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마복음 02장 Jesus is very paradoxical 평화, 그리고 불과 검과 전쟁(1/5)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알지 못한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살고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할 것이며
두 사람은 세 사람을 반대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할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홀로 서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눈으로 보지 못한 것,
귀로 듣지 못한 것,
손으로 만져보지 못한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예수는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것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로, 만일 모든 사람들이 거의 죽어 있는 상태라면 평화는 가능하다, 거기에 전쟁이나 갈등은 없을 테지만 삶 또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묘지의 침묵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가치가 없다, 차라리 전쟁이 있는 게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있으면 그대들은 생기와 활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른 유형의 평화가 있다, 그대가 자기 존재 내면에 중심을 둔 생기와 활력을 가질 때 완전히 다른 차원의 평화가 존재한다, 그것은 그대가 자기 자신을 알았을 때,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불꽃이 타올라 그대가 어둠 속에 있지 않을 때 찾아오는 평화이다.
거기에는 넘치는 생명력과 깊은 침묵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죽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묘지의 침묵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이해해야 하는 예수의 역설이다, 전쟁은 나쁜 것이고 미움도 나쁜 것이다, 그것들은 세상의 악마이며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질병은 나쁜 것이고 건강은 좋은 것이다, 질병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죽은 자는 결코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죽은 몸은 부패할 수 있지만 병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노력은 하나의 죽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 된다, 거기엔 전쟁과 질병과 그리고 미움은 없을 것이지만 또한 생명도 없다.
예수는 그와 같은 형태의 평화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형태의 평화는 쓸모가 없다, 오히려 전쟁이 있는 지금의 세상이 더 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애써왔지만 그들의 자세란 단지 소극적인 것이다.
그들은 "만일 전쟁이 그친다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통 사람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버트란트 러셀 같은 매우 위대한 철학자들도 "만일 전쟁이 그친다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소극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아니라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그대의 내면에 전쟁이 없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벌어질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대 내면의 전쟁에서 싸워 승리한다면 바깥의 전쟁은 그칠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인도에서는 마하비라를 '정복자' '위대한 정복자' 즉, 진나(the jinna)라고 불렀다, 진나라는 말은 정복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와도 싸운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그가 누구를 정복했다는 말인가?
그는 절대로 폭력을 믿지 않았고 절대로 전쟁을 믿지 않았으며 절대로 싸움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사람 마하비라를 위대한 정복자라고 부르는가? 이것은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비르다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떤 현상이 있었던 것인가?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정복했다, 일단 그대가 자기 자신을 정복한다면 다른 사람과의 싸움은 즉시 그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란 단지 내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면 오직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불편함으로 고통을 겪든지 아니면 그것을 누군가에게 투영하는 것이다.
그대가 내적으로 긴장되어 있을 때 그대는 이미 누군가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구실은 무엇이라도 좋다, 그 구실이 부당할지라도 그대는 그대의 고용인이든 아내든 아이들이든, 누구에게나 덤벼들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가진 내적 갈등과 불편함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그대는 다른 것에다 그 책임을 돌리고 그것을 통해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대는 지금 화를 낼 수 있고 그대의 분노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그대를 이완시키고 기분을 전환시켜 줄 것이다, 물론 일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내부는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쌓일 것이며 다시 이전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 내일이면 다시 분노와 미움은 쌓일 것이며 그대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투사해야만 한다.
그대가 남과 싸우는 것은 그대는 계속 자신의 내면에 쓰레기를 쌓아 올리고 있고 또 그것을 내다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한 사람, 자아 정복자는 내적 갈등이 없다, 전쟁은 끝났다, 그는 내적으로 하나이다, 거기에 둘은 없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갈등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사람은 다른 누구하고도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갈등을 피하는 것은 마음의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내적인 갈등은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대를 비롯한 모든 개개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선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이런 이미지 없이 살기란 어렵다.
정신분석의들은 환상이란 삶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상이 필요하다, 만일 그대가 스스로를 아주 추하고 사악하고 악마와 같다고 생각하고---사실 이것이 진실이다---그 이미지를 내면에 간직한다면 그대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모든 자신감을 상실할 것이며 사랑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로 인해 자기혐오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이며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대는 심한 열등감과 자신이 아주 나쁘고 사악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며 결국 그것으로 인해 죽음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그대를 자살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실이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열 살 된 어린이가 호르몬을 맞으면 스무 살의 청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악마의 사람이 아니라 신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며 길고 험한 길이다, 많은 것을 행해야만 악마는 신성이 된다, 그것은 신성이 될 수 있다!
그대는 아마 악마(devil)라는 단어의 어원을 모를 것이다, 그것은 신성(divine) 이란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왔다, 악마와 신성이라는 단어는 모두 데바(deva) 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다.
악마는 신성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성이 악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들은 한 에너지의 반대 극이다, 시거나 쓴맛으로 변한 에너지는 다시 단맛으로 변할 수 있다, 어떤 내적인 변형이 필요하며 내적인 연금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길고 힘든 일이다, 그리고 마음이란 언제나 장애물이 가장 작은 지름길을 찾는다, 그래서 마음은 말하기를 '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가?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그냥 믿어버리면 될 것을'.
이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대가 선하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대 자신은 아름답고 성스러우며 아무도 그대 자신과 같지 않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마저도 그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만일 환상들이 그대에게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줄 수 있다면 진리가 실현되었을 때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그대는 상상할 수 있다.
그대는 선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그 환상조차도 그대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힘있게 설 수 있게 하고 그대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그대는 환상과 함께 거의 중심에 있게 된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 생겨난 그 중심이 바로 에고이다.
그대가 정말로 중심에 있게 될 때 그것이 자기(self)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실현되었을 때에만 일어난다, 그대 내면의 에너지가 변형되었을 때 가장 낮은 것이 가장 높은 것으로, 땅의 것이 하늘의 것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악마가 신성으로 되고 그대 자신은 영광의 빛을 발한다, 그 씨앗은 싹을 틔워 피어나고 겨자씨는 한 그루 큰 나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긴 과정이다, 기다리는 용기가 필요하며 지름길로 가는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삶 속에서 지름길이란 없다, 오직 환상만이 지름길이다, 삶이란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힘든 노력을 통해서만 그대는 성장하기 때문이다.
성장은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대는 그것을 값싸게 얻을 수 없다, 값싼 것은 어느 것도 그대가 성장하도록 돕지 못한다, 고통은 그대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그 노력, 그 애씀, 그 긴 여정은 그대를 날카롭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경험하게 해주며 성숙하게 한다.
지름길을 통해서 어떻게 그대가 성장할 수 있겠는가? 한 가지 가능성은 있다, 지금은 동물들에게 실험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인간에게도 사용될 것이다, 그 한 가지 가능성이란 그대가 호르몬 주사를 맞는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 출생 1931년 12월 11일 인도 쿠치와다~사망 정보 1990년 1월 19일 인도 푸나)
열 살 된 어린이가 호르몬을 맞으면 스무 살의 청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가 십 년을 살아야 얻을 수 있는 그 성숙함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노력, 성욕통제의 필요, 사랑의 갈망, 자유롭게 살고자 하지만 통제해야 하고, 방황하고자 하지만 중심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움직이고 사랑으로 고통받고 또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없을 것이다, 스무 살로 보이는 이 남자는 실제로는 열 살인 것이다, 호르몬을 통해서 그대는 오직 몸을 부풀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동물이나 과일 그리고 나무에게 행해지고 있다. 나무에 주사를 놓으면 자연적으로는 삼 년 내에 꽃 피울 나무가 일 년 새에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핀 꽃은 무언가가 부족할 것이다, 그것을 알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꽃은 무언가 결함이 있다, 그 꽃은 강요당했고 지내야 할 계절을 지내지 못했다, 과일은 빨리 익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일은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언가 부족하다, 그들은 인위적인 것이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억하라, 마음은 언제나 서두른다, 자연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 자연은 기다리고 기다리며 그것은 영원하다, 거기에는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 삶이란 계속되고 또 계속되며 그것은 영원하다.
그러나 마음에게 있어서 시간은 짧다, 그래서 마음은 '시간은 돈이다'라고 말한다, 삶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삶은 '경험하라!'라고 말한다.
삶은 기다린다, 기다릴 수 있다, 마음은 기다릴 수 없다,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삶에 있어서 죽음이란 없다, 그러나 마음에는 죽음이 있는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지름길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지름길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대 자신이 곧 그대가 바랬던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신경성 질환에 걸리게 된다, 정신병원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나폴레옹, 알렉산더 또는 그 누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을 믿으며 또 그렇게 행동한다.
나는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있는 어떤 남자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자기가 위대한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했다, 삼사 년에 걸친 치료와 정신분석 후에 정신과 의사는 생각했다, '자, 이제 그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의사는 말했다, "이제 당신은 정상이니 집에 돌아가도 좋소"라고 그러자 그 남자가 말하기를 "집이라고? 궁전이라고 말하라." 그는 여전히 나폴레옹이었다, 만일 그대가 나폴레옹이 되었다면 그 병을 치료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비록 치료를 받아서 좋아진다 해도 상실감이 찾아오는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느 장군이 항상 술에 취해 있는 대위를 발견하고 그를 잡아들였다, 그 대위는 선한 사람이었다, 술꾼들은 거의 언제나 선한 사람들이다, 단지 지름길을 택할 따름이지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장군이 말했다, "자네는 좋은 사람이고 나는 자네를 높이 평가하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네를 사랑하네, 그런데 자네는 쓸데없이 자신을 낭비하고 있다네, 만일 자네가 술을 끊는다면 자네는 곧 대령이 될 수 있을걸세."
대위는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술 취해 있는 동안에는 나는 벌써 장군이 되어 있는 걸요, 그래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겁니다, 만일 맨 정신으로 있으면 나는 오직 대위일 뿐이지만 술 취해 있을 때에는 늘 장군이라 이겁니다!"
마음은 지름길을 찾고 환상은 그 지름길이다, 마야(maya.힌두교에서 '환상을 뜻하는 말)는 가장 쉽고 가장 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실재는 어렵고 힘들다, 불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그대가 더 많은 불 속의 시련을 통과할수록 그대는 더욱 단련되고 더욱 가치있게 된다, 그대의 신성은 시장에서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흥정할 수 없으며 그대는 신성을 위해 그대의 전 생애를 지불해야 한다, 신성의 획득은 그대의 전 생애를 걸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대가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그것이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가 좋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나쁘다고 생각하며 싸움은 외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만일 그대 자신을 직시한다면 그 싸움은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대는 자기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알며 그대보다 더 악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대 자신이 전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무언가가 일어난다, 내면의 싸움, 하나의 내부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면의 충돌을 통해서---그것은 하나의 기법이다, 기억하라,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사용되어 온 위대한 기법들 중의 하나이다, 만일 그대에게 내면의 충돌이 있다면 그대는 통합될 것이다---.만일 거기에 내면의 충돌이 있다면 그때 그 충돌하고 있는 것들을 넘어선, 하나의 새로운 중심인 그 충돌을 지켜보는 자가 생겨난다.
만일 거기에 내면의 충돌이 있다면 에너지들이 나타나고 그대의 전 존재는 혼란속에 있게 된다, 혼돈이 만들어지며 그 혼돈으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존재가 태어난다.
어떤 새로운 탄생이든지 혼돈이 필요하다, 이 우주 전체는 혼돈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대가 진정 다시 태어나기 전에 혼돈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말한 전쟁이다.
그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대에게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대가 받기를 원하는 그런 값싼 평화를 주러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 이제 그의 말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