毅公權應銖幕指陳
兵事利害六月夜往三閭店斬賊 五級追至朴淵設仗殺掠權公許以保障之才又赴永川
軍糧乏盡夜走昌巖得米百餘斛資軍食從權公之東都指劃甚密府尹邊應善判官朴毅長
稱讚不己登仙桃山見賊潛出北門馳報兵使朴晉翌日賊咸遁去九月行在除主簿癸巳
二月往于聞慶斬賊六級獻 首+或 于王世子行宮七月從權公破賊昌巖又從經理楊鎬
謀燒殺遂歸養老母戊戌除通訓大夫司僕侍正事載崇顯錄其后訓練院奉事南溪公夢濂
副護軍梅源公全仁后泰文時植承襲先儀爲人模楷 ㅁ+意 公之歿己久矣輿情之景仰
愈久彌新揆其實蹟宜印表門闡揚而時制不古當在泯 ㅁ+黑 無聞故本會按其狀而難
可韜王先付 침(판새길침)梓播懿蹟於八域使建碑閣壽 令名於千祀益彰善行永敦美
俗之志衣儒論讚揚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