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옥색 가락지를 매만지던 은하는 대답 대신 반지를 세 번째 손가락으로 옮겨 끼웠다.
'..우리는 혼인식을 했잖아요. 그니까-…'
'...'
'여기가 맞아요'
'…'
'...내가 전하에게 줄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는데'
하며 은하가 지환에게 건넨 건 검은색 수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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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 은하는 지환에게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선녀의 날개옷을 나무꾼이 숨겨 선녀가 고향하늘로 돌아가지 못하던 그 이야기.
은하가 지환에게 건넨 수첩은 나무꾼이 돌려준 선녀의 날개옷이었을까 아니면 나무꾼이 훔친 선녀의 날개옷이었을까.
그게 무엇이든 가볍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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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고마워요'
'...'
'...그니까..사랑한다는 말도 고마워요'
'…'
'다음에 저잣거리를 나가게 되면..'
'…'
'전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드릴 반지를 사와야겠어요’
그러니까 돌고 돌아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제서야 수첩을 건넨 은하도 수첩을 받은 지환도 웃는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서야 웃는 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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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국은 그 사이 몇 번이고 눈이 내렸다.
저잣거리에서는 이야기꾼을 고용하여 매주말마다 시행하던 동화구연을 하루하루 일수를 늘려갔고
옥국유치원도 거의 다 지어져 간판 올리기만을 앞두고 있다.
유치원에 상주할 선생님도 선발되어 공문이 내려졌다.
코끼리 반 정만호 선생님
고라니 반 양홍기 선생님
원숭이 반 곽재수 선생님
개구리 반 이동희 선생님
사슴 반 주일영 선생님
옥국은 점차 아이들의 울음소리보다는 웃음소리로 채워졌고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에 부모도 더 이상 장사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는 옥국이다.
-
'은하씨까지 선생님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싶어요'
'은하씨에게 고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아요'
'고되지 않아요'
어느새 은하씨가 입에 붙었는지 제법 자연스러워진 호칭으로 은하를 부르는 지환이지만 들리는 두 사람의 대화만큼은 부드럽지 못하다.
지환은 지금 굳이 선생님을 자처하는 은하를 말리느라 애쓰는 중이다.
'선생님은 충분히 선발했습니다. 모자르지 않아요'
'그럼 유치원에서 소일거리라도 할래요'
'...은하씨는 마마라는 걸 부디 잊지마세요'
'...마마는 아이들과 노는 것도 못 해요?'
'궁 안 사람들이 궁 바깥에서 일을 하지않습니다'
‘…그럼 저 궁 사람 안 할래요'
'은하야-…'
은하의 알 수 없는 고집에 금지당했던 반말령을 풀 수밖에 없는 지환이다.
'...참으로 말을 밉게 한다'
'…'
'..어째서 자꾸 고집을 피워'
'...아이들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그게 내 일이었는데..'
'...'
'아이들을 두고도 내 할 일이 없으니까..조금 허무해졌어요'
은하의 말을 들은 지환은 아이들 앞에서 동화구연을 하던 은하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밝았던 걸 알기에 그저 은하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고집부려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
'...은하씨가 가장 행복해하던 일인데 안 된다고만 해서 내가 미안합니다'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날카로운 말을 내뱉으려 하더니 그러질 못하고 서로의 몸을 더 세게 끌어안는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은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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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이 추가됐다.
주말 오전 토끼반 고은하 선생님
주말 오전을 제한 둔 건 지환이고 토끼반을 하겠다 말한 건 은하다. 그렇게 은하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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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따라 잠이 늘어난 은하다.
마음이 편해진 건지 눈을 떠보면 해가 중천일 때 도있고 조금은 더 넘어갈 때도 있지만 아직은 동이 트는 때에 일어나는 날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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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그때 제가 뭔 옷을 입고 있었냐면'
'…응'
'초록색 가디건에 연청바지를 입고 있었어요'
'가디..건이 뭡니까'
아차차 외래어
'털실로 짠 겉 옷이에요. 그 옷 제가 아끼는 거였는데'
'..그럼 연청바지라는게 뭡니까'
'청이..청을 뭐라고 해야되지..옥국엔 없는 소재같은데-'
'...그럼 그곳에서는 여성들도 바지를 입습니까'
'그럼요- 가끔은 남자들이 치마도 입어요'
인상을 구기는 지환이다.
'지금 그곳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아닙니다'
'방금 미간 주름이 되게 깊게 잡혔는데'
'..사내가 치마를 입는다는 게 상상이 가질 않아서'
이제는 그때의 이야기들을 하며 더 이상 은하는 울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앞머리가 꼬불했다고 했지'
'맞아요. 앞머리가 꼬불꼬불했어요. 그거 어울리기 쉽지않은데.. 제가 좀 어울렸어요-'
앞머리가 꼬불거리는 은하를 상상만 해볼 수 있는 지환은 그저 귀여웠겠다 싶어서 웃음을 감출 수 없다.
은하가 방에 돌아가고 지환은 은하가 준 그 수첩에 아주 얇은 붓으로 은하가 말한 모습을 적어본다.
'앞머리꼬불, 초록색가디건, 연청바지'
어쩌면 옥국에 물감이 있었다면 그런 은하의 모습을 그려봤을지도 모른다.
-
혼인을 하고 연애를 했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차마 바뀔 수 없는 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합방이었다.
물론 지환이 일방적으로 정한 합방이 아니었다.
은하는 버젓이 세 번째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우고 며칠 동안이나 궁을 누볐고
그 탓에 궁 안에서는 '마마에게 큰 문제가 있어서 합방을 못 한다 나봐. 가락지가 엄지로 옮겨지지 않은지 꽤 됐어' 라는 말이 옮았다.
그런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합방이었다.
'은하씨. 합방날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미안해요'
우려깊은 표정을 하고 연신 사과하는 지환이었지만 은하는 어쩐지 다가온 합방이 걱정되지 않았다.
저를 걱정하는 것에 여념이 없는 저 사람과 그니까 사랑하는 저 사람과 지새울 밤이 걱정될 리 없는 은하였다.
옥국유치원 간판이 올려지는 날과 함께 머지않은 합방날도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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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원래 합방날에는 살구색 연지를 바릅니다'
'앵두색 연지를 바르고 싶다니까'
오늘도 고집을 부리는 은하다.
'궁의 법도가 그렇다니까요…! 왜 이렇게 앵두색연지만 고집하세요-…'
그 사람은 은하에게 여전히 물러서 궁의 법도를 어긴 자기를 조금도 다그치지 않을 걸 은하는 알고 있다.
'앵두색연지가..이 비녀랑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애'
궁의 법도를 어기려는 만큼 은하도 그 사람에 가장 예뻐 보이고 싶은 날이다.
-
결국 은하는 앵두색연지를 바르고 지환의 방을 찾았다.
매번 '전하- 들어갑니다'하며 들어오면 웃음이 맴돌며 화기애애하던 방이었는데 오늘따라 적적한 분위기가 감돈다. 날이 날인만큼 은하도 지환도 어색하기만 하다.
'...미호가...합방날에는 살구색 연지를 바르는 게 궁의 법도라고 알려줬는데'
은하가 적막을 깬다.
'제가 고집을 부렸어요. 앵두색을 바른다고'
'…곱습니다'
'..궁의 법도를 어긴 제가 밉지 않으세요?'
'미울리가요'
수백 년 지켜오던 궁의 법도를 어겼는대도 밉기는커녕 곱다며 칭찬하는 지환이다.
'궁의 법도가 그러한들 나의 법도는 은하씨라서'
'…'
'..전혀 밉지가 않습니다'
'…'
'고우십니다. 매번 바르시는 앵두색연지도'
'…'
'그때마다 짝처럼 따라오는 비녀도'
'…아셨으면서 왜 말도 안 해주셨어요-…'
'부끄러우실 때마다 하지 말라 투정을 부리십니다'
'…'
'곱다는 말에 하지 말라 투정을 부리실까'
'…'
'맘으로만 삼켰습니다'
지환은 은하가 앵두색연지를 고집하는 이유도 부끄러울때면 되례 하지말라 토라져 버리는 버릇도 알고있었다.
'...곱다는 말을 싫어하는 여자가 어딨어요'
'...곱습니다'
'…'
'이제부터는 직접 말하겠습니다'
여간 떨리는 심장에 일찍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은하 역시 안 되겠다며 다시 금지령을 내리려 한다.
'..역시 안 되겠-…'
'곱다. 은하야'
토끼같은 부인의 금지령들이 한순간 무너진다.
사실 처음부터 천하를 쥐고 나라를 흔드는 지아비에게 부인의 사소한 금지령은 너무도 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아비에게 궁의 법도보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랑하는 부인의 고집을 지켜주는 것이어서 여전히 무른 왕은 그런 부인의 고집에 흔들려 줬을 뿐이다.
오늘만큼은 그런 왕도 부인에게 져주기보다 부인을 쥐고 흔드려한다.
-
두 사람의 호흡이 일그러지는 만큼 켜져 있는 촛불도 흔들린다.
매번 머리를 곧게 빗어 비녀를 꽂아주던 지환의 손이 오늘만큼은 비녀를 풀고 한참이나 은하의 머리를 엉크렸다.
-
'전하- 그만요..그만. 동이 틉니다-…'
'...미안합니다'
은하가 힘들다 울어도 봐주지 않고 멈출 줄 모르는 지환이다.
'은하 너가 우는 게 싫었는데'
'…'
'지금은…'
'…'
'…더 울리고 싶기만 해. 이런 내가 나빠?'
'…나빠요'
지환은 가장 나쁜 남편이 되어 은하를 한동안 놔주지 않았고 은하는 그런 남편 품에 투정을 부리며 더 깊게 파고든다.
길고 긴 밤이 끝나고 은하의 가락지는 엄지손가락으로 옮겨졌다.
-
이불을 덮어주고 자는 서로의 모습을 지켜만 봤던 두 사람이 이제는 한 곳에 누워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있다.
'은하씨 드릴 게 있습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 지환은 옷매무새를 여미고 무언가 가져온다.
'초록색..가디건...그 옷을 아낀다고 했는데..'
'...'
'옥국에는..아직 초록색 실이 없습니다'
'…'
'아끼는 옷과 똑같은 옷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미안합니다'
초록색 두루마기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은하의 복장이었던 초록색가디건 보다 더 고운 색의 초록색 두루마기.
'..아니요-… 아끼던 그 옷보다 더 예쁩니다'
'…'
'고마워요'
은하는 지환에게 입을 맞춘다.
입맞춤이 짙어지면 또다시 밤이 시작되려는 듯하다. 분명 아침이 밝았는데도 말이다.
가끔가다 그곳을 그리워하는 은하를 위로할 방법을 그렇게 하나씩 늘려가는 지환이다.
-
지환과 은하는 다 지어진 유치원을 바라보며 서있다.
'이제 아이들만 오면 되는 거예요?'
'벌써 반마다 정원을 채웠습니다'
유치원이 공개되고 처음에는 의아심을 가지던 부모들이 하루하루 아이들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유치원을 두 군데 더 세울 계획입니다'
'두 군데나요? 그래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
'이제 또 바쁘시겠네요- 저 혼자 심심하겠어요'
'..미안합니다'
'장난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 기다릴게요'
지환의 바쁜 일이 해결되면 여전히 눈이 내리는 옥국에서 눈사람을 만들까 생각해 보는 은하다.
'그럼 저는 전하랑 거래 성공한거네요’
거래가 성공했다며 웃는 은하와 그런 은하를 따라 미소 짓는 지환이다.
본래 은하와 지환의 거래는 제물이 될뻔한 목숨과 옥국의 평화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더 한 걸 주고 받았다.
어쩌면 이제는 더한 가치로 거래를 끝마쳐야 할 때가 온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