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갈대바다를 건널 때 마른 땅(하라바)에 마른 갈대 뿌리까지 들여다보고 건너야 한다.
2) 사단 곧 뱀은 카르디아의 끝 곧 갈대바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서 자세히 봐야 한다.
3) 하나님이 계시는 몸 된 성전을 강도(겉 사람)로부터 지키는 것이 디아코니아다.
4) 골방은 노아의 방주와 같아서 문을 굳게 닫고 깨어 있어야 한다.
나. 본론
1) 갈대바다를 건널 때 마른 땅(하라바)에 마른 갈대 뿌리까지 들여다보고 건너야 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예수 그리스도 역시 마른 땅(메에레츠 찌아)에서 나온다. 갈대바다를 건널 때 마른 땅(하라바)에 드러난 마른 갈대의 그 뿌리까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건너야 한다. 말라버린 갈대(쑤푸)는 물로 다시 뒤덮이게 되면 다시 살아나 기능을 하여 그 속에 빠지면 뱀의 종이 된다. 그래서 반드시 갈대바다의 그 실체를 알고 건너야 한다. 여기부터가 신약에 등장하는 히에론(건물 외적인 모습) 성전을 넘어서 있는 나오스(지성소, 하나님이 계시는 곳) 성전이 등장하므로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그 뿌리를 들여다보고 깨달아 탈출하게 되었다.
2) 사단 곧 뱀은 카르디아의 끝 곧 갈대바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서 자세히 봐야 한다.
성경기록은 사단 곧 뱀은 카르디아의 그 끝 곧 갈대바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서 메마른 땅에 드러난 그 뿌리까지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죽은 것을 확인하고 광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뱀은 광야에 해당하는 누스 안의 깊은 골방 앞까지 들어와서 유혹한다. 그래서 골방 안에서 반드시 문을 닫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 문을 열면 뱀의 유혹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가게 된다. 이를 알고 지키는 것이 디아코니아, 디아코노스다.
3) 하나님이 계시는 몸 된 성전을 강도(겉 사람)로부터 깨어 지키는 것이 디아코니아다.
성경에 집사, 섬기는 일, 섬김, 구제, 부조, 부조의 일, 직분, 직부, 봉사, 일군으로 번역한 ‘디아코니아’와 ‘디아코노스’는 여섯 문(감가기관, 眼耳鼻舌身意)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일체의 현상(강도들)에 미혹되지 않고 꾸준히 관찰하여 지켜내는 일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몸 된 성전을 강도(겉 사람)로부터 침입하지 못하도록 깨어 지키는 것이 디아코니아, 디아코노스다.
성경기록에는 디아코니아를 사도 장로 집사들로 번역하였다. 세상 교회에서 주는 직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구약에 몸 된 성전이 강도들에게 침입당하여 헐리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내용은 모두 디아코니아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여 일어난 일을 히다로 말씀하였다. 내면에서의 일을 비유한 것이다. 성전이 헐리면 다시 말씀(진리)에 근거하여 바로 세워야 한다.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이 디아코니아의 일이다.
취착의(대상이 되는) 물질(몸), 느낌, 인식, 심리 현상, 알음알이의 무더기 중에 어떤 것도 나(자아)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이를 알고 지키는 것이 ‘디아코니아, 디아코노스’다. 생겨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욕망에 미혹되지 않아야 하는 내용이다.
4) 골방은 노아의 방주와 같아서 문을 굳게 닫고 깨어 있어야 한다.
골방은 노아의 방주와 같다. 방주 안에서 문을 굳게 닫고 깨어 있어야 한다. 물(번뇌, 망상)이 새어 들어오면 역청으로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역청은 냄새가 심하여 그 안에서는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 이 뿐만 아니라 원어로 보는 그 내용은 번역과 다르게 아주 이상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 홍수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과 관계가 없는 나의 내면의 일로 히다로 되어 있다.
창세기(톨도트기)에 등장하는 에덴의 동산(에덴 하아다마) 안에 이르러야, 내면에 에덴 하아다마가 나타나 선악지식나무에 사는 뱀이 기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모든 갈애의 열매가 뱀에 의해 나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 의해 몸과 마음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생명의 그 빛과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