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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란다에서 일어난 대승불교 사상
날란다(Nālandā)는 마하비하라(Mahāvihāra大寺)가 있던 지명이다. 날란다는 라지기르(왕사성)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며 파탈리푸트라(현 파트나)에서는 95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날란다는 고대인도 불교사원대학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원대학이 세워지기 전에, 고타마 붓다는 이곳 망고 숲에서 가끔 유숙한 바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곳은 왕사성에서 바이샬리로 가는 간선도로여서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고 수행자들 또한 이 길을 통해 다녔다. 고대에는 동부 인도에서 서북 인도로 가는 대로(大路)가 이곳을 지나갔으므로 일찍부터 요충지였다. 게다가 이곳에는 망고 숲이 있고 연못이 있어서 수행자들에게는 쉼터나 다름없는 안식처이기도 했다. 고타마 붓다의 상수(上首) 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이곳 출신이다. 사리불은 이곳에서 열반했으며 지금도 사리탑이 보존되어 있다.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는 이곳에서 14년간의 우기(雨期)를 보낼 정도로 두 종교의 교주(敎主)가 좋아했던 곳이다. 날란다는 연꽃 줄기란 뜻을 갖고 있듯이 이곳에는 연못이 있어서 항상 연꽃이 피어 있었다. 이런 역사적 연유로 이곳에 큰 절이 세워졌고, 사원대학이 생겼다. 학문연구 중심지로 체계가 잡힌 것은 굽타 왕조(Gupta Empire 320-550 CE) 시대이다. 굽타왕조는 인도 대륙의 북부를 거의 커버하고 있었다.
날란다 대학 의 유적터 1 사리불 탑 부근
날란다의 전성기는 굽타왕조에 이어서 지금의 우트라 프라데시의 하르샤 왕국(590–647)과 팔라 왕조(Pala Empire 8-12세기CE)시대이다. 날란다 사원 대학의 최전성기는 5세기에서 12세기까지이며 티베트 중국 한국과 중앙아시아에서 유학승이 올 정도로 유명했으며, 7세기 당 나라 인도 구법유학승(求法留學僧)인 현장법사에 의하면 학생이 1만 명, 교수가 2천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4세기 말 5세기 초, 중국 동진의 인도 구법승 법현 법사가 왔을 때에도 사원대학으로서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대승불교 중관파(中觀派)의 대가이며 8종(宗)의 조사(祖師)로 일컫는 나가르주나(Nāgārjuna : 龍樹 150–250CE)가 학장을 지냈고, 그의 제자 아리야데바(Āryadeva : 提婆170~270)가 나가르주나의 학통(學統)을 이어서 발전시켰다고 하는데 역사적 신빙성이 부족하자고 현대 불교학자들은 말하기도 한다.
날란다 마하비하라(大寺)는 기원전 3세기 아소카 대왕에 의해서 사리불 존자의 사당이 있던 자리에 최초로 사원을 세웠지만, 큰 규모로 확장해서 발전시킨 것은 굽타 왕조시대이다. 굽타 왕조는 브라만 왕조였지만, 대승불교의 대철학자 바수반두의 영향으로 나라싱하굽타 Narasimhagupta Baladitya 495–?CE) 왕 때 크게 발전되었다. 바수반두(Vasubandhu : 世親 316-396CE)는 친형인 아상가(Asaṅga : 無著)와 함께 유식학파(唯識學派)의 창시자들이다. 대승교학(大乘敎學)은 중관파의 나가르주나와 유식학파의 바수반두에서 시작됐다. 중관 . 유식은 그대로 중앙아시아와 중국 티베트에 전해져서 불교철학의 양대 산맥이 형성되었고, 현재까지도 불교철학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나가르주나의 생애에 대해서는 타림분지인 중국 신장성 쿠차 출신인 쿠마라지바(Kumārajīva : 鳩摩羅什 334–413 CE)가 중국 장안에서 한역(漢譯)한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과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티베트 역의 부톤의 『인도불교사』 등에 나온다.
* 대승불교의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전개
대승불교 사상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중관 사상은 용수와 그의 제자 제바와 무착과 세친의 두 형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용수는 인도 마하라슈트라의 동부 지역인 비다르바에서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용수는 불교의 초기경전을 연구하여 고타마 붓다의 중도사상인 중관(中觀: Madhyamaka)을 깊게 연구하였다. 고타마 붓다의 중도에 대한 근본적인 논문인 『중론송Mūlamadhyamakakārikā)』을 저술,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인 공을 파악하여 공(空). 연기(緣起). 중도(中道)는 같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용수의 저작은 『대지도론大智度論』, 『中論頌』, 『十二門論』, 『회쟁론迴諍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毗婆沙論』, 『大乘二十頌論』, 『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 등이다. 대승불교철학의 중관사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서적들이다. 티베트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의 대승교학 연구의 텍스트들이다. 용수의 제자인 아리야데바(Āryadeva : 提婆 170~270)는 『백론(百論)』을 저술하였다. 중관파는 물론 중국의 삼론종 등은 용수와 제바를 의거하여 성립된 종파이다.
대승불교 철학사상사(哲學思想史)의 흐름에서 나가르주나의 중관파와 바수반두의 유가행(유식학)파는 쌍벽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도 이 두 파가 세계 불교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바수반두는 지금의 파키스탄 령인 간다라 지방의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와 같은 사상가로 유명한 아상가(Asanga無着 300-390)는 친형이다. 바수반두는 처음에는 유부(有部)에 속한 교리를 연구하여 카슈미르와 간다라에서 유부를 비롯한 여러 부파 불교의 학설을 수업하고 이들 학설의 요강서(要綱書)인 『구사론俱舍論』을 지었다. 나중에 형 아상가의 권유로 대승으로 전향하여 아상가 및 그의 스승 마이트레야(Maitreya-nātha 彌勒 270-350)의 저서에 주석을 붙여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의 완성에 힘썼고,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지었다. 더욱이 그 입장에 서서 반대설을 깨뜨리고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을, 또한 유식설 입문서로서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을 지었다. 『유식삼십송』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여러 주석서가 나왔고, 후일 현장(玄奘)이 호법(護法)의 주석을 중심으로 10대 논사(十大論師)의 여러 주석을 합하여 번역한 『성유식론成唯識論』은 중국 불교의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논서가 되었다. 바수반두(세친)의 저술은 『《구사론俱舍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대승오온론大乗五薀論』, 『대승성업론大乘乗成業論』, 『삼성론三性論』,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등이다.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대만에서의 대승교학 연구의 텍스트들이다.
아상가(無着)는 인도 대승불교의 사상가로서 수행 중,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나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장엄대승경론莊嚴大乘經論』 전하고 강설(講說)했다고 한다. 아상가가는 유가행의 스승이었던 마이트레야(Maitreya-nātha: 彌勒 270-350)에게서 받은 학설로서, 그는 유식설을 조직 체계화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었고, 그 밖에 『육문교수습정론六門敎授習定論』, 『순중론석의順中論釋義』, 『현양성교론顯揚聖教論頌』,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金剛般若經論』 등을 저술하여 유가행파의 대표적 논사(論師)로 꼽혔다.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고 소화하기에는 너무 사변적인이라 할 수 있는 서적들이지만 대승불교철학의 양대 산맥인 중관파와 유식학파를 이해하지 않고 선(禪) 불교사상사(佛敎思想史)의 전개를 이해할 수 없다. 중국 한국 일본의 동아시아 불교의 교학(敎學)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이런 학술적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
또한 당나라 현장법사와 의정법사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현태(玄泰) 혜륜(慧輪 반야발마) 혜업(慧業) 스님 등이 날란다사원대학에서 공부했다. 현태는 티베트를 경유하여 인도에 들어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왔고, 혜륜은 제자 현유와 함께 사자국(스리랑카)에 가서 종신(終身했다. 의정법사에 의하면 혜업의 산스크리트어(梵本) 저서를 직접 봤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했는데 그는 날란다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날란다에는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 티베트 등, 인도 이외의 나라에서 많은 외국 유학승들이 와서 공부한 국제대학의 명성을 갖고 있었다.
날란다 대학의 유적터 2
현장(Xuanzang 玄奘 602–664)은 삼장법사(三藏法師)로 그 이름을 널리 알려진 스님이다. 중국 당 나라 때의 학승으로, 한역(漢譯) 불전(佛典)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직접 인도에 가서 날란다 사원대학에서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삼장(경율론)을 5년간 배우고 16년간 인도에 체류하면서 견문을 익혔다. 뒤에 귀국해서 중국 역경사(譯經史)에서 신역(新譯)이라는 한 획을 그어 동아시아 불교에 큰 역할을 한 역경사(譯經士)이며 또한 여행가이기도 하였다.
현장 삼장은 629년 장안을 출발해서 고비사막과 천산남로(天山南路) 타림분지를 지나 카이버 고개를 넘고 훈자 계곡을 가로질러서 인도에 들어가 불적지(佛跡地)를 순례하고 날란다 사원대학에서 논리학(因明學) 문법 산스크리트어와 유가행파(Yogacara)의 철학을 학습했다. 특히 당대 날란다사 주지이며 대학승인 실라바드라(Śīlabhadra 戒賢 529–645CE)로부터 유가행파(瑜伽行派=唯識學派)의 논서(論書)를 집중해서 직접 배웠다. 실라바드라 논사(論師)는 아상가 바수반두 디그나가(Dignāga 陳那論師480–540CE)와 다르마팔라(Dharmapāla 護法 530-561CE)로 계승되는 유가행파(瑜伽行派)의 대학승이다. 유가행파의 근본 경전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이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미륵(彌勒)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세친(世親)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십지경론十地經論』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이 유가행파의 주요한 소의(所依=기본텍스트) 논서이다. 또한 세친의 『유식삼십송』에 대한 문하의 십대 논사의 학설을 호법의 학설을 중심으로 하여 현장(玄奘 602-664)이 번역 편집한 『성유식론成唯識論』도 주요한 텍스트에 포함시킨다.
인도 불교의 유가행파에 상응하여 중국 · 한국 또는 일본 불교의 종파로는 『십지경론』을 소의논서로 하는 지론종(地論宗), 『섭대승론』을 소의논서로 하는 섭론종(攝論宗), 『성유식론』을 소의 논서로 하는 법상종(法相宗:자은종·유식종)이 성립됐다.
현장 삼장은 646년 16년 만에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 598-649CE)황제의 요청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현장삼장은 귀국해서 경전번역에 여생을 마쳤는데, 장안 흥복사에 역경원(譯經院)을 설치하고 후에 대자은사(大慈恩寺)로 옮겼고, 『대반야경大般若経』번역을 완성하고 입적했고, 문하에 규기(窺基632–682CE)와 신라출신 원측(圓測613–696CE) 등 많은 제자를 두었고, 법상종(法相宗)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현장 삼장은 많은 경전을 옮겼고, 구법순례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남겼는데 이 책은 중세 서역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대한 1차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장삼장의 자서전 격인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师传』을 제자 혜립(慧立)이 664년에 찬했다. 프랑스에서 중국연구가 스타니슬라오 애낭 율리우스(Stanislas Aignan Julien 儒蓮 1797–1873)가 1857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영역(英譯)은 동양학 학자 사무엘 빌(Samuel Beal 1825–1889)이 1884년 『대당서역기』를, 1911년에『대자은사삼장법사전』을 발간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날란다에는 또 한명의 유명한 삼장법사가 유학했는데, 그 분은 의정(義淨 635–713) 삼장이다. 의정삼장은 25년간 중국과 인도 날란다를 오가면서 유학했는데, 그는 스리비자야( Srivijaya 650–1377 현재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국에서 산스크리트를 배우고 673년에 날란다 사원대학에서 가서 14년간 유학했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따르면 대강당이 8개 강의실이 300개인 주 건물만 4만 평 부지위에 있었고, 수백 개의 부속건물과 숙소 등이 있었다고 하며 1만 명의 학생가운데 중국 등지의 학승이 2천 명이었다고 한다. 티베트 소스에 의한 교과과정은 경 . 율 . 론 삼장의 기본 골격에, 상좌부인 설일체유부의 『아비담마비바사론阿毗達磨大毗婆沙論』, 경량부(经量部)의 『이부종윤론異部宗輪論』과 대승철학인 나가르주나의 『中論頌』과 무착 세친의 『유가행(唯識)』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으며, 기타 교양과목 등으로 조직됐다고 한다.
날란다 대학의 유적터 3
불교학 연구의 중심지로서의 세계 최고최대(最古最大) 사원대학이었던 날란다는 1200년 터키계 무슬림 장군 키질(Bakhtiyar Khilji?-1206)에 의해서 결정타를 맞고 파괴되었으며 도서관의 도서가 불타는데 6개월이나 소요됐다고 한다. 다행하게도 날란다 교과과정과 학통은 중국과 티베트 불교로 전수됐다. 8세기 말에 설립된 비크라마실라(Vikramaśīla 超戒寺) 대학에서 밀교가 티베트에 집중적으로 전수됐다고 할지라도, 중관.유식은 날란다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인도는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아주 먼 옛날 『베다』시대부터 구루쿨(Gurukul)이란 기숙사 型 학교가 있었는데 기원 6세기에 탁실라대학은 정치 경제 군사 의약 등으로 매우 유명했다. 당대 왕족의 자제들이 이 탁실라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마가다의 아잣타사투 왕, 코살라의 파세나디 왕과 아소카 대왕의 할아버지 찬드라 굽타 왕이 탁실라 대학 출신들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부처님)는 가정교사를 왕궁에 초빙하여 『베다』교육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날란다 불교사원대학은 탁실라대학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신(나바) 날란다 대학은 인도 초대 대통령 라젠드라 프라삿드 박사(His Excellency, Dr. Rajendra Prasad)가 1951년 옛 날란다 대학의 명성을 되살려 나바(新) 날란다 대학을 설립하도록 발의해서, 자그디쉬 캬삽(Bhikshu Jagdish Kashyap 1908-1976) 빅슈가 1955년까지 초대 학장 겸 이사장을 역임했다. 다수의 동남아 중국 등지에서 온 석.박사 과정학생들이 인도 고대사와 불교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