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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DHAMMACAKKAPPVATT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F DHAMMA
우꼬레 영어 번역 / 김한상 우리말 번역
행복한 숲
제3장
미안마력 1324년(서력 1962년) 따딩윳(Thadingyut)의 보름날 설법
오늘은 미얀마력 1324년(서력 1962년) 따딩윳의 보름날입니다. 불교승려들은 우안거(雨安居),
보름날이 지난, 첫째 날부터 3개월 동안 우안거인 와사(Vassa)를 준수해왔습니다.
오늘이 3개월 우안거의 마지막 날입니다. 3개월 동안 비구들은 부처님께 승인을 받은 특별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밤을 새는 여행을 하지 못합니다. 비구들은 그러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7일간 자신들의 거처를 떠날 수 있습니다.
오늘밤이 끝나고 내일 이른 새벽부터 3개월의 우안거기간이 끝납니다.
이때부터는 비구들도 밤을 새는 여행을 마음대로 떠날 수 있습니다.
1. 자자(自恣)
따라서 다른 곳에 볼일이 있는 비구들은 내일 거처를 떠납니다. 떠나기 전날 밤, 즉 오늘 저녁 비구들은 자자(自恣 pavāranā)의식1을 거쳐야 합니다. 비구가 보았거나 들었거나 의심이 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동료비구들로부터 훈계를 청하는 의식입니다.
자신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남들이 발견한 잘못이나 허물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도 모르게 어떠한 잘못이나 허물을 범했다면 모임의 다른 비구가 그것을 바로 지적해줄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시정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훈계에 따라 필요한 시정조치를 취하는 것은 계청정(戒淸淨)에 이르는 계율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계청정을 확립하고 나서 심청정(心淸淨)과 견청정(見淸淨)을 얻기 위한 수행에 들어갑니다.
이 훈계를 청하는 자자(自恣)의식은 부처님의 교법(sāsana)을 청정하게
유지하고 선정(禪定)이나 도과와 같은 높은 정신적인 성취를 얻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따딩윳의 보름날, 다섯 비구들이 다 모인 경우에는,
승가에 대해 공식적으로 훈계를 요청하고,
다섯 명이 안 될 경우에는, 상호간에 훈계를 요청하는 이 계목(戒目)3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 계목은 착한 신념을 지닌 비구가 각별히 유의해야만 하는 것으로 이 계목에 준하여 비구는
자신의 품행과 행동 가짐에 관련된 훈계를 진지하게 요청해야 합니다.
훈계를 받으면 필요한 시정조치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훈계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사교적 모임이나 대중 집회에 참석하기위해 막 떠나려는 사람의 얼굴에 묻은 땟자국이나 얼룩을 친구가 지적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친절한 지적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대중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얼굴에 묻은 땟자국을 미리 닦아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구는 도반들이 지적한 잘못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없애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이 수행은 부처님의 교법을 청정하게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전통을 단순히 형식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단점을 제거하고자 하는 진지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비구는 도반들로부터 훈계를 청하고 그 훈계를 환영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도 도반의 잘못을 보면 훈계를 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잘못을 고치려는 진지한 노력을 취함으로써 출세간의 수행이 오점 없이 청정한 상태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이 계율을 지정해주신 숨은 이유였습니다.
오늘 우안거 기간 동안 함께 지냈던 50명의 비구들이 강당에 모여 승가에 공식적으로 훈계를 청합니다. 각 승가 일원들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린 이 자자(自恣)의식에 참여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승가집회에서 곧바로 이곳으로 와서 지난주 열렸던
법문을 계속합니다.
2. 팔정도(八正道)에 대한 상세한 해설
지난주 우리는 중도, 즉 팔정도의 개요만을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개요를 상세히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바른 말(正語 Sammā-vācā)
바른 행위(正業 Sammā-sammānta)
바른 생계(正命 Sammā-ajiva)
바른 노력(正精進 Sammā-vãyama)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sati)
바른 집중(正定 Sammā-samãdhi)
팔정도는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를 실천하여 계의 도(sila magga)를 확립합니다. 바른 노력,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을 실천하여 정의 도(sama-dhi magga)를 확립합니다. 정견과 바르게 일으킨 생각(正思惟)은 혜의 도(pan~n~a magga)에 속합니다. 정견과 정사유를 계발하면 위빠사나 지혜, 도의 지혜, 과의 지혜, 즉 세간과 출세간 양쪽을 관통하는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실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이들 각각의 도를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3. 바른 말[正語]의 도
“비구들이여, ‘바른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말을 삼가고, 중상모략을 삼가고, 거친 욕설을 삼가고,
쓸데없는 말이나 무익한 잡담을 삼가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들 네 가지 그릇된 말을 삼가는 것을 ‘바른 말’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신 것과 같이, 이러한 말들을 삼가는 것이 ‘바른말’입니다. 그래서 거짓말, 중상모략, 또는 무익한 잡담을 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하지 않으면 ‘바른말’의 수행을 확립합니다. 사실, ‘바른 말’은 52가지 마음의 작용(心所 cetasika)4의 하나인 절제에 속하는 것으로, ‘바른 말’을 위한 절제(virati)5입니다. 하지만 거짓말 등을 삼가면 진실한 말을 하고, 상냥하고 유익한 말, 화합을 이루는 말만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거짓말 등을 하지 않음으로써 계를 지키는 선업을 짓게 된다는 점입니다. 오계, 팔계, 십계를 지키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사람은, 또한 중상모략, 욕설, 무의미한 말을 하는 세 가지 나쁜 구업(口業)을 삼가야 합니다.
나아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거나 생각할 때마다 그것을 알아차림으로써 여섯 가지 감각대상[六門]에 대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깨닫게 되면, 그릇된 말의 원인이 되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위빠사나를 통해, 그릇된 말은 물론 잠재된 번뇌(anusaya-kilesa)6 까지도 일시적으로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통찰지혜인 위빠사나 지혜를 완전히 계발하면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통해서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열반에 이르면, 출세간의 도인, ‘바른말을 위한 절제’의 힘으로 완전히 그릇된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청정도론」의 주석서에서, 첫 번째 도인 수다원은 거짓말을, 세 번째 도인 아나함은 중상모략과 욕설을 제거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이나 언어’는 의도를 뜻합니다.(거친 말은 의도 없이 나올 수도 있기는 합니다.) 네 번째 도인 아라한도는 무의미한 말이나 쓸모없는 잡담을 제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4악도로 재생하게 하는 거짓말, 중상모략, 욕설, 잡담은 이미 수다원에서 제거되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가지 출세간의 도7가 완전히 확립될 때 까지는 ‘바른말의 도’를 닦아야 합니다. 요약을 하면,
➀ 거짓말, 중상모략, 욕설, 무익한 잡담을 하는 것은 그릇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➁ 그릇된 말을 삼가는 것이 바로 ‘바른 말’입니다.
4. 바른 행위[正業]의 도
“비구들이여, ‘바른 행위란 무엇인가? 살생을 삼가고 도둑질을 삼가고 그릇된 성관계를 삼가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지금 말한 세 가지 그릇된 신체적 행위를 삼가는 것이 바로 바른 행위다.”
여기서도 역시, ‘바른 행위‘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내리신 정의는, 이들 세 가지 그릇된 신체적 행위를 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그릇된 음행을 저지를 기회가 왔을 때 그런 행위를 하지 않으면 ’바른 행동‘의 수행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몸을 물고 있는 모기를 죽이지 않고 그냥 쫒아버리는 것이 ’바른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도둑질이나 그릇된 음행의 경우에도 이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릇된 성관계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이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 되는 열두 부류의 여성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누이, 친척, 씨족의 연장자 혹은 수행도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 또는 결혼을 했거나 약혼한 여자와 성관계를 가진 남자는 그릇된 음행의 악업을 짓는 것입니다. 결혼이나 약혼을 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도 또한 이러한 악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행을 삼가는 것이 ;
바른 행동‘입니다. 요약하면,
➀ 살생, 도둑질, 그릇된 음행은 그릇된 행동입니다.
➁ 이들 나쁜 행동을 삼가는 것이 바른 행동(正業)입니다.
바른 행동’의 도는 도덕적 계율을 지켜서 닦아야 하고,
또한 네 가지 성스러운 도(출세간의 도)가 완전히 확립될 때까지 위빠사나를 수행하여 닦아야 합니다.
5. 바른 생계[正命]의 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 가지 그릇된 신체적 행동(身業)을 하고 네 가지 그릇된 언행(口業)을 하는 것이 그릇된 생계입니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들 일곱 가지 그릇된 행동을 삼가는 것이 ‘바른 생계(正命)의 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바른 생계’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에서 성스러운 제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릇된 수단을 삼가고 바른 생계 수단으로 생활한다. 이것이 바로 ‘바른 생계’다.”
그릇된 생계는 살생과 도둑질과 같이 법을 어기고 불선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그릇된 신체적 행동[身業]과 네 가지 그릇된 언행[口業]이 생계를 꾸리는 것과 관련이 없을 때에는, 그릇된 행동(micchā-kammanta)과 그릇된 말(micchā-vācā)이지만 그릇된 생계는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성냄이나 증오로 파리, 모기, 벌레, 뱀 또는 적을 죽이는 것은, 몸으로 짓는 그릇된 행동이지만 그릇된 생계는 아닙니다. 시장에 내다 팔거나 자신의 밥상에 올리기 위해 닭, 오리, 돼지, 염소, 또는 물고기를 죽이는 것은 분명히 그릇된 생계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도둑질과 강도는 경제적인 이유로 유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은 그릇된 생계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경제적인 것이 아닌 복수나 습관일 때에는 그냥 그릇된 행동이 됩니다. 그릇된 성관계는 보통 생계와 관련이 없지만 인신매매에 쓰기위해 의도적으로 여자를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것은 물론 그릇된 생계입니다.
만일 거짓말이 경제적인 이유로 유발되지 않았을 경우, 그것은 그냥 그릇된 말입니다.
하지만 사업을 번창하게 할 목적으로 상업적인 거래를 하거나 혹은 법정에서 거짓말을 한다면, 이는 그릇된 생계입니다.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없이 헐뜯는 말은 그릇된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 사업과 관련하여
거짓된 비용청구나 경쟁업체에 불명예를 주기 위하여 비난을 하는데, 이처럼 보편화된 방법은 그릇된 생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거친 말이나 욕설은 사업거래에서 좀처럼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그냥 그릇된 말입니다.
현대의 소설, 픽션, 단편물, 연극, 드라마, 영화는 대부분 그릇된 생계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살생, 도둑질, 거짓말로) 생계를 꾸리는 그러한 그릇된 방법은 고결한 사람들이 지키는 도덕률을 앗아가는 행동입니다.
6.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추구하는 것은 그릇된 생계다
오계를 지키는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생계의 일곱 가지 그릇된 도8 를 삼가야 합니다.
생계의 여덟 번째 계(ājīvaṭṭhamaka-sīla)9에는 그릇된 생계를 삼가는 것이 8계중의 하나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릇된 생계 수단을 삼가고 고결한 사람들의 도덕률에 따라 생계를 꾸리는 것이 바른 생계입니다.
7. 도덕률과 부합하는 것이 바른 생계[正命]다
바른 말과 바른 행위와 같이 바른 생계는 절제를 위한 수행(금욕의 정신적 속성, virati-cetasika)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된 생계를 삼가는 것이 바른 생계입니다. 바른 생계는 계율을 잘 지킴으로서 계발됩니다. 뿐만 아니라, 도의 절제가 완성될 때까지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계발해야 합니다.
바른 생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삭감경(削減經 Sallekha Sutta)」법문집 (Vol.II)10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들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세 가지가 팔정도의 계(戒)에 해당합니다.
이제 우리는 정(定)의 요소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8. 바른 노력의 도, 정정진(正精進)
“비구들이여, 바른 노력인 정정진(正精進)이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에서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不善法)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을 내어, 마음을 다잡아, 지속하겠다고 결심한다.
비구는, 이미 일어난 불선법을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을 내어, 마음을 다잡아, 지속하겠다고 결심한다.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선법(善法)이 일어나도록 하기위해서, 노력하고, 힘을 내어, 마음을 다잡고, 지속하겠다고 결심한다.
나아가 비구는, 이미 일어난 선법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또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증장시켜 수행(bhāvanā)을 완성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을 내어, 마음을 다잡아, 지속하겠다고 결심한다.”
이러한 노력이 부처님께서 자세하게 설명하신 바른 정진(正精進)입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지르는 살생, 도둑질, 거짓말과 같은
나쁜 행동을 알고 듣거나 볼 때마다, 스스로 노력해서 그러한 불선업을 없애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유행병이 돌때,
이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2. 이미 일어난 불선업을 없애고 제거하려는 노력입니다. 불선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➀ 드러난 불선업(vītakkama-akusala) - 살생, 도둑질, 거짓말과 같이 이미 저질러진 나쁜 행위가 있고,
갈애와 감각적 욕망과 같이 생각으로 일으킨, 번뇌로서의 불선업(pariyutthāna-akusala,)이 있습니다.
➁ 잠재적인 불선업(anusaya-akusala) -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잠재하고 있어서 기회를 만나면 일어나는 불선업입니다.
이 두 가지의 사악하고 해로운 업 중에서, 드러난 불선업은 계율을 지키면 사라집니다.
계를 철저히 지키면 드러난 불선업에서 생기는 나쁜 행동과 말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갈애와 욕망에 대한 불선한 생각인, 번뇌로서의 불선업은 사마타(집중수행)와 위빠사나(통찰수행)로 제거됩니다.
잠재적인 불선업은 위빠사나를 통해서 일시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재성향의 번뇌는 성스러운 도의 지혜가 성취되어야만 완전히 제거되고 뿌리 뽑힙니다. 이 잠재적 번뇌를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 점은 미묘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오직 위빠사나 수행을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이행하는 사람들만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업을 일어나게 하려는 노력입니다. 보시, 지계, 사마타 수행, 위빠사나 수행은
모두 형태만 다른 공덕행입니다.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아직 닦지 않은 이러한 공덕행을 지어 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덕행을, 오직 윤회를 연장시킬 뿐이라고 말하며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선업은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난 의도적 행위인 상카라(saṅkhāra)라는 것입니다. ‘saṅkhāra paccaya vinñãna, 즉, 행(行)을 조건으로 식(識)13 이 일어난다.’라는 12연기에 의하면, 선한 의도의 행위(kusala-sankhara)는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을 일으키기 때문에 선업도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명백히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부정하고 크게 오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선업을 짓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악도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선업만 남게 될 것입니다. 끝없는 윤회의 진정한 원인은 무명(avijiā)과 갈애(taṇhā)라는 번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번뇌는 번뇌를 제거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행되었을 때, 그 선행에 의해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공덕만 쌓아도, 법문을 들을 수 있고 또 수행을 하여 성자가 될 수 있는 선처(善處,sugati)에 재생할 수 있으며, 이로서 악처와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개구리 천인의 이야기는 이 점을 잘 설명해줍니다. 개구리 천인은 전생에 개구리였을 때 우연히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법문의 말뜻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공경하는 마음으로 만족하며 경청했는데 이 선업으로 천상계에 재생하였습니다. 천인이 된 개구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들을 기회를 얻어 수다원이 되었습니다.14
그래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업, 특히 성스러운 도에 이르게 하는 공덕행이 일어나도록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하는 순간마다 바른 정진(正精進)의 도에 나아갑니다.
4. 이미 일어난 선업을 계발하고 성숙시켜 완성하려는 노력입니다. 이 사실은 아주 명백합니다. 수행자가 보고 듣고 감촉하고
아는 순간의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불선업, 악이 일어나는 것을 실제로 막고 그럴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이는 또한 이미 일어난 불선업을 없애고 제거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수행자는 동시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위빠사나 선법(vipassanā-kusala)과 성스러운 도, 공덕을 계발하고자 노력합니다.
수행자는 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위빠사나 선법(vipassanā-kusala)을 성숙시키고 완성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이렇게 수행자는 항상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수행으로 알아차리고,
바른 노력인 정정진 혹은 사정근(四精勤)15을 계발합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노력
② 이미 일어난 불선법을 제거하려는 노력
③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을 일어나게 하는 노력.
④ 이미 일어난 선법을 지속시키고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려는 노력
이러한 네 가지 바른 정진을 사정근이라고 합니다.
보시(dāna), 지계(sīla), 수행(bhāvanā)16의 선업에 매진할 때마다 바른 노력, 즉 사정근의 도를 닦는 것입니다. 특히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선행을 할 때에는 위빠사나 수행의 공덕행은 물론 정정진(正精進)의 도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업을 짓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9. 바른 알아차림[正念]의 도
“비구들이여 바른 알아차림[正念]의 도는 무엇인가? 이 가르침에 따라 비구는, 이 몸을 단지 무상하고 괴롭고 제어할 수 없는, 추하고 즐겁지 못한 물질(色)이나 물질의 무더기(色蘊)라고 인식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제어할 수 없고, 추하고, 즐겁지 못한 몸(물질의 무더기)을 알아차리면서 머문다.[身念處]그렇게 하기 위해 비구는 열심히, 마음을 챙겨서, 바르게 이해하면서, 오온(五縕)의 세계나 물질세계에 대한 탐욕과 비탄(domanassa)17 을 버린다.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이러한 탐욕과 비탄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는 느낌을 단지 무상하고 괴롭고 제어할 수 없는 느낌으로 지켜보면서 머문다.[受念處]
그는 마음을, 단지 생각과 의식의 한 과정이고 무상하고 괴롭고
제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고, 마음을 지켜보면서 머문다.[心念處]
그는 마음의 대상(法)을 단지 보고 듣는 등의 현상으로서 무상하고 괴롭고
제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고, 마음의 대상[法]을 지켜보면서 머문다.[法念處]
이렇게 알아차리기 위해 비구는 열심히 알아차려서 이해하고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 즉 오온(五蘊)의 세계에서 일어나는탐욕과 비탄을 극복하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바른 알아차림(正念)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바른 알아차림(正念)에 대한 부처님의 상세한 말씀입니다.
10. 부처님은 팔정도를 상세하게 말씀하셨는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초전법륜경」에서 팔정도는 표제어(heading) 형태로만 설해졌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초전법륜경」을 처음 설하셨을 때 높은 지혜를 얻은 꼰단냐 존자를 비롯한 범천과 천신들은
과연 ‘바른 알아차림[正念]’이라는 그 단순한 표제어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그러니까 그들이 몸(身), 느낌(受), 마음(心), 마음의 대상(法)의 ‘사념처(四念處)’를 명확히 이해했을까요?
그들은 또한 ‘몸의 모든 행동과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른 알아차림이고,
이 바른 알아차림은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현상을 알아차려서 계발된다는 것을 이해하였을까요?
이것은 깊이 숙고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념처에 대한 분명한 앎(正知)이 없이는 그들은 바른 알아차림인 정념(正念)을 계발하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바른 알아차림이 없으면 성스러운 도과의 높은 지혜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로 꼰단냐 존자와 범천, 천신들은 이미 훌륭하고 뛰어난 바라밀이 완전히 성숙했기 때문에 궁극적 해탈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른 알아차림’이라는 말만 듣고도 단번에, 몸의 모든 행동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알아차림의 도를 계발한 것입니다.
두 번째 추론은, 부처님께서 처음 설하실 때, 수행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팔정도의 표제어와 사념처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1차 결집 때는「초전법륜경」과 사성제(四聖諦)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팔정도를, 표제어로 축약된
형태로 암송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전에는 이에 대한 독립된 해설이나 주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경전의 경우에도
제1차 결집에서와 같이 암송되고 축약된 사례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근본오십품(根本五拾品)〉의「염처경(念處經 Satipṭṭhāna Sutta)」은,
제 1차 결집 때 암송된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ṭṭhāna Sutta)의 첫 부분만을 축약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이행된 제 6차 경전결집 과정에서, 마찌마 니까야의 주석서에는 경전의 뒷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경의 유실된 부분을 보충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다른 경장에 속해있는 몇 개의 긴 경들이 쿠다까 니까야에 축약된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1차 경전결집 때에는, 법문당시에 있었던 바른 알아차림(正念)에 대한 해설을 생략하고 「초전법륜경」도
간략하게 암송했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단순한 제목만으로 그 심오하고 상세한 팔정도의 의미를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방금 독송한 사념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약된 팔정도 표제어에 대해 상세히 설하고 있는「대념처경」이 있으며 그 주석서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 알아차림의 도를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부처님께서 실제로
첫 법문을 여실 때,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바른 알아차림의 도를 아주 자세하게 설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른 알아차림의 도가 바로 사념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도를 어떻게 계발하는가에 대해서는
앞서 인용한 빨리어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 경전에 보면「대념처경」의 서문에 요약된 것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 간단한 설명으로 다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대념처경」자체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할 수도 있습니다.
「대념처경」에 의하면 신념처(身念處, 몸에 대한 알아차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들숨과 날숨(出入息 ānāpāna)을 지켜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카락, 몸의 털 등과 같은 32가지 몸의 부위를 주시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대념처경」의 이 두 가지 방법은,
사마타의 근본집중(samatha-appana-jhāna)을 만드는 수행대상입니다.
「대념처경」의 나머지 19가지는 근접 집중(upacāra-kammaṭṭhāna)19 을 만드는 수행대상입니다.
근접집중이란, 오직 근접 집중만을 생기게 하는 통찰지혜 수행(위빠사나의 대상, vipassanā-kammaṭṭhāna)입니다.
11.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은 어떻게 생기는가
그러므로 수행자는 통찰지혜 수행의 길인, 위빠사나 정념(正念)의 도를 계발하기 위해서 이미 언급한 나머지 19가지의 수행대상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몸의 자세에 관한 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걸을 때 걷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gacchanto vā- gaccha-miti paja-na-ti) 라고 한 가르침에 따라, 걷고 있을 때에는 걷는 행동과 이에 따른 몸의 동작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서있을 때, 앉아있을 때, 누워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에 따른 모든 행동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바로 그와 마찬가지로(yatha yatha va- pana) 앉아 있을 때, 예를 들어 몸의 자세에서 다른 작은 몸의 동작이 있으면 그것도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걸을 때 걷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문법적인 시제에 대해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현재의 행동만을 알아차리는 것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논장에 열거된 물질의 유형들을 사유하고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으로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신념처(身念處) 즉, 알아차림으로 몸을 주시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알아차림에 관한 부분에서 분명한 앎(正知, sampajan~n~a)의 도를 같이 언급한 바와 같이,
앞으로 나가거나 뒤로 갈 때, 앞을 보거나 뒤돌아볼 때, 몸을 구부리거나 팔다리를 뻗을 때에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12. 위빠사나 찰나집중에 대한 설명
「청정도론」에서, ‘요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dhātu-manasikāra- pabba)’에 관한 장(章)에 의하면, 네 가지 근본 물질(四大)도 일어나고 나타나는 대로 곧바로 알아차려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청정도론」(Vis.XI.116)에는, 사대(四大)를 주시하여 장애(五蓋)20를 극복하면 근접집중이 일어난다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근접집중은 「청정도론」의 대복주석서인「마하띠까(Mahā-tika)」에 설명되어 있는 것과 같이, 근본집중과는 가까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근접집중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중은 장애를 극복하고 고요함을 생기게 한다는 능력 면에서 근접집중과 유사하기 때문에 근접집중이라는 이름을 빌어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찰지혜 수행, 즉 위빠사나 수행에 활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위빠사나 찰나 집중(vipassanā-khaṇika-samādhi)이란 용어로 방금 언급한 집중을 설명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용법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을 비판합니다. 그들은 찰나집중으로는 위빠사나 지혜가 계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정말 그것이 가능하다면 경전을 공부하는 선원 학생들은 모두 통찰지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장애를 제거할 만큼 학생들의 집중력이 강하고, 이와 동시에「대념처경」에 따라서 정신과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린다면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외워서 배운 경전을 독송하고 그것을 숙고해서 얻은 집중은 장애를 극복할 만큼 강력하지도 않고 또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릴 수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비판한다면 이들은 분명히 올바른 위빠사나 수행에 정통하지 못한 것입니다.
「청정도론」(Vis.VⅢ.232)에는 위빠사나 찰나집중이 순간적으로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刹那心一境 khaṇika-cittassa-ekaggatā)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석서는 이를 순간적인 마음집중(khanāmattahitiko-samādhi) 등으로 지칭합니다. 그래서 주석서와 복주를 근거로, 위빠사나 찰나집중이라는 용어를 써서 근접집중을 설명한 것입니다. 일단 이러한 설명을 잘 이해하면 분명, 우리를 비판하는 마음의 혼란이 사라질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물질을 알아차릴 때는 ‘몸의 자세, 분명한 앎, 요소에 대한 숙고’에 대하여 언급한 장(章)을 근거로, 물질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림으로써, 위빠사나의 찰나집중이라고 할 수 있는 근접집중이 계발됩니다. 그리고 근접집중과 함께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인 정견(正見), 즉 위빠사나 지혜(통찰지)도 계발됩니다. 이들을 일러 바른 알아차림의 도,
바른 집중의 도, 바른 견해(正見)의 도라고 하며, 다시 말해서 신념처(身念處)라고 합니다.
이미 언급한 근접집중의 수행 대상인 ‘요소에 대한 숙고’는 청정도론」(Vis.XI.2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네 가지 요소에 대한 구별(catudhātu-vavaṭṭhāna)’을 수행의 대상으로 하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몸의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에 대해서는「염처경」주석서에서, 이것이 근접집중의 수행대상이 된다고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근거로 해서 근접집중에 이른다고 하는 우리의 단언에는 어떠한 의심도 가질 수 없습니다.
더구나,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의 장에 의하면, 느낌(受), 마음(心), 마음의 대상(法)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알아차리면 근접집중과 통찰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정도론」견청정(見淸淨) 장의 서문에는, 18가지 요소(十八界 dhātu), 12가지 감각장소(十二處 āyatana)21,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五蘊)에 대한 구별을 하고나면, 다음에는 수행자가 어떻게 사대(四大)를 알아차리고 바로 통찰지혜 수행을 시작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대념처경」등에서 제시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조금 전에 한 설명과 고찰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에 입각하여 바른 알아차림의 도를 어떻게 계발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었다면,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이 일어날 때, 그 순간 알아차리지 않고 경전에서 배운 지식을 그저 암송하는 정도로는 진정한 알아차림의 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알아차림(正念)이라는 올바른 도가 없으면 위빠사나 바른 견해의 도인 정견(正見)이 절대 확립될 수 없다는 것 또한 명백합니다.
13. 바른 통찰지혜는 오직 알아차림으로 얻어진다
우리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서「대념처경」의 주석서에서 한 문장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Yasama pana kāya vedanā citta-dhammesu kinci dhammam anāmasitava bhāvanā nāma natti.
Tasamā tepi imināva maggena sokaparideva samatikkhantati veditabba.”
「마하와경(Sutta Mahava)」의 주석서
“수행의 대상인,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法) 중에서 어느 것도 알아차림이 없으면, 성스러운 도를 관통하는 지혜,
통찰지의 계발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문을 듣고 성스러운 길과 도과에 이르는 통찰지혜를 얻었다고 알려진)
산따띠 장관과 빠따스라 장로니(長老尼)도 사념처(四念處)의 도를 수행하여 근심과 비탄을 극복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4. 알아차림 없이는 통찰지혜도 없다
이 점에 대해 주석서는 아주 명확합니다. 그냥 가르침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 중 어느 한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높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념처에 대한 알아차림이 없이는 성스러운 도과를 꿰뚫는 지혜나 통찰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분류하는 것만 배워서 알고, 실제로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는다면, 절대로 바른 견해인 정견과 성스러운 도를 관통하는 통찰지혜를 계발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바른 알아차림만으로는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습니다. 바른 알아차림을 성취하고 난 뒤,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때에만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을 요약한 서문에서는, ‘분명한 앎으로 부지런히 알아차리는 것’ 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축약된 서문의 해설에서는 ‘분명히 알다.(pajānāti)’ 라고 하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원인을 안다.(samudaya dhammānupassi)’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 알아차림(正念)의 도를 요약하였습니다.
알아차림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앎으로 부지런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1) 몸의 모든 동작에 대한 분명한 앎.
(2) 마음의 모든 움직임에 대한 분명한 앎
(3) 모든 느낌-좋은 느낌, 나쁜 느낌, 덤덤한 느낌(그 중 두드러진 것)에 대한 분명한 앎.
(4) 마음의 대상[法]이 일어날 때마다 바르게 이해하는 것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알아차림(正念)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계속해서 바른 집중(正定)의 도를 고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바른 집중의 도에 관련된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점만 골라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해설을 전부 다하면 그 범위가 너무 넓어지므로, 지혜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5. 바른 집중[正定]의 도
“비구들이여 바른 집중(正定)이란 무엇인가?
여기 있는 비구는 모든 욕망(탐욕)과 다른 불선업을 버리고,
일으킨 생각(尋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었으며,
이로서 희열(pīti)과 행복(sukha)으로 충만해있다.
나쁜 생각을 떨쳐버렸으므로, 사선(四禪)에 들어간다.”
네 가지 선정의 단계와 관련한 집중을 바른 집중의 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정은 마음이 방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넘어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켜 안정되도록 하는 것(心一境性)입니다.
경전에 따르면 네 가지 선정이 있습니다.
1. 다섯 가지 요소는,
일으킨 생각(尋 vitakka) –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거나 수행주제로 생각하는 것.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 – 나타난 대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는 것,
희열(喜 pīti) – 환희 또는 떨리는 기쁨,
행복(樂 sukha) – 행복 또는 즐거운 느낌,
집중(心一境性 ekaggatā) – 한곳으로 집중된 고요한 마음,
이들이 초선(初禪)을 이룹니다..
2.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사라지고,
희열. 행복. 집중, 이 세 가지 요소만 남아서 이선(二禪)으로 들어갑니다.
3. 희열이 사라지고 행복과 집중만이 남아서 삼선(三禪)으로 들어갑니다.
4. 사선정의 상태에서는 행복이 평온(捨 upekkhā)으로 바뀌고 평온과 집중, 두 요소가 남습니다.
이들 4선정은, 네 가지 색계선(色界禪)과 네 가지 무색계선(無色界禪)으로 알려진 더 높은 세간의 선(lokiya-jhãna),
혹은 성스러운 도의 마음22이 함께하는 출세간의 선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세간의 선정(lokuttara-jhãna-samādhi)은
성스럽고 바른 집중의 도이고, 세간의 선정(lokiya-jhāna-samādhi)도 만약 그것이 위빠사나를 계발하는데 기초가 된다면
바른 집중의 도로 분류될 수 있을 것입니다.23
16. 선정이 없으면 위빠사나를 계발할 수 없다는 주장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주장을 놓고, 위빠사나는 오직 선정을 통해 심청정(心淸淨)을 성취하고 나서 비로소 계발된다고 말합니다. 선정이 없이 심청정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독단적인 견해입니다. 선정에 가까운 근접집중은 장애(五蓋)를 억누르는 힘이 있기 때문에 견청정(見淸淨)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위빠사나가 계발됩니다. 그렇게 계발이 되어서 아라한과가 성취됩니다24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청정도론」에 분명히 적혀있습니다. 예를 들어,「대념처경」과 같은 빨리 경전에서는 몸의 자세와 같은 그런 대상을 알아차려서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이런 몸의 자세에서는 오직 근접집중만이 일어납니다. 빨리 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의 「수념경(隨念經 Anussatithana Sutta)」(A6:9)25에서도, 부처님의 공덕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불수념(佛隨念 buddha-anussati)26으로 집중을 얻으면 이 기초적인 집중으로도 아라한의 단계에 이르는 높은 지혜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앎에 대한 부분을 해설하는 주석서에서도, 오직 부처님과 승가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 희열이 일어나고, 그렇게 일어난 희열이 사라지면,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결과
아라한과를 얻게 된다고 명확하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들 경전의 주석서는 더 나아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도중에 해탈한 10만, 1백만, 1천만 명이나 되는 중생들이 선정에는
정통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십중팔구 그들 대다수는 선정을 갖추지는 못했겠지만 심청정을 얻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의 마음은 빠르게 이해하고, 예민하며, 장애(五蓋)로부터 벗어나 있고, 희열(pīty)에 차 있으며, 청정하다고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석서에는, 부처님께서 그러한 시의적절한 때 오직 부처님만이 설명할 수 있는 사성제에 대한 가장 거룩하고 수승한 법문을 설하셨다고 분명히 적혀있습니다. 주석서는 청중들이 그 설법을 듣고서 높은 지혜를 얻었다고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찰로 보건대, 네 가지 선정을 바른 집중이라고 설하신 것은 최상의 기술방법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근접집중이 비록 낮은 것으로 설해지고 있지만 이것 역시 심청정을 얻을 수 있는 바른 집중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근접집중은 초선(初禪)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억누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근접집중과 초선은 선정의 다섯 가지요소,
즉 일으킨 생각,
지속적인 고찰,
희열,
행복,
집중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유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정상적인 근접집중과 명목상의 근접집중,
이 두 가지를 낮은 단계의 선정인 초선의 범주에 포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정이란 고정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서(作意) 한 가지 대상을 면밀히 지켜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온한 집중을 얻기 위해서 호흡을 수행의 대상으로 하면 사마타 선정을 일으킵니다. 반면 정신과 물질의 성품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의 무상함, 불만족, 실체 없음을 지켜본다면 위빠사나 선정(vipassanā-jhāna)을 일으킵니다. 기억하기 쉽도록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겠습니다.
1. 주의를 고정시키고(作意, fixed attention) 면밀히 지켜보는 것을 선정이라 한다.
2. 사마타선정(samatha-jhāna)과 위빠사나선정(vipassanā-jhāna)의 두 가지가 있다.
3. 오직 고요함만을 계발하기 위해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을 사마타선이라 한다.
4. 삼법인을 지켜보는 것이 위빠사나 선정이다.
5. 집중에는 찰나집중, 근접집중, 근본집중의 세 가지가 있다.
이미 언급한 찰나집중은, 고요함을 수행대상(samatha-kammaṭṭhāna)으로 하는 과정에서,
근접삼매를 얻기 전에 오는 아주 고요한 상태로서, 위빠사나 집중이라고도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둘 중에서 위빠사나 집중을 근접집중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근접집중에서와 마찬가지로 장애를 억누르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집중이 강하게 계발되면 마치 근본집중과 같이 마음을 아주 고요한 상태로 지속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는 사념처수행을 계발하는 수행자의 개인적 체험으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청정도론」의 대복주석서인「마하띠까(Mahā-Tika)」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로 순간적인 마음집중(khaṇika-cittekaggatā)이란 매 순간의 찰나만 지속되는 집중이다. 수행대상인 정신과 물질에서 위빠사나 찰나집중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고요함이 하나의 형태로 쭉 지속되어 상대편 번뇌에 넘어가지 않을 때에는 그 마음이 마치 근본집중에 든 것처럼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하고 자신을 계발하여 도과에 이르려는 수행자는 가능하면 초선이나 이선, 삼선, 사선 또는 이 네 가지 선정을 모두 다 증득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네 가지 선정 중 어느 하나를 얻었으면 그 선정이 지속되고 능숙해지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선정을 얻지 못하면, 선정에 가까운 근접집중을 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반면에, 사대(四大)과 같은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위빠사나 수행자는 근접집중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억누를 수 있는 위빠사나 찰나집중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확고히 하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시작으로 해서 단계적으로 통찰지혜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찰나집중과 근접집중은 바른 집중인 정정(正定)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집중의 도를 폭넓게 다루었습니다. 이제 혜(慧)의 도를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7. 바른 견해, 정견(正見)의 도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 정견(正見)이라 한다.”
요약하면, 사성제(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정견의 도입니다.
이는 앞서 설명한 대로 바른 알아차림(正念)과 바른 집중(正定)을 계발하는 방법으로 계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찌마 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정견이 있다고 합니다.
①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kammassakata-sammādiṭṭhi)
②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jhãna-sammādiṭṭhi)
③ 위빠사나에 대한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
④ 도에 대한 바른 견해(magga-sammādiṭṭhi)
⑤ 과에 대한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
마찌마 니까야의 〈상분오십품(上分五十品)〉에서는 이와 비슷한 다섯 가지 견해를 언급하고 있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 대신에 ‘반조에 대한 바른 견해 (paccevekhaṇa-sammādiṭṭhi)’를 언급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여섯 가지 바른 견해(正見)라고 합니다.
①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
②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
③ 위빠사나에 대한 바른 견해
④ 도에 대한 바른 견해
⑤ 과에 대한 바른 견해
⑥ 반조(返照)에 대한 바른 견해
여기에서 ‘과에 대한 바른 견해’는 네 가지 성스러운 도의 결과인 네 가지 과(果)27 에서 나오는 바른 견해입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얻으면 자연적으로 그 과의 지혜도 따라옵니다.. 과의 지혜를 얻기 위해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반조에 대한 바른 견해’는 도와 과를 얻은 후 자연적으로 오는 자기 반조입니다. 그것이 생겨나도록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따라 수행자는 오직, 다음에 상세히 설명할, 처음 네 가지 바른 견해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8.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인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28 은 업과 업의 과보가 있다는 견해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행위는 업이고 행위는 선하거나 나쁜 과보를 만듭니다. 예를 들면, 악업을 짓는 사람은 나쁜 과보를 받습니다. 범죄자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으며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습니다. 욕설은 욕설로 되돌아오고, 악의에 차서 험악한 시선으로 쳐다본다면 자신에게도 험악하고 강압적인 시선이 되돌아 올 것입니다. 반면에 행복한 미소는 행복한 미소를 불러옵니다. 다정하게 인사하면 반드시 다정한 친절로 되돌아옵니다.
품행이 방정한 어린이는 어려서 좋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번영을 누리는 성공한 어른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돈벌이가 되는 장사나 사업을 하면 부자가 되어 번영을 누립니다. 하지만 도박과 같은 무익한 노력은 반드시 파멸을 가져옵니다. 선하거나 나쁜 행위에 따라오는 그러한 선과보(善果報)와 불선과보(不善果報)의 사례를 우리는 일상에서 체험합니다.
선한 행위는 선한 과보를 불러오고 나쁜 행위는 나쁜 과보를 불러오는 이 업의 법칙은 끝없는 윤회과정에서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나쁜 행위의 과보로 지금 생에 짧은 수명, 온갖 질병, 추함, 가난, 추종자나 시종들이 없는 것과 같은 나쁜 과보를 받아 고통을 치러야 합니다. 현생에서 살생하고, 남을 괴롭히고, 도둑질하고, 빼앗고 거짓말하는 등의 나쁜 행위를 하면 다음 생에 그 행위에 수반하는 나쁜 과보를 받아 낮은 중생계에 떨어지는 것으로 그 과보를 맺을 것입니다.
전생에 행한 선행의 결과는 지금 생에 좋은 과보로 열매를 맺고 장수를 누리고, 질병에 걸리지 않고, 아름다움과 부를 누리고,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됩니다. 살생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빼앗지 않고 선량한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봉사하면 더 높은 중생계에 나서 이러한 선한 행위의 과보를 받습니다.
선한 행위로 인한 선한 과보와 나쁜 행위로 인한 나쁜 과보는 분명히 실재하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바로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업자성정견입니다.
이러한 믿음, 즉 바른 견해는 통찰지처럼 자신의 꿰뚫는 직관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알려진 사례와 그 신뢰성을 스스로 가늠해보고 나서 스승들의 말씀과 경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견해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바른 견해는 열 가지 공덕행의 토대(puñña-kiriya-vattu)가 되며, 선행에 대한 바른견해(sucarita-sammādiṭṭhi)라고 합니다. 실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업과 업의 과보가 있는 것을 부정하는 그릇된 견해를 사견(邪見, micchādiṭṭhi)이라고 합니다. 이는 열 가지 악행(十惡行)의 하나로 분류되며 악행에 대한 삿된 견해(ducarita-micchādiṭṭhi)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우리의「삭감경(削減經 Sallekha Sutta)」법문 제 2권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1. 업과 업의 과보가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그릇된 견해가 악행에 대한 삿된 견해이다.
2. 업과 업의 과보가 실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바른 견해가 선행에 대한 바른 견해이다.
선행에 대한 바른 견해, 즉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는 모든 선한 행위의 근원입니다. 이 근원에 뿌리를 두고 모든 나쁜 행위를 삼가고 보시와 지계와 같은 선한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과 같은 공덕행도 닦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정견(正見)과 계(戒)를, 정(定)과 혜(慧)라는 선한 행위의 예비단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혼자서 수행을 할 수 있는 수행법을 간단히 말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나는 먼저 정(定)과 혜(慧)를 계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 법을 청정하게 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럼 그 예비적인 요구사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청정한 계율(戒律)과 바른 견해(正見)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계를 청정히 하고
바른 견해를 세워 나가면 그 계에 기대고 의지하라.
그대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사념처를 닦아 나갈 것이다.
그 세 가지 방식은
내부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
외부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
내· 외부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으로 보건데, 업자성정견과 계율의 도는 수행자가 수행을 하기 전에 굳건히 해야 할 예비적 기초임이 분명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심청정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정의 집중과 근접집중을 얻는 것이 필수조건이라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나아가, 성스러운 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그 예비단계의 도로서 위빠사나 도를 먼저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를 다음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① 기본단계의 도(mūla-magga)
② 예비단계인 위빠사나 도(pubbabha-ga vipassana- magga)
③ 성스러운 도(ariya-magga)
기본단계의 도, 예비단계의 도, 성스러운 도,
이 세 가지의 도를 닦아서 열반에 이른다.
19. 세 가지 도
선한 불교도는 공덕을 지을 때마다 빠르게 열반을 실현하고 증득하기를 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물론 최고선(最高善)은 단순한 소원만으로는 바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업의 공덕으로 갈 수 있는 높은 세계에 태어날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팔정도를 계발해서 수행해야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왜 내생까지 기다립니까? 왜 바로 지금 시작해서 이생에서 해탈을 준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해탈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예비단계의 도인 위빠사나 도가 앞서야 하는 팔정도를 계발해서 해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빠사나의 도를 닦기 위해서는 기본 요구조건들이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업자성정견의 도, 세 가지 계율의 도(sīla-magga), 집중의 도입니다.
부처님의 교법에 귀의를 한 사람은 이미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를 확립하였습니다. 계율의 도에 있어서, 재가신자로서 계율의 도를 아직 확립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계율을 지키면 이 도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비구인 수행자가 계율의 청정함에 자신이 없을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자(自恣 pavāranā)와 참회(manatta)의식을 치루어 자신의 계가 청정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수행자인 비구가 허용되지 않는 소유물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버리고 자기의 파계를 고백하여 청정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계를 확고히 하고나면 비구는 초선, 이선, 삼선, 사선, 또는 네 가지 선정 모두를 얻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선정에 가까운 근접삼매라도 얻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별도로 선정의 집중을 얻고자 노력할 수 없다면 사대(四大) 등을 지켜보면서 근접집중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억누르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위빠사나 찰나집중를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노력은 집중을 확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과 물질의 자연적 성품에 대한, 면밀한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감으로써 위빠사나 집중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대상에 알아차림이 분산되어 있거나 혹은 쉽게 구별할 수 없는 대상을 상대로 알아차림을 하면, 집중이 일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뚜렷하게 알 수 있는 한정된 대상에 알아차림을 국한시키면 집중(삼매)을 용이하고 빠르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자들에게 배의 영역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단단함, 누름, 움직임의 특성을 가진 바람의 요소(風大 vāyo-dhātu)를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배가 일어나면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리고 배가 꺼지면 ‘꺼짐’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이 일어나고 꺼지는 두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배의 일어나고 꺼짐을 알아차리는 동안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이라고 알아차리고 다시 배의 일어나고 꺼짐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만약 고통스런 느낌이 몸에서 일어나면 그것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고통스런 느낌이 누그러지거나 잠시 그것을 알아차렸으면 다시 배의 일어남, 꺼짐으로 되돌아옵니다. 팔다리의 구부림, 뻗음, 움직임이 있으면 ‘구부림, ‘뻗음,’ ‘움직임’,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떠한 몸의 동작이든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배의 ‘일어남’ ‘꺼짐’으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뭔가를 분명히 보거나 들으면 일정시간 ‘봄’ 혹은 ‘들음’이라고 알아차리고 다시 ‘일어남, 꺼짐’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 모든 현상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 마음은 확실히 고요해지고 집중이 됩니다. 알아차리는 매 순간마다 알아차림의 대상인 물질은, 그것을 인식하는 정신과 따로 분리되어 나타납니다. 이로서 집중되고 고요해진 마음의 힘으로, 물질에서 정신을 구별하는 특별한 위빠사나 지혜(통찰지)를 계발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혜안이 생기고 지혜가 생겼으며(cakkhu karani ñãṇa karani)”라고 말씀하신 특별한 지혜입니다. 장로 비구니들이“ 선행하는 지혜는 뒤따르는 지혜로 대체된다.(pubbenāparam visesam sanjānanti)”라고 설하였을 때도 역시 같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20. 선정 수행자는 어떻게 통찰 지혜를 계발 하는가
만약에 수행자가, 선정을 얻을 때까지 방금 언급한 방법으로 열심히 노력한다면, 선정력을 수반하는 지혜인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가 생기는데, 이것이 위빠사나의 목적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선정의 지혜가 아니라) 선정의 집중인데, 이는 심청정을 얻는 데도 도움이 되고 또 선정의 기초로서 위빠사나 수행에도 도움이 됩니다.
수행자는 선정으로 기초를 다지고 거기서 나와서 선정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인, 일으킨 생각(위따카),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희열(삐띠), 행복(쑤카), 집중(에까가타), 감각접촉, 의도, 숙고(마나시카라) 등을 얻는 순간에 일어나는 정신 상태를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수행자의 이러한 정신 상태는 매우 분명해지고 선정에 따른 몸의 상태도 그렇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스스로 분명하게
나타날 때마다 즉시 소멸이 뒤따릅니다. 끊임없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이 무상이고, 불만족이며 무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선정 상태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면서 선정상태의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을 주시합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행위를 번갈아가며 반복하는 동안 위빠사나의 도는 강력하게 계발되고, 곧이어 열반을 실현하게 됩니다. 그러한 실현의 가능성은 마찌마 니까야,〈구집(九集)〉의「선경(禪經 Jhãna Sutta)」29에 다음과 같이 씌여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초선(初禪)에 들어가 머문다. 그 상태에서 나와, 선정에 든 순간에 있었던,
몸(色), 느낌(受), 생각(想), 마음의 형성력(行), 식(識) 등을 주시하면서 그것들이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러우며
자아가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이렇게 보아서 얻은 위빠사나 지혜와 함께 머물며 모든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과를 얻는다.”
이것이 바로 선정 수행자30가, 선정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心所)에 대해서, 그리고 실제로 자기 몸의 연속체 안에서 생멸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대해,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성스러운 도를 얻은 방법입니다. 이는 책을 통해 배운 지식을 그냥 사유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자기 몸의 연속체 안에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실제로 주시하고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숙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선정 수행자가 선정상태에 들었다 나오면, 반드시 바로 조금 전에 실재했던 순간인 마음의 상태 등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수행의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선정수행을 하지 않는 수행자(a-jhãna-lābhi)도 즉시 바로 조금 전에
실재했던 감각적 욕망 등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그러므로 선정 수행자는 기계적인 암기나 책속의 지식을 사유하는 것만으로는
위빠사나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자기 몸의 연속체 내에서, 접촉하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냄새 맡고, 하는 등의
모든 행동을 면밀히 지켜보고 또 바로 조금 전에 실재했던 순간들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계발됩니다.
21. 잡다한 의도를 알아차림
선정 수행자는 다른 방법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는 선정상태에 들어갔다 나온 후 이미 설명한 대로, 선정의 마음과 마음의 상태 및 물질(rūpa) 중에서 두드러진 것을 수행의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고 접촉하고, 보고, 듣고 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대로 거기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이것이 잡다한 행(pakiṇṇaka-sa*nkhāra)31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정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suddha-vipassanā-yānika)32들이 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 선정을 위빠사나 수행의 토대로 사용하고, 그 선정력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날 때마다 쉽게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방법의 유일한 차이점입니다.
감각의 육문(六門)에 나타나는 다양한 대상들을 알아차리다가 피곤해지면 수행자는 다시 선정으로 돌아갑니다. 선정에 들어 피로가 회복되면 일어나는 모든 정신과 물질을 계속해서 주시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선정을 기반으로,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통해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을 때까지 위빠사나 지혜를 계발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은 마찌마 니까야의〈근본오십품(根本五拾品)〉
「쌍고경(雙考經 Dvedhavittakka Sutta)」의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부처님은, 보살이 선정을 근거로 통찰지혜를 계발하게 된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실제로, 수행자의 집중과 위빠사나가 아직 성숙하지 않을 때에는, 아주 오래 앉아서 위빠사나 수행을 할 경우, 피로가 엄습해오는데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몸 안에 불타는 감각이 있으며, 양 겨드랑이에서 땀이 흘러 나오기도 하고 뜨거운 증기가 정수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발버둥 친다. 수행자는 선정으로 다시 되돌아가 정신적, 육체적인 긴장을 완화시키고 안정을 찾는다. 그렇게 기운을 되찾아서 수행의 과업으로 다시 돌아간다. 오래 앉아있으면 또 다시 피곤해진다. 그러면 다시 선정으로 들어가 피곤을 푼다.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 선정에 들어가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 대단히 유익하다.”
이는 수행자가 자신의 기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정으로 명상을 시작하는 경우, 어떻게 잡다한 행을 수행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선정 수행을 하지 않는 경우는 느끼고, 생각하고, 듣고, 보는 것과 같은 잡다한 행에 대해서만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는 도중에 피로가 엄습해와도 선정으로 들어가서 피로를 완화시킬 수 없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한정된 대상으로 돌아갑니다. 수행대상을 한정시킴으로써 정신적, 육체적인 피곤과 긴장을 완화시킵니다.
그렇게 기운을 되찾은 수행자는 다시 잡다한 행을 지속적으로 지켜봅니다. 이러한 식으로 위빠사나 집중의 지혜가 증장되어서
수행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불편과 고통 없이 밤낮으로 수행을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의 대상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힘들이지 않고 알아차리면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는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집니다.
수행자는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자연스럽게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 지혜가 한걸음 더 나아가고 속도가 붙으면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식)33은 소멸과 사라짐의 상태로 돌진해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도를 통하여 열반으로 곤두박질하듯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근본이 되는 도(mūla-magga),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
성스러운 도(ariya-magga),
이 세 가지 도를 닦아서 열반에 이른다.
22. 위빠사나 도를 시작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도의 세 가지 단계 중에서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업자성정견과 계율로 구성된 ‘근본이 되는 도’가 완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기본토대로써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의 두 가지 근본 도로 이루어진 사마타 집중을 계발해야 합니다.
반면에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는 모든 감각대상에 주의를 기울여 면밀히 알아차리면서 사대(四大)등을 주시하여, 근본이 되는 집중의 도를 완성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다른 대상으로 방황하지 않습니다. 오직 알아차림에만 매진하게 되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이러한 심청정을 얻은 후에는 알아차림을 하는 모든 행위가 위빠사나 도를 계발하는 것이 됩니다.
23. 어떻게 위빠사나 집중의 도를 계발 하는가
일어남, 꺼짐, 앉음, 닿음, 생각함, 앎, 느낌, 뜨거움, 통증 등, 이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노력[正精進]의 도입니다. 사념처 수행의 대상인 몸의 동작[身], 느낌[受], 마음[心]과 마음의 대상[法] 등에 대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바른 알아차림, 정념(正念)의 도입니다. 감각대상에 마음을 겨냥하여 고정시키는 것이 바른 집중[正定]이며 위빠사나 찰나 집중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도, 즉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정(定)의 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입니다.
24. 어떻게 위빠사나 지혜의 도를 계발 하는가
감각대상을 알아차려 자연적인 성품 그대로를 보는 것이 정견(正見)의 도입니다. 심청정(心淸淨)을 얻으면 바로,
알아차리는 마음인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을 구별하는 지혜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뚜렷하게 구별하는 명료한 지혜가 견청정(見淸淨)34을 이룹니다.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다음에는 원인과 결과의 성품을 구별하게 됩니다. 구부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구부림이 있고,
뻗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뻗음이 있고, 움직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있습니다.
눈과 형상이 있기 때문에 봅니다. 귀와 소리가 있기 때문에 듣습니다. 선업이 있기 때문에 재물이 있습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의 법칙(因果法)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구별하게 됩니다.
수행을 계속하면서 수행자는 모든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려서 구별합니다. 그 결과,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
모두가 항상 하지 않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 현상은 모두 무서운 고통이고, 불만족인 괴로움이며, 실체가 없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나 관리 하에 있지 않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러한 확신이 정견(正見)의 도를 이룹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다운 괴로움의 진리(苦聖諦)를 아는 지혜가 바로 정견의 도라고 하셨습니다.
알아차림을 통하여 무상·고·무아의 삼법인으로 고성제(苦聖諦)를 관통하면 나머지 세 가지 진리인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도 관통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과업을 이루는 지는 나중에 도성제(道聖諦)의 장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기울여서 정신과 물질의 진정한 본성을 알고,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으로 그것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철견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의 도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정견과 정사유, 이 두 가지는 지혜(慧)의 도(道)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바른 집중인 정정(正定)의 세 가지 도를, 이상 두 가지의 혜(慧)의 도와 합치면, 행위자의 도
(karāka-magga)로 분류되는 다섯 가지 도가 됩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도는 모든 현상을 알고 알아차리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주석서에는 이것들을 행위자의 도(kāraka-magga)라고 하며, 도를 완성시키는 임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로 구성되는 계(戒)의 도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도 확립이 되고
수행을 하면서더욱 확고해지고 순수해집니다.
이 세 가지의 도를 포함한 여덟 가지의 도는, 예비단계의 도로서, 모든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이있을 때마다 계발됩니다.
25. 바른 사유[正思惟]의 도
우리는 지금까지 일곱 가지 도에 대한 분류를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의 도를 고찰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일으킨 생각 즉, 정사유(正思惟)35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 욕망과 탐욕에서 벗어난 생각인
‘출리에 대한 사유’(nekkhama-saṅkappa)가 있고, 살생하지 않고 또 살생을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남이 잘되는 것을 원하는 것에 대한 생각 등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abvyāpāda-saṅkappa)가 있다.
그리고 해치지 않음에 대한 생각, 연민으로 보호하는 것에 대한 생각 등
‘해치지 않을 것에 대한 사유’(avihiṃsa-saṅkappa)로 이러한 세 가지 사유의 방식이 정사유다.”
공덕행을 하고, 비구가 되기 위해 구족계(具足戒)36를 받고, 법문을 듣고, 법을 수련하는 등 선행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모두 ➀ 출리에 대한 사유입니다. 더 상세한 것은 「삭감경(削減經 Sallekha Sutta)」법문집 제 2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Pabbajjā pathamam jhãnam, nibbānanca vipassanā
Sabbepi kusalā dhammā, nekkhammanti pavuccare.
출가의 도는, 선정, 열반, 위빠사나이며,
모든 선법은 곧 출리라고 한다.(Vbh.86)
위의 게송에 따르면 위빠사나 수행을 계발하는 것은 분명히 정사유(正思惟)의 요소인
➀ 출리에 대한 사유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불살생과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생각은
➁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를 이루는 것입니다. 특히 자애수행을 할 때에는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의 요소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해치지 않음에 대한 사유’를 숙고하고 또 연민을 보내는 것은 특히 연민수행(karuṇā-bhāvanā)을 할 때 완성됩니다.
위빠사나 수행 중에는 감각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죽이고 싶다거나
잔인한 생각이 일어날 틈이 없기 때문에, 알아차릴 때마다 두 가지 요소의 정사유가 완성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심사숙고하거나 상상 수련을 하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과 관계없습니다.
정사유는 단지 정신과 물질의 실재하는 것에 가볍게 마음을 기울이거나 혹은 그쪽을 겨냥하여,
그것의 일어나고 사라짐 그리고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근본이 되는 도와 예비단계의 도인 위빠사나 팔정도에 관해 모든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위빠사나 도가 완성되면 열반의 실현에 이르는 성스러운 도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비단계의 도는, 뒤이어오는 성스러운 도를 예고하는 선도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비단계의 도와 성스러운 도는 연속되는 동일한 도의 첫 번째와 마지막 부분을 각각 이루고 있습니다. 도의 마지막 부분을 이루는 성스러운 도를 얻기 위해서는 그 도의 첫 부분인 위빠사나 도를 먼저 완수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스러운 도의 마지막 단계는 스스로 이루어집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개울을 뛰어넘으려면 전속력으로 뛰어서 개울까지 달려와야 합니다. 일단 뛰어올랐으면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개울의 반대편에 자동적으로 발을 내디딜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전속력으로 뛰어서 개울에 다가서는 것과 같습니다. 개울의 반대편에 발을 내딛는 것은,
위빠사나 도로 얻어진 추진력의 결과로 성스러운 도를 실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다시 요약을 합니다.
근본이 되는 도(mūla-magga),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
성스러운 도(ariya-magga),
이 세 가지 도를 계발해서 열반에 이른다.
오늘 법문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초전법륜경」큰 법문을 경청한 공덕으로, 여기에 모인 여러분 모두가 중도인 팔정도를 닦고,
잘못된 도인 두 극단을 피할 수 있으며, 고귀한 여덟 가지 중도를 따르고,
여러분이 바라는 바대로 도과를 이루어 모든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 역주(譯註) :
1. 자자(自恣 pavāranā)란 3개월의 우안거(雨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포살일(15일)에 안거를 보낸 비구 전원이 모여 우안거 동안의 잘못을 서로 지적하며 반성하는 더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집회이다. 「상윳따 니까야」복주석서(SAṬ.i.253)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자란 수행을 청정하게 하고 각자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하기 위한 기회를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안거가 끝날 때 행해지는 것인데, 이것을 청정해지기 위한 자백이라고 한다.
2. 교법(敎法)이라 번역한 사사나(sāsana)의 문자적 의미는 ‘메시지, 전달'의 뜻으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홉 부류의 교설(九分敎)을 말한다. 이 구부경은 구부설(九部設) 또는 구부경(九部經)이라고도 하며 서술의 형식이나 내용에 따라 경전을 분류한 체제이다.
➀ 계경(契經 Sutta): 경 가운데 장행 내지 산문의 부분.
➁ 중송(重頌 Geyya): 먼저 산문으로 서술한 후 다시 운문으로 읊고 있는 경의 부분.
➂ 수기(授記 Veyyākarana): 주석(註釋). 수역(授譯) 또는 별기(別記)라 번역.
불제자들의 생사인과를 적거나 불법의 심의(深意)를 분명히 적은 부분.
➃ 고기송(孤起頌 Gāthā): 운문체의 경문.
➄ 감흥어(感興語 Udāna): 질문을 받지 않았는데도 부처님 스스로 감흥이 일어나 설한 시의 문구.
➅ 여시어(如是語 Itivuttaka):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경으로 감흥어와 유사하다.
이는 주로 부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➆ 본생경(本生經 Jātaka): 부처님의 전생담을 실은 경.
➇ 미증유법(未曾有法 Abbhuta-dhamma): 부처님의 공덕의 위대함을 찬탄한 부분.
또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미증유의 일들을 기록한 부분.
➈ 교리문답(方廣 Vedalla): 인명(因明), 정리(正理)에 의거, 불법의 깊은 뜻을 자세히 설한 부분
그리고 십이분교(十二分敎)로 분류할 경우는 여기에
➉ 인연담(因緣譚 Nidāna)
⑪ 비유(譬喩 Apadāna)
⑫ 논의(論議 Upadesa)가 포함된다.
이와 같이 사사나(sāsana)는 부처님이 평생 설하신 교설(一代敎說)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써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종교적 체계로서의 불교를 뜻한다.
3. 계목(戒目)이라 옮긴 빠띠목까(pātimokkha)는 중국에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로 음역했고 영역은 code of discipline이다. 출가 수행자들을 제어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계의 목록, 즉 계본(戒本)이란 뜻이다. 비구의 경우 227가지로 되어 있는데 중한 정도에 따라 7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바라이법(波羅法夷 pārājika)이다. 이것은 ➀ 사음 ➁ 도둑질 ➂ 사람을 죽이는 것 ➃ 깨닫지 않았는데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의 4개조로 이것들을 범하면 승가로부터 영원히 추방된다.
4. 마음의 작용(心所 cetasika)은 모두 52가지로 주석서에서 ‘마음에 있으면서 그것에 의지해 존재하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이라 한다.’고 정의한다. 마음의 작용은 항상 마음(citta)과 함께 결합되어 일어나는 정신현상이며 전체 인식 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 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며, 마음은 마음의 작용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다. 역할로 보면 이 둘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마음의 작용을 인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인 마음에 의지하여 대상을 인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왕과 그 수행원들의 관계와 비교한다. 사람들이 “왕이 온다"라고 말하지만 왕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왕은 항상 수행원들과 함께 온다. 그와 같이 마음이 일어날 때는 결코 혼자 일어나지 않고 항상 마음의 작용이라는 수행원들과 함께 일어난다.
아비담마 52가지 마음의 작용
52가지 마음의 작용(dvipaññāsa cetasikā)
A. 다른 것과 같아지는 마음의 작용
1)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것 7가지
(1) 감각접촉(觸 phassa)
(2) 느낌(受 vedanaa)
(3) 인식(想 saññā)
(4) 의도(思 cetanā)
(5) 집중(心一境 ekaggatā)
(6) 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
(7) 주의 기울임함(作意 manasikāra)
2) 때때로 있는 것 6가지
(8) 일으킨 생각(尋 vitakka)
(9)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
(10) 결심(信解 adhimokkha)
(11) 정진(精進 viriya)
(12) 희열(喜悅 pīti)
(13) 열의(欲 chanda)
B. 착하지 않은 마음의 작용 14가지(akusala-cetasika)
1) 착하지 않은 것의 공통되는 것 4가지
(14) 어리석음(痴 moha)
(15) 양심 없음(無慙 ahirika)
(16) 수치심 없음(無愧 anottappa)
(17) 들뜸(掉擧 uddhacca)
2) 때때로 있는 것 10가지
탐욕에 관한 것 3가지
(18) 탐욕(貪 lobha)
(19) 사견(邪見 diṭṭhi)
(20) 자만(慢 māna)
성냄에 관한 것 4가지
(21) 성냄(嗔 dosa)
(22) 질투(嫉 issā)
(23) 인색(吝 macchariya)
(24) 후회(惡作 kukucca)
게으름에 관한 것 2가지
(25) 해태(懈怠 thīna)
(26) 혼침(昏沈 middha)
(27) 의심(疑 vicikacchā)
C. 께끗한 마음의 작용 25가지(sobhana-cetasika)
1) 깨끗한 것에 공통되는 것 19가지
(28) 믿음(信 saddhā)
(29) 알아차림(念 sati)
(30) 양심(懺 hiri)
(31) 수치심(愧 ottappa)
(32) 탐욕 없음(不貪 alobha)
(33) 성냄 없음(不嗔 adosa)
(34) 중립(tatramajjhattatā)
(35) 몸의 경안(輕安 kāyapassaddhi)
(36) 마음의 경안(cittapassaddhi)
(37) 몸의 가벼움(kāyalahutā)
(38) 마음의 가벼움(cittalahutā)
(39) 몸의 부드러움(kāyamudutā)
(40) 마음의 부드러움(cittamudutā)
(41) 몸의 적합함(適業性 kāyakammaññatā)
(42) 마음의 적합함(cittakammaññatā)
(43) 몸의 능숙함(練達性 kāyapāguññatā)
(44) 마음의 능숙함(cittapāguññatā)
(45) 몸의 올곧음(正直性 kāyaujukatā)
(46) 마음의 올곧음(cittaujukatā)
2) 절제(위라띠, virati) 3가지
(47) 바른 말(正語 samā-vācā)
(48) 바른 행위(正業 samā-kammanta)
(49) 바른 생계(正命 samā-ājīva)
3) 무량(無量 appamaññā) 2가지
(50) 연민(悲 karuṇā)
(51) 같이 기뻐함(喜 muditā)
4) 어리석음 없음(不痴 amoha) 1가지
(52) 통찰지의 기능(慧根 paññindriya)
5. 52가지 마음의 작용에서 보듯, 절제(virati)는 팔정도 가운데서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의 셋을 지칭한다. 이는 3가지 깨끗한 마음의 작용으로서 말과 행동과 생계로 나쁜 행위를 엄격히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 세간의 마음에서 절제는 사람이 나쁜 행위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것을 억제하는 경우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행위가 일어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런 나쁜 행위를 짓지 않으면 그것은 절제가 아니라 청정한 계율(sīla)에 속한다.
6. 잠재적 성향으로 번역한 아누사야(anusaya)는 anu(따라서)+√sī(눕다)에서 파생된 양성명사로‘따라 누운’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무시(無始)이래로 중생들의 잠재 의식의 연속 속에 잠복해 온 숨은 잠재 성향을 말한다. 중국에서 수면(隨眠)으로 옮겼고 영역은 underlining tendency, dormant disposition등으로 풀이된다.
주석서에“자기가 속해있는 정신적인 흐름에 따라 누워 있다가 적당한 조건들을 만나면 표면으로 드러나는 번뇌이다.”라고 하듯이 이 아누사야는 언제라도 튀어 나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적절한 자극이 가해지면 겉으로 표출되고 자극을 주는 힘이 사라지면 언제라도 다시 잠복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즉 아누사야라는 술어는 번뇌가 출세간의 도에 의해 박멸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불선법(不善法)들은 다 아누사야에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➀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kāmarāgānusaya),
➁ 존재에 대한 욕망의 잠재성향(bhavarāgānusaya)
➂ 적의의 잠재성향(paṭighānusaya)
➃ 자만의 잠재성향(mānānusaya)
➄ 사견의 잠재성향(diṭṭhānusaya)
➅ 회의적 의심의 잠재성향(vicikicchā nusaya)
➆ 무명의 잠재성향(avijjānusaya)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청정도론」(Vis.XXⅡ.73)은 이들 잠재적 성향이 어떻게 도에 의해서 버려지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견의 잠재성향과 의심의 잠재성향은 첫 번째 지혜(수다원의 지혜)로 버린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잠재성향과 의심의 잠재성향은 첫 번째 지혜(수다원의 지혜)로 버린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잠재성향과 적의의 잠재성향은 세 번째 지혜(아나함의 지혜)로 버린다.
자만의 잠재성향과 무명의 잠재성향은 네 번째 지혜(아라한도의 지혜)로 버린다.”
7. 4가지 출세간도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4 가지 도를 가리킨다.
8. 생계의 7가지 그릇된 도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짓는 3가지 그릇된 신업(① 살생 ② 도둑질 ③ 그릇된 성관계)과
4가지 그릇된 구업(④ 거짓말 ⑤ 중상 ⑥ 욕설 ⑦ 잡담)을 뜻한다.
9. 생계의 8번째 계로 번역한 아지와따하마까 실라(ājīvaṭṭhamaka-sīla)는 ājīva(생활, 생계)+aṭṭhama(8번째)+ka(지말접미사)+sīla(계)의 합성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활명계(活命戒), 또는 활명팔계(活命八戒)로 옮기고 영역은 The Eight Precepts with Right Livelihood as the Eighth, 또는 virtuous conduct with right livelihood as the eighth kind등으로 풀이된다. 이 계는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있어 방금 본문에서 언급된 7가지 악행을 삼가는 계에 그릇된 생계수단을 삼가겠다는 8번째 계를 더한 것이다. 즉 다음과 같다.
1. 나는 살생을 하지 않겠습니다.
2. 나는 주지 않는 것을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3. 나는 그릇된 성관계를 갖지 않겠습니다.
4.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5. 나는 중상을 하지 않겠습니다.
6. 나는 욕설을 하지 않겠습니다.
7. 나는 잡담을 하지 않겠습니다.
8. 나는 그릇된 생계수단을 갖지 않겠습니다.
그릇된 생계수단이란 출가자의 경우디나 니까야,「범망경」(D1)에 나오는 것처럼 점치고 관상보고 제사지내는 법들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출가자나 재가자에 다 해당되는 그릇된 생계로는 무기, 독극물, 고기, 술장사를 들고 있다.(A.iii.208).
이와 관련하여 레디 사야도(Ledi Sayādaw)의 말씀을 인용해본다.
“생계의 8번째 계는 재가자의 계와 승가의 계의 두 가지가 있다. 몸으로 짓는 3가지 불선행(kāya-duccarita)과 입으로 짓는 4가지 불선행을 삼가는 것이 바로 재가자가 지키는 생계의 8번째 계이다. 포살일에 지키는 8계(aṭṭhanga-uposatha-sīla)와 10계(dasanga-sīla)는 이 생계의 8번째 계를 더욱 정련하고 빛을 낸다. 율장에 제정된 227계를 엄수하는 것이 상가가 지키는 생계의 8번째 계이다. 이 227계는 몸으로 짓는 업(kāya-kamma)과 입으로 짓는 업(vacī-kamma)을 포괄하고 주석서에도 그렇게 분류되고 있다. 율장에 명시된 나머지 계율은 이 생계의 8번째 계를 정련하고 빛을 낸다.
(Requisites of Enlightenment, by Ledi sayādaw, Kandy, BPS, 2007)
10. Discourse on Sallekha Sutta, by Mahāsi Sayādaw, Buddha Sāsana Nuggaha Organization, Yangon, 1981.
11. 상좌부 불교의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심리 현상들을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로 나누고 있다.
➀ 선(善)으로 옮기는 꾸살라(kusala)의 원 의미는 ‘유익한, 숙련된, 능숙한, 이로운’등으로 기본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뜻하고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앗타살리니(Atthasālini)」에 따르면 꾸살라는 꾸사풀을 베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풀이 아주 억세고 날카로워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잘못 꺾게 되면 손을 베이고 만다. 그래서 이 풀을 베려면 아주 마음을 기울여서 조심해서 꺽어야 한다. 이렇게 어떤 것이 선하고 유익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如理作意 yoniso-manasikāra)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이 말이 유래되었다. 그래서 kusala에는 능숙함이란 의미가 항상 담겨 있으며 서양에서는 wholesome외에 skillful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➁ 불선(不善)으로 옮기는 아꾸살라(akusala)는 이와 반대로 도덕적으로 불선하고 해탈과 열반에 해로운 것이다.
➂ 무기(無記)로 옮기는 아비야까따(avyākata)는‘설명되지 않은, 답하지 못하는, 결정하지 못하는’의미다. 즉 선(善)과 불선(不善)으로 판단할수 없는 심리현상을 뜻한다.
12. 바와나(bhāvanā)는 √bhū(to become)의 사역형 동사 bhābeti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되게 하다’라는 문자적인 뜻에서‘마음 계발, 수행, 명상을 뜻하는 불교수행의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바와나는 집중을 계발하는 사마타 수행과 통찰지를 계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이 있다.
13. 여기서의 식(識 viññāna)은 본서에도 나오듯이 바로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na)을 뜻한다. 이 재생연결식은 금생과
내생을 연결하는 식으로써 중생들이 죽는 순간에 나타나는 업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 그리고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중 하나를 대상으로 생긴다. 상좌부 불교의 아비담마에서는 이 재생연결식을 한 생의 출발로 본다. 모든 중생은 한 생을 죽는 마음(cuti-citta)으로 종결짓고 나면 즉시 다른 형태의 존재로 재생(再生)하는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고 이 재생연결식이 곧바로 다음 생의 바왕가(有分心 bhavaṅga)로 연결이 된다. 그러므로 임종직전에 가지는 마음 태도가 상당히 중요하다. 평화로운 임종을 맞기 위해서는 평소에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 즉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아야 하며 특히 임종 시에는 이생에 대한 애착을 모두 털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상좌부 불교국가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대념처경」을 독송해주거나 그로 하여금 생전에 지은 선업을 기억해 내도록 유도하여 마지막 순간에 좋은 생각을 일으키도록 도와주고 있다.
14. 「청정도론」(Vis.Ⅶ.52)에 이 개구리 천신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온다. 부처님께서 짬빠시의 주민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 한 개구리가 부처님의 목소리 표상에 취해있었다. 바로 그때 한 목동이 막대기에 기댄 채 그의 머리를 누르면서 서있었다. 막대기에 눌려 고통을 당했지만 개구리는 법에 대한 환희심으로 울부짓지도 않고 죽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삼십삼천의 황금 궁전에 태어났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그곳에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업을 살펴보다가 전생에 개구리였을 때 부처님의 목소리 표상을 취한 것외에는 없음을 알고는 부처님께로 가서 법문을 듣고는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한다.
15. 사정근(四精勤)으로 옮긴 삼마 빠다나(sammā-ppadhāna)는 sammā(바른)+padhāna(노력, 애씀, 정근)의 합성어이고 다시 이 padhāna는 pra(앞으로)+√dhā(내딛다)로 분해될수 있다. 이 사정근은 팔정도의 6번째인 정정진(正精進)의 내용이며, 5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5가지 힘(五力 pañca-bala)의 두 번째인 정진(viriya)의 내용이기도 하다.
5가지 기능(五根)은
① 믿음(saddhā)의 기능
② 노력(viriya)의 기능
③ 알아차림(sati)의 기능
④ 집중(samādhi)의 기능
⑤ 통찰지혜(paññā)의 기능이고,
다섯 가지 힘(五力)은
① 믿음의 힘
② 노력의 힘
③ 알아차림의 힘
④ 집중의 힘
⑤ 통찰지혜의 힘이다.
이처럼 5가지 기능과 5가지 힘은 같은 다섯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둘은 다른 역할을 한다. 기능(根)들은 그 각각의 영역에서 지배하는 요소들이고 힘(力)들은 반대되는 것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이들과 함께하는 법들을 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이 5가지 기능은 그들의 영역에서 각각 결심하고, 분발하고, 확립하고, 산만하지 않고, 식별한다. 이렇게 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법들, 즉 우유부담함, 게으름, 부주의함, 동요, 미혹함을 극복한다. 5가지 힘은 이것들과 같은 상태인데, 흔들리지 않고 이와 반대되는 법이 이것들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한다.
16. 보시(dāna), 지계(sīla), 수행(bhāvanā)은 공덕행의 토대 (puñña-kiriya-vattu)라고 경전에서 나온다. 주석서,
특히「앗타살리니(Atthasālini)」는 이를 좀 더 세분하여 다음의 10가지로 들고 있다.
① 보시(布施 dāna)
② 지계(持戒 sīla)
③ 수행(修行 bhāvanā)
④ 공경(恭敬 pacāyana)
⑤ 봉사(奉仕 veyyāvacca)
⑥ 회향(廻向 pattidāna)
⑦ 더불어 기뻐함(隨喜 pattānumodana)
⑧ 법을 가르침(說法 desanā)
⑨ 법을 들음(聞法 savana)
⑩ 자기의 견해를 바로 잡음(diṭṭhujjukamma)
17. 여기서 싫어하는 마음(슬픔, 비탄)으로 옮긴 도마나싸(domanassa)는「대념처경」에서 크게 두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사성제의 고성제편에서 나타나는 dukkha-domanassa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서 나타나는 abhijjhā-domanassa이다.
본서에서는 전자를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으로 후자를 ‘탐욕과 비탄’으로 구분해서 옮겼다.
이 경우는 정신적으로 넘어간 고통이다.
18. 분명한 앎(正知)으로 옮긴 삼빠쟌나(sampaJñña)는 sam(함께)+pra(앞으로)+√Jñā(알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문자 그대로‘충분하고 분명하게 앎’이란 뜻이다. 수행과 관련된 빠알리 성전에서 사띠(sati)와 삼빠쟌나(sampaJñña)는 거의 대부분 함께 나타난다. 사띠(sati)가 정해진 대상에 마음을 확립하는 것을 말한다면 삼빠쟌나(sampaJñña)는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은 함께 쓰이고 있다.
서양에서 사띠(sati)는 mindfulness로,
삼빠쟌나(sampaJñña)는
clear comprehenshion, full awareness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19. 근접 삼매가 생기는 명상주제로 옮긴 우빠짜라 깜마타나(upacāra-kammaṭṭhāna)는 upacāra +kamma+ṭhāna로 분석된다. upacāra는 ‘근접삼매’란 뜻이고 kamma는 업으로 옮겨지나 여기서는 넓은 의미로 쓰여서 ‘행위일반’을 뜻한다. 그리고 ṭhāna는 ‘장소, 지역’이다. 그래서 kammaṭṭhāna는 ‘행위의 장’이 되며 kamma를 업이나 일로 해석하면 ‘작업장, 일터’를 뜻한다. 즉 수행자들의 일터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이를 업처(業處)로 옮겼고 수행자들이 40가지 삼매의 주제와 10가지 위빠사나를 일터로 삼아 도를 이루기 위해 일(수행)을 해야한다는 뜻이다.「청정도론」에서는, 사마타를 성취하는 40가지 명상주제를 깜마타나(kammaṭṭhāna)로 부르고 10가지 위빠사나는 위빠사나의 지혜(vipassana-ñāṇa)로 부른다.
*참고 「대념처경」의 주석서에 따르면 21가지의 수행대상이 있다. 즉
➀ 들숨날숨(出入息)
➁ 4가지 자세
➂ 4가지 분명한 앎
➃ 32가지 몸의 부위
➄ 사대(四大) ➅-⑭ 9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⑮ 3가지 느낌,
⑯ 16가지 마음의 대상,
⑰ 5가지 장애(蓋),
⑱ 5 무더기(蘊),
⑲ 6 가지 감각장소(處),
⑳ 7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
(七覺支), ㉑ 4성제(四聖諦) 등이다.
이들 가운데서 들숨날숨(出入息)과 32가지 몸의 부위와 아홉 가지 공동묘지에 대한 알아차림 11가지는 근본집중에 이르는 명상주제이다.『장부』를 암송하는 마하시와(Mahāsīva)장로는 그런데 9가지 공동묘지에 대한 알아차림은 위험함을 관하는 것으로 설해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견해에 따르면 두 가지만이 근본집중을 유도하는 대상이고 나머지는 모두 근접집중의 대상이 된다.
20. 장애(五蓋 nīvaraṇa)란 마음을 덮거나 훼방하여
정신적인 발전을 가로 막는 것으로 다음의 다섯가지가 있다.
영역은 five hinderances.
➀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 악의(vyāpāda)
➂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회한(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
21. 감각장소로 옮긴 아야따나(āyatana)는 중국에서‘이쪽으로 온다’는
문자적인 의미를 중시하여 입(入)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장소란 의미로 쓰이므로 처(處)라고 옮기기도 하였다.
보통 12연기에서는 육입(六入)으로, 12처와 공무변처등의 4처는 처(處)로 옮기고 있다.
본서에서는 감각작용와 관계된 육입이나 12처를 감각장소(處)로 옮겼다.
이 12가지 감각장소(十二處)는
① 눈의 감각장소(眼處)
② 귀의 감각장소(耳處)
③ 코의 감각장소(鼻處)
④ 혀의 감각장소(舌處)
⑤ 몸의 감각장소(身處)
⑥ 마음의 감각장소(意處)
⑦ 형상의 감각장소(色處)
⑧ 소리의 감각장소(聲處)
⑨ 냄새의 감각장소(香處)
⑩ 맛의 감각장소(味處)
⑪ 감촉의 감각장소(觸處)
⑫ 법의 감각장소(法處)이다.
22. 성스러운 도의 마음(ariya-magga consciousness)에서 consciousness는 식(識)으로 번역되지만,
위냐나(viññāṇa)가 아니라 마음(心)인 찌따(citta)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찌따와 마노를 영어로는 mind로, 위냐나를 consciousness로 번역하지만
여기처럼 역자나 문맥에 따라 가끔 찌따를 consciousnes, 또는 state of consciousness라고 번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논장과 주석서에서는 찌따와 마노, 위냐나를 거의 동의어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과 관련된
빨리어를 영어번역에만 의지해서는 원어가 지닌 독특한 뉘앙스와 정확한 쓰임새를 파악하기 가 쉽지 않다.
23. 네 가지 색계선은
➀ 초선(初禪)
➁ 이선(二禪)
➂ 삼선(三禪)
➃ 사선(四禪)이고
무색계선은
➄ 공무변처(空無邊處)
➅ 식무변처(識無邊處)
➆ 무소유처(無所有處)
➇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원래 경장에서는 앞의 4가지 선만을 선정이라 불렀으나
뒤에 논장과 그 주석서에서는 이를 더 확장하여 앞의
네 가지 선은 색계선정이라 명하고 뒤의 4처는 무색계선정이라 칭하게 된다.
이를 각각 사종선(四種禪)과 오종선(五種禪)이라 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말씀은 이들 4가지 색계선과 4가지 무색계선은 깨달음을 위한 토대는 될지언정 그 자체가 깨달음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세간의 선(lokiya-jhãna)이라 말씀 하신 것이고 이러한 세간의 선에 기초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닦아 무상· 고· 무아를 꿰뚫는 통찰지를 증득해야만 삼계(三界)의 속박에서 벗어나 출세간의 열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이들 세간의 선정도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가 된다면 출세간의 선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4선정 자체로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고 그것들을 토대로 반드시 통찰지를 계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수행이 바로 위빠사나이다. 비록 경전에서 통찰지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집중(samādhi) 혹은 선정(jhāna)수행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주석서들에 따르면 이러한 4가지 선의 체험 없이도 통찰지의 실현은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수행을 하는 자를 주석서에서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suddha-vipaasaka)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순수 위빠사나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집중을 찰나집중(khaṇika-samādhi)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이 토대가 될 수 있고 이러한 근본집중이 없이도 가능하다. 근본집중을 토대로 하지 않은 순수 위빠사나를 닦을 때에 매 순간마다 근접집중에 해당하는 고도의 집중이 생기는데 이를 찰나집중이라고 하는 것이다.
빨리 경전에서는,
4선정을 두루 닦는 사마타 수행의 힘으로 여러 신통지를 얻는 것을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라고 하고
위빠사나를 통해서만 해탈을 성취하는 것을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이라고 한다.
또 이 둘을 다 갖춘 것을 양면해탈(兩面解脫 ubhatobhāga-vimutti)이라고 한다.
24. 상좌부 불교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의 두 가지 다른 수행법이 있다.
사마타를 닦는 수행자는 먼저 어느 수준까지의 근접집중과 근본집중(혹은 본삼매)에 이르는 사마타를 닦는데,
먼저 근접집중이나 색계 혹은 무색계선정을 얻은 뒤 선정 상태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지켜본다.
그런 후에 이 선정에서 나타나는 각지(覺支)들을 무상· 고· 무아라고 알아차린다. 이런 수행자가 먼저 근접집중이나
근본집중을 얻는 것을 심청정(心淸淨)이라 한다.
반면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는 이러한 위빠사나의 토대가 되는
사마타수행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수행자는 계를 청정히 하고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정신과 물질(名色)의 변화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바로 들어간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힘과 정확한 겨냥을 얻게 되면 마음은,
어떤 법칙을 따라서 항상 변화하는 정신과 물질의 흐름(相續)에 자연스럽게 집중되는데
이것은 사마타의 근접집중에 필적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에 대한 이러한 매순간의 마음집중을 찰나집중이라고 한다.
이것은 근접집중과 동등한 정도의 마음의 고요와 안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를 심청정으로 보는 것이다.
25. 미얀마에서 이루어진 6차 결집본에는 「Anussatithana Sutta)」로 나타나고 있지만 영국 PTS본에는 이 경의 이름이「Anussati Sutta」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은 앙굿따라 니까야(A6:9)에 나오는 동일한 경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미얀마 분이라 당연히 미얀마에서 결집된 6차 결집본을 저본으로 언급하셨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영국 PTS본대로 경명을 「수념경(隨念經)」으로 옮기고 대신 경번호를 괄호로 표기하였다.
26. 불수념(佛隨念 buddha-anussati)은「청정도론」(VⅢ)에서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하는 십수념(十隨念)중의 하나로 나온다. 이 십수념의 대상은, 부처, 법, 승가, 계율, 보시, 천신, 죽음, 몸에 대한 알아차림,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 고요함 등 열 가지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27. 네가지 성스러운 도와 과는
예류(수다원),
일래(사다함),
불환(아나함),
아라한의 사향사과(四向四果)를 말한다.
28.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로 번역한 깜마사까따-쌈마디띠(kammassakata-sammādiṭṭhi)는 ‘kamma(업)+sakata(자기, 자신)+sammādiṭṭhi(바른 견해)’로 분해가 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라는 의미이다.
29. 앙굿따라 니까야〈구집(九集)〉의「선경(禪經 Jhãna Sutta)」(A9:36)에 나오는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는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불선업으로부터 벗어난 뒤...초선에 들어가 머문다. 그는 그 상태에서 일어나는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식과 같은 모든 법들을 무상하고 괴롭고, 질병, 종기, 화살, 재난이며, 나의 것이 아니고, 무너지게 되어 있고, 공한 것이고 무아라는 것을 바르게 지켜본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 불사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30. 선정수행자라고 옮긴 wi나라비(jhãna-lābhi)라는 술어는 경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주석서와 복주서 문헌에는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다. 즉 색계선을 증득한 자, 무색계 선을 증득한 자, 까시나(kasiṇa)로 선을 증득한 자 등등의 용어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가 아닌 선정 혹은 집중을 먼저 닦고 이를 토대로 하여 위빠사나를 계발하여 도과를 성취하는 사마타 수행자라고 보면 되겠다.
31. 잡다한 행(pakiṇṇaka-sankhāra)에서 ‘잡다한’으로 옮긴 빠낀나까(pakiṇṇaka)는 pra(앞으로)+√ṛ(흩다)의 과거분사 pakiṇṇa에다‘-ka’어미를 붙여서 만들어진 단어로 ‘흩어진’것이란 의미에서 ‘잡동사니, 보편적이지 못한 것’등의 의미로 쓰인다. 이들은 선과 불선으로 특별히 분류되지 못한다. 선한 마음의 작용(kusala-cetasika)과 함께 하면 선한 기능을 하고 불선한 마음의 작용(akusala-cetasika)과 함께하면 불선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행(行 saṇkhāra)은 12연기에서처럼 의도적 행위 즉 주석서의 해석대로 업(kamma)이라는 뜻으로 쓰였고 이는 쩨따나(cetanā)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32.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란 초선(初禪) 이상의 근본집중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곧바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이다. 주석서와 복주서에서는 이러한 수행자를 선정의 습기가 없다는 의미로 마른 위빠사나 수행자(乾觀行者)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사마타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근접집중이나 근본집중으로 구성된 사마타 집중을 계발한다.
33. 감각대상은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의 오처(五處)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인 식란 눈의 식(眼識), 귀의 식(耳識), 코의 식(鼻識), 혀의 식(舌識), 몸의 식(身識)의 전오식(前五識)이다.
그리고 마노(意 mano)는 정신적 대상을 아는 감각기능(根) 혹은 감각장소(處)이다.
즉 눈(眼)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형상(色)이라는 대상에 대한 눈의 식(眼識)가 일어나고 귀(耳)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소리라는 대상에 대한 귀의 식이 일어나듯이 마노(mano)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정신적인 대상에 대한 마노의 식(意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눈, 귀, 코, 혀, 몸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마노(意)는 정신적인 감각장소 혹은 기능인 것이다.
그래서 의는 마음(心)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고 인식과정에서 대상과 전오식(前五識)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오문전향의 마음)을 하고 다시 전오식과 의식(意識)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받아들이는 마음)을 한다.
34. 「청정도론」(Vis.ⅩⅧ.2)에도‘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견청정(見淸淨)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온 대로 이 경지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vavaṭṭhāna-ñāṇa)라고 한다. 즉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정신과 물질로 분석해보고 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청정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견청정이라 하는 것이다.
35. 정사유(正思惟)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출리(nekkhamma)에 대한 사유:
출리(出離)로 옮긴 네까마(nekkhamma)는 nis(out)+√kram(to stride)에서 파생된 명사인데‘벗어남’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에서‘출가(出家), 출리(出離)’를 뜻한다. 영역은 renounciation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출가나 출리는 감각적 욕망이나 갈애등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여 전통적으로 이 단어는 kama(감각적 욕망)이 없음(nis+kama)으로 해석해왔다. 그래서 바른 사유(正思惟)란 첫째가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생각, 사유, 의지라는 것이다.
(2) 악의 없음(abyāpāda)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으로 옮긴 아브야빠다(abyāpāda)는 a(부정접두어)+byāpāda/byāpāda(악의)로 분해된다. vyāpāda/byāpāda는 vi(분리하여)+ā(향하여)+√pad(to go)의 명사형으로‘나쁘게 만들다, 해치다’의 의미에서 악의(ill-will)로 번역하였다. 악의는 마음부수가운데서 성냄(dosa)과 일치하는데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적의(paṭigha)로 나타난다.
(3) 해치지 않는 것(不害 avihiṃsā)에 대한 사유
해치지 않는 것(不害)으로 옮긴 아힘사(avihiṃsā)는 a(부정접두어)+vihiṃsā(해코지, 잔인함)으로 분해된다.
한편 hiṃsā는 vi(분리하여)+√hiṃs(to injure)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 남을 해치고 괴롭히려는 욕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사유는,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생각과 의지, 적의나 악의를 갖지 않으려는 생각과 의지,
비폭력, 혹은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과 의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사유는 사무량심(四無量心)과도 연결된다 할 수 있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4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brahmāvihara)이라고도 하며
➀ 자애(慈 mettā)
➁ 연민(悲 karuṇā),
➂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
④ 평온(捨 upekkhā)이 있다.
이 사무량심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이들을 단순히 행동원칙이나 숙고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치지 말고 체계적인 명상의 주제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명상을 4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는 수행(四梵住修行 brahmāvihara-bhavana)라 한다.
이 수행을 하는 실제적인 목적은 이들 4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에 힘입어 선(禪) 이라는 고도의 정신집중 단계를 성취하는 데 있다. 자애(慈)나 연민(悲), 더불어 기뻐함(喜)에 대해 명상을 할 경우에는 모두가 4가지 선정 중에서 3선정까지 성취할 수 있는데 반해, 평온(捨)을 주된 요소로 명상을 하면 4선정까지 도달할 수 있다.
수행자는 어떤 경우 어떤 상황 어떤 장소 어떤 때에도 항상 출리와 악의 없음과 비폭력이라는 정사유를 가져야한다는
부처님의 간절한 메시지가 팔정도의 두 번째 구성요소에는 들어있다.
36. 구족계(具足戒)는 우빠삼빠다(upasampada)의 역어로 사미와 사미니가 받는 10계와 비교하여 계품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구족계라고 한다. 비구의 경우 227계, 비구니는 348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