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오는 환자들의 질환에는 단지 진단명 하나로 압축되지 않는 서사가 있고, 더 나은 진단과 치료를 위해 내가 들어야 하는 서사가 무엇인지 알려면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연결된 고통』 14p 머리말 중에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를 참 좋아했었다. 교육 역시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이 근간이라, 타인을 어떤 자세로 마주 할지를 고민하던 시기에 좋은 답을 준 작품이었다.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환자가 단지 질병으로 코드화된 개체로만 의사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자기 결정권을 지닌 자유로운 존재로 의료진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대학에서 이미 배우지 않았던가. 나는 아마 그때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를 몸소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리 지도를 보고 길을 익혀둔다고 해도, 결국 그 길을 걸어야만 보이는 풍광이 있는 것처럼. - 41p.
지금의 나는 사람이 온다는 것이 조금은 무섭고 꽤 버겁다. 사람이 온다는 게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사람은 보통 뚜벅뚜벅 제 힘으로 걸어올 것이라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는 것도 함께. 폭우 속 산사태처럼 쏟아지기도, 액체 괴물처럼 흘러내려 찐득거리기도,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제멋대로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굴러오기도 한다.
진단 및 치료의 알고리즘은 의학이 발전할수록 점점 더 세분화되고 복잡해졌다. 물론 알고리즘이 정교할수록 진단 및 치료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확도나 속도, 효과와 효율이 강조될수록 인간의 삶이 '질병 코드'로 암호화되면서 고통이나 증상을 통해 아픈 몸이 말하고자 했던 목소리가 검열, 절삭되어 결국 일개 디지털 부호로 납작해진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이렇게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다 담기지 않는 아픈 몸의 이야기, 즉 질환 서사 속에는 가난, 노동,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의 문제가 거의 언제나 상존한다. 의학이 환자의 질환 서사를 제외한 채 깔끔하게 통제되고 압축된 정보로 재단된 몸만 다룬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 전체에서 상당한 부분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것 아닐까. 그것은 의학의 무능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 43, 44p.
매일이 그간 없었던 발전을 이룩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여유 없는 세계에서 개인의 서사는 깔끔히 재단되어 엑셀표 한 칸에 반듯이 놓인다. 이 세계가 인간을 대하는 방식은 '참 성의가 없다.' 특히 자본이 외면한 곳(돈이 되지 않는 분야)일수록 지나치게 인간을 하대한다.
책을 읽으며 '돌봄의 부재'와 '이분법적 사고'에 관한 저자의 지혜가 나의 얼어붙은 사고(思考)를 흔들었다. 저자가 파악한 원인이자 제안한 해결 방안의 핵심인 '돌봄'이 사회 전반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세계를 상상해 본다. 이 세계에선 하나를 택하기 위해선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강요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중하게 다뤄야 할 일은 신중히 다룰 수 있는 여유와 저항할 체력이 있길. 당장의 정명함에 이끌려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길. 결정을 내린 후에는 반추할 수 있길. 나도 그러하길. 우리가 함께 그러길.
환자 B에게 책상에 꽂혀 있던 책의 구절('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중에도 고통을 감내하면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을 읽어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저자와 그 진료 공간을 상상하며 행복했다. 조금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무슨 마음일지 너무도 알 것 같았다. 사람은 뚜벅뚜벅 걸을 수도 있고, 폭우 속 산사태처럼 쏟아질 수도 있다. 액체 괴물처럼 흘러내려 때론 찐득거릴 수도 있고, 비닐봉지처럼 제멋대로 굴러갈 수도 있다. '그래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댓글 사람이 온다는 게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공감해요..🥲
특히 선생님이라든지 의사라든지.. 특성 자체가 어떤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감정에 무뎌져야 된다고들 하지만, 서현쌤이나 저자처럼 ‘사람’을 대하려고 애쓰는 누군가가 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해요..♡
무성의한 방식으로 인간을 대한다는 말이 너무 아프면서도,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자본의 크기와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동등한 돌봄을 받을 수 있게되길 바라게 됐어요🍀
환자의 눈으로만 드러나는 고통이아닌 속까지 보려는 의사가 많아졌음해요:)
질병코드는 병의 파악과 적절한 처방을 돕지만, 동시에 그 코드 너머의 사람의 맥락을 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아요. 코드에 개개인의 상황을 모두 담을 수는 없으니, 질병 너머의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우리, 그러니까 사람의 몫이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