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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을 慕山 先生 곁에서
洪 瑀 欽
1. 이 글을 쓰는 의의와 목적
금년(1998) 3월 20일(음2월 28일)은 은사 모산(慕山) 심재완(沈載完)박사께서 탄신 80주년을 맞이하시는 날이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란 옛말에 비추어 보건대 사람으로 태어나서 80세의 수를 누린다는 것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선생께서는 일생동안 오로지 교육과 학문에만 전념하신 결과 절대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리지 아니할 뚜렷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셨다. 선생께서 편찬하신 《교본역대시조전서》는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한국문학사가 존재하는 한 김천택의 《청구영언》이나 안민영의 《가곡원류》가 없을 수 없듯이, 지금부터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교본역대시조전서》는 《청구영언》이나 《가곡원류》 이상의 절대적인 국학 자료로 활용되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인 업적은 단시일 내에 우연히 성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가문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천부적인 자질과 후천적인 교육 및 학문적인 수련이 혼융일치(渾融一致)되어 이루어진 결과일 것이다. 때문에 《청구영언》이나 《가곡원류》의 역사적인 가치를 이해하려면 김천택과 안민영을 알아야 하듯이 《교본역대시조전서》를 연구하려면 선생의 환경과 사상 및 그 전체 생애의 과정을 모르고 가능할 수 없다. 김천택과 안민영은 당시 사회에서 소외된 위항문인(委巷文人)이었던지라 생존 시에는 아무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학문적인 업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행히 《청구영언》과 《가곡원류》는 전해지고 있으나 그 편자인 김천택과 안민영의 자세한 전기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아니함은 한국문화사상 하나의 큰 모순이요 결함이며 안타까움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과거는 현재의 역사이듯이 현재는 미래의 역사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마땅히 미래의 한국문화사를 연구하는 후예들을 위해 《교본역대시조전서》의 편자인 선생의 전기적 기초자료가 될 수 있는 기록을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 그 기록은 정확해야 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맞은편에서 본 여산(廬山)은 재(嶺)이더니 옆에서 본 여산(廬山)은 봉우리(峯)를 이루고 있으니, 여산(廬山)은 보는 사람의 시각이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같지 아니 하구나”(橫看成嶺側成峯, 遠近高低各不同)란 소식(蘇軾)의 말과 같이 한 인물에 대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기록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다만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른 시각으로 한 인물을 조명하게 되면 그 인물의 진면목은 비교적 자세히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금번 모산학술연구소(慕山學術硏究所)가 제80회 탄신(誕辰)을 맞이하시는 선생의 전기적인 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선생을 아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내용을 제한하지 아니한 원고를 청탁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비록 소략하고 산만함을 면치 못할지라도 많은 기록이 정리 보존되면 후인들은 그것을 토대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전기(傳記)를 작성함과 아울러 진정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필자는 1963년 3월 영남대학교 전신인 청구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선생을 뵙게 되었고, 1998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줄곧 선생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어언 3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선생을 배우고 선생을 바라보면서 산 셈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단 한 번도 선생의 완정(完整)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손끝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계시는 것 같으면서도 다가서면 아득히 멀어지며, 봄 햇볕같이 따사로우면서도 추상(秋霜)같이 냉엄(冷嚴)하시며, 평범한 기거동작(起居動作) 속에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비범한 인격과 지혜가 숨어 있으며, 소심할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하시면서도 모든 것을 초월한 달인(達人)처럼 호방광달(豪放曠達)하시다. 때문에 필자는 고백하건대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공자의 깊이와 넓이를 모르고 소동파(蘇東坡)가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듯이 지금도 선생을 따르고 배우기는 하나 선생의 도량과 경지를 모르고 있다. 다만 35년 동안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선생을 바라보고 느낀 몇 가지 소감을 가능한 한 솔직하고 가감(加減) 없이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2. 건장활달한 선생의 초면인상
필자가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63년 어느 날 대구시 중구 문화동에 있었던 청구대학 강의실에서 시조문학 강의를 들을 때부터였다. 회고하건대 그때 검은 가방을 옆에 끼고 처음 강의실 문을 들어와 교단에 오르시는 선생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건장하고 활달함’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훤칠하고 당당한 체격에 단정한 의복, 용안(龍顔)처럼 긴 얼굴, 넓은 이마 밑에 힘차게 뻗어 우뚝이 솟은 콧날, 길고 뚜렷한 인중 아래 팔자(八字)를 마주 합한 듯 굳게 다문 입술, 꼬리가 조금 아래로 처져 유순하고 온화해 보이면서도 야심차고 예리함이 번득이는 봉안(鳳眼)의 눈매, 그 위에 짙지 않게 가로 놓인 인자하고 지혜로운 눈썹, 눈 위치 아래로 두껍고 여유 있게 자리 잡은 후덕한 귓밥, 모발을 짧게 깎아 운동선수같이 윤곽이 뚜렷한 두상, 금성옥진(金聲玉振)의 카랑카랑한 음성 등은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 생동감과 신뢰감을 풍기는 동시에 무언가 대인다운 비범함을 느끼게 하는 인상이었다.
나중에 관찰한 일이지만 선생의 두 발은 그 건장한 체격을 무리 없이 지탱할 정도로 큰 편에 속하나 두꺼운 양손의 손가락은 굵기는 하나 체격에 비해 다소 짧아 보이는 편이다. 특히 좌우수(左右手)의 앵지 가락은 유별나게 가늘고 짧아 보이며, 손금은 잔금이 적으나 두 손바닥의 중앙을 횡으로 가로지른 굵은 금이 단선(單線)으로 그어져 있다. 속설에는 이러한 손금을 ‘총명하고 성실함을 암시하는 막 쥔 손금’이라 하여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걸음은 언제나 의장대가 사열연습을 하듯이 어깨를 활짝 펴고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보무도 당당하게 걸으신다.
필자는 선생의 선장(先丈)을 친견한 적이 없으나 몇 번 자당(慈堂)을 뵈올 기회가 있었다. 자당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평범한 규중부인(閨中婦人)이 아닌 전중단아(典重端雅)하신 여중군자(女中君子)의 용태였다. 아마 선생은 자당의 골격과 심성을 많이 이어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3. 돈후엄격(敦厚嚴格)한 선생의 사제정의
선생은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선산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초등학교에 부임하여 교사생활을 시작하셨다. 해방이 되자 김천농고, 대구상고, 대륜고등학교 등의 교사를 거치면서 청구대학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학사과정을 마치고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영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때문에 선생이 각급 학교 과정을 수료하면서 스승으로 모셨던 분은 많았던 것 같다. 그중 필자가 선생의 구전(口傳)을 통해 들었거나 직접 본 분은 초등학교 재학시절의 박두은(朴斗銀) 선생과 일본인 교사 다꾸마신(宅間梓) 선생, 경성사범학교 재학 시의 스승이며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이었던 도남 조윤제(陶南 趙潤濟) 박사, 경북대학교 대학원 재학 시의 청계 김사엽(淸溪 金思燁) 박사 등이다.
선생이 박두은 선생과 다꾸마신 선생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과 애정은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 같다. 스승의 도리를 말씀하실 때마다 선생은 언제나 그 두 분을 모범의 실례로 들었다. 그리고 그 두 분 선생이 초등학교 시절에 보내 주신 작은 엽서 몇 장을 전쟁 · 피란 · 이사 등 많은 어려움의 와중에서도 70년 동안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시면서 언제나 그때 그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으셨다. 그 엽서는 1997년 선생이 이사장으로 계시는 금옥장학회 회보 제10호에 소개된 바 있다. 김사엽 박사와는 학문적인 교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돌아가신 뒤 그 묘비건립 추진에 상당한 정성을 기울이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께서 도남 조윤제 박사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모시는 도리는 각별하였다. 5·16군사혁명 직후 당시 군사정부의 부도덕성을 비판하며 협력하지 아니한 결과 대학 강단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계시던 도남 선생을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청구대학 국어국문학과 전임교수로 모셔 온 것은 그 하나의 예다. 이로 인해 도남 선생은 그 학문과 교육의 최후를 영남대학교에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가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방대한 국학 자료를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게 되었으니 한국문학계의 상징인 도남 학맥은 영남대학교에서 최후의 봉우리를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남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러하였다. 도남 선생이 생시에 보내오신 십 수 통의 서간문(書簡文)을 소중히 간직하시면서 도남학회의 이사장직을 맡아 그 기금을 확충하기 위해 대구에서 서예전을 열기까지 하였으며, 언제나 국학계의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경앙(敬仰)해 마지 않으셨다.
필자의 소견에 의하면 선생께서 제자에 대해 베푸신 정의(情誼)는 크게 두 가지 시각에서 조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열정적인 면이며, 둘째는 냉정한 일면이다. 그러나 그 열정과 냉정은 매우 투철한 원칙과 기준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열정적이어야 할 경우에 냉정하거나, 냉정해야 할 경우에 열정을 쏟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럼 필자의 눈에 비친 그 열정과 냉정이란 무엇인가.
선생은 제자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바르고 착한 길을 걸어나가려고 노력할 경우에는 흡사 자기 자녀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칭찬과 격려와 협조를 아끼지 않으셨다. 보다 훌륭한 신입생을 모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며, 인품과 전공지식을 구비한 졸업생이 배출되면 그 취직을 위해 불원천리 해당 학교와 회사로 달려가 끝까지 길을 열어 주는 데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한 정의는 누가 보아도 열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정직 성실하지 아니한 일을 하는 제자가 있을 때에는 즉석에서 그 잘못을 힐책하거나 공박하여 그 인격에 손상을 입히지 아니하고 관용하시는 일면, 그사람 자신이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깨달아 교정할 수 있도록 무언의 암시를 하시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계속 그 시중(示衆)의 연화(蓮花)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경우에는 그의 성장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시는 것만 같았다. 될 수 있으면 무언의 채찍으로 제자들을 훈도하시는 그 발이중절(發而中節)의 교육 방법을 혹자는 냉정과 무관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필자는 때때로 무언(無言) 무심(無心)한 돌부처님 앞에 앉아 기도를 하면서 부처님이 필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자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거기서 얻은 결론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도 착한 나에게는 열정적인 자비를 베푸실 것이며, 악한 나에게는 냉정한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였다. 선생께서도 돌부처님이 중생을 깨우치는 그 뜨겁고도 차가운 교육 방법을 터득하셨던가.
온유와 강직, 열정과 냉정을 조화시킨 이 양단겸전(兩端兼全)의 중용적인 교육 방법은 단순한 이론을 통해 배우거나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다. 다만 그러하리라 추측하면서 흉내를 내어 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4. 선생의 대인관계와 의리정신
선생이 얼마나 많은 인사들과 어떠한 교유관계를 유지해 오셨으며 어떤 사상과 신념으로 사람들을 대해 오셨는지 필자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필자가 듣고 본 몇 분과의 관계와 그 속에서 견지해 오신 자세와 풍겨온 인상을 적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국과 일본에 산재해 있는 경성사범학교 동기생들과의 교분이다. 선생은 재학시절 일본 학생들과의 관계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한 사이였다고 한다. 때문에 특별히 미워한 사람도 없었지만 별로 친한 사람도 없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에는 일본의 간악한 식민정책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 일본인 동창생들과의 관계도 소원하기 그지없었다. 해방 후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 된 다음 몇몇 동창생들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여 우의를 다져온 것으로 듣고 있을 뿐이다. 특히 안동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다가 퇴임하신 교육학자 김학수(金學守) 박사와는 두 분의 성격과 취향이 서로 다르면서도 항상 동기동창으로서의 돈독한 신의를 다져 오셨다.
영남대학교와 관련이 있는 분들 가운데 가장 의기투합했던 분으로는 고 소정 최해종(韶庭 崔海鍾) 선생과 계당 최해태(桂堂 崔海泰) 박사 형제 외에 이동영(李東寧) 이사장, 신기석(申基碩) · 이선근(李瑄根) · 조경희(趙敬熙) 총장, 이용구(李龍九) · 박원규(朴元圭) 교수 외에 많은 분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중에서도 한학자인 소정(韶庭) 선생을 매우 존경하며 계당과 상호이해, 도의상마(道義相磨)하신 친분과 이용구(李龍九) 교수를 친 아우처럼 끔직히 아끼시던 일은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쳐졌다.
영남대학교 외의 인사 가운데 친밀히 교왕하신 분은 학계의 임창순(任昌淳) · 이가원(李家源) · 최진원(崔珍源) 교수, 박태권(朴泰捲) 교수, 정완영(鄭椀永) 시조시인(時調詩人), 서화계의 김충현(金忠顯) · 김응현(金膺顯) · 조수호(趙守鎬) · 민경갑(閔庚甲) 씨 등이 있으며, 대구를 중심한 주변에는 조경희(趙敬熙), 정달용(丁達龍), 곽예순(郭禮淳), 이병재(李炳載) 씨, 그리고 매달 모임을 갖는 경사동창회(京師同窓會), 오목회(五睦會), 구인회(九人會) 회원들과 부단한 우의를 다져 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정계(政界)나 관계(官界)의 인사들과는 대부분 경이원지(敬而遠之)한 태도를 견지하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을 합병하여 영남대학교를 창설한 고 박정희대통령과의 관계는 그 좋은 예의 하나라 여겨진다. 박대통령은 선생과 먼 척인(戚因)이 있는 동향인(同鄕人)으로서 같은 사범교육을 받은 동도(同道)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생께서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문경초등학교 교사 자리가 바로 박대통령이 교사로 재직하다가 사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사표를 제출했던 그 빈 자리였다. 그러므로 선생이 만일 저 천박비루한 속인들처럼 교육과 학문을 팽개치고 권력이나 영달에 대한 야심을 품었더라면 그 누구보다도 더 박 대통령을 가까이하고 그 후광을 이용하여 부귀영달을 누릴 수 있는 기회와 인연과 능력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박대통령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동기와 방법 및 그 군인으로서 저지른 행위(行爲)를 내심으로 끝까지 찬동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박대통령을 직접 만나거나 교제하려고 노력하지 않으셨다. 다만 한 사람의 학자로서 그 강력한 정치세력을 어찌할 수 없었는지라 그의 생각이나 행위를 강력히 비판하거나 광정(匡正)할 수는 없었지만, 시종일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경이원지(敬而遠之)한 관계를 유지해 왔을 뿐이다. 그때 선생의 그 참신 고고한 조행(操行)은 도남 선생을 이어 영남사림의 선비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놓은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붓을 멈추고 생각해 보건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해서 안 될 일은 절대로 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우리는 ‘성인(聖人)’ 혹은 ‘현인(賢人)’이라 불러왔다. 예를 들면 중국 고대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은 무왕(武王)의 아우요 성왕(成王)의 숙부로서 무왕이 죽고 강보에 싸인 성왕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주나라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사람이면 누구나 욕심을 부릴 수 있는 임금이 될 수 있는 권능(權能)까지 자신의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조카 성왕을 위해 끝까지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했을 뿐, 해서는 안 될 임금 자리를 탈취하는 반역행위는 하지 않았다. 때문에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聖人)도 주공을 꿈에도 잊지 못하는 자신의 거울로 삼아 유가사상(儒家思想)의 핵심인 인(仁)과 의(義)를 확립했던 것이다.
한국역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성계(李成桂)가 임금으로 모시던 고려의 공양왕(恭讓王)을 내쫓고 근세조선(近世朝鮮)을 건국했을 때, 고려충신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는 그 이성계의 반역행위를 끝까지 용납하지 않았다.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가 죽음을 당했고, 그 충절을 계승한 길재는 부귀영화에 대한 모든 회유와 유혹을 다 뿌리치고 영남 선산의 금오산 밑에 숨어 일생을 야인으로서 마무리하였다. 여기서 그는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金宗直) 등 이른바 영남의 후진들에게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가’를 교육시켰다. 그 뒤 영남 지역을 중심한 식자(識者)들 가운데 이 정몽주와 길재의 절의정신(節義精神)을 계승하여 생활화해온 사람들의 유파를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라고 불러왔다.
이 영남사림파의 정신은 지금도 맥맥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영남에 사는 식자(識者)이거나 과거 영남사림파의 혈통적인 후예라고 해서 영남사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남지방의 학자나 영남사림파의 후예들 가운데서도 영남사림의 선비정신을 욕되게 하고 파괴한 사람이 많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근래 영남의 식자들 가운데 그야말로 ‘해야 할 일은 끝까지 하고, 해서 안 될 일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끝까지 안 하는 모범을 보여 준 선비’가 과연 몇 분이나 되겠는가. 다시 말하면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에 박대통령이 부귀영화를 보장할 것을 암시하면서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데도 그의 불의(不義)를 미워하여 협력하지 아니하다가 직장에서 추방당한 선비가 몇 명이나 있었던가. 거기서 한 걸음 더 물러나 박대통령과 연줄을 달아 남다른 권세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인연과 기회와 능력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만 그의 의리를 탓하여 초연히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생활한 학자가 몇 명이나 있었을까. 좌정관천(坐井觀天),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졸견(拙見)인지는 몰라도 전자는 은사 도남 조윤제(陶南 趙潤濟) 선생과 같은 분이요, 후자는 모산(慕山) 선생이 그러한 유에 해당하지 아니할까 여겨진다.
저간 우리들 주변에는 ‘팔공산이나 토함산 속의 화조월석(花朝月夕)에 매혹되어 물외신선(物外神仙)이 된 것처럼 보였던 분들’이 계셨다. 우리들은 그분들이 노래했던 달콤한 언어의 향기를 멀리서 믿고 호흡하면서 혼탁한 속세의 정신을 맑히는 청량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어찌 된 셈인가. 그렇게 미려개결(美麗介潔)하고 청초 고아(淸楚高雅)해 보이던 이분들 가운데는 저 높은 곳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그만 오금을 떼어놓지 못한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인륜 기강에 대한 의리나 시비(是非)를 분별하지 못한 채 권력 앞에 머리를 숙임으로써 우리의 믿음과 꿈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말았다. 그분들은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름답게 여겼던 팔공산과 토함산의 화조월석(花朝月夕)을 헌신짝처럼 팽개치면서 “어와 성은(聖恩)이 이제야 당도했구나!”를 외치는 동시에 기차도 느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때 그 사실을 눈치챈 팔공산과 토함산 정령(精靈)들은 그분들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하지만 본래 의리함양(義理涵養)과 시비분변(是非分辨)을 뒤로 한 채 언어유희(言語遊戱)에만 몰두했던 그 화조월석(花朝月夕) 속의 가신선(假神仙)들은 끝내 팔공산과 토함산 정령들의 그 뼈저린 충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 높은 곳을 향해 까마득히 달려가고 말았다. 팔공산과 토함산의 정령들은 ‘연못 속의 이무기’와 ‘산속의 호랑이’를 잃어버린 듯 허탈하고 괘씸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가신선(假神仙)들이 산령(山靈)들의 충고를 뿌리치고 그 높은 곳에 달려가 얻어 온 것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추측하건대 허망한 홍진속세(紅塵俗世)의 구린내 나는 오물 이외에 무엇이 더 있었겠는가. 그래도 그분들은 자신들의 몸과 마음속에 감염된 그 ‘구린내 나는 오물’ 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의기양양하게 다시 팔공산과 토함산으로 되돌아와 옛 보금자리를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팔공산과 토함산 정령들은 저 처량하게 ‘오물단지’를 끌어안고 돌아온 가신선(假神仙)들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았다. 토함산 정령은 그들이 돌아오자 운무(雲霧)로 산문(山門)을 봉쇄했으며, 팔공산의 정령은 분노하여 산자락에 다시 들어 선 그들을 고함쳐 내쫓아 버렸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히 영남 현대정신사의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면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혼탁한 시대 상황의 와중에서도 도남 선생과 모산 선생 두 분이 이 팔공산 밑에서 영남사림의 의리정신을 꿋꿋이 지켜 주셨음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던가. 이 두 분이야말로 영남의 선비정신, 나아가서 공맹유학(孔孟儒學)의 진정한 의리사상을 오늘에 되살리신 분들이라 해서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으로 진정한 영남학맥이 태백산의 억센 능선처럼, 낙동강의 완곡한 굽이처럼 살아 흘러내리고 있음을 실증한 분들임에 틀림이 없다. 오늘 선생의 이 전기자료(傳記資料)를 수집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5. 영원불후할 선생의 학문업적
조선조 명문 청송심씨의 후예로 태어나신 선생은 일찍이 면면부절한 가학(家學)의 배경을 통해 유년기부터 한문과 서예를 익혀 오신 일면 초등학교와 사범학교 과정을 이수했기 때문에 신구학문에 대한 기초를 겸전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의 초등학교 교원 생활, 해방 후 혼란한 사회 상황과 6·25전쟁의 국란을 거친 뒤의 고등학교 교원 생활 등은 오랫동안 선생에게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문을 중시해 온 가문의 전통과 선생 자신의 천성적인 학문 애호 취향, 그리고 경성사범학교 재학 시절에 은사로 모셨던 도남 조윤제 박사의 영향 등으로 인해 선생은 국문학연구에 대한 강한 집념을 버리지 않으셨다. 다시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고전문학을 전공하시고 대학 강단에서 시조문학(時調文學)을 강의하시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개인적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재력(財力)과 정력(精力)을 기울여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프랑스 등 전 세계 학술기관에 소장되어있는 각종 고시조 자료를 수집 정리, 드디어 한국문학사상 불후의 금자탑이 될 수 있는 《교본역대시조전서》를 편찬하는 동시에 《시조의 문헌적 연구》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찬술하게 된 것이다.
그 학문적인 업적의 역사적인 의의는 이미 본고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으며, 거기에 응용된 연구방법은 고증학(考證學)을 기본으로 한 문자학(文字學) · 교감학(校勘學) · 서지학(書誌學) 등이라 할 수 있다. 국학계는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영남대학교에서는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대한민국 학술원에서는 제18회 학술상 중 저술상(著述賞)을 수여하여 그 실적과 노고를 치하(致賀)한 바가 있었다. 그 외의 여러 가지 업적에 대한 소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6. 인성도야를 위주한 선생의 교육이념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항상 군인다운 생각에 익숙해 있듯이, 사범학교 출신인 선생은 언제 보아도 스승으로서의 조행과 이상에 젖어 있었다. 선생은 공자가 그 제자들을 깨우칠 때 항상 개개인의 개성과 수준에 따라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했음과 서양에서 근대교육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스위스의 교육학자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의 교육관을 자주 말씀하시면서 ‘인성도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유럽 여행 중 예정에 없었던 수백 리 길을 달려 기어이 루소와 페스탈로치의 동상(銅像)을 둘러보고 오셨다니 사범학교 시절에 익숙히 배웠던 루소와 페스탈로치의 교육관을 얼마나 신봉하고 계셨던가를 암시해 주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목전 우리의 교육 현실 중 지식암기를 위주로 한 이른바 ‘일류 지향 교육’의 병폐에 대해서는 개탄을 금하지 못하셨다. 가정에서 자제들을 지도하심을 보면 그 교육에 대한 이념과 실제를 얼마나 잘 조화시켜 나가시는가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가 있다. 선생은 슬하에 5명의 아들을 두고 계신다. 그 다섯 아들은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여 사회의 명사(名士)들이 되어 있다. 필자는 비교적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선생을 모셔왔지만, 그 아들들에게 한 번도 ‘일등(一等)을 하라’거나 ‘일류학교에 가야 한다.’라고 강조하시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일류 중 · 고등학교와 일류대학을 나온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칭찬하시거나 자랑하시는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 다섯 명의 자제들을 한결같이 자기 능력과 적성에 맞는 학교에 진학시켜 타고난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뒷바라지를 해 주실 뿐이었다. 때문에 선생의 아들들은 어느 학교 무슨 학과에 입학을 했거나 간에 다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전공에 최선을 다해 왔으며, 졸업 후에는 그 길로 매진하여 각자의 분야에서 큰 업적을 쌓아가고 있다.
근간 어느 교육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울대학교 진학을 마치 중등학교 교육의 지상과제인 양 열을 올리고 있는 좌중을 향해 “서울대학에 진학을 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성 개발, 인성 도야를 위주한 전인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신 것은 평소 교육에 대한 소신의 일단을 피력한 증거라 여겨진다.
7. 광범심취한 선생의 예술취향
선생의 선장(先丈)이신 퇴산공(退山公)은 한시문(漢詩文)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서법(書法)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를 쌓으신 분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은 일찍부터 가학(家學)의 영향으로 한학과 서예의 기초를 익히시게 되었고, 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거기에 대한 취향을 버리지 못하셨다. 특히 서예에 대해서는 중국서예사를 탐독하여 그 발전과정을 이해하고 각종법첩의 임서(臨書)로 실기를 익힌 동시에 중국에서마저 명성을 떨쳤던 성제 김태석(惺齋 金台錫) 공에게 사사(師事)하는 일면, 학생 신분으로서 당대 명필가들을 두루 예방하여 안목을 넓히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범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폭넓은 예능의 기초를 수련 체득했기 때문에 선생은 많은 문인 · 서예가 · 음악가 · 화가들과 더불어 폭넓은 교유를 하심과 아울러 그 발전을 위해 적지 아니한 활동을 전개해 오셨다.
필자는 몇 년 전 선생을 모시고 대만과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서예와 관련된 기관과 인사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필자도 평소 선생께서 서예를 좋아하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진실로 깊이 이해한 것은 그 여행 중에서 겪은 다음 몇 가지 경험을 통해서였다.
첫째, 선생은 명인들의 서예 작품이 진열된 전시장이나 박물관에 들어가시면 때때로 삼매경(三昧境)에 몰입하여 옆에 동행인이 있음과 예정된 시간이 초과함을 잊으시는 점이다. 기다리다 지쳐서 짜증이 날 정도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둘째, 개인 소장품 가운데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하시면 지갑에 든 여행비를 계산하시지 않고 그것을 기어이 구입하시는 열성이었다. 한 번은 대만에서 어느 명사가 소장했던 하소기(何紹基)의 작품과 우우임(于右任)의 여비서 모씨가 소장하고 있던 우우임의 서예 작품들을 보시더니, 그것을 살 수 있는지, 살 수 있으면 값은 어느 정도인지를 물어보라고 하셨다. 지금 회고하건대 그 작품들은 실로 구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값도 엄청난 것이었다. 교수 봉급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값을 들으시더니 선생께서도 어안이 벙벙하셨는지 먼 하늘만 치어다 보시며 말이 없었다.
그날 저녁 호텔로 돌아오신 선생은 몇 번인가 자제를 하시더니 결국 일본에 있는 제씨(弟氏)에게 전화를 걸어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그것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을 빌려 달라고 하셨다. 어지간해서는 누구에게도 금전을 빌려달라고 하시는 선생이 아닐 뿐 아니라, 선생의 말씀이라면 콩을 팥이라 해도 믿는 그 제씨였던지라 흔쾌히 호응하셨다. “내일 아침 대만 중앙은행 모모 구좌로 송금할 터이니 가서 찾으라”라는 것이었다. 그때 제씨의 그 말을 듣고 즐거워하시던 선생의 모습은 흡사 천진난만한 소년이 신기루의 환상에 도취되어 있음과 같았다. 아마 한국에서 우우임의 진품 글씨를 가장 많이 소유하신 분은 선생일 것이다.
셋째, 서예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가 있으면 모든 것을 다 뒤로 미루어 두시고 그것을 먼저 관람하셨다. 일본 동경에서 있었던 일이다. 필자와 고 이현규(李鉉奎) 박사는 동경(東京)엘 처음 간 기회라 먼저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동경의 관광명소를 보고 싶었다. 선생께서도 모처럼 들리신 동경인지라 여러 가지 볼 일이 많으셨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다 그만두고 서예에 관한 귀중한 자료나 보고 가자”라고 하시면서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어디론가 계속 가셨다. 최후에는 택시를 타고 동경 변두리 어느 조용한 마을로 들어섰다. 도착한 곳은 전형적인 일본식 이층고가(二層古家), 중촌부절기념서도박물관(中村不折紀念書道博物館)이었다. 본래 서양화가였던 중촌부절이 서예에 심취하여 일생동안 중국서예사와 관련된 만여 점의 금석자료를 수집했는데 중촌씨가 죽은 다음 그 자료들을 본가에 진열하여 기념박물관으로 활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집의 아래 위층에는 중국 고대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서예 발달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들이 알차게 진열되어 있었다. 일본의 한 개인이 어디서 어떻게 그렇게도 많고 체계적인 중국의 골동 자료를 수집했는지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서예에 대해 혹호심취(酷好深醉)하신 선생의 취향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박물관이었다.
8. 효우화목한 선생의 치가법도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순서에 입각해 보면 수신(修身)을 바탕으로 한 제가(齊家) 즉 치가(治家)는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신을 통해 치가를 못한 사람은 치국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며, 치국을 못한 사람은 자연히 평천하 사업에 동참할 수가 없다.
선생은 훌륭한 천성을 타고나 철저한 사범교육을 받았던 탓이었는지 항상 남을 가르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함양하며, 나라를 걱정하시기 전에 집을 다스리는 데 정성을 기울이셨다. 그간 필자의 눈에 비친 몇 가지 구체적인 내용을 적기(摘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조(先祖)에 대한 추원보본지심(追遠報本之心)을 잊지 않으시며, 부모에게는 효성을 다하셨다. 일본의 계씨(季氏) 성금으로 집안사람들과 합심하여 고향 큰댁 사랑채 자리에 봉고정사(鳳皐精舍)를 중건(重建)하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시며, 선고(先考), 조고(祖考), 증조고(曾祖考) 3대의 유고(遺稿)를 정성스럽게 수집 번역하여 봉고세고(鳳皐世稿)를 출간하여 자손들에게 그 뜻을 전하시며, 구십 세까지 계신 자당(慈堂)에게는 노래자(老萊子)와 같은 효성을 다하셨다.
둘째, 사모(師母) 조정순(趙貞順) 여사와의 부부생활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요조숙녀, 군자호구(窈窕淑女, 君子好逑)”의 금슬지도(琴瑟之道)를 일관하셨다. 선생과 사모는 두 분의 체격과 용모와 성품이 부부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친 남매간과 같이 닮은 분들이시다. 사모는 출가하시기 전에 그 친정 자당과 조모님으로부터 철저한 양반가 규중의 교양과 법도를 익히시면서 학교를 졸업하신 다음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일상생활에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다.
회고하건대 선생께서는 사모의 훌륭하신 부덕과 정성어린 내조를 바탕으로 《교본역대시조전서》란 불후의 학문적 업적을 남기시게 될 수 있었고, 다섯 아들을 출중하게 성장시켜 나가셨을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 내외분은 ‘여빈여우(如賓如友)’를 부부간의 근본 도리로 삼아 언제나 ‘서로 손님같이 공경하고, 친구같이 다정하게 지내시어’ 일가친척과 제자들에게 진정한 부부의 아름다움과 도리가 어떠한 것인가를 솔선수범해 주셨다.
셋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다섯 자제들에게 지식암기식의 경쟁교육을 강요하지 아니하고 인성도야 원칙에 입각한 개성함양 교육을 실시하여 가정에서는 효자요 사회에서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민주시민으로 기르셨다.
한국자동차보험회사에서 발군의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상무직까지 역임한 뒤 (주)택산(澤山)을 경영하고 있는 장남 홍필(弘弼) 사장, 경영학을 전공하여 미국 미시시피대학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차남 정필(正弼) 박사, 토목공학을 전공한 뒤 인하대학교 공과대학교수로 부임하여 국내외 토목학계의 촉망을 받고 있는 삼남 명필(名弼) 박사, 경영학을 전공하여 안동대학교 무역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기획실장을 담당하고 있는 사남 원필(元弼) 박사, 서양화를 전공하여 불란서 파리에서 유학하면서 현지 화단의 호평과 장려로 여러 번 수상과 전시회를 개최하며 성장해 나가고 있는 오남 문필(文弼) 화백 등은 그 점을 입증해 주고 있다.
넷째, 선생 내외분께서는 선대의 봉제사에 대해 항상 정성을 다하시며, 형제자매에 대한 우애를 돈독히 하셨다. 그리고 원근 일가친척과 동료 제자 일반인 등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자택을 방문하여 제반사를 묻고 의논함을 조금도 번거롭게 여기거나 꺼리지 않으신다. 누가 언제 가도 항상 새로운 손님으로 반가이 맞이하시는 선생 내외분이시다. 때문에 선생의 문전에는 언제나 손님의 내왕이 그치지 않는다.
실로 화목하고 자연스러운 속에 정연한 법도와 질서가 있는 모범 가정을 이룩하셨다고 할 수 있다.
9. 평범 속에 비범한 선생의 일상생활
선생의 일상생활을 눈여겨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평범 속의 비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째, 선생은 전통적인 유가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삼강오륜의 덕목을 익히심과 아울러 도가(道家) 불가(佛家)에 대한 이해를 겸했으며 그 위에 현대교육의 이론을 체득하신 탓인지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종교 이념이나 사상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가정에서는 철저히 유가풍의 생활을 하시면서도 자주 산사(山寺)의 고승(高僧)을 찾아 담화를 나누시기도 하고 사원의 법당에 들어가시면 불상(佛像)을 향해 경건히 예배도 드리신다. 때문에 언제나 명랑 쾌활하시고 자신만만하시면서도 신중치밀(愼重緻密)하고 고아청신(高雅淸新)한 품격을 잃지 않으신다.
둘째, 가족 · 동료 · 제자 · 일반인 등 그 누구에게나 항상 자상하고 정중하게 대하시며 전통적인 양반 가문의 언어생활을 영위하신다. 예를 들면 선생으로부터 ‘너’라는 호칭이나 ‘해라’ 식의 낮춤말을 들어본 제자는 드물 것이다.
셋째, 선생은 기상에서부터 취침까지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법이 없으시다. 무료한 시간이 나면 글씨를 쓰시거나 책을 읽으시며 혹은 운동을 하신다. 그리고 의 · 식 · 주에 있어서 과분한 사치나 낭비를 절대로 하지 않으신다. 비록 기거하시는 건물의 규모는 여유가 있으나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가구나 기타 생활 용구는 화려하거나 값비싼 물건을 구입하지 않으시며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쓰신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식사하실 때나 남과 함께 외식하실 때도 항상 채소를 중심한 소박한 음식을 꿀맛이 나는 듯 맛있게 드시며, 신으시는 구두를 두고 이중 삼중으로 새 구두를 사지 않으신다.
넷째, 선생은 언제나 소박하고 겸손하시며 주위 사람을 믿고 편안하게 해 주신다. 몇 년 전 필자 내외는 선생 내외분을 모시고 약 20일 동안 대만 · 홍콩 · 태국 · 싱가포르 ·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연세가 높으신 노인분네들인지라 사실상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일 일이 많을 것을 각오하고 떠난 여행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기우에 불과하였다. 집을 떠난 그 날부터 구미에 맞지 아니한 음식, 언어 소통의 불편함, 비 내리고 무더운 열대 기후, 전문 안내원이 없는 산만한 여행 일정, 장거리 여행의 피로함 등등 여러 가지 견디기 어려운 일이 많았으나 단 한 번도 불편하거나 짜증 나는 기색으로 필자 내외의 심기를 초조하거나 불안하게 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여로(旅路)에서 만날 수 있는 매사에 대해 항상 깊은 흥미를 기울여 듣고 보실 뿐만 아니라 혹 마음에 들지 아니한 일이 생겨도 태연자약하시며 때로는 적절한 유머로 여행의 분위기를 한층 여유롭고 신선하게 만드셨다. 연세 높으신 선생 내외분으로 인해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행을 즐거워하시는 선생의 정취와 멋에 도취되어 날짜가 흘러감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 사람을 알려고 하면 함께 여행을 해 보라”고 한 말과 같이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해보면 누구든지 그 평소의 인품과 본색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선생을 모시고 여행을 해 본 사람이면 시종일관 평안하여 날짜가 지나갈수록 더욱 새로운 분위기에 젖어 들게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대인군자의 도량과 운치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된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선생 내외분의 아름다우신 마음씨와 멋진 몸 가지심이었다.
다섯째, 선생은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구분하시어 사정(私情)으로써 공사(公私)를 어렵게 하시는 일이 절대로 없으시다. 선생께서 모산학술재단과 모산학술연구소를 대하심은 그 하나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본 재단과 연구소는 물론 선생의 덕행과 학문적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 운영되고 있는 학술연구 기구이다. 그러나 설립된 지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선생은 본 재단과 연구소에 매일 출근하여 연구하시되 단 한 번도 “이것은 내 것”이란 생각이나 표현을 하신 적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항상 엄격한 “공중학술기관(公衆學術機關)”으로 여기시면서 이사장이나 연구소장이 처리하는 일에 대해서 일체 간섭을 하시지 아니하신다. 혹 재단의 정기적인 이사회와 연구소의 운영위원회에 옵서버로 참석을 하셔도 다만 노고를 위로하고 감사의 소회를 피력하실 뿐 운영방침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론에 일임하실 뿐 선생 자신의 사적인 견해를 피력하시지 않으신다. 때문에 이사진과 연구소 임원들은 더욱 책임을 지고 봉사를 할 뿐만 아니라 일을 할수록 새로운 보람을 느끼게 된다.
여섯째,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음악의 기초와 사교춤을 이해하시지만 대중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지 않으시며, 화투 · 장기 · 바둑 등 잡기에 전혀 손을 대지 않으신다. 그러나 남이 즐기는 것을 질책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시지도 않으신다.
일곱째, 주석(酒席)에 접대부들이 동석하면 소탈한 농담을 잘하시며, 주량은 두주불사(斗酒不辭)의 거량(巨量)이지만 아무리 음주를 하셔도 그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실언과 실례를 하지 않으신다. 1974년 여름 어느 날 대구 명덕로타리 모 중국음식점에서 필자와 대만 중국문화대학에서 온 여자유학생 오혜순(吳惠純) 그리고 김주한(金周漢) 동문이 선생을 모시고 식사를 하면서 두홉들이 고량주 9병을 마신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9병 가운데 적어도 3병 이상은 선생에게 권하고 나머지를 필자와 김동문이 나누어 마셨을 터인데, 당시 나이 어린 필자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여 선생 댁을 찾아가 횡설수설 제멋대로 춤을 추며 이웃이 떠나가도록 노래를 부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으나 선생은 끝까지 태연자약하셨다. 주중불언진군자(酒中不言眞君子)가 바로 선생임을 그때서야 깨닫고 고개를 숙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필자가 그 주중에 저질렀던 횡설수설한 실언과 경거망동한 실례를 까맣게 잊으셨는지 지금까지 한 번도 되씹어 말씀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셨다. 때문에 필자는 아직도 선생의 그 무언의 채찍 속에 어떤 교훈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의아스럽고 두렵게 여기고 있다.
여덟 번째, 외국 여행 중에 계실 때는 아무리 바쁜 일정 속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정다운 편지를 잘 쓰시며 귀국 시에는 차나 기타 정성어린 선물을 자주 하신다. 특히 아는 사람의 전공에 맞는 서책을 보시면 불편함을 무릅쓰고 사다 주시면서 정진을 당부하신다.
아홉 번째, 장래에 해야 할 일을 반드시 수첩에 기록하시며, 매일의 생활을 그 기록에 의해 시행하시기 때문에 착오가 없으시다. 뿐만 아니라 연초(年初)가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수첩을 선물하시며 기록하는 생활의 습관을 들이도록 권장하신다.
열 번째, 주위 사람들의 단점이나 부족한 점은 가급적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장점과 좋은 점을 칭찬하고 격려하신다. 그리하여 그 사람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거나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 주신다. 제자들에 대해서는 특히 그러하시다.
열한 번째, 평소 건강에 대한 지론은 식사를 잘하며 바로 앉고 많이 걷는 것이라고 하신다. 대만 여행 중 오후 6시 화련(花蓮)에서 배를 타고 익일 아침 8시 기륭(基隆)에 도착하기까지 밤새도록 꼿꼿이 앉아 계시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 비친 선생의 건강 비결은 성실 근면하시며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한 일상생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10. 선생과 모산학술재단의 설립
필자는 평소 현세에서 보기 드문 선생의 덕행을 존경한 동시에 선생께서 혼신의 정성을 기울여 편찬하신 《교본역대시조전서》(校本歷代時調全書)의 역사적인 의의를 소중하게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이 책은 시조문학에 대한 이론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역대의 시조를 총망라하여 대교(對校) 집성(集成)한 자료집이기 때문이다. 이론서는 아무리 유명해도 끊임없이 개발되는 새로운 이론서에 밀리고 파묻혀 언젠가는 생명이 다할 날이 있다. 그러나 필수 불가결한 자료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욱 보배스럽게 활용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 멀리는 중국의 공자가 편찬한 《시경》과 소통이 편찬한 《문선》 등이 그러한 예이며, 가까이는 조선조의 서거정의 《동문선》 · 김천택의 《청구영언》 · 안민영의 《가곡원류》 등이 그 좋은 예에 해당한다.
만일 《교본역대시조전서》가 불후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헌이라면, 그 책이 전하는 한 저자인 선생도 반드시 역사적인 인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본역대시조전서》의 가치와 선생의 덕행을 알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은 그 영원한 미래의 역사를 위해 무엇을 해 두어야 할 것인가.
필자는 대만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 유지 경영하고 있는 장대천기념관(張大千紀念館)을 관람하고 일본 동경에 있는 중촌부절기념서도박물관(中村不折紀念書道博物館) 등을 둘러보면서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해 왔다. 선생의 학문적인 업적과 고아한 덕행을 오래도록 기릴 수 있는 조그마한 사업을 주선해 보아야겠다는 막연한 상상을 해 본 것이었다. 그 뒤 귀국하여 대학에 취직한 다음 선생을 모시고 서울 어느 학회에 가는 기차 안에서 그 문제에 대한 필자의 뜻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려 보았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일언지하에 “가당치 아니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두 말을 못 하게 하셨다. 하지만 필자는 그에 대한 구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선생께서 고희(古稀)를 맞기 1년 전인 1987년 어느 날, 필자는 선생의 장남 홍필(弘弼) 씨를 만나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던 의견의 일단을 제시해 보았다. 홍필 씨 역시 필자와 꼭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필자와 홍필 씨는 선생을 위한 조촐한 ‘학계(學契)’를 모으기로 합의하고 함께 그 계획을 선생께 말씀드렸다. 선생께서는 전과 다름없이 허락하지 않으시면서 “사실은 고향 선산 사람들도 그러한 제안을 해왔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라고 하셨다. 필자는 그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이 일은 하면 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다짐하였다
다시 필자와 홍필 씨는 선생께 몇 번이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물론이고 옆에 계시던 사모께서도 “지금 그런 일을 시작하면 공연스리 어려운 주위 사람들에게 번폐를 끼치게 될 터이니 애당초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셨다. 참으로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시는 말씀이었으나, 이 일은 단순히 선생 개인의 덕행과 업적을 기리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영남문화 나아가서 미래의 한국문화사를 위한 일임을 생각할 때 절대로 중도에서 그만둘 일이 아니었다.
그 얼마 뒤 필자의 계속된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 선생께서는 “자네의 뜻이 굳이 그러하다면 내가 평소에 가장 믿고 있는 문삼수(文三洙) 사장과 오세도(吳世度) 변호사에게 가서 그분들의 의견을 들어보라”라고 하셨다. 필자는 그날 당장 두 분을 찾아가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고견을 타진해 보았다. 초면인 두 분은 모두 필자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우 잘 생각한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면 될 수 있습니다. 이왕 일을 시작할 바에는 그런 소규모의 학계(學契) 정도로 할 것이 아니라 학술재단을 구성하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셨다. 필자는 이 두 분의 의외 제안에 오히려 할 말을 잊었다. “고소원이나 불감청(不敢請)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상당한 기금이 마련되어야 할테니 가능하겠습니까”라고 반문을 하였다. 두 분은 흡사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선생에 관한 일은 하면 될 수 있습니다. 나도 적극 협력하겠습니다”라고 하셨다. 그날 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 필자는 실로 흥분된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 뒤 계속해서 선산(善山)의 문화원장으로 계시던 고 이경일(李景一) 씨와 문화원 사무국장으로 계시던 김태규(金泰圭) 씨를 찾아갔다. 이경일 원장과 김태규 국장 역시 전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면서 “만시지탄(晩時之歎)을 금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선생의 고향인 선산을 대표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고 하셨다.
필자는 이때부터 평소 선생을 존경하고 보필해 온 영남대학교 사무과장 장상두(蔣相斗) 씨와 손발을 함께 하며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문회장 이근후(李根厚) 사장을 비롯하여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김윤곤(金潤坤) 교수와 국어국문학과 이현규(李鉉奎) · 이동희(李東熙) · 윤영옥(尹榮玉) · 김주한(金周漢) 교수, 포항공대 김원중(金元重) 교수, 대구대학 최창록(崔昌祿) · 권재선(權在善) · 이강언(李康彦) 교수, 경산대학 김영숙(金榮淑) 교수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 일을 상의하였다. 계획을 설명하자 어느 누구도 그 일에 전적으로 호응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1987년 6월 25일 드디어 모산학술재단(慕山學術財團)을 설립하기 위한 발기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 문삼수, 부위원장 오세도, 위원에 김원중 · 김춘룡 · 김태규 · 심우정 · 오상인 · 윤영옥 · 이근후 · 이현규 · 최창록 · 서근섭 · 장상두 씨를 위촉하고 필자는 간사(幹事) 직무를 맡아 재단설립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문삼수 위원장과 오세도 부위원장을 비롯한 위원 여러분과 선생을 존경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기금확충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수천만 원의 거액이 모금되어 재단 설립에 필요한 경제적인 요건을 충족하게 되었다. 지금 회고하건대 단시일 내에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일본경북도민회장이며 송본가구(松本家具) 사장으로 있던 선생의 제씨 심재인(沈載寅) 사장이 귀국하였다. 심사장은 그 재단설립의 취지와 지금까지의 추진상황을 듣고 “요즘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느냐, 참으로 보람 있고 감사한 일이다”라고 하시면서 두 차례에 걸쳐 2억여 원의 기금을 협찬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토지 가격이 비교적 헐하던 때이긴 했지만 현금을 두면 상승하는 물가고를 따라갈 수가 없었는지라 당장 그 기금으로 1988년 2월 15일 대구시 수성구 두산동 88-4번지 67평의 현 재단회관 부지를 구입했다. 그와 동시에 1988년 5월 31일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로부터 「사단법인 모산학술재단」 설립허가(사체25600호)를 받게 되고, 이어서 정식 이사진(명예이사장 심재인, 이사장 문삼수, 이사 오세도 · 이근후 · 이현규 · 이경일 · 홍우흠 · 심홍필, 감사 김춘룡 · 심우정, 간사 장상두)을 구성하여 대구지방법원에 「사단법인 모산학술재단」의 등기(328호)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989년 5월 10일 재단회관신축기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설계는 한국건축설계사무소 (대표 尹永道)가 맡고, 공사는 대노건설회사(大爐建設會社)가 담당하였다. 기금관리를 책임진 필자는 기금을 출연한 여러분들의 고귀한 뜻을 어기지 않기 위해 건축공사를 시작한 그 날부터 매일 현장에 나가 소홀한 공정을 일일이 시정하면서 인부들의 작업을 독려하였다.
동년 10월 28일 드디어 지하 1층, 지상 5층 연건평 270평의 모산학술회관을 완공 개관하게 되었다. 그때 수성들판에서는 유일하게 우뚝이 솟은 오층빌딩 모산학술회관(上樑文에 道德宣揚, 國學暢達을 씀), 그 옥상에 올라가 멀리 북쪽으로 팔공산을 병풍처럼 등지고, 남쪽으로 거울 같은 수성못 넘어 아늑히 펼쳐진 비슬산을 바라보던 필자는 가슴 속에서 치솟는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처음 부지물색 과정에 있어서 “대명동 영남대학교 부근이 좋을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던 선생께서도 이 건물이 완공된 뒤에는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이 자리를 잘 선택했다. 홍군 자네는 풍수야, 풍수!”라고 농담까지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1990년 4월 20일, 모산학술연구소(초대소장 이현규 박사, 운영위원 권재선 · 김영만 · 김원중 · 김윤곤 · 염선모 · 윤영옥 · 조수학 · 홍우흠 · 김주한, 간사 김영숙)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학술연구 활동을 전개해 왔다. 1995년 12월 27일 이현규 소장이 별세, 1996년 4월26일 필자가 제2대 소장으로 취임한 이래 현재까지 국내외 학술 세미나 개최, 논문집 발간, 연구총서 간행 등등 끊임없이 목적한 본연의 연구 사업을 추진해 왔다. 재단이 설립되고 회관이 준공된 지 어언 10년 세월, 그간 본 모산학술연구소가 국학발전을 위해 공헌한 바는 실로 적지 아니하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생의 남다른 덕행과 학문적인 안목은 《교본역대시조전서》란 불후의 업적을 남기게 되었고, 《교본역대시조전서》는 「사단법인 모산학술재단」과 「모산학술연구소」가 설립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으며, 「사단법인 모산학술재단」과 「모산학술연구소」는 국학계의 금자탑인 《교본역대시조전서》와 그 편자인 선생을 영원히 빛나게 할 수 있는 역사적 밑거름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11. 필자에게 베푸신 선생의 은혜
1963년 봄, 필자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근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구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학과에는 학과장 우촌 강복수(又村 姜馥樹) 교수를 비롯하여 모산 선생과 노산 이은상(李殷相) · 긍포 조규설(肯浦 趙奎高) · 두산 김택규(斗山 金宅圭) · 이재선(李在銃) 교수가 계셨고 그 뒤에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 박사가 오셨다. 전국 어느 대학에 가도 이보다 더 훌륭한 교수진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극도로 어려워 고학신세(苦學身勢)를 면치 못하게 된 필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학비를 제 때에 조달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제적(除籍)과 복학을 반복함은 물론 의 · 식 · 주의 곤란으로 건강마저 악화되어 학교를 계속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부득이 학과장에게 가서 휴학할 계획을 말씀드렸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을 들으신 선생께서는 백방으로 알아보시더니 필자를 자신의 처종숙이며 금성방직 상무로 계시는 고 조봉선(趙鳳善)씨 댁의 입주 가정교사로 추천을 해 주셨다. 그 때 사정을 미루어 좀 더 정확히 말하건대, 조 상무께서 가정교사를 원하여 추천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필요도 없는 가정교사를 선생께서 억지로 떠맡기신 것이다. 조 상무는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하시고 방직기술을 습득하신 분으로 용안(容顔)이 옥골(玉骨)이며 학문을 이해하고 심성이 인자하신 신사였다. 비록 종질서이지만 선생을 매우 아끼고 좋아하신 분으로 필자가 한문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4학년 1학기까지 필자는 조 상무 댁에 들어가 그 집 여러 자녀들과 더불어 꼭 같이 생활하고 공부함으로써 절박했던 의식주(衣食住)를 동시에 해결하여 건강을 회복함과 동시에 다소의 학비까지 보조를 받게 되었다.
그 때 선생과 조 상무의 특별하신 배려가 없었다면 필자는 아마도 대학과정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며 또 기한(飢寒)으로 인해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 두 분의 높고 큰 은혜로 1967년 2월에 드디어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그해 3월 1일부로 그렇게도 얻기 어려웠던 취직자리, 모교 대구성광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필자의 일생에 있어서 실로 건너지 못할 뻔 했던 “난관(難關)의 다리”를 거뜬히 건너게 해 주셨던 높고 큰 은인들이셨다.
1969년 3월 필자는 다시 영남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때 역시 남모르는 가정 사정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선생의 격려와 지도로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고전문학을 공부하여 1972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석사학위를 받고 보니 거기서 그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시 중국 유학을 결심하고 완전히 독학으로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삼학년 담임을 하면서 일주일에 정규수업 24시간, 과외수업 6시간, 외부출강 6시간, 총 36시간의 수업을 하고 나면 사실상 피곤하고 여유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항상 선생의 격려를 되새기면서 출퇴근 버스 안에서는 책을 보고, 밥 먹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에는 녹음기를 들으며, 취침시간 잠이 들 때까지는 중국말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중 국어 기초를 다져 나갔다. 그런데 이 어찌 된 일인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란 격언과 같이 1972년부터 영남대학교와 대만 중국문화대학이 자매결연을 체결함과 동시에 교수와 학생을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내심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로 여기면서 당시 영남대학교 교무처장으로 계시는 선생을 찾아가 “대만에 유학할 수 있는 교환학생의 자격을 취득할 수 있겠느냐”고 여쭈어보았다. 선생께서는 “아직 재학생 가운데 아무도 희망자가 없으니 문교부에서 실시하는 중국유학시험에 합격만 해 오면 가능할 것”이라고 하셨다. 선생의 이 말씀을 들은 필자는 사실상 있는 힘을 다해 중국어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해 가을 학기 드디어 중국문화대학에서 제1차로 우초병(于超屛) · 오경제(吳慶第) · 오혜순(吳惠純) 등 세 사람의 교환학생을 파견해 왔다. 참으로 희망과 갈등으로 가슴 설레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우초병을 개인적으로 초청하여 중국어 작문을 배우는 동시에 선생의 지도를 받게 된 오혜순 양의 정성어린 도움으로 중국어회화를 연습하기 시작, 2년간의 각고면려(刻苦勉勵) 끝에 1974년 드디어 문교부에서 주관하는 중국유학시험에 합격을 하였다. 실로 어렵고 험난한 고비를 넘은 셈이었다.
여기서 선생께서는 즉시 총장과 국제부 등 학교 당국과 협의하여 필자가 영남대학교와 대만 중국문화대학간의 제1차 교환학생이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필자는 7년간 봉직한 성광고등학교 교사직을 사직하고 그해 10월 그렇게도 소원이던 대만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필자가 4년간 유학을 하는 기간, 선생께서는 중국문화대학 중국문학과 교수이며 필자의 지도교수인 반중규(潘重規) 박사와 돈후(敦厚)한 교분을 맺으시며 필자의 학업과정을 음양으로 도와주셨음은 물론이거니와 1978년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 전신)에 전임으로 취직을 할 때며, 1980년 한국사회사업대학에서 영남대학교로 옮겨 오기까지 그 어느 고비를 막론하고 선생의 높고 큰 은혜가 깔려 있지 아니한 곳은 없었다.
아버지는 필자를 낳아 주신 분이지만 선생은 필자를 길러 주신 분이었다. 그 높고 큰 은혜에 보답은 못 할지언정 어찌 잊을 수야 있겠는가.
12. 이 글을 맺는 말
이상 필자가 35년간 모산 선생 곁에서 선생에 대해 보고 듣고 느낀 몇 가지 소감과 필자 개인이 선생으로부터 입었던 은혜의 일단을 두서없이 기록해 보았다. 될 수 있으면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서술해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때로는 주관적인 정감에 얽매여 소기(所期)의 필치(筆致)로 일관했는지 스스로 확언하기가 어렵다.
서언(緖言)에서도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어느 한 인물에 대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아니한 일이다. 특히 그 인격이 고매(高邁)하고 사상이 심원하며, 조행(操行)이 전아(典雅)하고 업적이 방대한 분은 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위에서 필자가 모산 선생에 대해 서술한 몇 조목의 내용은 오로지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일면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다시 한번 확신하고 강조해 두고자 하는 바의 객관적인 모산(慕山)은 “고매(高邁)한 인격과 돈후(敦厚)한 덕행을 갖추신 분인 동시에 민족문화사상 만인이 필요로 하는 불후의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인류 역사상 만인이 필요로 하는 업적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 생명을 잃지 아니했다. 동서양의 성현들이 남긴 경전(經傳)들은 저 일월과 같은 존재라면, 소통의 《문선》 · 서거정의 《동문선》 · 김천택의 《청구영언》 · 모산 선생의 《교본역대시조전서》등은 밤하늘의 뭇 별들처럼 영원히 그 빛을 잃지 아니할 것이다. 따라서 선생은 그 불후의 업적과 함께 온 인류의 가슴 속에 항상 새로운 희망과 빛을 밝혀 주는 뚜렷한 하나의 별자리로 남게 될 것이다.
끝으로 탄신(誕辰) 80주년을 맞이하신 선생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동시에 먼 훗날 이 졸문(拙文)을 읽으며 미소 짓는 배달겨레 후예들의 생기 넘친 얼굴들을 상상해 본다.
(영남대학교 교수, 모산학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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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 글을 명예교수회 카페에 올리면서 이제 우리 카페의 무게가 제대로 묵직해 지겠구나 싶었습니다. 교수님 글이 정한 양의 두배쯤 긴데, 그 뜻과 사랑은 열배쯤 담으셨네요. 이렇게 긴 글이 한숨에 읽게 되다니 참 대단하시다 싶고, 그보다도 더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깊이 느껴져 부러웠습니다. 교수님의 팔순 출판기념회에 갔을 때 교수님께서 은혜를 잊지 않는 마음이 오늘을 있게 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글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교수님, 글에 쓰신 김영숙 교수님 생각이 나서 한자 남깁니다. 어느 해인가 경북도청에서 만든 위원회에 갔는데, 들어가니까 위원들 이름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여교수가 둘이 있구나"하면서 김영숙이란 이름을 보고 있었는데, 남자 교수님이 그 자리에 와서 앉으시더라구요. 그분이 김영숙 교수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