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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입능가경
2. 집일체법품 ②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저희를 위하여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ㆍ오법자성상(五法自性相)의
온갖 미묘한 법문을 설해주소서. 이것은 일체 모든 불보살께서 자기 마음의 경계에 들어가서
행하던 바의 상(相)을 떠났으므로 진실한 뜻이라고 하는 모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마음입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여래께서 이 산중의 모든 보살 대중을 위하여 과거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장식(藏識)의 바다 물결과 법신의 경계를 연설하여 주소서.”
그때 세존께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인연이 있어서 안식(眼識)이 변화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말하자면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집착하여 취하기 때문이요,
무시이래로 색(色)의 허망한 습기에 집착함이요,
식(識)의 본성이 이와 같은 까닭이요,
여러 가지 모든 색상(色相:물질)을 즐겨 보는 까닭이다.
대혜여, 네 가지 인연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에 폭포수[瀑流水] 같은
전식(轉識:8식)의 물결이 생긴다.
안식과 같이 다른 식도 또한 이와 같다.
일체 모든 근과 미진(微塵)ㆍ털구멍ㆍ눈 등에서 전식이 갑자기 생긴다.
비유하면 거울에 온갖 색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고,
혹은 점차 생기기도 하므로 마치 맹렬한 바람이
큰 바다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같이 마음의 바다도 또한그렇다.
경계의 바람이 불어 모든 식의 물결이 일어나 상속하여 끊어지지 아니한다.
대혜여, 인(因)과 지은 모양[所作相]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업과 생긴 상[生相]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색(色) 등 자성을 깨닫지 못하고 5식(識: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의 몸이 굴러간다.
대혜여, 5식과 함께 하거나 혹은 차별과 경계의 모양을 구별하여 인식하므로 의식이 생긴다.
그러나 그 모든 식에 대해서, ‘무리들이 동시에 바뀌어가면서 인이 된다’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
식은 자기 마음에 나타나는 경계에서 분별과 집착이 때를 같이하여 일어나므로 차별상이 없이
각각 자기 경계를 알 뿐이다.
대혜여, 모든 수행자는 삼매에 들어가면 습기의 힘이 미세하게 일어나는 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고,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식이 멸하여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 실은 식이 멸하여 삼매에 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습기의 종자가
멸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경계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인데 식이 멸하였다고 생각한다.
대혜여, 이와 같이 장식의 행상(行相)은 미세하다. 오직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 2승(乘)이나 외도의 정혜(定慧)의 힘으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수행하여 여실히 행하는 자는 지혜의 힘으로 모든
지(地)의 상(相)을 안다. 구의(句義)를 잘 통달하여 끝없는 부처님의 선근을 널리 모으고 허망하게 분별하지 않으며 자기 마음으로 본다는 것을 잘 안다.
대혜여, 모든 수행인은 숲속 편안한 곳에서 상ㆍ중ㆍ하를 닦아 능히 자기 마음의 분별과 흐름을 보고
삼매의 자재한 힘에 통달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관정(灌頂)해 주신다. 그리고 모든 보살에게 둘러싸여
마음ㆍ뜻ㆍ의식이 행하는 경계를 알아 애업(愛業)ㆍ무명ㆍ생사의 대해를 초월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반드시 모든 불보살과 여실히 수행하는 대선지식을 친근하여야 한다.”
그때 세존께서 다시 게송으로 설하셨다.
비유하면 큰 바다 물결은 맹렬한 바람으로 일어나
큰 파도가 깊은 바다를 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같이
장식(藏識)의 바다 항상 멈추나 경계의 바람이 움직여
갖가지 모든 식의 물결 뛰어올라 바뀌면서 생겨난다.
푸르고 붉은 모든 색소금과 조개와 젖과 석밀(石蜜)
꽃과 열매와 해와 달의 빛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지도 않느니라.
뜻 등 일곱 가지 식(識)도 이와 같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바다와 파도가 같듯이 마음도 함께 화합하여 생기느니라.
비유하면 바닷물이 움직여 갖가지 파도가 변하듯이
장식(藏識)도 또한 이와 같이 갖가지 모든 식이 생기느니라.
마음과 뜻과 의식 여러 가지 모양이라 말하나
8식은 다른 모양이 없고 능상(能相)과 소상(所相)도 없느니라.
비유하면 바다와 파도같이 이것은 곧 차별이 없다.
모든 식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다른 점 또한 찾을 수 없느니라.
마음이 업(業)을 쌓아 모으고
뜻도 업을 쌓아 모아서 인식하여 분별하므로 식이라 하고
나타난 경계에 대하여 다섯을 말하느니라.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푸르고 붉은 모든 색상(色像) 중생의 식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파도와 같은 갖가지 법은 어떠한지 부처님 설하여 주소서.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푸르고 붉은 모든 색상 파도 속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
마음이 온갖 모양 일으킨다 말하여 모든 범부를 깨우치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본래 일어남이 없는 것이고
자기 마음에서 취하고 버린 것이며
취하는 자와 취하는 대상도 저 파도와 같으니라.
몸과 재물[資財] 머무는 곳도 생의 식이 나타낸 것이니
이런 까닭으로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보나 파도와 더불어 차별 없느니라.
그때 대혜가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큰 바다 파랑의 성품치고 출렁임 분별되지만
식도 이와 같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깨닫지 못합니까?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바다와 같고 전식(轉識:7식)은 파도와 같은 것
범부는 지혜가 없으므로 비유로 자세히 연설하셨다.
그때 대혜가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비유하면 햇빛이 솟아나와 위아래 다 비추듯이
부처님도 또한 그렇습니다. 마땅히 어리석은 이 위하여 진실을 설하시어
이미 능히 법 열어 보이셨으니 어찌 진실을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만약 진실을 말한다면 그들 마음은 진실함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바다의 파도와 거울 속 영상과 꿈이
일시에 나타나는 것같이 마음의 경계도 그러하여
경계가 갖추어지지 아니하므로 차례로 바뀌어 생기느니라.
식은 능히 깨달아 알고뜻과 의식 그러하며
5식(識)은 나타난 경계를 알지만일정한 차례가 없느니라.
비유하면 재주 있는 화가와화가의 제자가
그림 그리는 베에 온갖 상을 그리듯 나의 설법도 또한 이와 같다.
채색 가운데 문양도 없고붓의 자취도 없고 또한 바탕[素]도 없으니
중생 기쁘게 하려고아름답고 빛난 온갖 모양 그리니
말은 변하여 달라지고진실은 문자를 떠난 것
내가 머무는 진실한 법모든 수행자 위해 설하느니라.
진실함을 스스로 깨닫는 곳주체와 객체의 분별 떠나나니
불자 위해 말하고어리석은 범부에게는 분별하여 연설하느니라.
여러 가지 모두 환과 같아 보이는 것은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갖가지 설법 일에 따라 달리 설해지며
설할 것이 마땅치 않으면 그에게는 설하지 아니하나니
비유하면 많은 병든 사람에게 좋은 의원이 병 따라 약 주듯이
여래는 중생 위해마음 따라 근기[量]에 맞게 설한다.
세간에서 의지하고 믿어야 할 것은깨달은 지혜로 행하는 곳이고
외도의 경계는 아니며 성문도 또한 그러하니라.
“또한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만약 취하고자 하는 분별 경계가 모두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것임을 깨닫고자 한다면
반드시 소란함과 혼침과 수면을 떠나야 한다.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부지런히 닦고 익혀 일찍이 들었던
외도의 삿된 이론과 2승의 법을 멀리 떠나 자기 마음의 분별의 상(相)을 통달하여야 한다.
또한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지혜의 마음이 머무는 상(相)에 머물고
나아가 최상의 바른 지혜[上聖智]의 3상(相)에서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한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말하자면 영상이 없는 상[無影像相],
일체 모든 부처님이 원하여 지니는 상[一切諸佛願持相],
스스로 바른 지혜를 깨달아 나아가는 상[自證所趣相]이다.
모든 수행자는 이런 상(相)을 얻고 나서 곧 절름발이와 같은 나귀의 마음의 상[心相]을 버리고
보살의 제8지에 들어가 이 삼상의 수행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대혜여, 영상(影像)의 모양(相)이 없다는 것은 일체 2승(乘)의 외도상의 관습으로 말미암아
생기(生起)하는 것을 말한다. 일체 제불이 원력으로 지니는 모양이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스스로 본래 원력에 가지(加持)되어 생기한 것을 말한다.
스스로 바른 지혜[聖智]를 깨달아 나아가는 모양이란 일체법의 모양을 취하지 않고
환과 같은 모든 삼매를 성취하여 몸이 부처님 경지의 지혜에 나아가기 때문에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대혜여, 이것을 최상의 바른 지혜의 세 가지 모양이라고 한다. 만약 이런 상(相)을 얻으면 곧 스스로가
바른 지혜를 깨달아 행하는 곳에 이르므로 너와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한다.”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모든 보살의 생각하는 마음을 알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부처님께 아뢰었다.
“오직 원하옵나니 백팔 구의 차별이 의지하는 것과 바른 지혜의 자성법문을 설하여 주소서. 일체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 모든 보살마하살이 자상(自相)ㆍ공상(共相)에 떨어진 것을 위하여 망령되게 헤아리는 성품의 차별화된 의미를 설해 주십시오.
이 뜻을 알고 나서 곧 능히 2무아관(無我觀:人ㆍ法無我)을 청정히 닦고
모든 지(地)를 밝게 비추어 일체 2승ㆍ외도의 삼매락(三昧樂)을 초월하게 하여 주십시오.
모든 여래가 행한 불가사의한 경계를 보고 필경에 오법자성(五法自性)을 버리고
일체 부처님의 법신의 지혜로써 스스로 장엄하게 하시며, 환(幻)과 같은 경계에 들어
일체 세계의 도솔타궁(兜率陀宮) 색구경천(色究竟天)에 머물러 여래의 몸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한 부류의 외도는 모든 법이 인연을 따라 가는 것으로 보고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켜
토끼뿔이 없으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토끼뿔이 없는 것같이 모든 법도 그와 같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외도는 대종(大種:四大)ㆍ구나(求那:原質)ㆍ티끌[塵] 등 모든 물질의 모양과 양(量)과 나누어진
위치[分位]가 각각 차별이 있음을 보고 토끼뿔이 없다는 것에 집착하여 소는 뿔이 있다는 생각을 낸다.
대혜여, 그들은 두 가지 견해에 떨어져 오직 마음임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자기 마음에 분별심을 증장한다.
대혜여, 몸과 살림[資生:의ㆍ식ㆍ주]과 기세간(器世間) 등 일체가 모두 분별에서 나타난 것이다.
대혜여, 반드시 알라. 토끼뿔은 있고 없음을 떠났고 모든 법도 다 그러하니 분별을 하지 말라. 어떻게 토끼뿔이 있고 없음을 떠났는가? 서로가 상대하여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 소뿔을 분석하고 나아가 먼지에 이르기까지 그 본체와 모양을 구하지만 끝내 얻을 수 없다. 바른 지혜로 행하면 그런 견해는 멀리 떠난다. 이러한 까닭에 이런 것을 마땅히 분별하지 말 것이다.”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것이 허망된 견해로써 상(相)을 일으켜 비교하여 헤아리고,
상대하며 관찰하여 허망되게 없다고 헤아림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분별로써 상대(相待)를 일으켜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별을 생인(生因)으로 하는 까닭에 뿔로써 분별하여 의지하는 바가 되고 의지하는 바를 인으로 한다. 다름과 다르지 아니함을 떠나서 상대로 말미암아 토끼뿔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대혜여, 만약 이 분별이 토끼뿔과 다르다면 곧 뿔이 인이 아니요,
만약 다르지 아니하다면 그 뿔로 인하여 일어난다.
대혜여, 소뿔을 분석하고 나아가 극미(極微:원자)에 이르러 찾아도 얻지 못한다.
뿔이 있다든가 뿔이 없다고 하는 분별은 결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둘이 함께 있지 아니하거늘 누가 누구를 상대하랴.
만약 상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소뿔이 있다고 하는 데
상대하기 때문에 토끼뿔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마땅히 분별이 아니다.
정인(正因)이 아닌 까닭에 유무(有無)를 논하는 자는
유(有)에 집착하고 무(無)에도 집착하는 것이므로 둘 다 성립되지 않는다.
대혜여, 또 어떤 외도는 물질의 형상과 허공이 가지런히 나누어짐[分齊]을 보고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 물질은 허공과 다르다고 말하며 분별을 일으킨다.
대혜여, 허공이 곧 물질[色]이라 물질의 종류[色種]에 따라 들어간다.
대혜여, 물질이 이 허공이니 능지(能持)와 소지(所持)를 건립하는 성품[建性] 때문이니라.
물질과 공의 한계[分齊]가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대혜여, 대종(大種)이 생길 때 스스로 모양이 각각 달라 허공에 머물지 않지만 허공에 없는 것도 아니니라.
대혜여, 토끼뿔도 또한 그와 같아 소뿔을 상대적으로 관찰하여 그 뿔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혜여, 소뿔을 분석하여 나아가 먼지에까지 이르고 또 그 먼지를 분석해도 모양은 나타나지 않는데
무엇을 상대하여 없다고 말하는가? 만약 다른 물건을 상대하여도 그것도 또한 이와 같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토끼뿔ㆍ소뿔ㆍ허공ㆍ물질의 분별을 멀리 떠나야 한다.
그대와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항상 자기 마음이 본 분별의 모양을 관찰하고
일체 국토에서 모든 불자를 위하여 자기 마음이 수행하는 법을 관찰하여 말해 주어야 한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설하셨다.
마음이 본 것(사물)은 없고오직 마음에 의지하여 일어날 뿐
몸과 재물과 사는 곳은 그림자라중생의 장식(藏識)에서 나타난 것이니라.
마음과 뜻과 식과자성과 다섯 가지 법[五種法]과
2무아(無我)의 청정함을모든 도사(導師)께서 연설하시느니라.
길고 짧음을 같이 상대적으로 관찰하고번갈아 가면서 서로 생기나니
유(有)로 인하여 무(無)를 이루고무로 인하여 유를 이루느니라.
미진까지 분석하여도물질의 분별 일어나지 않고
오직 마음으로 일으킨 것견해 잘못된 자는 믿지 않느니라.
외도가 행할 곳 아니고성문도 또한 그러하니
구세주[救世]의 설하신 바는스스로 깨달으신 경계이니라.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에 현재의 흐름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 청하여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든 중생이 자기 마음의 현재 흐름을 청정하게 합니까?
점차로 청정하게 되는 것입니까?
단번[頓]에 청정하게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점차로 청정하여지고 단번에는 되지 않는다.
나무 열매가 점점 익고 단번에 익지 않듯이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모든 중생의 마음의
현재 흐름을 청정하게 하심도 또한 이와 같다. 점점 청정하게 되는 것이지
단번에 청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공[陶師]이 그릇을 만들 때 점점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번에 되지 않듯이,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모든 중생의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하심도
또한 이와 같아 점차로 되는 것이지 단번에 되는 것이아니다.
비유하면 대지에 모든 초목이 날 때 점점 생겨나지 단번에 나지 않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모든 중생의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하심도
또한 이와 같아 점차로 되는 것이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비유하면 사람이 음악과 글과 그림 등 갖가지 기술을 배울 때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듯이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모든 중생의 현재의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하심도 또한 이와 같아 점차로 되는 것이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밝은 거울이 단번에 온갖 형상을 비춰도 분별함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모든 중생의 마음의 현재 흐름을 청정하게 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 단번에 일체 모양 없는[無相] 경계를 나타내어 분별함이 없느니라.
해와 달이 일시에 일체 색상(色像)을 두루 비추듯이
모든 부처님ㆍ여래가 모든 중생들 마음의 잘못된 습기[過習]를 청정하게 함도
또한 이와 같아 단번에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ㆍ여래 지혜의 경계를 나타내 보인다.
비유하면 장식(藏識)은 단번에 몸과 살림과 국토와 일체 경계를 나타내듯이
보신불[報佛]도 또한 그러하여 색구경천에서 단번에 일체 중생을 성숙시켜 모든 행을 닦게 한다.
비유하면 법신불이 단번에 보신불과 화신불을 나타내어 광명이 빛나게 비추는 것과 같이
스스로 깨달은 성스러운 경계도 또한 이와 같아 단번에 법상(法相)을 나타내어
밝게 비추어 일체 유ㆍ무의 잘못된 견해를 떠나게 한다.
또한 대혜여, 법성에서 흘러나온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
자기 마음에 나타난 습기로 인연한 모양이요, 망령되게 성품으로 헤아려 집착한 인연의 모양이요,
상에 얽매인 여러 가지 요술 같은 일[幻事]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다고 설하신다.
모든 중생이 갖가지로 집착하여 이것을 진실이라 하나 모두 얻을 수 없다.
또한 대혜여, 망계자성(妄計自性:변계소집성)은
연기자성(緣起自性:의타기성)을 집착하여 일어난다.
대혜여, 비유하면 요술사가 요술의 힘으로 풀과 나무ㆍ기와ㆍ돌에 의하여 중생의 몇 가지 모습을
요술로 만들어, 보는 이가 여러 가지로 분별하게 하나 모두 진실한 것이 없다.
대혜여, 집착한 경계의 습기의 힘으로 연기의 성품 가운데서 망령되게 헤아린 성품의 갖가지 모양이 나타난다.
이것은 망령되게 헤아린 성품에서 생긴 것이다. 대혜여, 이것을 법성에서 흘러나오는
부처님이 설한 법상(法相)이라 한다.
대혜여, 법성의 부처님이란 스스로 깨달은 지혜로 행할 바를 세워 일으켜 마음의 자성상(自性相)을 떠난다.
대혜여, 화신불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ㆍ온(蘊)ㆍ처(處)ㆍ계(界)의 법과
모든 해탈과 모든 식(識)의 행상(行相)을 설하시고 차별을 세워서 외도의 견해와 무색계[無色]의 행을 초월한다.
또한 대혜여, 법성불(法性佛)은 반연(攀緣)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 인연하는 것[所緣]과 만든 모양[相]과 근본[根]과 양(量) 등의 모양을 모두 다 멀리 떠나서
범부와 2승(乘)과 외도가 아상(我相)을 집착하여 취하는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대혜여,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의 수승한 경계의 모양에서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서 자기 마음이 나타내어
분별하여 보는 모양을 반드시 속히 버리고 떠나야 한다.
또한 대혜여, 성문승에는 두 가지 차별상이 있는데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의 빼어난 상[自證聖智殊勝相]과
분별하고 집착하는 자성상[分別執著自性相]이다.
무엇을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의 빼어난 모양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고(苦)ㆍ
공(空)ㆍ
무상(無常)ㆍ
무아(無我)ㆍ
모든 제(諦)의 경계를 밝게 보고 욕심을 떠나 적멸하므로,
온ㆍ계ㆍ처와 자상(自相)이나 공상(共相)이나
밖의 파괴되지 않는 모양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서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무는 것이다.
한 경계에 머물고 나서는
선(禪)ㆍ
해탈ㆍ
삼매ㆍ
도과(道果)를 얻고
벗어남을 얻어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의 경계의 즐거움에 머문다.
그리고 아직 습기와 불가사의한 변역의 생사[變易死:迷悟를 벗어난 상태]를
떠나지 못한 것을 성문승의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의 경계상이라 이름한다.
보살마하살은 이 바른 지혜의 경계를 얻었다 할지라도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본원(本願)을 갖는 까닭에
적멸문(寂滅門)과 삼매락(三昧樂)을 깨닫지 않는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의 즐거움에서 반드시 닦고 배우지 않는다.
대혜여, 무엇을 분별하여 집착하는 자성상이라 하는가?
이른바
단단함과
습기와
따뜻함과
움직임 그리고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것과 같은 법은 작자(作者)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리(敎理)에 의하여 자상과 공상을 보고 분별하며 집착하므로
이것을 성문승의 분별집착상(分別執着相)이라고 이름한다.
보살마하살은 이 법을 반드시 알고 인무아(人無我)의 견해를 떠나
법무아(法無我)의 상(相)에 들어가 점점 모든 지(地)에 머물러야 한다.”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항상하고 부사의한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의
제일의경계[第一義境]는 모든 외도가 말하는 항상하고 불가사의한 작자(作者:조물주)와 같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모든 외도의 작자는 항상하고 부사의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외도의 항상하고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자상(自相)의 인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미 자상의 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항상하고 불가사의한 것을 나타내 보이겠느냐.
대혜여, 외도들이 말하는 항상하고 부사의함이 만약 자상으로 인하여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항상함이 있겠지만 다만 작자(作者)를 원인의 상[因相]으로 하는 까닭에
항상하고 부사의함이 성립하지 않는다.
대혜여, 내가 제일의(第一義)가 항상하고 부사의하다는 것은
제일의의 인상(因相)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유무(有無)를 멀리 떠나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하는 상이 있다.
제일의의 지혜는 그 인(因)이 되기 때문에 인이 있는 것이요,
유무를 떠났기 때문에 작자가 아니다. 허공ㆍ열반ㆍ적멸법과 같기 때문에 항상하고 부사의하다.
이런 까닭으로 내가 항상하고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은 외도의 논쟁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여, 여기서 항상하고 부사의하다고 설하는 것은 모든 여래가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하는 진리이므로 보살은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한다.
또한 대혜여, 외도가 항상하고 부사의하다 함은 무상(無常)한 다른 모양을 인(因)으로 하여
항상하다는 것이고 자상(自相)을 인으로 하지 않으므로 항상하다는 것이다.
대혜여, 외도의 항상하고 부사의하다 함은 지은 바의 법[所作法]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데도 무상한 것과 비교하여서 항상하다고 아는 것이다.
나도 지은 바의 법이 있다가 없어지면 무상하다고 보나 이로 인하여 항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혜여, 외도는 이와 같은 인상(因相)을 항상 있고 부사의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상은 있는 것이 아니며 토끼 뿔과 같다.
항상하고 부사의하다는 것은 오직 분별일 뿐이며 단지 말만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인(因)이 토끼뿔과 같아서 스스로의 인상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내가 항상 있고 부사의하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인상으로 삼고 밖의 법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무상을 인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는 이와 반대로 항상하고 부사의한 자인(自因)의 모양을 잘 알지 못하고,
항상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하는 모양의 밖에 있으므로 마땅히 말할 바가 되지 못한다.
대혜여, 모든 성문은 생사와 망상의 괴로움을 두려워하여
열반을 구하나 생사와 열반의 차별상은 모두 망령된 분별로 있는 것이다.
실제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의 모든
근(根)과 경(境)이 멸함을 망령되게 미루어 짐작하여 열반이라 한다.
스스로 지혜의 경계를 깨달아 의지하는 바의 장식(藏識)이 바뀌어
대열반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3승이 있다고 말하고
오직 마음뿐 경계는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혜여, 그 같은 사람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자기 마음의 경계는 알지 못하고 마음 밖의 경계를 가지고 항상 생사에 돌고 돌아 끊어지지 않는다.
또한 대혜여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여래께서 일체법은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자기 마음에서 보이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며, 유생(有生)과 무생(無生)을 떠났기 때문이다. 토끼ㆍ말 등의
뿔과 같이 어리석은 범부는 망령되게 집착한다.
오직 자기가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할 곳은 모든 어리석은 범부의 두 가지 분별하는 경계는 아니다.
대혜여, 몸과 살림[資生], 기세간(器世間) 등
일체는 다 이 장식(藏識)의 그림자로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두 가지 모양이 나타난 것이지만,
저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생기고 머물고 멸함의 두 견해 속에 떨어져 그 가운데서 허망되게
유무의 분별을 일으킨다.
대혜여, 그대는 이러한 뜻을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또한 대혜여, 다섯 가지 종성(種性)이 있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말하자면
성문승의 종성ㆍ
연각승의 종성ㆍ
여래승의 종성ㆍ
부정(不定)종성ㆍ
무종성(無種性)이다.
대혜여, 어떻게 성문승의 종성을 아는가?
말하자면 만약 온ㆍ계ㆍ처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말하는 것을 듣고 알거나 증득하여 온 몸의 털을 세우고
마음에 닦고 익히기를 좋아하지만 연기의 모양[緣起相]을 관찰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반드시 알라.
이는 성문승의 종성이다. 그는 자기 승에서 깨달은 바를 보고 나서 5지(地)와 6지(地)에서 번뇌의 얽매임을 끊으나 번뇌의 습기를 끊지는 못한다. 나아가 부사의한 사(死)에 머물러 바로 사자후로 말하되, 나의 생(生)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梵行)을 이미 이루었으며 지을 것[所作:三業의 所作]을 이미 갖추어서 뒤에 있을 것(몸)을 받지 아니하며 인무아(人無我)를 닦고 익히고 나아가 열반(涅槃)을 얻었다는 생각을 낸다.
대혜여, 또한 이런 중생은 열반의 증득을 구하여 능히 나와 남ㆍ중생ㆍ양자(養者)ㆍ취자(取者)를 깨달아 알고
이것이 열반이라고 말하고, 다시 말하기를 일체법은 작자(作者)로 인하여 있다고 보아 이것이 열반이라고 한다.
대혜여, 그들은 해탈이 없으니 능히 법무아(法無我)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성문승과 외도의
종성이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낸다.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이런 나쁜 견해를 버려야 한다.
대혜여, 어떻게 연각승의 종성을 아는가?
말하자면 만약 연각승의 법을 듣고 온몸의 털을 세우고 눈물 흘리며 슬피 울고 심란하고 시끄러운 인연을 떠나
물들어 집착함이 없고, 때로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 혹은 모으고 혹은 흩어지는 신통변화에 대하여 말함을 듣고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어서 어기거나 거스름이 없으면 반드시 알라. 이는 연각승의 종성이니 그를 위하여
연각승의 법을 설해야 한다.
대혜여, 여래승의 종성이 깨닫는 법은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자성과 자성이 없는 법[自性無自性法],
몸 안으로 스스로 깨닫는 바른 지혜의 법[內身自證聖智法],
밖의 모든 부처님 세계의 광대한 법[外諸佛刹廣大法]이다.
대혜여, 만약 이 하나하나의 법과 자기 마음에 나타난 몸과 재물의 건립이
아뢰야식의 부사의한 경계가 일으킨 것이라고 말함을 듣고 놀라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도 않으면 반드시 알라. 이것이 여래승의 종성이다.
대혜여, 부정(不定)의 종성이란 말하자면
그 세 가지 법을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따라서 믿고 알아 순종하여 닦고 배울 것이다.
대혜여, 처음 다스리는 지위의 사람[初治地人]을 위하여 종성을 설해 그들이
그림자 없는 지위에 들어가게 하려고 이것을 일으켜 세워 만든 것이다.
대혜여, 그 삼매의 즐거움에 머무는 성문이 만약 능히 스스로 의지하는 식(識)을 깨달아
알아서 법무아(法無我)를 보고 번뇌의 습기를 맑게 하면 필경에는 마땅히 여래의 몸을 얻을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설하셨다.
수다원[預流]ㆍ
사다함[一來]
아나함[不還果]ㆍ
아라한(阿羅漢)
이들 모든 성인그 마음 모두 미혹하여
내가 세운 3승(乘)과
1승(乘)과 승 아님은
어리석은 범부와 지혜 적은 이를 위하여
고요함을 즐기는 모든 성인이 말씀하신 것이니라.
제일의(第一義)의 법문
2취(取:能取ㆍ所取)를 멀리 여의고경계 없는 데 머물거늘
어찌 3승을 세움이 있겠는가.
모든 선정과 4무량(無量)과 무색(無色)의 삼마제(三摩提)
나아가 멸수상정(滅受想定)은 오직 마음뿐 그 외는 얻을 수 없느니라.
“또한 대혜여, 이 가운데 일천제(一闡提)는 무슨 까닭에 해탈 가운데서 즐거워함을 내지 않는가.
대혜여, 일체 선근을 버린 까닭이요 시작 없는 때부터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체 선근을 버렸다 하는가?
보살장(菩薩藏)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계경(契經)ㆍ
조복(調伏)ㆍ
해탈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말을 할 때 선근이 모두 끊어져서 열반에 들어가지 못한다.
무엇을 무시이래의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모든 보살은 본래 서원의 방편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열반에 들어가기를 서원한다.
만약 한 중생이라도 열반에 들지 아니하면 나는 끝내 열반에 들지 아니하리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들도 또한 일천제의 무리에 머문다. 이것이 열반 종성의 모양[涅槃種性相]이 없는 것이다.”
대혜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가운데는 어떤 이가 필경에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저 보살 일천제는 일체법이 본래 열반임을 알아 필경에 열반에 들어가지 아니하나
선근을 버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근을 버린 일천제도 부처님 위신력으로 어느 때에 선근이 생긴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버린 때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보살 일천제는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
또한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3자성상(自性相)을 잘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3자성인가?
이른바 망령되게 헤아리는 자성[妄計自性:변계소집성],
연기자성(緣起自性:의타기성),
원성자성(圓成自性:원성실성)이다.
대혜여, 망계자성은 상(相)으로부터 생긴다. 무엇을 상으로부터 생긴다 하는가?
말하면 연기의 사상(事相)의 종류가 나타남에 의하여 헤아려 집착을 내기 때문이다.
대혜여, 저 사상에 헤아려 집착함에 두 가지 망령되게 헤아리는 성품이 생기니
이것은 모든 여래께서 연설하신 바이다.
이른바 이름에 계착하는 모양[名相計着相],
사물의 모양에 계착하는 상[事相計着相]이다.
대혜여, 사계착상(事計着相)이란 내외의 법을 계착함을 말하고,
상(相)계착상이란 내외의 법 가운데에서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계착하나니
이것을 두 가지 망계자성상(妄計自性相)이라고 한다.
대혜여, 의지하는 바와 반연하는 바에서 일어나나니 이것이 연기성(緣起性)이다.
어떤 것이 원성자성인가?
명상(名相)과 사상(事相)이 일체 분별을 떠나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하는 진여이다.
대혜여, 이것이 이 원성자성의 여래장심(如來藏心)이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명(名)ㆍ상(相)ㆍ분별은두 자성상(自性相)이고
정지(正智)와 진여(眞如)는 원성자성상이니라.
“대혜여, 이것을 5법(法)과 자성상(自性相)을 관찰하는 법문이라고 이름하며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하는 경계이다. 너와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한다.
또한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두 가지 무아(無我)의 상(相)을 잘 관찰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인무아상(人無我相)과 법무아상(法無我相)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인무아상이냐?
온(蘊)ㆍ계(界)ㆍ처(處)는 나[我]와 내 것[我所]을 떠나고 무지(無知)의 애업(愛業:탐애의 업인)으로
생기하여 안식[眼] 등의 식이 생겨서 색(色) 등을 취하여 집착을 일으킨다.
또 자기 마음으로 모은 몸,
기세간(器世間)은 모두 장심(藏心:藏識)이 나타난 것으로 찰나에 상속하고 변하여 허물어지며 멈추지 아니함이
흐르는 강과 같고, 존자 같고, 등의 불꽃과 같고, 빠른 바람 같고, 뜬구름 같고, 성급하게 움직여 안정하지 못함이
원숭이 같고, 깨끗하지 못한 곳을 좋아함이 나는 파리 같으며, 만족을 모름이 맹렬한 불길 같다. 시작 없는 예부터
허망하고 거짓된 습기가 인이 되어 모든[法有] 중생[趣] 가운데 유전하여 쉬지 않고 물 뜨는 도르래 같고, 갖가지
색신(色身)의 위의(威儀)가 나아가고 멈춤이 비유하면 죽은 시체가 주력(呪力)으로 걸어 다니는 것 같고,
또 나무로 만든 사람이 기구로 인연하여 움직이는 것 같다.
만약 능히 여기서 그 모양을 잘 알면 이것을 인무아의 지혜라 한다.
대혜여, 무엇을 법무아의 지혜라 하는가?
온ㆍ계ㆍ처가 망계성(妄計性)임을 알며, 온ㆍ계ㆍ처와 같이 나와 내 것을 떠나 오직 함께 쌓고 모은 애업(愛業)에 묶이어 서로 연기하니 능히 만든 자[作者]가 없다. 온(蘊) 등도 또한 그러하여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떠나
허망하게 분별하여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남에 어리석은 범부는 분별하나 모든 성자는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이 일체 모든 법을 관찰하여 마음ㆍ뜻ㆍ의식ㆍ오법자성(五法自性)을 떠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법무아지혜라고 이름한다. 이 지혜를 얻고 나서 경계가 없음을 알고 모든 지(地)의 모양을
깨달아 곧 초지(初地)에 들어가 마음에 환희가 생겨 차례로 점점 나아간다. 이에 선혜지(善慧地:九地)와
법운지(法雲地:十地)에 이르러 모든 중생의 짓는 것을 모두 이미 갖추느니라. 이 지에 머물고 나서 큰 보배 연꽃
왕이 온갖 보배로 장엄한 것이 있는데, 그 꽃 위의 보배 궁전에 연화(蓮花)보살이 가서 닦아 환과 같은 법문[幻性法門]을 이룬다. 같이 간 불자가 앞뒤로 에워싸고 일체 부처님 세계에 계시는 여래께서 모두 그 손을 펴서 전륜왕자의 이마에 물을 뿌리는 법[灌頂法]과 같이 그 머리에 관정하면, 불자의 지위[佛子地]를 초월하여 스스로 증득하는
법을 얻어 여래의 자재한 법신을 이룬다.
대혜여, 이것을 법무아상을 본다고 한다. 그대와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한다.”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건립비방상(建立誹謗相)을 설하시어 저와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런 나쁜 견해를 떠나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게 하시고 보리를 얻고 나서 항상 비방하여 단견을 세우는
것을깨뜨리어 정법을 헐뜯고 비방함이 생기지 않게 하소서.”
부처님께서 그 청을 받고 곧 게송으로 설하셨다.
몸과 살림[資財] 머무는 곳모두 오직 마음의 그림자[影像]인 것을
어리석은 이 깨닫지 못하고비방함을 세워 일으키며
일어난 것도 다만 이 마음뿐마음 떠나서 얻을 수 없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다시 설하시려고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없는 것을 세움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모양이 없는 데 모양을 세움이요,
견해가 없는데 견해를 세움이요,
인이 없는데 원인[因]을 세움이요,
성품이 없는데 성품을 세우니 이것이 넷이다.
대혜여, 비방이란 모든 나쁜 견해에서 세운 법은 찾아도 얻을 수 없으나
잘 관찰하지 못하고 마침내 비방함이 생긴다. 이것이 세운 비방의 모양이다.
대혜여, 무엇을 모양이 없는데 모양을 세운다 하는가?
온ㆍ계ㆍ처에서 자상과 공상은 본래 있는 것이 없는데,
계착함을 내어 이것은 이와 같고 이것은 다르지 않다 하니 이런 분별은
무시이래로 여러 가지 악습이 낳은 것이다. 이것을 모양이 없는데 모양을 세운다고 한다.
무엇을 견해가 없이 견해를 세운다 하는가?
온ㆍ계ㆍ처에서 나와 남, 중생 등이 견해를 세우니 이것을 견해가 없이 견해를 세운다고 한다.
무엇을 원인 없이 원인을 세운다 하는가?
처음의 식[初識] 전에는 원인이없어 식이 생기지 않았고 처음 식은 본래 없는데 뒤에
눈, 빛, 밝음, 생각 등이 원인이 되어 환(幻)과 같이 생기며, 생기고 나서 있고,
있는 것이 다시 없어진다. 이것을 원인이 없이 원인을 세운다고 한다.
무엇을 성품이 없이 성품을 세운다고 하는가?
허공과 열반은 무작(無作)의 성품인데 집착을 일으킴이다.
대혜여, 이것은 성품과 성품 아님을 떠났고, 일체 모든 법도 유무(有無)를 떠나
마치 털 수레바퀴, 토끼, 말들의 뿔과 같다. 이것을 성품이 없는데 성품을 세웠다고 한다.
대혜여, 비방을 세움은 모두 어리석은 범부는 오직 마음뿐임을 깨닫지 못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나 모든 성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반드시 부지런히 관찰하여
이런 견해를 멀리 떠나야 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음과 뜻ㆍ의식ㆍ오법자성(五法自性)ㆍ2무아(無我)의 상(相)을 잘 알므로 중생을 위하여 여러 가지 몸을 만들어 연기에 의하여 망령되게 헤아리는 성품[妄計性]을 일으키는 것같이, 또한 마니(보배)가
마음 따라 빛을 나타냄과 같이 널리 부처님의 모임에 들어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모든 법은
환(幻)과 같고,
꿈 같고,
그림자 같고,
거울 속의 형상 같고,
물속의 달과 같으므로,
생멸(生滅)과
단(斷)ㆍ상(常)을 멀리 떠나고
성문ㆍ벽지불도에 머물지 않으며,
듣고 나서는 무량백천억 나유타삼매를 성취한다.
이 삼매를 얻고 나면 일체 모든 불국토에 두루 돌아다니며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모든 천상에 태어나 삼보를 드날리고, 부처님 몸을 나타내 보여 모든 성문과 보살 대중을 위하여
바깥 경계는 모두 오직 마음뿐이라고 설하여 모두 유무(有無) 등에 집착함을 멀리 떠나게 할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불자는 잘 관찰해 보니세간은 오직 마음 뿐이라
갖가지 몸 나타내 보이며하는 일[所作] 장애 없고
신통력 자재하며 모두 다 성취하느니라.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청하여 말하였다.
“원컨대 저희를 위하여 일체법이 공하고 생함이 없고 둘이 없고 자성이 없는 모양을 설하여 주소서.
저와 모든 보살이 이 모양을 깨달아 유무의 분별을 떠나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한다.
대혜여, 공이란 망령되게 헤아리는 성품의 구절을 뜻한다.
대혜여, 망령되게 헤아린 자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공ㆍ무상ㆍ무이(無二)ㆍ무자성(無自性)을 설한다.
대혜여, 간략히 공(空)의 성품을 말하자면 일곱 가지가 있다.
모양이 공함[相空]ㆍ
자기 성품이 공함[自性空]ㆍ
행할 것이 없는 공[無行空]ㆍ
행하는 공[行空]ㆍ
일체법을 말할 수 없는 공[一切法不可說空]ㆍ
제일의의 바른 지혜의 큰 공[第一義聖智大空]ㆍ
저기에는 저것이 공함[彼彼空]이다.
어떤 것이 모양이 공함[相空]인가?
일체법의 자기 모양[自相]과 공통의 모양[共相]이 공하나 번갈아 옮기고 쌓고 모아 서로 상대한 까닭이다.
분석하고 추구하여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나와 남과 함께 함이 모두 생기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자상과 공상은 생김이 없고 또 머묾도 없다. 이런 까닭으로 일체법의 자상이 공하다고 한다.
어떤 것을 자기 성품이 공하다[自性空] 하는가?
말하자면 일체 법은 자성이 생기지 않으므로 이것을 자성공이라 한다.
어떤 것을 행할 것이 없는 공[無行空]이라 하는가?
모든 온(蘊)은 본래 열반이라 모든 행[諸行]이 없다. 이것을 행이 없는 공이라 한다.
어떤 것이 행공(行空)인가?
모든 온은 업과 인이 화합하여 일어나 나와 내 것을 떠났다. 이것을 행공이라 한다.
어떤 것이 일체법은 말할 수 없는 공인가?
말하자면 일체법을 망령되게 헤아린 자성은 말할 수 없다. 이것을 말할 수 없는 공이라 한다.
어떤 것이 제일의의 바른 지혜의 큰 공[第一義聖智大空]인가?
말하자면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를 얻을 때 일체 모든 견해의 잘못된 습기(過習)는 모두 떠난다.
이것을 제일의의 바른 지혜의 큰 공이라 한다.
어떤 것이 저기에는 저것이 없는 공인가?
말하자면 여기에는 저것이 없다. 이것이 저기에는 저것이 없는 공이라 한다.
비유하면 녹자모 강당[鹿子母堂:녹자모가 지은 강당ㆍ동원정사]에는 코끼리ㆍ말ㆍ소ㆍ양 등이 없으므로
내가 그 강당은 공하다고 말하나 비구 대중이 없는 것은 아님과 같다.
대혜여, 강당은 강당의 자성(自性)이 없다고 말함이 아니요,
비구는 비구의 자성이 없다고 말함이 아니요, 다른 곳에 코끼리ㆍ말ㆍ소ㆍ양이 없다고 말함도 아니다.
대혜여, 일체 모든 법의 자상ㆍ공상은 저기에는 저것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저기에는 저것이 공하다고 이름한다. 이것이 일곱 가지 공이다.
대혜여, 이 피피공(彼彼空)은 공 가운데 가장 거칠므로 너는 마땅히 멀리 떠나도록 하여라.
또한 대혜여, 무생(無生)이란 자체가 생기지 아니하되 생기지 아니함도 아니며 삼매에 머묾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무생이다.
대혜여, 자성이 없다는 것은 무생이기 때문에 비밀한 뜻으로 무자성이라 말함이다.
대혜여, 일체법은 자성이 없고 찰나도 머물지 아니하며 뒤에 변하고 달라짐을 보기 때문에
이것을 자성이 없다고 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인가?
대혜여, 빛과 그림자 같고, 길고 짧음과 같고, 검고 흰 것과 같이 다 상대적으로 성립되어 홀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혜여, 생사 밖에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요 열반 밖에 생사가 있는 것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은 서로 어긋나는
모양이 없다. 생사와 열반이 같듯이 일체법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두 모양이 없다고 한다.
대혜여, 공ㆍ무생(無生)ㆍ무이(無二)ㆍ무자성상(無自性相)을 너는 마땅히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항상 공한 법을 설하는 것은단(斷)과 상(常)을 멀리 떠나게 하도다.
생사는 환과 꿈과 같으나 업은 없어지지 않느니라.
허공과 열반 둘을 멸함도 이와 같으니라.
어리석은 범부 허망하게 분별하나
모든 성인은 유무(有無)를 떠났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다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공ㆍ무생ㆍ무자성ㆍ무이상(無二相)은 다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수다라(修多羅:경) 가운데 들어 있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은 모두 이 뜻이 있다.
대혜여, 모든 수다라는 일체 중생의 마음을 따라 설하되 진실은 말 속에 있지 않다. 비유하면 아지랑이는 모든 짐승을 속여 유혹하여 물이라는 생각을 내게 하나 실은 물이 아닌 것과 같다. 많은 경에 설하신 것도 또한 이와 같아 모든 어리석은 범부가 스스로 분별한 것에 따라 환희심을 내게 함이요, 모두 바른 지혜로 깨달은 곳의 진실한 법을 나타내 보인 것이 아니다. 대혜여, 마땅히 뜻에 따르고 말에 집착하지 말라.”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수다라 가운데 ‘여래장의 본성은 청정하고 항상하다. 끊어지지 않고 변하여 바뀜이 없다.
32상을 갖추고 일체 중생 몸속에 있지만 온ㆍ계ㆍ처의 때 묻은 옷에 얽매어 있고, 탐ㆍ진ㆍ치 등의 망령된
분별의 때에 오염되어 마치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가 때 묻은 옷 속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외도가 말하기를, ‘나’는 영원한 작자(作者)이며 구나(求那:原質)를 떠나 자재하며 멸함이 없다고 말하니
세존께서 설하신 여래장의 뜻과 외도의 ‘나’는 같지 아니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내가 여래장이라 말한 것과 외도가 말한 ‘나’는 같지 않다.
대혜여,
여래ㆍ
응ㆍ정등각은 성공(性空)ㆍ
실제(實際)ㆍ
열반ㆍ
불생(不生)ㆍ
무상(無相)ㆍ
무원(無願) 등 모든 구절의 뜻을 가지고 여래장을 설하였다.
어리석은 범부가 무아(無我)의 공포를 떠나도록 하고 분별 없고 그림자가 없는 곳의 여래장의 문을 말한 것이다.
미래ㆍ현재의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여기에서 ‘나’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대혜여, 비유하면 도공이 진흙
및 물과 막대와 수레바퀴와 노끈과 방편(기술)으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
일체 분별 상을 멀리 떠난 무아의 법과 갖가지 지혜와 선교방편으로
혹은 여래장을 설하고
혹은 무아(無我)라 설하기도 하므로
갖가지 명자(名字)와 차별이 있다.
대혜여, 내가 여래장이라 설한 것은 ‘나’에 집착한 모든 외도의 무리를 도와서 망령된 견해를 떠나
3해탈(解脫)에 들어가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게 하려 함이다.
이런 까닭으로 모든 부처님께서 여래장을 설한 것은 외도가 설한 ‘나’와 같지 않다.
만약 외도의 견해를 떠나고자 하면 반드시 무아인 여래장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설하셨다.
사부(士夫) 상속하는 온(蘊)과온갖 인연과 미진(微塵)
승자재(勝自在:대자천 외도)가 만든 것이것은 다만 마음의 분별일 뿐이네.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미래 일체 중생을 널리 관찰하고 다시 부처님께 청하여 말하였다.
“원하옵건대 저희를 위하여 자세히 수행법을 말씀하여 주소서. 모든 보살마하살과 같이 큰 수행을 이루오리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수행법을 갖추어야 큰 수행을 이루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말하자면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을 관찰하는 것이요,
나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견해를 멀리 떠남이요,
밖의 법은 성품이 없음[無性]을 잘 아는 것이요,
오로지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보살이 이 네 가지 법을 이루면 곧 대수행자라는 이름을 얻을 것이다.
대혜여, 무엇을 자기 마음에 나타남을 관찰한다 하는가?
말하자면 삼계(三界)는 오직 자기 마음뿐임을 관찰하여 나와 내 것을 떠나고 동작함도 없고 가고 옴도 없으며 무시이래로 집착한 잘못된 습기에 훈습되어 삼계의 갖가지 색깔ㆍ행동ㆍ이름ㆍ말에 얽매어 몸, 살림[資] 머무는 곳을
분별하여 따라 들어가 나타낸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대혜여, 무엇을 나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견해를 떠남이라 하는가?
이른바 일체법은 환과 꿈에서 생긴 것 같아 나와 남이 모두 다 생기지 아니하건만
자기 마음의 헤아림에 따라 나타난 것이므로 밖의 사물은 없다고 본다.
모든 식(識)은 일어나지 않고 또 모든 인연은 쌓임이 없다고 보며,
분별하는 인연으로 삼계가 일어난다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안과 밖, 일체 모든 법을 모두 얻을 수 없으며
실체와 진실이 없음을 안다. 생긴다는 견해를 멀리 떠나 환과 같은 성품을 깨달으면
곧 그때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제8지에 머물러 마음ㆍ뜻ㆍ의식ㆍ오법자성(五法自性)ㆍ
2무아(無我)의 경계를 깨닫고 의지하는 곳을 바꾸어 의생신(意生身:육신이 아닌 化身)을 얻는다.”
대혜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의생신이라 이름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의생신이란 비유하면 뜻이 움직임에 빠르고 막힘이 없는 것과 같으므로 의생신이라 한다.
대혜여, 비유하면 마음과 뜻은 한량없는 백천 유순 밖에서 먼저 보았던 갖가지 모든 사물을 기억하여 생각이 이어져 빠르게 그곳에 나아가므로 몸과 산과 강, 돌, 석벽이 능히 막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의생신도 또한 이와 같아 여환삼매[如幻]의 힘[力]으로 신통[通] 자재의 모든 상(相)을 장엄하고 본래 중생을 성취시키려는 서원을 기억하는 까닭에 마치 뜻이 가듯이 일체 모든 성인 대중 가운데 태어난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생(生)ㆍ주(住)ㆍ멸(滅)의 견해를 멀리 떠난다고 한다.
대혜여, 무엇을 밖의 법은 성품이 없음을 관찰한다 하느냐?
일체법은 아지랑이 같고, 꿈의 경계 같고, 털 수레바퀴 같으나 무시이래로 희론과 갖가지 집착과 허망한 악습(惡習)이 그 원인이 된다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일체법을 관찰할 때 스스로 깨닫는 바른 지혜를 구할 수 있다.
대혜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법을 갖추며 큰 수행을 이루었다 한다. 너는 마땅히 이와 같이 부지런히
더 닦고 배워야 한다.”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청하여 말하였다.
“원하옵건대 일체법의 인연의 모양을 말씀하시어 저와 모든 보살마하살이 그 뜻을 깨달아 통달하여
유무(有無)의 견해를 떠나고 모든 법이 점점 생기고 한 번에 생겨난다고 허망되게 집착하지 않게 해주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일체법이 인연에서 생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안과 밖이다. 밖이란 말하자면 진흙덩이ㆍ물ㆍ막대기ㆍ수레바퀴ㆍ노끈ㆍ사람 공(功)의 인연이 화합하여 병(甁)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진흙 병 풀로 만든 자리 종자 싹ㆍ타락[酪]ㆍ생소[蘇] 같은 것이다. 밖의 인연이 앞뒤로 옮겨져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안[內]이란 말하자면 무명(無明)과 애업(愛業) 등에서 온ㆍ계ㆍ처의 법이 생기므로
이것을 안으로 인연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은 다만 어리석은 범부가 분별하는 것이다.
대혜여, 인(因)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이른바
당유인(當有因)ㆍ
상속인(相屬因)ㆍ
상인(相因)ㆍ
능작인(能作因)ㆍ
현료인(顯了因)ㆍ
관대인(觀待因)이다.
대혜여, 마땅히 있는 인이란 안과 밖의 법이 인(因)을 만들어 과(果)가 생김을 말한다.
상속하는 인이란 안과 밖의 법이 연(緣)을 만들어 과ㆍ인ㆍ온(蘊)ㆍ종자 등이 생김을 말한다.
서로 인연한다는 것은 사이 없는 상[無關相]을 만들어 상속하여 과(果)를 생(生)함을 말한다.
능히 만드는 인이라는 것은
인(因)을 증가시켜 과(果)를 생성하는 것이 전륜왕과 같은 것이다. 밝게 나타내는 인이라는 것은 분별하여
발생하는 것에 경계의 모양[境相]을 나타내는 것이 등불이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대하여 보는 인이란
멸할 때 상속이 끊어져서 허망한 생각이 없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대혜여,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가 스스로 분별하는 것이요 점차로 생긴 것도 아니요 또한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혜여, 만약 갑자기 생겼다면 만드는 자와 만들어진 것이 차별이 없어 그 원인을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까닭이다. 만약 점차로 생겼다면 그 체상(體相)을 찾아도 또한 얻지 못하므로 자식이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버지라 부르리오. 모든 것을 헤아려 분별하는 사람[計度人]이 말하는 인연과 소연연(所緣緣)1)과
무간연(無間緣)2)ㆍ증상연(增上緣)3) 등으로써 능생(能生)과 소생(所生)이 서로 소속되어 얽혀 차례로 생긴다는 것은 이치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두 망정(妄情)으로 집착한 상(相)인 까닭이다.
대혜여, 점차로 생김과 단번에 생김이 모두 생김이 아니다. 다만 마음에 몸과 살림[資] 등이 나타난 까닭으로 밖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 모두 성품이 없기 때문에 오직 식이 스스로 분별하여 견해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대혜여, 그러므로 반드시 인연이 만드는 화합의 모양 가운데서 점차로 생김과 단번에 생긴다는 견해를 떠나야
한다.”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설하셨다.
일체법은 무생(無生)이니또한 멸함도 없어저 모든 인연 가운데
1) 연(緣)은 원인, 소연(所緣)은 심식(心識)의 대상을 말한다.
2) 앞의 마음이 멸하고 뒤의 마음을 일으키는 작용을 말한다.
3) 다른 법을 일으키는 데 강한 힘이 되는 것, 논밭이 곡식에 힘이 되는 것 등이다.
생멸상(生滅相)을 분별하느니라.
모든 인연의 모임을 막지 않으면 이와 같이 멸하여 다시 생기니
다만 어리석은 범부들이망정(妄情)에 집착함을 멈추도록 함이니라.
인연 가운데 법의 유(有)ㆍ무(無)는이것 다 생김이 없는 것
습기와 미혹이 마음을 굴리면 여기에서 삼계[三有]가 나타나도다.
본래 생김이 없고또한 멸함도 없느니라.
일체 유위(有爲)를 관찰하면 비유하건대 허공의 꽃과 같아
능히 취하고 취할 것을 떠났건만 모든 것은 미혹하여 보이느니라.
능히 생함도 생긴 것도 없고 또 다시 인연도 없건만
다만 세속 따르는 까닭에 생멸이 있다 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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