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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이미지와 시간성 인식
우리는 정초만 되면 신춘문예에 집중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모르지만 신춘문예라는 화려한 등장을 기대하는 문학청년들이 많았다.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신춘문예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40년대에 폐간된 후 8. 15부터 속간은 되었으나 6. 25까지 신춘문예에 대해서만은 웬일인지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5년에 다시 신춘문예가 시작되었는데 그 무렵 발행된 한국일보에서도 실시하게 되어 마침내 3개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서 많은 시인들이 등용되었다. 여기에서 50년대에 당선한 시인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 : 전영경「선사시대」(55년), 박봉우「휴전선」(56년), 신동문「풍선 기」(56년), 김영옥「표정」(57년), 윤삼하「응시자」(57년), 안도섭「불모지」 (58년), 신동엽「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59년), 김재원「문」(59년), 최 원 「효종대왕릉망부석」(60년)
-동아일보 : 황 명「분수」(55년), 강인섭「산록」(58년), 박열아「전율지역」(60 년), 정진규「나팔 서정」(60년)
-한국일보 : 김규동「우리는 살리라」(55년), 권일송「불면의 흉장」(57년), 윤부 현「제2의 휴식」(58년), 주문돈「꽃과 의미」(59년)
이들은 그 시적 경향이 각기 독특한 특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응모작품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역량있는 신인들인 만큼 모두가 수준 이상의 수작들이 많았다. 올해도 경향각지의 신문들이 대거 신춘문예를 공모하여 많은 시인들을 등용시켰는데 필자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심사를 맡아서 권영민 전 서울대 교수와 손해일 펜부이사장과 함께 좋은 시인 한 사람을 뽑았다.
8월의 뒤란은 출출하다
태양이 볼륨을 높이다가
긴 치맛자락 끌고 내려오면
슬픔도 허기 채워 가라앉고
그 반대쪽으로 풀벌레 소리가 화창하다
소란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게 한다
그러나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진 말자
살금살금 고민하며 다가오는 잎새
그 잎사귀 몇 잎 입에 물면
바람의 손가락도 짭조름해진다
빨랫줄 옷가지들이 바람을 몹시 귀찮아한다
옷가지들에 쫓겨난 바람이 장독대를 드나들며
뒷짐 지고 하늘바라기를 하거나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 담벼락에 주저앉거나
풍경 속으로 그림자를 흐느적거리며 사라지게 한다
땡볕이 넓적해지면 계절이 새롭게 열린다
빛들도 숙성되며 바스락거리는 동안
내 인생의 무늬도 옅어지는 것은 아닌지
찬란한 정오
장독대에 나를 활짝 펼쳐 놓는다
--봉윤숙의「장독대가 활짝 피었다」전문
농민신문 당선작품이다. 이 작품은 ‘도시 아파트 생활로 사라져가는 ‘장독대’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내세운 시상 전개와 언어 구사가 신선했다. 시의 첫 연에서는 ‘출출한 8월의 뒤란’으로 햇살이 내려오면 ‘슬픔도 허기 채워 가라앉고’ ‘반대쪽으로 풀벌레 소리가 화창하다’라며 전경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서 장독대로 다가오는 ‘잎사귀 몇 잎 입에 물면’ ‘바람의 손가락도 짭조름해진다’ ‘옷가지들에 쫓겨난 바람들이 뒷짐 지고 하늘바라기를 하거나’ ‘땡볕이 넓적해지면 빛들도 숙성되고 바스락거린다’ 같은 공감각적인 비유와 상상력 전개가 돋보인다.‘는 심사평을 받았다.
그러면 지난 신년호 『국보문학』의 작품들은 어떠했는가. 우선 ‘낙엽’과 상관한 시간성의 인식을 새롭게 조망하는 작품들을 많이 대할 수가 있었는데 지난 가을의 여음(餘音)들이 지금까지 메아리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탯줄잡고 매달렸다
뱃속에서 태어난 젖줄잡고 매달렸다
험한 세상살이 부모님 손에 매달리고
이젠 남편 품속에 매달린다
자식에게도 매달려 보지만
가꾸자꾸 밀려나네
달리기만 하는 말없는 세월 앞에
모든 걸 내려놓고 아양을 부려도 보고
생긋생긋 웃어도 보지만
서럽기 한이 없네
나는 매달리는데 이골이 났다
오늘도 떨어질까 두 손 꼭 잡고
이 악문다
흥, 내가 떨어지나 봐라.
--김선영의 「낙엽」전문
보라. 김선영은 ‘매달림’에 대한 감성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낙엽’이라는 시간성에서 생성하는 변화 즉 ‘떨어짐’에 대한 역설적인 진실이다. 그는 ‘부모님’, ‘남편’ 그리고 ‘자식’이라는 화자에게서 ‘자꾸 밀려나’는 ‘말없는 세월 앞에’서 ‘서럽기 한이 없’다는 진실을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결론에서 ‘흥, 내가 떨어지나 봐라’라고 ‘매달림’과 ‘떨어짐’에 대한 대칭적인 간극(間隙)으로 공감을 유로하고 있다.
응축된 삶의 허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냄새일까
아니면 미지의 맛일까
부르짖는데도 들을 수 없는 소리
겹눈으로 보이는 퇴색된 색깔
오감을 동원해도
더듬게 되는 낙엽 쌓인 길이라
낙엽 속을 헤치고
지난해 떨어진 가랑잎 찾아보는
기억 속의 기억에 빠져
사색하게 하는 그런 길이 있다
발자국조차 허용하지 않는
낙엽들의 추상적 군무
올해도 어김없이 시작되었나니
쓰다만 시구 완성 위해
서리로 얼어버린 새벽녘 되면
입김으로 그림 그리며
공원 산책로에 나서야겠다.
--유 유의 「산책로엔 낙엽이」전문
유 유의 ‘낙엽’은 어떠한가. 그는 ‘낙엽들의 추상적 군무’에서 ‘사색하게 하는 그런 길’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응축된 삶의 허상에서 /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냄새일까 / 아니면 미지의 맛일까’라는 허상과 실재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낙엽 쌓인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결국 그가 추구하는 ‘쓰다만 시구 완성 위해’서 필요한 사색의 한 방편인지도 모른다.
체온을 데우고 간 비
심장 속으로 스며든다
버린 것이 그리워서
젖은 마음을 밟고 간다
가녀린 잎새의 떨림은
그대의 눈물일까
몸부림치며 흐른다
지쳐버린 초록빛에
계절이 그린 그림은
보내야 함이 서러워서
하늘도 울고 있다
빗물에 젖은 바람에 업혀
어딘가를 지나갔을 낙엽 한 잎
젖은 가슴이 발등을 적신다.
--채경자의 「낙엽에 젖는 비」전문
채경자는 ‘어딘가를 지나갔을 낙엽 한 잎 / 젖은 가슴이 발등을 적신다.’는 시적 정황(situation)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그가 젖은 낙엽이 적시하는 ‘그대 눈물’이라는 현실적인 대입이 바로 그가 탐색하는 낙엽과 시간성이 상관된 인식이다.
그는 ‘보냄’과 ‘그리움’이 동반하는 ‘가녀린 잎새의 떨림’으로 우리들의 실재(實在)를 더욱 명징(明澄)하게 현현함으로써 낙엽이 던져주는 이미지는 숙연하게 투영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상황 묘사와 메시지의 융합을 위한 시적 구조를 간명(簡明)하게 유로한 점은 더욱 주제의식의 확대와 함께 낙엽이 공유(共有)하는 함의(含意)가 충분하게 발현되었다는 데 눈길을 이끌고 있다.
본래 이 낙엽에 대한 이미지는 고적함과 쓸쓸함이다. 옛 한시에서도 ‘여름엔 무성하던 것이 / 가을에 떨어진 게 슬프다(嵯夏(茂(而秋落)’라고 해서 슬픔과 동시에 그리움까지도 형상화한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의「증언하는 캘린더」에서는 ‘낙엽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낙엽은 결코 죽지 않는다. 저기에서 저렇게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보다 새로운 생(生)이 준비되어 가고 있는 소리이며 저기에서 저렇게 무수한 단풍이 가지각색 빛깔로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은 나무보다 더 큰 생명의 모태를 영접하는 몸치장인 것이다.’라는 말로 보편적 인식을 전환시키고 있다.
이처럼 고독하고 그립고 기다림의 가을은 낙엽의 시간적 변화에서 우리는 시적 발상이나 주제의 투영에 많은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 임명규는 ‘길을 따라 산중턱 양지 밭에 영면(永眠)의 집이 있었다 / 잠간 쉬려고 그 옆에 누워 세상을 닫았다 / 얼굴 위로 낙엽이 떨어졌다 / 서산마루에 노을이 곱게 물들어 갔다 / 눈을 감으니 더욱 황홀했다(「가을이 떠나는 숲속」중에서)’거나 권희경은 ‘초록 노랑 빨강 / 노을 따라 물들어 / 슬픈 삐에로의 미소만큼 / 텅빈 가을 속으로 달리고 있구나(「늦가을 속으로」중에서)’, 이우창도 ‘뭉게구름이 해를 가려 미소를 주었는데 / 떨어진 낙엽만 보고 기억을 찾는다(「가을 감사」중에서)’, 이철호가 ‘이 가을 오케스트라가 / 내 귀와 눈을 멀게 한다면 / 난 아직 / 고동치는 인생의 가을에 있는 것이지요(「가을의 사랑은」중에서)’ 그리고 이계순이 ‘시작과 마침은 / 태초부터 동일점인 것을 / 이제사 새삼스레 아파온다(「가을」중에서)’라는 어조로 가을의 이미지를 살피고 있어서 시간성이 갖는 다양한 변화의 현상에서 새로운 주제가 창출되고 있다.(『국보문학』 2014. 2.)
‘그리움’에 투영된 자아의 인식
벌써 2014년 새해를 맞는다. 지난 연말에는 모두가 분주하게 마무리를 잘 하고 이제 새로운 목표를 향해서 힘차게 도약하는 기세로 각오를 다지는 한 해를 시작한다. 해마다 ‘年年有餘’라는 연하장을 써보지만 시인들의 마음은 항상 비어있다는 순정적인 상념으로 사유(思惟)하고 있다.
작년 12월호『국보문학』에서는 송년 특집으로 ‘움막문학회’ 회원 작품을 집대성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흡인(吸引)한 바가 있다. ‘가슴에 / 恨맺히도록 부르고 싶은 / 간절한 詩를 갖고 싶었습니다(이승연의 「山寺에서」중에서 )’는 어조와 같이 그들이 시에 목말라하는 현장을 찾아본 것이다.
상호간의 진정한 대화를 하며 삶의 위험성이 위협받을 때 서로 보호하고 최후의 예의적으로 믿고 친밀한 결속과 서로 모순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머리 맞대고 인간성과 자유의 회복을 겨냥하는 움막문학은 아프게 노래한다
움막문학회 공정식 회장의 인사말과 같이 ‘상호간의 진정한 대화’의 장이 바로 움막문학회이다. 모두 15명의 회원들이 주옥같은 시편을 발표해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경남권을 중심으로 거창, 합천, 마산, 창원, 부산, 그리고 경북 고령 일대에서 활동하는 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그리움’이라는 내면의식을 표출하는 특성을 읽을 수 있는데 이 ‘그리움’의 이미지는 회원 스스로 자아인식을 통한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로 농촌의 전원과 연결되는 서정성은 지나간 추억의 체험으로 재생되는 자연과 가족간 혹은 이웃간의 정경(情景)을 통해서 적시(摘示)하는 진솔한 고백적인 시심(詩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저 끝에서
아무도 몰래
옅은 살갖 적시며 파고든 봄비에
떨면서 깨어난 동면인가
진한 향기 대신
비릿한 살 냄새 풍기며
감추이듯 내 보인 화사한 자태
올해도 예고 없이 찾아온 꽃샘추위
끝내 오래 머물 수 없는 슬픈 몸부림
짧은 행복위해
고운 꽃잎 흩어지고 나면
고통의 체액 모아
가지마다 무성한
바람 스치는 날만 기다리는가.
--남형호의 「목련화」전문
그렇다. 우선 남형호가 구현하려는 ‘그리움’의 표상은 사물 ‘목련화’를 통해서 전개하는 시적 정황(situation)이 ‘그리움’의 생성에서부터 결론적으로 ‘짧은 행복위해’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슬픈 몸부림’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목련꽃이 피는 어느 봄날의 추억이 아련하게 재생되고 있으나 이는 ‘바람 스치는 날만 기다리는가’라는 의문형의 어조에서 엿볼 수 있듯이 ‘꽃샘추위’라는 현실성이 상관함으로써 인식의 범주는 단순하게 ‘목련화’라는 이미지만 적시한 것은 아니고 좀더 폭넓게 옹립(擁立)하는 정서의 일단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고요히 달빛이
청아하게 부셔져 내렸을까
풀잎에 옥(玉)구슬 맺히어서
한 올 별빛인 듯 피었고..
밤새워
꽃잎 위에 미소를 짓더니
햇살이 너무나 수줍어서
자꾸만 작아지는
투명하고 찬란한 이슬의 영롱함이여
하염없이 안겨오는 아픔이여
그리움 가득히 고여
가슴 저리는데
햇살 밝아
녹아들고 말이 없네.
--김연당의 「이슬」전문
김연당도 동일한 ‘그리움’의 이미지를 추출하고 있는데 이는 ‘이슬’이라는 사물에서 이미지를 추출하는 시법이 앞의 남형호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러한 어떤 사물에서 다양하게 분출하는 이미지의 감도(感度)는 외적인 사물에서 내적인 관념이 우리 인간본연의 정한(情恨)에서 창출하는 보편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요한 달빛’과 ‘꽃잎의 미소’ 그리고 ‘하염없이 안겨오는 아픔’에서 감지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가 구가하는 ‘그리움’이 형상화하는 상황을 잘 처리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움 전하려고 길가에서 피었구나
누구의 가슴 속에 심어둔 연민이라
늦여름
햇살 한 아름 부둥켜안은 채로
말 못할 속마음을 참다가 참으려다
긴 대궁 가지 끝에 망울망울 꽃으로 피어
바람결
그 앏은 품에다 그려 넣은 일편단심
미워서 하도 미워 끝내 말 못하고
눈물도 말라버린 노랑 꽃 마타리야
긴긴날
사랑으로 그린 그 마음 물든 채로.
--이용호의 「마타리꽃」전문
이용호의 ‘마타리꽃’에서는 사물의 의인화로 우리들 인간의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자연 사물의 서정적인 시적 구성과 언어의 표출은 잔잔한 우리들의 심성을 한 대궁 ‘마타리꽃’의 비유로 되살아나고 있어서 우리 서정시의 진수(眞髓)를 음미하는 ‘사랑’과 ‘그리움’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은유적인 화법(話法)으로 전개한 작품의 구성에서도 ‘누구의 가슴 속에 심어둔 연민’과 ‘그 얇은 품에다 그려 넣은 일편단심’이라는 인간 내면에 잠재한 진실이 결론적으로 ‘사랑’의 표상으로써의 ‘그리움’이 적절하게 현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한다.
정자나무 아래
은행나무 곱게 물들어
환상처럼 흩날리던 눈송이로
아무도 알 수 없는 순간에
너는 내게 정겨움으로 다가 왔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너는 힘든 어깨
피곤한 삶에 실려 왔을지도 모른다
무색. 무미, 무표정함으로
처음 내 발등을 찾았을 때
무심히 지나치는 바람결로 알았다
삭풍 끝에 실린 마음
애처롭던 그 겨울
어쩌면
사랑도, 미움도, 기다림도 아닌
무향의 그리움으로 다가왔을지도.
--서옥련의 「무향의 그리움」전문
서옥련도 ‘무향의 그리움’이라는 정황을 통해서 이 ‘그리움’의 원류를 탐색하여 우리 인간과의 융합에서 야기되는 갈등과 고뇌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심도 있게 추적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그리움이라는 무형의 관념세계가 ‘환상처럼 흩날리는 눈송이로 / 아무도 알 수 없는 순간에 / 너는 내게 정겨움으로 다가왔다’는 어조로 보아서 이미 예측된 상황이 아니고 ‘필연인지 우연인지’를 자신도 의아해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무향이다. 그리고 그는 ‘무색. 무미, 무표정함으로 / 처음 내 발등을 찾았을 때 /무심히 지나치는 바람결로 알았다’는 인식의 시간은 ‘삭풍 끝에 실린 마음 / 애처롭던 그 겨울’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의 결론으로 ‘사랑도, 미움도, 기다림도 아닌 / 무향의 그리움’이다
이 밖에도 김남규의 ‘이 가을 소리에 / 함초롬히 님 그리워진다(「가을은 오는데」중에서)’는 그리움과 함께 ‘靑山에 고운 꿈을 먹고 / 海雲같이 넓은 理想의 世界 / 꿈 많은 東山에 올라 읊조리며 / 그날의 詩 한 편을..(「그날」중에서)’ 갈망하는 깊은 심려(心慮)의 그리움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또한 김영식의「풍경(風磬)소리」, 심성희의「삶」, 이승연의「山寺에서」, 이옥남의 「그 세월에」가 작품성이 투철한 이미지의 창출을 위한 고뇌의 흔적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전해말은 작품 「추억이 오는 언덕」에서 ‘오늘도 / 추억이 오는 언덕에는 / 사무치는 그리움과 기다림이 / 서로 다정히 만나고 있다.’는 ‘그리움’의 주제를 ‘추억’에서 회상하면서 그 ‘기다림이’ 바로 ‘그리움’으로 화해하는 것이 ‘잊혀진 기억 속에 한때의 / 순간들이 숨어서’ ‘그리운 그 사람’으로 각인되고 있어서 그리움의 승화는 더욱 공감을 확대하고 있다.
이렇게 읽어본 ‘움막문학회’의 특집은 모두가 이미 전원생활과 익숙해져 있어서 자연 서정을 원류로 한 교감의 심혼(心魂)들이 더욱 시적인 진실의 탐구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적 발상이 바로 우리 현대시의 모태가 되는 당연성을 이해하게 된다.(『국보문학』 2014. 1.)
시적 의미성에 대한 개성과 정서
우리 현대시의 주안점은 대체로 시적 상황(situation)의 설정과 언어을 통한 이미지의 투영 그리고 의미성의 부각이다. 이 의미성은 주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한 시인의 삶의 궤적(軌跡)에서 획득한 체험의 소산물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현대시의 구성은 시창작의 지침에서 발췌해보면 첫째가 운율(시의 음악성)을 중시한다. 시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외형율(外形律)은 우선 음수율로서 3.4.3.4조 등의 율격의 정리가 확연하게 나타나는 정형시이지만,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현대시에는 내재율(內在律)이라고 해서 안으로 감추어져서 분별하기가 약간 난해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내재율은 호흡법으로 가늠해 보면 어디에서 한 박자 쉬고 가야하는지가 관건이 된다.
다음에는 이미지(image-시의 회화성(繪畫性))를 말한다. 이는 마음의 그림이니 언어의 그림이니 하는 표현으로 시인의 상상력으로 언어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처럼 이미지를 창출하는 요소는 우리 신체가 가지고 있는 오관(五官-눈귀입코손)에 의해서 지각하는 외적 사물에서 추출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필수적으로 대입(代入)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제(시의 의미성)이다. 이 주제는 작품의 핵이 되는 메시지이다. 언어의 나열만 잘 하면 좋은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내용이 있어야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 주제는 그 시인의 체험이 우리들의 정(情-七情 : 喜怒哀樂 愛惡慾)에 의해서 생성되고 이 체험이 바로 이미지나 주제로 연결되는 특성이 있다. 이 체험에는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이 있다. 태어나서 지금 현재까지 살아온 경험이 직접 체험이며 실제로 직접 체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선지자나 선각자가 체험하고 기술해 놓은 선험(先驗)을 독서를 통해서 체험하는 것이 간접 체험이다. 이렇게 시의 구성 원리를 이해하면 시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 달 발표된 작품들은 대체로 수작(秀作)들이 많았다. 우리 시인들이 창작에 좀더 많은 열정을 투여한다면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우선 특별 초대시로 수록한 손해일 국제펜한국본부 부이사장의 작품을 읽어보기로 하자.
바다는 육지가 그리워 출렁이고
나는 바다가 그리워 뒤척인다
물이면서 물이기를 거부하는
모반의 용트림
용수철로 튀는 바다
물결소리 희디희게
안개꽃으로 빛날 때
아스팔트에 둥지 튼 갑충(甲蟲)의 깍지들
나도 그 속에 말미잘로 누워
혁명을 꿈꾼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덧없는 날들이 어족처럼 데리고
시원(始原)의 해구(海溝)로
우리가 어느 바닷가 선술집에서
불혹을 마시고 있을 때
더위 먹은 파도는 생선회로 저며지고
섬광 푸른 종소리에 피는
새벽바다 안개꽃.
--손해일의 「새벽바다 안개꽃」전문
그는 ‘새벽바다’와 ‘안개꽃’이라는 시적 상황을 설정하고 ‘물이면서 물이기를 거부하는 / 모반의 용트림’이 작법(作法)상의 기(起)에 해당하는 도입부에서 비장한 메시지를 적시(摘示)하고 있다. 그는 다시 ‘물결소리 희디희게 / 안개꽃으로 빛날 때 / 아스팔트에 둥지 튼 갑충(甲蟲)의 깍지들 / 나도 그 속에 말미잘로 누워 / 혁명을 꿈꾼다’는 ‘새벽바다’의 기상이 그의 진솔한 시맥(詩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시원(始原)의 해구(海溝)’를 갈망하지만, ‘덧없는 날들의 어족’과 동행해야 하는 현실적인 모순을 화해로 흡인하려는 정서의 발흥으로 현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김용복의 ‘꿈’은 어떠한가.
나이와 색깔이 있고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며
임자가 따로 없다
젊었을 때는 높고 컸지만
나이를 먹으며 낮고 작아졌다
알맹이가 없으며
맛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꿈은 잡히지 않는 환상이요
무지개 잡으러 들녘에 갔더니 사라졌다
별을 따러 산에 오르는 것 같은 것
들녘에서 은인을 만나고
별을 따러 갔다가 지혜를 얻는 것이
꿈이다.
--김용복의 「꿈(望)」전문
그는 이 ‘꿈’에 대한 이미지와 은유(隱喩)적인 적시로 ‘들녘에서 은인을 만나고 / 별을 따러 갔다가 지혜를 얻는 것이 / 꿈이다.’라는 어조로 결론의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꿈’에다가 바란다는 망(望)자를 동시에 적시함으로써 그가 여망하는 묵시적(黙示的)인 이미지가 담겨 있다는 점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그는 결국 이 ‘꿈’은 ‘임자가 따로 없다’거나 ‘젊었을 때는 높고 컸지만 / 나이를 먹으며 낮고 작아졌다’ 그리고 ‘알맹이가 없으며 / 맛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는 보편적인 언술로 그가 분사(噴射)하는 시어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천도의 ‘촛불’은 그가 응시한 사물에서 지각하게 되는 생명성과 상관을 이룬다.
너를 죽여 밤을 밝히고도
비명도 몸부림도
울부짖음도 없다
오직 너의 생명을 태워
누군가의 빛이 될 뿐
흐르는 건
고통의 눈물이 아니다
기쁨 희생 헌신 보람
영광의 눈물이다
진정
희생이란 그런 것이다.
--이천도의 「촛불」전문
그렇다. 그는 ‘비명도 몸부림도 / 울부짖음도 없다’는 화자의 어조는 무언(無言)으로 ‘밤을 밝히’는 ‘촛불’과의 시적 교감이다. 여기에서 주제는 ‘기쁨 희생 헌신 보람 / 영광의 눈물이다’라는 확연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촛불’은 ‘오직 너의 생명을 태워 / 누군가의 빛이 될 뿐’이라는 결론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촛불’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그의 심저(心底)에서 작동한 정서의 원류로 흐르고 있다. 우리 현대시에서 강조하는 이미지와 은유의 탐색은 작품의 멋과 맛을 더욱 가미(加味)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많은 시인들이 이의 연구를 위해서 열정을 쏟고 있다. 그렇게 치열한 탐구정신이 결여되면 좋은 작품이 탄생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지난 달 신인상으로 데뷔한 강도헌은 어떠한지 살펴보기로 하자.
다름질한다
마름모꼴이 보기 싫어도
어떤 모양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겸손하게 만드는 모양
언제,
표현도 할 수 없는 천부적 기질을
태고 때부터 있었나
얇게 쓰려 내린 눈동자를 크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만물을 본다
닥치는 대로 흩날리고 뿌리는
손끝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민중의 삶.
--강도헌의 「찾아오는 새소리」전문
그는 ‘표현도 할 수 없는 천부적 기질을’ 하늘로 비상하는 ‘새’에게서 듣고 있다. 필자가 심사를 해서 당선한 신인의 작품으로서는 상당한 습작기간을 거친 작품이라는 평가를 한 바가 있다. 그는 ‘겸손하게 만드는 모양’이나 ‘얇게 쓰려 내린 눈동자를 크게 보면 / 세상의 모든 것이 만물을 본다’는 예지(叡智)적인 사물관이 그의 특성으로 현현되고 있으나 그가 탐색하고자하는 주제는 ‘자유로울 수 없는 민중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와 대칭으로 부자유한 ‘민중의 삶’이 현실적인 갈등과 고뇌에의 조화를 위한 해법일 수도 있다는 역설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도헌의 데뷔에 대해서 ‘네 꿈이 / 이곳에서 삯이 될 때 / 묵직한 한 그루 / 국보문인협회는 너에게 작은 햇살을 불러 / 절차탁마(切磋琢磨)가 되겠다(황주철의 「도헌 씨께 보내는 메시지」중에서)라는 격려의 언어도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이일현의 「가을맞이」, 조환국의「가을여행」, 박희균의「늦가을」, 황주철의「가을이 가네」, 그리고 정진해의「비오는 날」등이 사라져가는 가을에 관한 이미지를 투영하면서 세월의 덧없음을 토로(吐露)하고 있어서 주목하게 된다.(『국보문학』 2013. 12.)
가을 이미지와 시적 진실
가을이 완연하다. 계절이 바뀔 적마다 우리들의 심지(心地)는 그 깊이를 더하는 이미지가 발굴된다. 가을 이미지는 어떠할까. 우선 가을 하면 오곡백과가 결실해서 주렁주렁 매달린 나뭇가지를 쳐다보기만 해도 풍성함을 느낀다. 풍요의 계절이다. 이러한 풍성한 가을에는 우리 문단에도 문학행사가 많이 열린다. 11월 1일은 ‘시의 날’이다. 육당 최남선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1908년 11월 1일을 당시 한국시인협회와 한국현대시인협회가 공동으로 정하고 지금까지 번갈아서 행사를 하고 있다.
이 ‘시의 날’ 선언문에서는 ‘시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다. 우리는 시로써 저마다의 가슴을 노래로 채워 막힘에는 열림을, 어둠에는 빛을, 끊어짐에는 이어짐을 있게 하는 슬기를 얻는다. 우리 겨레가 밝고 깨끗한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그러한 시심을 끊임없이 일구어 왔기 때문이다. 이땅에 사는 우리는 이에 시의 무한한 뜻과 그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하여 신시 80년을 맞이하는 해, 육당 최남선의「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소년』지에 처음 발표한 날, 십일월 초하루를 ’시의 날‘로 정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올해가 벌써 27회째이다. 한국시인협회가 서울 문학의 집에서 시행하는 행사에는 박원순 서울 시장이 참석해서 ‘시의 도시, 서울’ 선언문을 낭독하고 문학 5단체(한국문협 등)가 함께 하는 특별한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시이며, 거짓말 시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이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유린 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팍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이 글은 1987년 당시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이었던 권일송 시인과 시를 무척 사랑했던 소년한국일보 김수남 사장이 함께 발의하고 시낭송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당시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동의하고 또한 한국시인협회가 동참함으로써 ‘시의 날’이 제정되고 위와 같은 ‘시인선서’가 2004년에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발표하였다. 이렇게 우리 문단의 소식을 전하다보니 지난 10월호『국보문학』에 발표된 작품 읽기가 늦어진 것 같다. 우선 지난호에는 완연한 가을의 이미지를 많이 창출하고 있다는 특징을 읽을 수가 있다.
자전거에 올라앉은
가을 밭 풀 비린내
하얀 억새 손끝이 바퀴살이 걸렸다
참 맑다
비틀비틀한 이 길이 가을인가?
--김태희의 「가을」전문
김태희의 가을은 약간 어눌한 이미지가 다가온다. 그는 시조로 중앙리보에서 7회나 입상한 시력(詩歷)이 있어서 운율에 남다른 애정으로 시창작을 하고 있다. 이후에 현대시도 쓰고 있으나 일반적인 시의 구성보다는 그 흐름이 완만하게 진행하는 특성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는 ‘하얀 억새 손끝이 바퀴살이 걸렸다’거나 ‘참 맑다 / 비틀비틀한 이 길이 가을인가? ’라는 어조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보편적인 상상력을 초월해서 하나의 이미지를 완성하려는 그의 진실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또한 문장에서도 ‘이 길이 가을인가?’라는 의문형으로 종결함으로써 이 ‘가을’에 대한 정의를 통한 시적주제는 잠시 유보하는 시법으로 구성하고 있다. 다시 그는 함께 ‘10월의 시인’으로 발표한 「코스모스의 미소」에서도 ‘가을’의 이미지를 추출하여 ‘침묵인가 미소일까? / 가을 하늘 몇 살일까?’라는 등의 의문형의 시법은 그가 구사하는 시적 구성에서의 개인적인 특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가을 나뭇잎 바스락 소리
기다리던 갈바람 마중하네
을숙도 뙤약볕에 땀흘리며
모시조개, 바지락 캐던 한 여름도
소슬바람이 대나무숲을 지나고
파아란 하늘 양떼구름에 물러가니
식구들 둘러앉은 돗자리 평상에는
뛰놀던 개구장이 잠 청할 때
귀뚜라미 우는 소리 가을을 알리네
--홍대식의 「가을 소식」전문
홍대식은 ‘가을 소식’을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분사(噴射)하는 이미지즘(imagism)의 형태로 시법을 전개하고 있다. ‘을숙도 뙤약볕에 땀흘리며 / 모시조개, 바지락 캐던 한 여름’, ‘대나무숲’이나 ‘파아란 양떼구름’ 그리고 ‘식구들 둘러앉은 돗자리 평상’ 등의 시각적인 형상화는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는 형상이며 다시 ‘가을 나뭇잎 바스락 소리’와 ‘귀뚜라미 우는 소리’ 등은 청각적인 이미지로 시를 구성하고 있다. 이처럼 이미지의 다양한 창출은 현대시가 요구하는 시법의 하나로 시의 향취(香臭)를 더욱 상승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현대시는 단일성 이미지만으로는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할 수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단조로운 묘사나 감상적인 스케치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연재시로 함께 발표한 작품「코스모스 편지」에서도 ‘코끝이 찡한 가을 하늘에 / 짝을 찾는 고추잠자리 / 뱅글뱅글 반가운 맴을 돈다’거나 ‘모란꽃 전설이 서글퍼 / 다시금 피어날 계절을 대신하며 / 가을 사랑으로 피어난 코스모스’라는 어조가 가을에 대한 이미지를 감도(感度) 높게 형상화하고 있다.
오늘 가을 들녘을 보았습니다
그리도 야속한 사람인데
파란 하늘에 흔들리는 당신 얼굴이
고추잠자리와 함께다니네요
가을 바람은 당신 같은 바람이고
코스모스는 당신 같은 미소 같고
고개 숙인 해바라기는 당신 마음 같아
--중략--
또다시 당신이 그리워질 때면
나는 이렇게 홀로 들녘을 걷겠지요
가을은 당신과 나를
지난 세월로 몰고 가는 그리움입니다.
--이영순의 「가을은」중에서
이영순의 ‘가을은’ ‘가을은 당신과 나를 / 지난 세월로 몰고 가는 그리움입니다.’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을=그리움’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다. 하나의 실생활(real lige)과 상관된 계절병적인 심려(心慮)를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당신’과 ‘나’의 시적화자는 가상이 아닌 실재(實在)의 체험에서 투영된 이미지로서 ‘그리움’의 주제를 더욱 명징(明澄)하게 현현해 주고 있어서 공감을 확산시키는 효과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큰 열매, 청정한 공기를 생산하는 너
너에게서 상실의 냄새가 난다
나무가 사는 숲속에서는 사람 냄새가 나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마치 나눔과 사랑이 모두 제 것인 양 자랑하는 너
너의 냄새에 머리가 띵하구나
어디를 가나 추함은 눈 보듯 뻔하다
눈 질금 감아보면 나는 없고 너만 있는데
무엇을 그리 거머쥐려 몸부림이냐
마치 모든 계절을 자신이 만든 듯 허풍 떠는 네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도 당당한 겨울을 거울로 주마
위선의 너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져 나가고 싶다
점점 더 쌓여만 가는 너의 욕심을 무시하며
은은한 목탁소리 버리지 못한 번뇌를 절간에 벗어 놓는다.
--김선영순의 「가을, 그 위선자에게」전문
김선영의 ‘가을’은 ‘위선자’이다. 그 위선은 우리 인간 일상에서 당면하는 갈등이 내면으로 스며들어 현실과 교차할 때 다양한 현상으로 현현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위선의 너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져 나가고 싶다’ 는 기원의 의지가 충만하는 그의 진실이다. 그는 ‘점점 더 쌓여만 가는 너의 욕심’이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없고 너만 있는’ 인간사에서의 고뇌가 계절의 시간성에서 접맥하는 이미지의 결합은 바로 사물과 시간성이 융합하면서 발현된 그의 진정성이며 ‘은은한 목탁소리 버리지 못한 번뇌를 절간에 벗어 놓는다.’는 결론은 그의 시적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국보문학』 2013. 11.)
사물 이미지와 관념 이미지의 차이
현대시의 특징 중에는 사물 이미지만으로 한편의 시를 완성하는가 하면 반대로 관념 이미지만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어느 한쪽이 그르다 옳다가 아니라, 시적 취향이나 시인의 정서에서 사물이나 관념으로 편향하는 경향을 읽을 수가 있는데 이는 자칫하면 편향된 정서의 외길로 흐를 염려가 있을 것이다. 흔히들 사물시(physical poetry)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사상이나 어떤 의지를 배제하고 오로지 사물적인 이미지만을 중시하게 된다. 이미지즘의 시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관념시(platonic poetry)는 어떤 관념의 세계를 드러내어 독자를 설득시키려는 의지가 있어서 인생이나 정감을 관념으로 파악하여 표현한 시를 말한다.
여기에서 이미지의 추출은 우리 인간이 소유한 오관(五官-眼耳鼻舌身))에 의해서 생성하는 오감(五感-視聽嗅味觸)을 통한 지각활동이 바로 우리 정서나 사유와의 교감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에서 외적 요인만 기술하는 사물 이미지와 내적 정서가 주요 주제를 이루는 관념 이미지로 형상화하게 된다. 대체로 사물시라고 하면 오감, 특히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서 분사(噴射)된 외적인 표현을 말하고 관념시는 외적인 자극에 의해서 내적으로 승화한 시법을 말한다.
행구동 저수지 오솔길 따라 걸어가면
숲속 광장 사람 없는 대합실 긴 의자
청솔모 한 마리 역무원인양 졸고 있습니다
열차 시간표에
멎어버린 기적소리 그리운 듯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갤 끄덕입니다
눈 맑은 아이와
젊은 아버지가
출발하긴 너무 이른
멈추기엔 아직 이른
황금빛 눈부신
청운의 역을 지나
붉은 신호등 졸고 있는
정지된 간이역
아 어느새 이곳까지 왔을까
여기는 우리의 반곡역(盤谷驛)입니다.
--정진수의「간이역」전문
이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간이역’이라는 하나의 사물을 시적 소재로 취택해서 완성한 작품이다. 보는 바와 같이 ‘간이역’을 통해서 보이는 외적 묘사에 치중하면서 자신이 행동이나 주변 환경을 기술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자신의 의지와 감정의 흐름이 없는 사물 이미지만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어찌보면 정감이 결여된 딱딱한 스케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작품들은 권영하의「칡꽃 등불 받쳐 들고」, 이혜선의「돌문」, 맹숙영의「밤바다」, 한양정의「서나무」, 정다운의「아버지의 뒷모습」, 최수연의 「담쟁이 넝쿨」, 김선영의「나팔꽃 피다」그리고 김명옥의「꽃과 벌」등에서 사물 소재에서 창출한 이미지군(群)을 만날 수 있다.
난 바보인가 봐
사랑해선 안 될
아픈 사랑을 했나봐
한쪽 가슴은 바보라고
빈 마음으로 잊으라고 하는데
한쪽 가슴은 자꾸만 그리움으로
날마다 못나게끔 서러워 보채는구나
아 두 가슴을 묶어
깊은 강물에 던지고 싶은데
어정쩡하고
못자람 가슴에다 대고
인생이란 이런 거라고
사랑은 모두가 아픈거라고
그냥 아름답게 조율하며 살라고
나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속삭이네
기억의 올무 속에
서성대는 내 삶의 모습이
아무래도 나는 바보인가봐
--이영순의「난 바보인가봐」전문
여기 이영순은 반대로 자신의 감정만 깊숙이 표현해서 ‘나’라는 화자의 독백이 많이 나타나는 현상의 관념 이미지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어서 내적인 정감은 풍부하지만 독자들과의 공감영역이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이길옥의 「생각 허물다」과 「몰입」, 방극률의「내가 나에게」, 이우창의「그녀 생각」, 정다겸의「맘」연작 그리고 박범수의「변화」등이 관념 이미지로 소재를 설정했거나 내용을 풀어나갔다.
이처럼 사물시나 관념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스케치나 독백이 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우리 시법에는 사물과 관념의 이미지를 적절하게 융합(融合)해야 한다는 창작법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물과 관념의 이미지의 융합은 취택된 소재가 사물(가령 산, 강, 돌, 나무 등등 외적인 대상물)이라면 시적인 상황 설정에서 사물 이미지를 도입하고 다시 정감이 우러나는 관념 이미지로 서로 교감시키는 시법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생성하는 시이론은 김춘수가 말한 「존재의 감각과 의미의 의지」중에서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원시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관념(의미) 이전의 관념이 장차 거기서 태어날 관념의 제로지대에 있기도 하다. 이 지대에서 야기되는 사건들은 질서가 없는 듯하지만 그것은 관념의 쪽에서 바라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 사물 이미지란 관념이 없는 순수 이미지를 말하고 관념 이미지는 사물 이미지에 인생이나 사회의 어떤 관념이나 의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미국의 신비평가 랜슴(J.C. Ransom)은 사물시와 관념시를 비판하고 바람직한 시로서 형이상시(形而上詩-metaphysical poetry)를 내세우고 있다. 시는 사물 이미지만으로는 편협한 것이 되므로 사물과 관념, 감각과 사상이 통합된 시가 가장 바람직한 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형이상시라는 것인데 말하자면 사물시와 관념시의 장단점을 보완해서 새로운 타입의 시를 창작하는 것인데 이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데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대를 생각하며
새벽녘 불어오는 바람결에
내 마음 실어
그리움의 향기 띄웁니다
가득하게 떠오를
그대를 가슴에 담으려면
내 마음을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조육현의「일출」전문
여기 조육현은 사물적 소재 ‘일출’(시각적)을 통해서 자신의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간결한 소회(所懷)를 담아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재(제목)를 사물로 했을 경우에는 내용은 관념으로 풀어야 하고 반대로 소재가 관념일 경우에는 내용은 사물로 구성하면 형이상시의 개념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견해가 된다.
이길옥이 작품「몰입」에서 ‘내 넋이 / 헐렁한 외투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 블랙홀에 뛰어들어 / 노숙을 한다’라거나 이우창의 작품「그녀 생각」에서 ‘크게 피지 않아도 기쁨을 주며 / 향기가 코끝에 닿지 않아도 / 여름이 오는 긴 신음을 듣고 있다’는 어조는 조육현의 상황과 다르게 현현되고 있다
차디찬 바위에
제 몸을 녹여 붙이고
버티고 버티며 한 생을 이뤄
마침내 눈부신 꽃을 피워낸
배롱나무 앞에 고개 숙여
합장을 한다
미안하다 나의 시업(詩業)이여
이 작품은 허형만 교수가 오래전에 상재한 시집『그늘이라는 말』에 수록된 작품 「미안하다」전문인데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제목이 관념이지만 내용은 어떠한가. 마지막 한 행에서만 관념 이미지로 타나나지만 전체의 구성은 시각적인 이미지의 사물이다. 보라. 허형만 교수는 ‘바위’, ‘눈부신 꽃’, ‘배롱나무’ 그리고 ‘합장’까지 외적 사물과의 관계에서 투영된 ‘나의 시업’을 향한 자신의 진솔한 심중(心中)이 잘 발현되고 있어서 시의 위의(威儀)를 더욱 심도(深度)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권희경은 다시 작품 「투타연의 폭포는 흐르고」에서 ‘이름 모를 꽃 / 거름되어 붉게 피어나니 / 떠도는 젊은 영혼의 넋이여 / 아름다운 투타연 폭포 / 흐르는 물에 잠시 쉬어 가게나’라고 사물과 관념을 고르게 융합하는 조화가 엿보인다.
한편 맹숙영의 작품 「여름밤 소야곡」에서도 ‘발걸음 멈춘 다리 밑 공터 / 색소폰의 애잔한 소리에 / 귀기울이며 땀 식히는 사람들 / 간헐적 들리는 소리 / 찜통더위를 실어 나른다’라는 어조로 사물과 관념의 교차로 작품성뿐만 아니라, ‘소야곡’에 걸맞는 스토리가 감흥(感興)을 높혀 주고 있다.
이처럼 사물 이미지와 관념 이미지의 차이는 어쩌면 상호 괴리(乖離)의 정감으로 변할 수도 있으나 ‘소재는 사물=내용은 관념’이거나 반대로 ‘소재는 관념=내용은 사물’이라는 보이지 않은 하나의 시법을 상기하면 형이상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남아 있을 것이다.(『국보문학』 2013. 10.)
삶의 궤적(軌跡)과 시적 상상력
지난 8월. 열대야가 계속되는 더위에도 우리 문단에는 쉬지 않고 행사가 많았다. 연중 가장 큰 행사로 소문이 난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린 ‘만해축전’을 빼놓을 수가 업을 것이다. 이 축전에서도 전국의 문학단체가 벌이는 문학제 중에서 한국문인협회가 실시한 제52회 한국문학심포지엄이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번 주제는 ‘문학과 과학의 상생’으로 조병무 평론가의 좌장으로 최진호 수필가, 우한용 소설가, 민병도 시조시인 그리고 박덕규 평론가가 발표를 하고 필자와 곽노흥 희곡작가, 바두순 아동무학가가 지정 토론을 별였다.
전국의 문협회원 약 3백 여명이 모여서 진지하게 진행된 심포지엄은 여느 해보다도 대성황을 이루었고 회원들의 관심도 그 만큼 상승되고 있었다. 이처럼 ‘문학과학’의 상호 상생에 대한 논제는 현재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에 비해서 서로 상생을 탐색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깜깜한 밤에
밝은 태양을 생각한다
먼 우주 공간에서
허공에 뜬 지구를 바라본다
천만 겁으로 얽힌 인연 속에서
금생의 나를 생각한다
지금 이곳에서
매트릭스에 갇힌
나를 느낀다
저 아득한 곳
블랙홀로 이어진
또 다른 우주에서
음양으로 맺어진 내가
광속보다 빠른 영감으로
또 다른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낸다
안부를 전한다.
--안희수의 「또 다른 나에게」전문
이 심포지엄에서 필자는 위의 작품을 예로 들면서 토론에 임했다. 안희수 시인은 서울대에서 지구과학교수로 퇴임한 분이다. 그는 시집『우주의 고도에서』를 발간하면서 필자가 해설을 집필하면서 우리 시와 지구과학이 접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확인한 바가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가 우부공간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이미지가 지구과학자답게 놀라운 상상력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지적 사유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또 다른 나에게’는 그의 존재를 재확인하면서 ‘따뜻한 마음과’과 ‘안부를 전하는’ 등 자아 인식을 차원 높게 교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교신의 흔적은 그의 고뇌스런 소재의 선택과 작품의 전개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한국시인협회가 후원한 ‘한국 현대시 100년을 바로 세운다’라는 주제로 만해축전 한국 현대시 100년 대회 심포지엄을 가졌는데 오세영 시인, 이숭원 평론가, 최동호 시인, 홍성란 시인이 발표를 하고 박현수 시인, 장석원 시인, 오형엽 평론가, 염창권 시인이 지정토론을 해서 많은 관심을 도출했다.
그리고 한맥문학가협회에서는 ‘합천, 그 석비정신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필자가 고향의 선비와 문학을 역설하는 심포지엄이 합천 해인사관광호텔에서 대성황리에 개최되어서 경향 각지 문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바 있다. 여기에서 낭송된 졸작「해인사에서」전문은 다음과 같다.
분명히 이승이다. 아름드리
길목 잣나무 잔잔한 회상
지금도 멈추지 못하는
홍류동(紅流洞) 계곡 물소리
어쩌면 우리 사랑을 잊어버린
날들이 한꺼번에 씻겨지는
은은한 숲 내음
그대여, 오늘은 목탁소리 귀기울이다
가야천 드리운 나뭇잎 하나
둥둥 떠내려 보내지만
묵은 텃밭에 웃자란 잡풀 뜯어내
고뇌와 묶어 흘려 보낼 수야 있을까마는
삐리 삐리 삐리리 산새 울음
젖은 가슴 속 회오리치면
그대여, 절반쯤은 극락이다
일주문 지나 봉황문 홍하문 해탈문 안으로
대적광전 큰 부처님 미소
오오, 나무관세음보살--
가야산 먼 흰 구름은.
지난 달 『국보문학』에서는 특출(特出)한 작품은 없었다. 모두들 염천(炎天)에 지쳤는지 아니면 모두 피서를 떠나서 창작의 시간을 갖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새롭고 지적인 사유의 산물인 작품들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삶이란
수레바퀴다.
굴러가다가
수렁에 빠지기도 하고
돌멩이에 걸려
땀을 뻘뻘 흘리기도 한다.
굴러가다가
도랑에 처박히기도 하고
오르막길에서 숨이 차
헉헉거리기도 한다.
수렁이나 돌멩이
도랑이나 오르막길
삶의 추임새다.
수레바퀴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들이
삶의 추임새다
이길옥의 「추임새」전문인데 평범한 상상력으로 ‘삶’에 대한 진지한 논거(論據)를 투영하고 있다. 그는 ‘삶=수레바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살아가는 동안의 희비(喜悲)가 교차하면서 하나의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또한 그는 ‘삶의 추임새’는 바로 ‘수레바퀴의 발목을 잡는 / 걸림돌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다시 작품「걸림돌」에서도 ‘가장 중요한 때 아니면 / 가장 요긴한 곳에는 반드시 / 몹쓸 심사로 토라진 걸림돌이 있다’고 어조(語調)를 높인다. 이러한 상상력의 근원도 ‘추임새’와 같이 ‘삶’에 대한 그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시적 발상이나 이미지의 창출 혹은 주제의 투영에는 그 시인의 삶의 궤적(軌跡)에서 발현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지나온(살아온) 과거의 재생에서 획득하는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현재의 삶에서 유추하거나 탐색하는 이미지도 있을 것이다.
너와 내가 함께 사는 세상
너무 따지고 살지 말자
푸른 하늘을 보라
넓은 바다를 보라
--중략--
세상사는 동안
싸안으며 삶의 폐지를 곱게 누벼보자
그러다 보면 인생은 살맛이 난다.
이영순의「삶의 폐지」일부이다. 그도 자신의 현재의 사유를 통해서 교훈적인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인생의 살맛’을 위해서 제시하는 몇 가지의 방안은 우리들이 생각하고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상상력의 재생이다. 어차피 우리는 ‘함께 사는 세상’에서 ‘내가 남을 헤아리며 용서하면 / 남도 나를 용서하며 사랑하겠지’라는 결론이다.
내일이면 후회하지 않을
사랑만을 하고 살자
일희일비하는 삶이지만
사랑함으로 행복을 잃지 말자
이제 때늦은 후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픔의 고통일 뿐
홍대식의「내일이면 늦으리」일부이다. 그는 ‘삶’의 정의가 ‘일희일비’라고 추정하고 ‘후회’ 없는 삶을 구현하라는 메시지가 명징(明澄)하다. 그리고 ‘面從腹背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 진실한 사랑만을 주어도 짧은 세월’이라는 어조는 삶과 ‘세월’의 복합적인 상관성을 통해서 구가(謳歌)하는 시적 상상력과 그 진실이 확대하고 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중 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부부로 인연을 맺어
매일 뜨는 태양을 함께 바라보며
부푼 꿈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정다운의 「부부로 산다는 것은」일부인데 일상적인 삶의 형상화이다. 그는 ‘부부로 인연을 맺어’ ‘부푼 꿈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평범성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그의 사유에는 삶의 한 단면을 통해서 ‘때로는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고 / 때로는 원수처럼 싸우기도 / 때로는 헤어지자고 / 시도 때도 없이 힘겨루기를 한다’는 진솔한 삶의 여백을 토로하고 있다.
어광선도 작품 「소박한 행복」일부에서 ‘씨 뿌리며 웃고 / 거둬들인 수확에 웃고 / 맛있어 웃는 부부는 행복하리라’ 는 어조가 역시 삶의 궤적에서 창출한 현실적인 소회(素懷)의 형상화임을 알 수 있다.(『국보문학』 2013. 9.)
시적 화자(話者)의 변용(變容)
현대시의 표현 언어에서 시적 화자(persona)의 역할과 작품의 메시지 전달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일상생활에서 단순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논리적인 기능보다는 정서적인 기능을 중시하는 시의 언어(혹은 시어(詩語))는 모든 사물과 관념의 시적 대상물에 대한 진실을 지적(知的)으로 판별하는 것은 물론, 언어가 지닌 음향의 미묘한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을 통해서 이 신비하고 오묘한 맛의 조화를 이해하게 되는데 특히 우리의 일상적인 담론에서도 말하는 주체(화자)가 있고 말하려는 화제(내용)가 있으며 그것을 듣는 청자(聽者)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처럼 시에서도 화자의 표정과 상황, 그리고 담론(언어와 메시지)의 어조(語調-tone)에 따라서 독자(청자)에게 전달되는 시적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이 화자는 우리가 작품을 창작할 때 등장하는 ‘나’, ‘너’ 혹은 ‘그’라는 인칭대명사를 묘사하는 예를 흔히 대할 수 있는데 사물이나 관념에서 문법상의 의인화로 실제의 ‘나’와 구분하게 된다. 이처럼 어떤 사물을 의인법으로 처리했을 때에는 시적 정감이나 주제의 감도(感度)가 상승하지만, 실제로 ‘나’를 표현했다면 이것은 자신의 독백으로 변해버릴 우려가 항상 남아 있다.
내 이름 석 자 곁에 가만히 내가 눕는다
쓸쓸한 저녁 무렵
돌아보는 이 없는 빈 들녘에서
오로지 내 이름 곁에 몸을 뉘인다
격한 분노도 아픈 시샘도
꿈이라 이름지어
거침없는 시간들을 땅에 묻고
안타까이 지는 석양빛도
회한없이 바라볼 수 있는 나를 위해
내 이름 써 놓고 내가 눕는다
--구자성의「내가 꿈꾸는 자유」중에서
이 작품에서 ‘내 이름 석 자’는 실제로 시인의 이름 석 자가 된다. 물론 시의 발상이나 동기는 나의 체험(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에서 발현되는 것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의인법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나를 위해’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완전히 ‘나’ 개인에 대한 어떤 결심이나 결단같은 정감으로 흐르고 있다. 한편 ‘내 눈 끝은 / 하늘만 바라본다(최민석의「하늘을 본다」중에서)’거나 ‘나는 지금 / 시를 쓰기 위하여 / 문화의 계곡으로 / 자유로운 의지로 / 시를 찾아가고 있다(송형기의「시(詩) 찾기」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나’는 실재(實在)의 자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싫지 않는 마음으로
하늘을 보며 별을 세는
고독한 시간이고 싶다
너와 내가 사는 세상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앟고
기다림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이영순의「기다리는 마음」중에서
이 작품에서는 ‘나’와 ‘너’가 복합적으로 화자를 형성하고 있다. 일인칭과 이인칭이 상호 연결로 자신의 현재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작품도 자칫하면 혼자만의 넋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내가 가서 네게 닿아 / 닻을 내리고 / 내 맘 확 까발려 타는 속 넣어/ 노골노골 / 너를 녹일께(이길옥의「내가 갈께」중에서)’ 혹은 ‘빛의 사람은 / 내가 하늘이다 / 너는 나보다 더 높은 하늘이다(임명규의「빛의 사람」중에서)’ 그리고 ‘모두 어디를 가나 그와 함께 하고 싶겠지 / 한 줌 흙이 될 때까지 / 그가 나와 함께 했으면(김선영의「흥」중에서)’ 등에서 ‘그대’ 혹은 ‘그’와 ‘나’에 대한 화자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작품의 제목이 외적인 요소(사물)일 경우에는 그 사물이 의인화해서 ‘나’나 ‘너’라는 화자가 성립되어 그 사물이 ‘나’나 ‘너’로 변용(또는 대변인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되었음을 알 수 있겠으나 만약에 제목이 일반적인 관념(기다림. 그리움 등등)일 경우에는 그 시를 창작한 시인 자신이 ‘나’로 변한 어조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경우에 독백이나 넋두리 혹은 푸념에 가까운 언술이 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게 된다.
그대는 예전에
보았던 느낌이나
지금 본 느낌이
어쩌면 저리도 같을까
--중략--
쭉 뻗은
자주색 곧은 대공
백자처럼 오붓한 미소
아름다운 그대여!
--허임영의「寒蘭」중에서
이 작품에서는 ‘그대’라는 하자가 있다. 이는 ‘너’나 ‘당신’ 등의 화자가 ‘그대’라는 이름으로 작품의 중심에 서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대’는 ‘한란’이 의인화로 변용되어서 소재 ‘한란’에 대한 구구한 설명이나 시각적인 효과만을 투영한 것은 아니라서 그 이미지와 비유된 어법이 좀 다르게 형상화하고 있다. 다시 ‘당신 / 맘 가득히 / 그대를 바라보기나 했나요(이철호의「사랑을」중에서)’와 같이 ‘당신’이란 화자의 취택으로 효과를 거두는 사례도 많지만 ‘그대’ 대신에 직접 실명이나 직함을 거론해서 작품을 완성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늘 그 자리에 계시기
남들이 모르는 줄 알았습니다
맘먹고 찾아갔을 때
타지 출타하는 날이면
등대 잃은 칠흑바다
사방 면벽의 암흑
길 잃은 탕자가 됩니다
해 없는 꽃이었던가
흔들리지 않은 수목 없고
비에 젖어 덜덜 떨 때
햇살로 데워주시고
양식 넣어 채워주시는
고타법원 김이현 스승님은
저의 멘토 사해의 횃불입니다.
--조환국의「사해의 횃불」전문
이 작품에서는 화자가 ‘고타법원 김이현 스승님’으로 현현되고 있다. 이렇게 실명을 거론하여 청자와의 교감을 시도하는 작품은 어떤 경우에는 주제를 더욱 확고하게 정리하는 효율성도 있게 한다. 그러나 ‘저의 멘토’라는 ‘저의’가 바로 ‘나’였음을 적시하면서 실존의 ‘저’로서의 어조로 변할 수도 있다. 다시 ‘인연, / 억만년 갑절을 넘어 / 오늘 만나고 있다 / 우리 어머니(최민석의「우리 어머니」중에서)’ 혹은 ‘달콤함이 그리워 /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꺼내든 / 거북선이 도드라진 동전 한닢(김동주의「오십환의 이야기」중에서)’와 같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화자로 등장하여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렇게 작중 화자는 인칭대명사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실제 실명으로 등장시켜도 되고 심지어 애완견 이름 등도 화자로서 실감나게 작품을 풀어나가는 경우도 있어서 이 화자의 활용을 잘 하면 작품의 의미와 전체의 균형에도 적극 도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화자가 가장 바람직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을 수가 있을까. 우리는 어떤 작품에서 이러한 인친대명사가 전혀 삽입되지 않고 문장을 완성한 작품을 대할 때 그 작품의 성격이나 주제를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멀리 잊혀진 계절이
짙은 녹음으로 활짝 피어내면
알 수 없는 기억이 뚜벅뚜벅 걸어와
황망한 어스름에 산다
바람이 물고 온
이승 깨우던 숨은 씨앗들
감도 없는 나무를 흔들며
어거지로 어거지로 낙엽이 진다
안개 같은 그리움이 얼룩으로 일어나
꽃으로 열리는 밤,
짧았던 인연, 안타까운 여인이
꿈속에서 달로 뜬다
--공의식의「나이 앞에 서면」전문
보라. 이 작품에서는 인칭대명사가 보이지 않는다. 굳이 찾아내라면 ‘안타까운 여인’이 화자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위에서 살펴본 화자와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화자가 보이지 않더라도 화자가 은닉되어 있어서 오히려 작품의 정돈된 정감이 살아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은 서병진의「지구촌 새 한 마리,」홍대식의「봄꽃 지는 사월」, 권희경의「새벽」그리고 박태훈의「칠월 서정」등에서 화자가 표면에 등장하지 않고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시법으로 현현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표면에 나타나는 화자와 나타나지 않는 화자가 있는데 가령 박목월의 「가정」일부에서 ‘아랫목에 모인 /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 강아지 같은 것들아 /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와 같이 ‘아홉 마리 강아지’와 ‘내’가 표면에서 작품을 전개하고 있으며 신경림의「파장」일부에서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과 같이 전혀 누가 화자인지를 찾을 수가 없다. 우리 시론가들은 이처럼 화자가 들어나지 않는 작품을 선호하는 까닭도 개인적인 독백을 피해가려는 하나의 방편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국보문학』 2013. 8.)
‘싶다’라는 보조형용사와 기원의식
문학 창작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지난 6월에는 한국문인협회가 개설한 평생교육원에서 무료 공개강좌가 있었다. 필자도 7월 개강을 앞두고 ‘현대시와 언어’라는 제목으로 공개강좌가 열려서 성황을 이룬 바가 있다. 대체로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라는 기조로 현대시와 언어의 상관성을 살핀 후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 ‘시의 언어와 시어는 다른가’ 그리고 ‘시인은 언어의 무법자인가’라는 항목으로 나누어 강의를 진행하였다.
요즘 현대시들이 표현하는 언어의 특징은 한글맞춤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띄어쓰기를 무시한다든지 문장 부호를 제대로 붙이지 않는다든지 하는 등의 문장을 많이 대할 수 가 있다. 우리 시인 중에서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시는 이 상의「오감도-시제15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거울업는室內에잇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중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잇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떠케하랴는陰謀를하는中일가.
이러한 표현의 문장은 시의 목적과 시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언어의 횡포가 되기 싶다. 간혹 맞춤법에 정한 문장부호 즉 마침표(.)와 쉼표(,), 의문부호(?), 느낌표(!)등을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예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밖에도 시인들은 신조어(新造語)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박목월 시인의「靑노루」를 읽어 보자.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ㅅ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작품「靑노루」에서 보는 것처럼 ‘청노루’, ‘청운사’. ‘자하산’ 등이 모두 상상속의 사물이다. 하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낮설지는 않아 보인다. 박목월 시인은 ‘靑石 돌담’이니 ‘남도 삼백리’, ‘보랏빛 石山’, ‘水晶그늘’. ‘砂礫質’ 같은 상상의 신조어를 많이 구사하고 있어서 특이하다. 또한 사어(死語-obsolete word)가 있다. ‘때묻은 언어’라거나 죽은 언어라고 하는데 낡아버린 언어 혹은 관념어를 말한다. 일상어는 다양한 개념과 통념을 지니고 있어서 가령 ’꽃과 같이 아름답다‘라는 형용은 아름답다는 말 그대로 한번의 개념만 줄뿐이지 자기가 느낀 아름다움의 본질은 표현되지 않고 있다. 시인은 과감하게 이 때묻은 표현을 깨뜨려야 한다. 이처럼 시의 언어(곧 시어-poetic diction)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역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나 많이 사용하여 식상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언어들은 자제하는 것이 시의 위의나 시인의 위상에도 품위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시의 언어는 시 속에서 우리에게 존재를 보여주는 등불이 된다. 존재의 영역은 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범위에 국한하는데 가령 캄캄한 밤에 성냥을 켯을 때 성냥불이 비춰주는 그 범위만 환하게 눈에 보일 것이다. 이것은 암흑(또는 無)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의 언어는 일상생활에서 단순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논리적인 기능보다는 정서적인 기능을 중시하는데 모든 사물과 관념의 시적 대상물에 대한 아름다움과 진실을 지적으로 판별하는 것은 물론, 언어가 지닌 음향, 즉 음악적인 미묘한 요소가 결합하고 있어서 신비하고 오묘한 맛이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일상적인 담론에서도 말하는 주체(화자)가 있고 말하려는 화제가 있으며, 그것을 듣는 청자(聽者)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처럼 시에서도 화자(話者)의 표정과 상황, 그리고 담론(언어)에 따라서 독자(청자)에게 전달되는 시적 메시지가 어떠할까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작품에 등장하는 ‘나’, ‘너’ 혹은 ‘그’라는 인칭대명사를 묘사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사물이나 관념을 의인법으로 처리했을 때는 시적 정감이 상승하지만,실제로 ‘나’를 표현했다면 이것은 자신의 독백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언술에서 시의 본령인 비유나 상징으로 처리하여 화자가 은폐되는 경우도 있다. 어찌보면 이런 경우가 더욱 바람직한 시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또한 화자가 감추어진 채 상황만 설정하고 누구의 어조로 들려주는 것인지가 불명확하다. 그러나 화자의 어조(語調 : tone)는 분명하다. 이 어조는 음질, 음량, 템포, 억양, 강약, 고저 등에 의해서 시인이 무엇(주제)을 말하려는지(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것인지)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현대시에서는 이런 화자와 그 어조를 통해서 반어법, 풍자, 역설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그 의미적 요소를 이해하려 하지만, 작품 전체를 이야기로 전개하여 주제를 적시하는 경향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시인이 어떤 사물에 관한 스토리를 전개하여 작품 전체에 포괄되는 의미를 추적하는 작법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라지는 것들
망각의 뒤안길을
굳이 헤집어
꺼내는 새봄
머리칼 스쳐간
한 올 실바람일 뿐인데
목련꽃 필 때마다
거센 회오리로 엉겨 오는지
늙지 않는 그리움
화석이 되어
서 있는 동구 밖
봄 뜰에 노을이
내리는 저녁
산속에 새소리 불러 숨긴
목련 향기로 두고 싶다.
--신인호의 「흔적」전문
이 달의 시 읽기는 우선 ‘싶다’라는 보조형용사가 메시지로 전해주는 그 시인의 기원의식을 살펴보려 한다. 위 신인호는 마지막 연에서 ‘봄 뜰에 노을이 / 내리는 저녁 / 산속에 새소리 불러 숨긴 / 목련 향기로 두고 싶다.’라는 어조로 그의 간절한 기원이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기원의 어조는 작품 속에 전개되거나 함축한 내용 중에서 그 시인의 인생 체험이 절대적인 상상력으로 재생하여 어떤 가곡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데 ‘흘러가는 시간 속에 /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시간성과 복합적으로 현현되고 있다.
아름다운 6월에
나는 그대를 만나고 싶어
꽃이 만발하고
연녹색 산들이 날개를 펴고
새들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들뜬 내 발걸음이 풍금을 치네
--이영순의 「아름다운 6월」중에서
이영순도 ‘아름다운 6월에 / 나는 그대를 만나고 싶어’라는 어조로 계절과 ‘나’와의 상관성을 간구(懇求)하는 시간성의 아쉬움이 ‘새들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 들뜬 내 발걸음이 풍금을 치네’라고 ‘황홀’한 ‘6월’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한편 조환국이 작품「비는 보고 싶은 눈물」중에서 ‘무르익은 광채의 눈 / 야생화의 고고한 향기 / 낙수 타고 들리는 음성 / 비는 보고 싶은 눈물이다’라거나 어광선도 작품「칠년만의 미소」중에서 ‘그동안 누가 억지로 맡겼나 / 그 동안 누가 강제로 떠밀었나 / 그저 내가 하고 싶어 했을 뿐’이라는 그의 간절한 여망이 성취되는 소희를 기원의 의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최민석은 작품「인생길에서」중에서 ‘계절은 자연을 변화시겼지만 / 그 세월은 그 인생을 변화시켰을 뿐 / 아무런 의미도 남겨두지 못한 채 / 이승의 그믐밤 반쪽 남기고 / 저승 그믐달 반쪽만 남아 있는가 싶구나!’와 같은 어조로 그가 평소에 간직한 내면의 진실을 절감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싶다’라는 기원 외에도 문장의 흐름이나 표현의 방법에서 그 시인의 간곡한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박윤주의 작품「엄마가 하고 간 말」전문에서 ‘난 윤주를 믿어요 / 너 아빠 딸이잖아 / 언젠가 빚이 있겠지 / 그래 언젠가 빚이 있겠지’라는 어조 속에는 깊은 심저(心底)의 진실이 어떤 기원을 내포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허임용의 작품「아침 이슬처럼」중에서 ‘아무런 / 말도 없이 / 한 줄기 바람에 / 흔들릴까 안타까워 / 용기와 믿음으로 / 아침 이슬처럼 / 영롱하고 빛나기를!’이라고 그의 소망을 현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언어에서는 다양한 자신만의 진실을 분사(噴射)하게 되는데 간절한 요망사항이 주로 ‘....싶다’ 또는 ‘좋겠다’는 어휘로 나타나서 우리들의 심금(心琴)을 울려서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희망이 없다면 절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이의 성취를 기원하는 희망사항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시적 창조에서 진실의 간절한 성취를 꿈꾸는 것은 우리 시인들의 영원한 과제이며 숙명일 뿐이다.(『국보문학』 2013. 7.)
그리움과 기다림 그 시간의 시학
우리의 계절에는 봄이 없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나뭇가지들이 겨우 봄 햇살에 기지개를 켜는가 했더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벌써 여름 날씨가 우리 곁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우리는 계절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빠르게 확인하면서 적응하려는 생명성이 계절과 동행하는 인간과 자연의 정감은 영원한 시적 발상의 원류이며 소재가 되기도 한다.
지난 4월에서도 ‘봄’에 관한 소재와 주제가 돋보였는데 이번 5월호에서도 ‘봄의 생명’에 관한 시적 탐색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체로 우리들이 작품의 형태로 발전시키는 모태(母胎)가 바로 계절적(혹은 시간적)인 변화와 거기에서 착상(着想)하거나 분사(噴射)하는 주제를 간과(看過)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봄’에 관한 이미지는 새 생명의 탄생에서 흔하게 작품으로 투영하고 있는데 이 생명성에서는 우리 인간들이 겪은 칠정(七情-喜怒哀樂 愛惡慾)에서 발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백숲 너머
퍼렇게 웅그려진
꽃잎에 머물고
깃털 구름 사이
갈라질 듯한 따가움
바위 끝 작은 햇살 부셔내며
빠알갛게 토해낸 듯
절여낸 시름
그리움에 덜고
천년을 반짝이는 긴 그림자
낮게 내린 바람에
잊혀져간 가슴에 부서진다.
--권희경의 「봄」전문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권희경의 ‘봄’은 ‘동백숲’과 ‘깃털 구름’ 그리고 ‘햇살’ 등에서 풍기는 ‘봄’의 이미지에서 그의 내면에 잠재한 정서와 사유(思惟)의 중심축에는 ‘그리움’이 내재(內在)되어 있어서 그가 현현하고자하는 ‘잊혀져간 가슴에 부서’지는 애환이 깊게 흐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봄’과 ‘그리움’의 시적 상관성을 자연 섭리에서 조망(眺望)함으로써 그의 체험이 형상화하면서 절실하게 묘사되는 우리 인간의 정감을 다시 확인하고 있어서 그가 구현하려는 진정한 시적 진실이 잘 발현되고 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녀가 오랜만에
길모퉁이에 보인다
사넬 옷을 어깨에 걸친 그녀
잇몸이 하얗게 웃고 있다
살랑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예쁘다
지난 겨울 무엇을 했는지
성큼 큰 것도 같고
야윈 것도 같다
그녀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같은 리듬으로 하늘하늘 춤을 춘다
그녀의 봉긋한 입술에 반해
나도 콧등이 벌름거린다
저렇게 상쾌히 걸을 거면서
얼마나 발끝이 근질거렸을까
모진 풍파를 견딘 그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배시시 웃고 있다.
--김선영의 「봄」전문
김선영 역시 동일한 제목 ‘봄’으로 그 이미지를 승화하고 있는데 그는 ‘그녀’라는 화자를 등장시켜서 ‘봄’의 언어를 구사하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현대시의 시법(詩法)을 잘 응용해서 공감을 흡인(吸引)하는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녀’는 겨우내 보이지 않던(월동하던) 생명들이 이제사 ‘사넬 옷을 어깨에 걸’치고 ‘살랑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정경(情景)에서 새로운 희망이 엿보이는 형상이 ‘모진 풍파를’ 인내로 버텨온 우리들에게 강렬한 새 생명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권희경과 김선영은 동류(同類)의 소재 ‘봄’에서 탐색하는 이미지는 생명성에 대한 탐구이다. 그러나 표현에서는 본인의 사유를 중심으로 현현한 주관과 ‘그녀’와 ‘나’를 화자로 등장시킨 객관으로 나누어서 시적 진실에 접근하는 시법들로 형상화하고 있으나 주제의 창출에는 동일한 시간의 섭리에서 파생된 그리움과 기다림의 미학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홍대식은 작품 「봄과 사랑」에서 ‘낭랑하던 새소리 들려오는 봄날 / 긴 기다림 속에 찾아오는 벅찬 환희 속에 / 그대를 향한 황홀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리라’는 어조와 같이 ‘황홀한 사랑’에의 기다림이 바로 ‘봄’에 관한 시적 언어이며 우렁찬 메아리이다.
바람이 이름을 바꾸고 있다
하늘이 그림자를 지우고 있다
땅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봄의 호흡이 피기 시작한다
작은 싹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구름이 길을 만들어 꽃길을 인도한다
온통 새 생명으로 길을 만든다
작은 입술이 터지게 봄을 부르고 있다
뒷걸음치는 겨울의 손끝이 작게 보인다
멀리 흔들거리는 아지랑이가 겨울을 이별하고 있다
소리 없이 노을이 색을 만들어 주고 있다
기다림의 인내가 생명을 안고 있다.
--이우창의 「봄의 생명」전문
이우창의 작품은 ‘기다림의 인내’가 주요 메시지로 현현되고 있다. 그것이 ‘봄의 생명’이라고 그의 절대적인 신뢰의 정감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봄의 호흡’과 ‘’새 생명‘의 조화는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외연(外延)과 내포(內包)가 화해하는 새로운 진리의 세상을 창조하는 성스러운 시간의 하모니이다. 그는 이러한 시법을 통해서 진실의 구현을 위한 모색을 하는 오감(五感)의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는데 그의 문장법은 남다르게 ‘...있다’, ‘...한다’라는 종결어미를 매 행(行)마다 사용함으로써 특이한 어감(語感)을 유로(流路)하고 있어서 간결미가 우선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또한 이철호도 작품 「봄을 깨우는 비」에서 ‘동동동 / 빗방울 소리에서 / 기쁨의 생명이 배어 나오고 / 지나온 발걸음도 / 그 가락에 힘을 얻는다’는 어조로 생명성에 대한 환희의 정서를 분사하고 있다. 이러한 ‘봄’의 이미지는 새 생명의 탄생에서 창조하는 사랑의 의미가 주제로 승화하는 경향을 많이 대하게 된다.
일찍이 19세기 근대시의 최대 비평적 정신을 소유했던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는 그의 「시집(詩集)」에서 ‘봄철의 숲 속에서 솟아나는 힘은 인간에게 도덕상의 악도 선에 대하여 어떠한 현자(賢者)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이는 ‘봄’이 간직한 인간들과의 교감이 응집된 친 자연적인 순리의 일환이지만, ‘봄’이라는 시간성은 인간의 생활이나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세월의 내리막길에
그리운 정 하나 얻었으면 된 걸
돌아갈 수 없는 어제도
이젠 추억이 되어 갔구나
--중략--
소중한 삶 속에
덧없는 욕심 버리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준비하자
--이영순의 「시간」중에서
그렇다. 이영순의 어조와 같이 ‘시간’이 ‘삶’과 내밀(內密)한 상관성으로 시적 상황이 설정되고 또한 주제가 명징(明澄)하게 도출(導出)되는 시법이지만 그에게서 절실한 것은 ‘그리운 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월의 내리막길’이거나 ‘돌아갈 수 없는 어제’ 혹은 ‘아름다운 시간’이 적시(摘示)하는 메시지는 바로 ‘그리움’과 아름다움‘이라는 인본주의에서 착상된 시적 원류는 바로 시간성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권희정도 작품「염원」에서 ‘사랑의 다리가 되어주고 / 새벽녘 해가 뜨는 날엔 / 당신의 그림자로 / 마음을 내어주며 // 서로 향한 마음엔 / 기다림의 인내가 여울져 / 세월 속에 빛을 발하니 / 푸르름이 묻어나는 하늘에 / 사랑의 연가 영원하리라’는 어조로 ‘세월 속의 빛’이 곧 ‘사랑’이거나 ‘기다림의 인내’라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양태영의 「외로운 밤」에서도 ‘세월 따라 흘러가는 애달픈 청춘 / 가도가도 끝이 없는 유랑의 길 / 해지는 석양에서 헤매는 이 마음 / 이 밤도 등불 아래 지세워 보자’는 ‘외로운 밤’ 역시 ‘세월’이라는 시간성을 배제할 수 없는 ‘애달픈 청춘’으로 분화(分化)하고 있다.
나의 기둥 오래된 친구들
뭣이 못마땅했는지
또 하나 금이 가더라
소통도 상생도 하라며
나를 키워준, 공신들의 아픔들
오랜 세월 불가사의 육신을
하루 세 번, 닦고 조여 줬어야
흔들림 없이 살았을 터인데
깊숙이 숨겨 둔 오래된 친구 하나
눈 감고 싹둑 지워버렸다.
--방극률「오래된 친구」중에서
여기에서도 ‘세월’에 대한 시적 담론을 계속하고 있다. 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오래된 친구 하나’를 ‘눈감고 싹둑 지워버’린 시간성의 애환이 진솔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의 순정적이면서도 순박한 심저(心底)에서 길어 올린 시적인 순수가 잘 현현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국보문학』 2013. 6.)
자연 향훈(香薰)과 시적 진실
‘5월은 푸른 하늘만 우러러 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희망의 계절이다. 5월은 피어나는 장미꽃만 바라보아도 이성이 왈칵 그리워지는 사랑의 계절이다’라고 우리의 소설가 정비석은 그의 유명한 글 「청춘산맥」에서 읊었다. 이렇게 5월의 향훈은 생동이라는 이미지와 상징의 함의(含意)를 이해하게 된다. 흔히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니 사랑의 달이니 하면서 많은 시인 묵객들이 5월을 찬양하고 그 푸르름에 대한 정감을 노래하고 있다.
이 만물의 성장과 생명력은 바로 봄이라는 계절의 의미가 더욱 성숙하면서 발산한 자연의 섭리에서 우리 인간들이 조응(調應)하고 수용하는 진실들이 시 작품에서 더욱 활기차게 현현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 4월의 향기가 넘쳐져서 5월로 이어지는 상관성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4월은 봄의 절정에 이르는 개화의 만개로 마무리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꽃축제가 벌어지고 봄을 맞이하는 잔치들이 우리들의 흥을 돋구는 향연들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 시단에서도 낭송회 시화전 등이 개최되어 우리 시 인구의 저변확대에 기여를 했다.
지난 4월에는 이상 기온의 탓으로 어떤 지방에서는 눈이 내리고 영하로 내려가는 기후로 개화가 늦어지는 현상이 지구촌의 화제로 등장하기도 했으나 4월호 『국보문학』에서는 많은 시인들이 봄과 꽃을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우선 희망찬 봄은 어떠한 형태로 다가와서 작품 속에 융합하고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은향 정다운의 「봄이 오는 길목에서」전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기나긴 어둠 헤치고
변함없이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
따사로운 햇살로
바람으로
소리로 찾아온다
자연의 리듬 따라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생기 넘치는 자연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의 꽃씨를 뿌린다.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봄과 마주 앉아서
사랑하기 좋은 봄날
내 마음에도 꽃이 핀다
봄, 봄,
기다림의 세월은 생명으로 빛난다.
정다운은 ‘봄’을 두고 ‘반가운 손님’이 ‘햇살로 / 바람으로 / 소리로 찾아’오는 ‘자연의 리듬’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와 같이 ‘봄’에 관한 이미지는 새 생명이며 새로운 탄생이며 희망으로 표징된다. 여기에서도 ‘생기 넘치는 자연’으로서 ‘뿌리’, ‘새싹’, ‘꽃’ 등으로 ‘희망의 꽃씨를 뿌’리고 있다. 다시 그는 ‘산’과 ‘들’, ‘강’과 ‘바다’와 봄이 어우러져서 ‘사랑하기 좋은 날’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앞서 정비석의 ‘청춘산맥’에서처럼 ‘사랑의 계절’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지만, 그가 구사하려는 주제는 바로 마지막 행에서 결론으로 제시한 ‘기다림의 세월은 생명으로 빛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혜송 홍대식도 작품「봄의 길목」에서 ‘길가 담쟁이 햇살녘엔 / 어느 새 숨죽이고 고개 내민 / 파릇파릇 소곤소곤 새싹들이 반갑구나’라는 어조로 ‘봄이 오는 소리’를 듣거나 ‘아롱아롱 아지랑이’를 음미하고 있다. 이처럼 ‘봄’에 관한 작품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각자의 특성에 따라서 그 관조와 응시를 통한 의미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사물적이든 관념적이든 간에 각자의 취향과 정서의 내면에 관류하는 특징적인 체험이 곧 인식과 지향점을 향해서 언어의 그림을 그리거나 의미성(주제)의 탐색을 위한 여과(濾過)장치의 도정(道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님의 추억을 메고 / 물오른 가지마다 그리움이 몰려오네(이영순의 「봄」중에서)
-여섯 살 손녀딸 새끼손 같은 / 가녀린 꽃잎 / 노오란 개나리 / 양지 끝 울타리에 응봉산 돌산 위에도 / 노오란 융단의 꽃잔치 열렸네(이정종의 「꽃잔치」중에서)
-생명이 살아 숨쉬는 소리 / 지천에 피어나고 // 망울마다 솟아나는 영기가 / 영롱한 방울 만들어 // 세상이 그 안에 자리한다(박태훈의「우수」중에서)
-봄비는 남녘에서부터 / 높새바람 타고 /도담도담 내려 / 얼음을 녹인다.(옥산 송형기의「봄 비」중에서)
-남쪽나라 매화꽃은 만발하고 / 진달래 철쭉꽃 준비 완료 / 앙상한 버드나무 새싹이 보인 다(석청 어광선의「무등산」중에서)
-겉절이로 무쳐먹고 / 비벼먹고 쌈싸 먹고 / 봄소식이 입안에 뱅뱅.(오산 송형기의 「봄의 서곡」중에서)
-앞뜰 목련화 / 노란 개나리 / 꽃망울 부풀어 / 봄의 향연에 미소 짓고 있네(문성 조육현의 「꽃샘추위」중에서)
이처럼 ‘봄’과 관련된 작품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생명의 탄생을 주된 이미지로 투영하는 특성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각 시인마다의 개성에 따른 이미지의 추출과 표현 방식은 서로 다르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현대시학에서 담론으로 제기하는 이미지의 표상은 한 시인이 간직한 체험에 의한 영향을 말하는 것으로 시인이 어떤 체험을 재생시켜서 그 재생된 상상력을 다시 새로운 창조적인 상상으로 전환하느냐 하는 문제가 작품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 예시한 ‘봄’에 관한 이미지나 시적 구도는 이영순이 ‘그리움’을, 박태훈이 생명성을 시적 진실로 토로(吐露)하는가 하면 이정종과 송형기, 어광선은 외형적인 사물 이미지로 시각적인 효과를 통해서 ‘봄’에 관한 이미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송형기와 조육현은 ‘봄소식’과 ‘봄의 형연’을 형상화함으로써 자연 향훈의 진실을 탐구하고 있다. 김선영의 「봄」전문에서는 그 시법(시적 구도)이 특이하다. 그는 ‘봄=그녀’라는 등식을 성립시켜서 스토리와 어조를 잔잔하게 풀어나가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시적 대상을 의인화해서 대화를 하거나 시를 구성하는 방법이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녀가 오랜만에
길모퉁이에 보인다
사넬 옷을 어깨에 걸친 그녀
잇몸이 하얗게 웃고 있다.
살랑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예쁘다
지난 겨울 무엇을 했는지
성큼 큰 것도 같고
야윈 것도 같다
그녀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같은 리듬으로 하늘하늘 춤을 춘다
그녀의 봉긋한 입술에 반해
나도 콧등이 벌름거리다
저렇게 상쾌히 걸을 거면서
얼마나 발끝이 근질거렸을까
모진 풍파를 견딘 그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배시시 웃고 있다.
그렇다. 그는 봄이라는 계절적인 대상을 ‘그녀’라는 사람으로 환치해서 시적 상황(situayion)을 전개하고 있다. ‘그녀가 오랜만에’ 혹은 ‘그녀가 지날 때마다’라든지 ‘그녀의 봉긋한 입술’ 그리고 ‘모진 풍파를 견딘 그녀’ 등에서 적시(摘示)하는 ‘그녀’는 자연(봄)에게 자신을 투사(投射-project)하는 시법으로 정리하고 있어서 새로운 형태의 시적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법은 고 김준오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비정적(非情的) 타자성(他者性)’이라는 원리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가장 전통적인 자연관은 자연이 그 존재 근거를 신이나 인간정신에 두고 있어서 흔히들 감상적 오류(誤謬)라고 한다. 또한 이 투사는 시인이란 그 정체가 없기 때문에 그가 계속해서 어떤 다른 존재를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원리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선영은 봄이 곧 ‘그녀’라는 투사는 자신이 ‘봄’과 동화(同化)하지 않고 자연을 인격화해서 시적 스토리를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화자(話者)에서 ‘그녀’와 대칭하는 ‘나’가 있다. ‘그녀’와 ‘나’는 동질의 개념에서 ‘봄’을 형상화함으로써 시적 진실을 더욱 확산하여 공감을 유로(流路)하고 있다. 이 밖에도 ‘2013년 봄’ 국보문학 동인문집 제15호 『내 마음의 숲』에 게재된 니아 박언휘의「사월은 행복한 달」에서 봄에 관한 진솔한 언어로 정적인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다.
붉은 장미 넝쿨마다
베르테르의 편지가
기어되는 봄날입니다.
--중략--
행복은
떨어진 장미꽃잎에도 새벽 공간에도
그렇게 스며들어 있었답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속에 느끼는 만큼
존재한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관념에 치우친 개인적인 관조의 사설(辭說)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행복’과 ‘우리’의 존재를 감도(感度) 높게 읽을 수 있다. 이런 시법을 외적(外的)인 요소인 사물과 내적(內的)인 요소인 관념의 조화로서 ‘봄’과 화해하는 해법으로 시적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지나간 달에는 시낭송 행사도 많았다. 국보문학의 시낭송 ‘시가 흐르는 서울’(사당역)과 지필문학 시낭송(지하 서울역), 뜨락 시낭송 ‘봄의 왈츠’(인사동 순풍) 그리고 청송시인회 정기 작품발표회(낙원동 크라운 호텔) 등 참석 시인들과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우리 시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국보문학』 201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