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반응하는 동물이다.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할줄 모른다. 생각은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인데 도구가 없다. 우주 안의 모든 힘은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외부 자극이 내부 밸런스를 무너뜨리면 밸런스가 복원되려고 하는 힘을 도구로 삼아 생각한다. 그것은 능동적인 생각이 아니다.
인간은 특정 조건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수렁에 빠지면 탈출하려고 하고, 문제를 주면 풀 수 있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반응이다. 우주 안의 모든 힘은 밸런스의 복원력이므로 생각하려면 먼저 밸런스를 이루는 계를 장악해야 한다. 계와 밸런스와 축과 방향전환 개념이 없으면 생각하지 못한다.
수가 무엇인지 생각해본 사람이 있을까?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밸런스의 복원력이므로 자연에서 수로 나타낼 수 있는 변화의 방향은 두 가지다. 밸런스가 무너지는 방향과 그것이 원래대로 복원되는 방향이다.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방향전환이므로 원래 자연의 수는 방향전환수 음수다.
자연의 어떤 수는 양수가 아니라 음수다. 최초의 수학자가 그것을 양수로 정했기 때문에 헷갈리게 된다. 자연의 정지상태는 0이다. 거기서 변화가 일어나면 방향전환이다. 0에서 방향을 틀었으므로 방향전환수다. 우리가 그것을 굳이 따지지 않는 이유는 원시인 입장에서 피곤하기 때문이다.
nice의 어원은 no Science다. nice의 원래 의미는 셈하지 않는 것이다. 유럽사람이 원래 셈에 약하다. 셈하지 않는 것을 나이스 하다며 좋아한다. 애초에 수학에 대한 불신과 적대의식을 갖고 출발했다. 우리가 아는 음수는 양수에 대한 방향전환이다.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곱하면 플러스다.
방향전환을 두 번 하면 원위치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자연의 변화하는 방향은 정방향과 역방향 그리고 방향전환 세 가지가 있는데 왜 수는 음수와 양수 밖에 없을까? 뭐가 하나 빠졌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어린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자동차로 비유하자. 전진과 후진과 유턴이 있다. 후진과 유턴은 다른 것이다. 손수레라면 어떨까? 전진과 유턴 만으로 충분하다. 수레의 전진이 플러스라면 유턴은 마이너스다. 그런데 유턴을 두 번 하면 원위치 된다. 후진은 없어도 된다. 그런데 만약 후진이 있으면 어쩔거냐? 매우 곤란하다.
인간은 앞으로 가거나 뒤로 돌아서 간다. 뒷걸음질로 가는 인간이 있다면? 인간이 뒷걸음질을 하지 않고 뒤로 돌아 앞으로 가는 이유는 뒤통수에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뒤통수에 눈이 붙은 인간이 있다면? 유턴은 필요없고 전진과 후진을 자유자재로 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자동차는 있다.
시간의 과거를 따지면 후진이 있다. 오늘이 기준이면 어제가 과거다. 내일이 기준이면 오늘이 과거다. 기준을 변경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가 있으므로 허수가 필요하다. 자연의 수는 음수와, 양수, 허수다. 음수는 방향전환수다. 엄밀히 따지면 자연의 모든 수는 음수고 양수는 없다.
양수는 뭘까? 양수는 셈의 출발점인 기준점을 지워버린 것이다. 양수는 방향이 없는 장님 수다. 시간의 과거는 마이너스지만 부호를 생략해도 된다. 기준을 세워야 하지만 그게 번거로우므로 기준을 없애도 된다. 우향우! 구호를 외치면 교관이 기준인가, 병사가 기준인가? 눈치껏 알아듣는다.
경상좌도는 지도의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전라좌수영은 왜 목포에 있지 않고 여수에 있는가? 임금을 기준으로 정했기 때문에 헷갈리는 것이다. 임금은 남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임금은 언제나 북쪽에 있고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게 되어 있다. 우리가 마이너스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양수는 방향이 있는데 편의상 방향을 생략한다. 그렇다면 정방향과 역방향, 방향전환방향이 있다. 학계가 애초에 수학의 출발점을 잘못 찍었다.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라고? 그게 귀차니즘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계산이 되니까 그렇게 한다. 그런데 계산이 안되면? 좆되는 거다.
원시인이 주먹구구로 셈할 때는 대충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엄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는 원래 방향전환이다. 제곱해서 마이너스가 되는 수는 원래 자연에 있다. 수학이 그런 피곤한 상황을 피해가는 요령을 발달시켜 왔다. 이런 것은 초등학생도 생각할 수 있는데 얼버무린다.
인류의 지적 태만에 실망하게 된다. 벌거숭이 임금을 봤으면 벌거숭이라고 말해야 한다. 누가 직선을 그었는데 비뚤어져 있으면 비뚤어졌다고 말해야 한다. 수는 방향전환이다. 셈하라고 하면 우리는 빈 손에 하나씩 채운다. 상자에 사과를 한알씩 담으면서 셈한다. 틀렸다. 왜 플러스 방향인가?
상자에 사과를 가득 담아와서 거기서 하나씩 빼면서 세는 것이 맞다. 자연이 원래 그렇게 작동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밸런스의 복원력이라는 자연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 자신이 기준이 되면 안 된다는 거다. 인류의 수학은 인간 자신이 기준이므로 0에서 카운트 한다.
우리는 0에서 시작하고 점점 늘어서 무한대에서 끝나는 수 개념을 알지만 이는 인간의 상상 속에 있고 자연에는 없다. 자연의 수는 어떤 크기에서 시작하여 점점 줄어서 0으로 끝난다. 손가락은 10개에서 시작해서 하나씩 감소해서 0에서 계산 끝이다. 허수문제는 0 기준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 규칙은 누가 정했는데? 0에서 출발하므로 수는 플러스 방향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마이너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허수는 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기준이 0이 아니면 정방향, 역방향, 방향전환 방향이 있다. 자연의 기준은 밸런스다. 아무 것도 없음에서 수가 카운트 되는 것이 아니라 균형에서 플러스와 마이너스 두 방향으로 카운트 되는 것이다.
자연의 자연스러운 전개는 밸런스의 복원력이므로 평형이탈에서 출발하여 본래의 0으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카운트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