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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 마르부르크 회담
코람데오 추천 4 조회 279 24.04.29 08:02 댓글 1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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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4.29 08:13

    첫댓글 좋은 포스팅입니다. 루터가 츠빙글리는 물론이고 부처, 오이콜람파디우스와도 교류중단을 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진영 안에서 개혁주의와의 괴리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 24.04.29 16:34

    공감합니다.

  • 24.04.29 08:20

    좋아요!

    츠빙글리와 루터의 논쟁을 보는 가운데 또 다른 중요한 위인들의 이름이 나와서 반갑습니다: 부처, 오이콜람파디우스, 멜랑히톤 등.

  • 24.04.29 10:47

    네, 그렇네요. 종교개혁의 역사를 조망할 만한 인물과 내용입니다.

  • 24.04.29 08:21

    오이콜람파디우스(John Oecolampadius)

    ... 일련의 저술, 특히 〈주의 말씀의 정확한 해석에 관하여 De genuina verborum domini expositione〉(1526)에서 그는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기념일 뿐 재연은 아니다"라는 츠빙글리의 견해를 지지했다. 바젤에서 종교개혁을 확고히 하기 위해 1529년 부활절에 공표된 지방 법령 작성을 도운 후 마르부르크 회담(1529. 10)에서 다시 츠빙글리의 입장을 옹호했으나 루터와는 논쟁을 벌였다. 바젤로 다시 돌아와 1530년 교회문제에 지방 정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반대했고, 교회행정에 목사 및 평신도 장로가 참여하도록 교회 훈련을 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1531년 츠빙글리가 카펠 전투에서 살해당하고 종교개혁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이 정치적 분열 때문에 좌절되자 충격을 받고 죽었다.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6a1211a

  • 24.04.29 11:12

    훑어보니 많이 안타깝네요ㅠㅠ

  • 24.04.29 08:27

    부처는 원래 루터를 존경하고 응원하던 인물이었습니다.
    --------------------------------

    부처는 1518년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어거스틴 수도회 종단토론회에 참석했을 때, 처음 그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은 부처의 생애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강변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장차 위대한 종교개혁가가 될 브렌츠와 부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슈트라스부르크의 도미니칸 수도사 마르틴은 비텐베르크(독일어: Wittenberg)의 어거스틴 수도사 마르틴 루터를 따라 수도사에서 종교개혁가로 전향하게 되었다. 부처는 루터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그(루터)는 모든 점에서 에라스무스와 일치합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은 있는데, 에라스무스가 다만 심고 있기만 하는 것을 그는 공공연하고 자유롭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그의 편을 듭니다.) ”

    — Beatus Rhenanus에게 보낸 1518년 5월 1일자 편지, no. 75.
    다른 편지에서는 비텐베르크의 개혁가 루터를 가리켜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진지하시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 24.04.29 08:28

    강력한 존경하는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부터 부처는 루터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5%B4%ED%8B%B4_%EB%B6%80%EC%B2%98

  • 24.04.29 11:18

    @장코뱅 루터를 지지했지만 나중에 루터의 한계를 발견한 것 같은데요. 모든 것을 다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 24.04.29 16:34

    @노베 공감합니다.

  • 24.04.29 08:30

    멜란히톤

    필리프 멜란히톤(독일어: Philipp Melanchthon, 독일어 발음: [meˈlançtɔn], 본성: 슈바르츠에르트·Schwartzerdt, 1497년 2월 16일 브레텐 ~ 1560년 4월 19일 비텐베르크)은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의 동료로서 종교개혁운동을 통한 복음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519년 루터와 함께 라이프치히 논쟁에도 참석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노력하였다. 신학자들의 신학적 차이를 화해시키는 관용적 인물로 종교개혁 신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저서로는 《신학 강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등이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5%84%EB%A6%AC%ED%94%84_%EB%A9%9C%EB%9E%80%ED%9E%88%ED%86%A4

  • 24.04.29 11:23

    프빙글리에게 불링거가 있다면 루터에게는 멜랑히톤이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 24.04.29 16:36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저에게 유익이 됩니다.

  • 24.04.29 16:59

    저도 동감입니다.

  • 작성자 24.04.30 09:25

    성찬론에서 마지막 15번째 조항에서 합의를 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루터와 츠빙글리 및 주변 종교개혁가들의 견해 차이를 좁히기가 쉽지는 않았겠죠. 루터가 보기엔 츠빙글리 일파가 성찬을 가볍게 여긴다고 우려를 하였겠지만, 성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기념일 뿐 재연은 아니라는 츠빙글리의 견해가 신약성경을 더 정확히 이해했다는 반증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탁월한 학자요 설교자라 할지라도 부정확하고 미진한 부분이 있음을 잘 알아야겠어요. 현대 인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24.04.30 07:29

    네, 공감합니다.

    루터교 예배를 직접 목격한 분들은 느낄 겁니다. 분위기가 카톨릭과 많이 비슷합니다. 루터의 개혁이 츠빙글리에 비해서 미흡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개혁의 훌륭한 선구자였던 것은 맞습니다.

  • 24.04.30 11:45

    @장코뱅 두 분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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