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
이두희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장맛비 때문에 며칠 동안 텃밭을 둘러보지 못했다. 예상했던 대로다. 제 세상을 만난 온갖 잡초들은 밭고랑과 각종 채소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밭주인의 손길을 지워놓았다. 애지중지 돌보던 고추, 상추, 쑥갓, 근대 등 채소들이 잡초들의 등쌀에 못 이겨 생장의 힘을 잃어가고 있다. 단지 밭 귀퉁이에 높다랗게 지지대와 그물을 쳐서 넝쿨을 올려놓았던 오이와 방울토마토는 그나마 잡초들의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우뚝하게 버티고 있다. 문득 위쪽의 성성한 푸른 잎과는 달리 아래쪽 퇴색된 잎들 사이로 대롱거리며 줄기에 매달린 늙은 오이가 눈에 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까실까실한 가시를 한껏 돋우고 연녹색 피부에 백분까지 바르고 있었던 오이가 그새 노각이 되어가고 있다. 누르스름하게 변한 껍질이 군데군데 트고 갈라질 만큼 퉁퉁 불은 몸매이다. 가녀린 넝쿨손들은 그물을 힘겹게 붙잡고 있는데 줄기에 한사코 매달려 있는 노각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어릴 적 어머니는 집 뒤 채마밭에 가지와 오이를 정성껏 심으셨다. 퇴비를 듬뿍 넣고 틈나는 대로 돌본 덕분에 지지대와 얼기설기 걸쳐놓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 아이 팔뚝 크기의 오이를 주렁주렁 달았다. 오이는 성장이 꽤 빠르다. 작은 호박꽃처럼 생긴 노란 오이꽃이 떨어지고 사나흘만 지나면 찬거리가 될 만했다. 간간하고 시원한 멸치 육수에 통깨를 띄우고 삶은 미역과 오이채를 썰어 넣은 냉국은 보리밥과 찰떡궁합이었다. 저녁상엔 숭숭 자른 부추, 고추장과 함께 버무린 오이무침이 밥맛을 돋우었고, 그냥 길쭉하게 잘라 된장에 쿡 찍어 먹어도 반찬이 되었다. 그렇게 오이는 시골의 옆집 아낙네같이 친숙하고 막된장처럼 간편한 서민적 정서로 늘 여름철 밥상을 지켜왔다.
8월 한더위가 어느덧 고개를 넘고 나면 텃밭의 오이는 그늘진 곳에 한두 개씩 남겨지는데 그것들이 노각으로 익어간다. 노각은 오이 특유의 싱싱하고 아삭한 맛은 없어지고 물에 불린 것처럼 싱거우면서 들쩍지근한 맛이 난다. 얇게 썰어 식초를 뿌리고 쪽파와 고추 가루에 무쳐 먹으면 그 나름의 맛으로 반찬이 되었다. 그러나 노각에겐 반찬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 주어져 있었다. 씨를 받아내는 일이다.
사람들은 채 익지 않은 푸른 오이를 고유의 맛으로 알고 먹는다. 제대로 익으면 늙은 오이라고 푸대접하고 이름마저 바꾸어 버린다. 젊고 늙음을 자기 편리한대로 판단하고 이름을 갖다 붙이고 있으니 이기주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동식물이건 생식이 가능한 여문 씨앗을 품고 있을 때 비로소 성체가 되었다고 본다. 그 이전 단계는 아직 발육 중인 미완성체에 불과하다.
노각이 이름처럼 오이넝쿨을 물고 늘어지는 짐 같은 존재가 아님을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오히려 줄기는 노각에게 더 많은 영양분을 공급하고 충분한 햇볕과 신선한 바람을 맞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햇볕을 가리는 아래쪽 잎들을 스스로 말려서 치워주기도 하고 아기 손가락만 할 때까지는 더디게 자라지만 일단 어느 정도 커지면 서둘러 쑥쑥 키워간다. 사람 손을 피해 빨리 노각을 만들려는 발버둥에 가까운 노력이다. 그런 까닭에 푸른 오이보다 누런 노각이 훨씬 많은 영양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선한 맛은 떨어지지만 야채로서 제대로 된 영양분은 역시 충분히 익은 다음 갖추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리라.
진화생물학자인 어느 교수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할머니의 지적대물림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바로 "할머니 이론(Grandmother Hypothesis)"이다. 40대 후반에 폐경기가 되면 생식능력을 상실하게 되지만 손자를 키우며 삶의 경험과 지혜를 전수하게 되는데 이것이 유전자에 기록되어 전해지면서 지적능력을 발전시켜 왔다는 이론이다.
비행기 조종을 가르치며 학생들 앞에 서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내가 노각으로 비쳐질 게다. 지난 세월동안 밤잠을 아껴가며 공부하고 많은 아픔을 견디며 익힌 비행의 지혜가 노각의 씨앗처럼 내 속에 여물어 있지만 젊은이들에겐 주름진 겉모습만 보이리라. 비행을 단순한 기술이나 요령의 일면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역사와 전통이 세워지고 전해지는 과정을 그들은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내가 겪어야 했던 실수와 아픔을 똑같이 겪고 나서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노파심인 줄 알면서도 쉬이 내려놓지 못하고 열정을 앞세우는 나도 안타까운 노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