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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마하연론 제2권
釋摩訶衍論 卷第二
용수 지음
벌제마다 한역
이인혜 번역
龍樹菩薩造 姚秦三藏筏提摩多奉 詔譯
이제까지 입의분(立義分)에 관해 설명하였으므로
다음에는 해석분(解釋分)을 설명하겠다.
해석분에서 시설하는 법문의 명자(名字)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그 내용[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다만 네 가지 법이 있네. 나머지 스물아홉 가지 문은
해석하지 않고 생략했기 때문이며 아홉 논에서 그렇게 설했기 때문이라네.
【釋】 해석분에서는 네 가지 법에 한정해서 해석하고,
나머지 법문은 별도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체마하연(體摩訶衍),
둘째는 삼자마하연(三自摩訶衍:自體ㆍ自相ㆍ自用의 마하연),
셋째는 진여문(眞如門),
넷째는 생멸문(生滅門)이다.
무슨 이유로 나머지 법은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는가?
『일심변만론(一心遍滿論)』 등 아홉 가지 논에서 이미 그렇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심변만론』에서는 네 가지 법에 한정해서 해석하고 나머지 법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일심(一體一心)의 마하연이요,
둘째는 삼자일심(三自一心)의 마하연이요,
셋째는 일체일심(一體一心)의 문(門)이요,
넷째는 삼자일심(三自一心)의 문이다.
『융속귀진론(融俗歸眞論)』에서도 네 가지 법에 한정해서 해석하고
나머지 법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무량무변한 차별을 갖는 제법이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체대(體大)의 마하연이요,
둘째는 아무것도 섞인 것 없이 적정한 일미의 평등하여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체대의 마하연이요,
셋째는 제법의 차별이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체대 문이요,
넷째는 일미로 평등하여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체대 문이다.
『법계중장론(法界中藏論)』에서도 네 가지 법에 한성해서 해석하고
나머지 법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래장공덕의 상대(相大) 마하연이요,
둘째는 성품의 공덕을 구족한 상대 마하연이요,
셋째는 여래장공덕의 상대 문이요,
넷째는 성품의 공덕을 구족한 상대 문이다.
『비밀미묘론(袐密微妙論)』에서도 네 가지 법에 한정해서 해석하고
나머지 법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 세간의 인과를 생하는 용대(用大) 마하연이요,
둘째는 일체 출세간의 선인과를 내는 용대 마하연이요,
셋째는 세간의 인과를 내는 용대 문이요,
넷째는 출세간의 선인과를 내는 용대 문이다.
『중명합일론(衆命合一論)』에서도 네 가지 법에 한정해서 해석하고
나머지 법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무량무변하게 차별되는 제법이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마하연이요,
둘째는 아무것도 섞인 것 없이 적정한 일미로 평등하여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마하연이요,
셋째는 제법차별부증불감의 문이요,
넷째는 일미로 평등하여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문이다.
『진여삼매론(眞如三昧論)』에서도 네 가지 법에 한정해서 해석하고
나머지 법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래장공덕의 마하연이요,
둘째는 성품의 공덕을 구족한 마하연이요,
셋째는 여래장공덕의 문이요,
넷째는 성품의 공덕을 구족한 문이다.
『심성청정론(心性淸淨論)』에서도 네 가지 법에 한정해서
해석하고 나머지 법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 세간의 인과를 생하는 마하연이요,
둘째는 일체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는 마하연이요,
셋째는 세간의 인과를 내는 문이요,
넷째는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는 문이다.
『부동본원론(不動本源論)』과 『심심현리론(甚深玄理論)』
두 가지 논에서는 한 가지 법만을 해석하고 나머지 법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무엇이 한 가지인가?
불이(不二)의 마하연법이다. 광설과 약설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위 갖가지 논에서 건립문(建立門) 가운데는 본래의
법수[本數]를 빠짐없이 나타내면서
교설문(敎說門) 가운데서는 그 수에 빠짐이 있는가?
법체(法體)는 나뉠 수 없지만 의문(義門)에는 차별을 용납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며,
공부하는 이들에게 사유하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며, 매우 깊고 지극히 오묘한 교리를
열어 보여 줌으로써 존중하고 찬탄하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이며, 허공계와 같이
광대한 법문(法門)과 잔잔하고 신비한 바다같이 무궁한 의리(義理)는 언설로는 빠짐없이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며 사유로써는 그 한량을 알 수 없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다.
이제까지 본래의 법수에 관해 설했다.
다음으로 해서분에서 설하는 법에 대해 별문(別門)을 시설하여 해석하겠다.
【論】 해석분(解釋分)에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바른 뜻을 드러내 보이고,
둘째는 삿된 집착을 대치하고,
셋째는 대승의 도로 항해 나아가는 모습을 분별함이다.
【釋】 이와 같은 세 가지 문이
네 가지 법을 해석하는 대문(大門)의 수량이다.
【論】 ‘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라고 한 것은
일심법을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가지 문이 각각 일체법을 다 포괄한다. 무슨 뜻인가?
이 두 가지 문은 서로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釋】 이것은 약설분(略說分)에 해당한다.
이 중에는 세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네 가지 법상을 건립하는 문[建立四種法相門]이고,
둘째는 법문이 포괄하는 것이 원만한 문[法門該攝圓滿門]이고,
셋째는 문답을 일으켜 원인을 밝히는 문[發起問答顯因門]이다.
‘일심법에 근거해서 두 가지 문을 나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심진여문이고,
둘째는 심생멸문이다’라고 한 것은 네 가지 법상을 건립하는 문에 해당한다.
두 가지 법과 두 가지 문의 명칭은 어떻게 차별되는가?
그 수는 몇 가지며, 그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각각에 열 가지 명칭이 있으니
계경에서 다르게 설하기 때문이라네.
그러나 별도의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니
공능(功能)에 따라 명칭을 건립했기 때문이라네.
【釋】 두 가지 법과 두 가지 문에 각각 열 가지 명칭이 있다.
갖가지 계경에서 그렇게 구별해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체(法體)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법과 문의 공능을 기준으로
명칭을 세웠기 때문이다.
두 가지 본법(本法)이 갖는 열 가지 명칭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비마하건나(毘摩訶健那)
마하구시제(摩訶鳩尸帝)
마시타나라(摩尸陀那羅)
마가라구사(摩迦羅俱舍)
필살이니라(必薩伊尼羅)
파가파구사(婆伽婆俱舍)
필달마변나(必達摩邊那)
혹은 마하연(摩訶衍)이라 이름하며
파가차일파(婆伽叉一婆)
필아소마리(必阿素摩利)
이상 열 가지 명칭이두 가지 본법에 통하네.
【釋】 두 가지 본법 각각이 열 가지 명칭을 갖는다.
명칭은 공통되지만 뜻은 다르다. 무엇이 열 가지 명칭인가?
첫 번째는 광대신왕(廣大神王)이라는 이름이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구나야신왕(鳩那耶神王)이고,
둘째는 차비거라신왕(遮毘佉羅神王)이다.
첫 번째 신왕은 금강산(金剛山)에 머물며 오로지 길하고
상서로운 신증(神衆)을 출생한다.
두 번째 신왕은 큰 바다에 머물며 갖가지 모든 길하고 상서로운 신중과 허물되고 근심스러운
신중을 가림 없이 출생한다. 두 가지 본법의 광대신왕도 마찬가지다. 즉, 일체본법(一體本法)은
오로지 진여의 정법(淨法)만을 출생하며, 자체에서 나오는 삼자본법(三自本法)은 갖가지 모든
청백품(淸白品)의 법과 염오품(染汚品)의 법을 가림 없이 출생하기 때문이다.
『자체계경(自體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문수사리가 부처님 전에 아뢰었다. ‘세존께서 설하신 매우 깊고 지극히 묘한 두 가지 대승법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겠습니다.마땅히 세존께서는 대중을 위하여 다시 설해 주십시오.’
세존께서는 상(相)을 지어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위와 같은 두 가지 법은 금강신왕(金剛神王)라
주해신왕(主海神王)이 그 상(相)에서 각기 차별을 갖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금강신왕이 금강산에 머물며 갖가지 경계를 나타내 보일 때 오직 금빛을 낼 뿐 다른 빛을 내지 않는 것처럼,
진여일심(眞如一心)의 금강신왕도그와 같아서 오직 정법(淨法)만 있을 뿐 다른 법은 없기 때문이다.또 금강신왕이
청정한 권속만을 내고 이제껏 한 번도 잡된 권속을 내지 않듯이,진여일심도 마찬가지로 오직 더러움 없는 청정한
법한을 출생하기 때문이다.또 하나는 주해신왕이 큰 바다에 머물 때 갖가지 거칠고 악한 권속과 갖가지 선하고
묘한 권속을 출생하듯이, 생멸일심(生滅一心)의 주해신왕도 마찬가지로 모든 염법과 정법을 출생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태허공왕(太虛空王)이라는 이름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공자재공왕(空自在空王)이고, 둘째는 색자재공왕(色自在空王)이다.
첫 번째 공왕은 공을 통해 수용하는 것으로 자재를 삼고,
두 번째 공왕은 색을 통해 수용하는 것으로 자재를 삼는다.
두 가지 본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일체공왕(一體空王)은 무주처(無住處)로 자재를 삼고
삼자공왕(三自空王)은 유주처(有住處)로 자재를 삼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계경』에서는 “일심여법의 이치는 자체가 공무(空無)하다.
마치 저 공왕에게 본래 주처(住處)가 없듯이”라고 하였다.
『일지계경(一地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일심법의 체는 모든 장애에 대해서 장애를 갖지 않고 제법에 머물게
한다. 마치 공왕이 일체 색에 있어서 자재를 얻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대종(大種)을 수용(受容)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출생용왕(出生龍王)이라는 이름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광명을 내는 용왕이고,
둘째는 바람과 물을 내는 용왕이다.
첫 번째 용왕은 청정한 광명을 의지로 삼고,
두 번째 용왕은 바람과 물의 공덕을 의지로 삼는다.
두 가지 본법의 출생용왕도 이와 마찬가지다.
일체본법은 순정법(純淨法)으로 체(體)를 삼고
삼자본법은 염법과 정법으로 덕(德)을 삼기 때문이다.
『순리계경(順理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일심의 본법은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순일하다. 비유하면 광명을
내는 용왕이 청정한 광명으로 궁전을 삼고 청정한 광명으로 몸의
모습을 삼으며 청정한 광명으로 대중을 삼는 것과 같다.”
『무시계경(無始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유하면 큰 바다에 살면서 바람과 물을 일으킨다는 대용왕과 같다. 그 용왕은 머리로는 깨끗한 물을 내고
꼬리에서는 바람을 낸다. 이 용왕 때문에 큰 바다에는 물과 바람이 끊기지 않고 항상 계속된다. 일심용왕도
그러하여 갖가지 모든 차별법과 갖가지 모든 평등한 법을 내어끊김 없이 항상 계속되게 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여의주장(如意珠藏)이라는 이름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금주여의(金主如意)고,
둘째는 만주여의(滿主如意)다.
첫 번째 여의는 오직 금강(金剛)만을 내고,
두 번째 여의는 선한 것[物]과 선하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고 낸다.
두 가지 본법도 이와 같다. 일체여의(一體如意)는 오직 정법(淨法)만을
생하고 삼자여의(三自如意)는 염법과 정법을 가리지 않고 생하기 때문이다.
『여여계경(如如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에게 말씀하셨다. ‘불자여, 금시조왕(金翅鳥王)이 목숨을 마친 후
그의 마음이 바다에 들어가 여의주가 되어 금모래를 내서 용왕을 이롭게 하듯, 일심의 본법도 그러하여
진리를 내서 원만한 자를 이익되게 한다.’”
그러므로 『본성지계경(本性智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차다리귀(遮多利鬼)가 은혜를 갚기 위해
만겁 동안 여의주가 되어 바다의 중생을 이롭게 하듯이, 일심여의(一心如意)도 마찬가지로 생사법과 열반법을
낳고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방촌(方寸)이라는 이름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백호방촌(白毫方寸)이고,
둘째는 난색방촌(亂色方寸)이다.
첫 번째 방촌은 천상(天像)만을 현전해 보이고,
두 번째 방촌은 오취(五趣)를 가림 없이 현전해 보인다.
이 두 가지[毫]를 통해 중생의 몸[身]과 분수[分]가 마치밝은 거울에
비추었을 때와도 같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두 가지 본법도 이와 같기 때문이다.
『섭무량계경(攝無量契經)』에서는
“청정법계는 청정한 필살이니라(必薩伊尼羅)와 같고
무진법계는 잡된 필살이니라와 같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여섯 번째는 여래장(如來藏)이라는 이름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점점 더 유전하고 점점 더 묶이는 여래장이고,
둘째는 행(行)과 상(相)을 갖춘 여래장이다.
『실제계경(實際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불자여, 여래장에는 오직 각자(覺者)만 있고 오직 여여(如如)만 있다. 유전(流轉)의 인(因)을 떠났고
사려와 지식의 속박을 떠나 하나하나가 흰색처럼 깨끗하기에 여래의 창고[如來之藏]라 한다.”
또 『능가계경(楞伽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여래장은 선과 불선의 인이 되어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다. 인(因)과 본래부터 함께 하여 생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일곱 번째는 일법계(一法界)라는 이름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순백(純白)의 일법계고,
둘째는 무진(無盡)의 일법계다.
첫 번째 법계는 공겁(空劫)의 시분[時]과 같고,
두 번째 법계는 주겁(住劫)의 시분과 같다.
『진여법계계경(眞如法界契經)』에서 “공종(空種)의 무애(無礙)는 공(空)이 자라나는 시분과 같고
편종(遍種)의 무애는 유(有)가 불어나는 시분과 같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마하연이라는 이름인데 그 내용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아홉 번째는 중실(中實)이라는 이름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평등하게 머무는 중실이고,
둘째는 각기 다르게 머무는 중실이다.
첫 번째 중실은 단일한 명주[獨明珠]에 비유할 수 있고,
두 번째 중실은 다른 빛에 순응하는 명주[順明珠]에 비유할 수 있다.
『명중실계경(明中實契經)』에서 “치유침을 떠난 진심(眞心)은, 진여를 의지로 삼을 때는 차별 속에
동일성을 갖는 구슬과 같고 생멸을 의지로 삼을 때는 동일함 속에 차별성을 갖는 구슬과 같다”고
설했기 때문이다.열 번째는 일심(一心)이라는 이름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하나가 하나인 일심이고,
둘째는 일체가 일체인 일심이다.
첫 번째 일심은 소작(所作)을 기준으로 세운 명칭이며,
두 번째 일심은 능작(能作)을 기준으로 세운 명칭이다.
『일심법계경(一心法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본지수다라(本地修多羅)에서 읊으시기를,
심(心)의 체성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법도 아니고 비법(非法)도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일체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오늘은 부처님
스스로 진여일심은 하나에 바탕했기 때문에 하나가 되고 생멸의 일심은 많음에 바탕했기 때문에
하나라고 말씀하십니까? 세존께서는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앞과 뒤가 모순되는 오류를 범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어째서 그런가?
심법(心法)이란 하나가 아니다. 소작(所作)이 하나일 경우에는 그에 따라 하나라고 임시로 이름붙일 뿐이다.
그렇다고 심법이란 일체도 아니다. 소작이 일체가 될 경우 그에 따라 임시로 일체라는 이름을 붙일 뿐이다.
그러나 일체심이라 말하지 않고 굳이 일심이라고 하는 이유는,능작심(能作心)을 기준으로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다’
하시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셨다.”
이상이 열 가지 명칭이다.
이 열 가지는 모든 부처님의 일체 법장에 있는 근본법을 빠짐없이 포함하는 명칭이다.
이제까지 두 가지 법이 갖는 열 가지 다른 명칭에 관해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두 가지 문이 갖는명칭이 어떻게 차별되는지에 대해 설명하겠다.
심진여문(心眞如門)에 열 가지 명칭이 있는데, 그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바가바구사(婆伽婆俱舍)
건차아다나(健遮阿多那)
필보리파리(必菩提婆梨)
건하건파나(健訶健婆那)
아타아지니(阿陀阿只尼)
아가아시야(阿伽阿始耶)
도라락보제(度羅諾補帝)
마호건나지(漠呼健那地)
마하표타일(摩訶標陀一)
파아차니라(婆阿叉尼羅)
이와 같은 열 가지 명칭은진여 외에 다른 것을 칭하지 않는다네.
【釋】심진여문(心眞如門)에 열가지 명칭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여래장문(如來藏門)이라는 이름이니, 잡되게 뒤섞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불이평등문(不二平等門)이라는 이름이니,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일도청정문(一道淸淨門)이라는 이름이니, 다른 갈래가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불기부동문(不起不動門)이라는 이름이니, 작위와 업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무단무박문(無斷無縛門)이라는 이름이니, 장애를 대치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무거무래문(無去無來門)이라는 이름이니, 아래도 없고 위도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출세간문(出世間門)이라는 이름이니, 사상(四相)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적멸적정문(寂滅寂靜門)이라는 이름이니, 어디로 향하고 가고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대총상문(大摠相門)이라는 이름이니, 별상(別相)이 없기 때문이다.
열째는 진여문(眞如門)이라는 이름이니, 허망과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이 열 가지다.
이 열 가지 명칭으로 제불의 일체 법장인 평등한 의리와 법문을 빠짐없이 포괄한다.
심생멸문(心生滅門)의 열 가지 명칭은, 그 상(相)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아리야건마(阿梨耶鍵摩)
바가바구사(婆伽婆俱舍)
아이파나라(阿伊婆那羅)
건하건지니(健訶健只尼)
건가건시야(健伽健始耶)
차차벌나라(叉叉筏那羅)
나락보제니(羅諾補帝尼)
사박다열반(闍縛多涅盤)
아지가나시(呵只伽那尸)
다발다건사(多跋多健舍)
이와 같은 열 가지 명칭은생멸 외에 다른 것을 칭하지 않는다네.
【釋】심생멸문(心生滅門)에 열가지 명칭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장식문(藏識門)이라는 이름이니, 모든 염법과 모든 정법을 다 거두어들여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장문(如來藏門)이라는 이름이니, 여래법신의 체(體)를 덮어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기동문(起動門)이라는 이름이니, 끊임없이 업을 짓기 때문이다.
넷째는 유단유박문(有斷有縛門)이라는 이름이니, 장애를 대치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유거유래문(有去有來門)이라는 이름이니, 위도 있고 아래도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다상분이문(多相分異門)이라는 이름이니, 염법과 정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세간문(世間門)이라는 이름이니, 사상(四相)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유전환멸문(流轉還滅門)이라는 이름이니, 생사와 열반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상대구성문(相待俱成門)이라는 이름이니, 자체적으로 법을 성립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열째는 생멸문(生滅門)이라는 이름이니, 무상(無常)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생멸문의 열 가지 명칭이다.
이 열 가지는 제불의 모든 법장이 갖가지로 차별되는 법문을 빠짐없이 포괄하는 명칭이다.
이제까지 두가지 문이 갖는 열가지 각기 다른 명칭에 관해 설명하였다.
다음은 동이분상문(同異分相門)을 설하겠다.
두 가지 본법(本法)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그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세 가지 점에서 다르고 두 가지 점에서 같다네.
소의[依]와 법문[門]과 경계[境]가 각기 구별되기 때문이며
편(遍)과 명(名)에서 공통성을 갖기 때문이니,
명칭은 같으나 뜻이 다르기 때문이라네.
【釋】 두 가지 본법은두 가지 법문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그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일곱 가지 면에서 다르고 한 가지 면에서 같다네.
인(人)과 법(法)과 의(依)와 행(行)과 체(體)
경계(境界)와 위(位)가 각기 구별되기 때문이며
명칭이 다른 데 따라 특성도 다르기 때문이라네.
【釋】 이 두 가지 문은 일곱 가지 면에서 차별성을 갖고 한 가지
면에서 동일성을 갖는다.
무엇이 차별되는 일곱 가지 면인가?
첫째는 중생의 부류가 다르다는 것이니,
즉 진여문에는 오직 청정한 자와 해탈한 자들만 있는 반면에 생멸문에는
삼취(三聚)에 속하는 갖가지 중생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법문이 다르다는 것이니,
즉 진여문에는 오직 청정하고 깨끗한 품(品)만 있는 데 반해 생멸문에는
모든 염법과 모든 정법이 다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소의로 삼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니,
각각 소의로 삼는 마하연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행법(行法)이 다르다는 것이니,
진여문에서는 일심(一心) 일념(一念)이라도 생하면 속박이 생기므로 불생(不生)으로
행을 삼는 데 반해, 생멸문에서는 생으로 생을 멸하고 멸로 멸을 멸하는 것으로 행을 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체상(體相)이 다르다는 것이니,
심진여문은 본법과 동등한 데 반해 심생멸문은 본법과 다르기 때문이다. 『능가계경(楞伽契經)』에서
“적멸(寂滅)이란 일심을 말하며, 일심은 즉 여래장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경계가 다르다는 것이니,
각기 자소의(自所依)를 연해서 경계를 삼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위(位)와 지(地)가 다르다는 것이니,
진여문에서는 서로 섞이어 머무는 반면, 생멸문에서는 향해 나아가 머물기 때문이다.
이상이 두 가지 문이 차별성을 갖는 일곱 가지 면이다.
무엇이 동일성을 갖는 한 가지 면인가?
두루하는 범위가 같다는 점이다.
어째서 그런가?
명칭이 다른 데 따라서 특성도 다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문의위(位)와 지(地)에 관해서는 어떤 경에서 분명하게 설하고 있는가?
각각에 몇 가지 위가 있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능가(楞伽) 등의 계경에서 설했네.
진여문에 한 가지가 있고
생멸문에 두가지가 있으니 반드시
섞이는 것과 상ㆍ하가 있기 때문이라네.
【釋】 두 가지 문의 위(位)와 지(地)에 관해서는 능가 등의 경에서 분명하게 설하고 있다.
즉, 『대본능가계경(大本楞伽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회향(迴向)이 곧 신심위(信心位)요
신심(信心)이 곧 불지(佛地)며
불지(佛地)가 곧 십지(十地)요
십지(十地)는 곧 발심위(發心位)라네.
『분류능가계경(分流楞伽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십지(十地)는 초지(初地)가 되고
초지는 팔지가 되며
구지는 칠지가 되고
칠지는 팔지가 되며
이지는 삼지가 되고
사지는 오지가 되며
삼지는 육지가 되니,
적멸(寂滅)에 무슨 차례가 있을까?
『진수계경(眞修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한 살짜리 어미가 어느 때 오십 세의 아이를 낳았네.
저 오십 세의 아이는 한 살짜리 어미를 뱄다네.오십 세 아이를 낳은 한 살짜리는 대장부 남자라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이런 일이 없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경에서는 심진여문에 의지하여 그 위(位)와 지(地)를 건립하였다.
진여문에서는 뒤섞여 머무는 위만 있을 뿐, 다른 위라고는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반드시 섞인다[唯亂]’고 한 것이다.이 밖의 다른 경에서 차례로 향해 나아가는 갖가지
위와 지글 언급한 것은, 생멸문에 의거해서 안립한 것이니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생멸문에는 두 가지 위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향상문(向上門)이고,
둘째는 향하문(向下門)이다.
이 두 가지 문이 생멸문과 관련해서 위를 결택하는 내용에 관해서는 앞으로 분명하게 설하겠다.
심생멸문의 정지(正智)로 증득한 성진여(性眞如)의 이치는 어느 문에 들어가는가?
생멸문에 들어가는 것이지 진여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계(界)의 차별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문은 진여와 관련해서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진여문의 이(理)에서는 이(理)가 이(理)에서 나오는 반면, 생멸문의
이에서는 지(智)가 이(理)에서 나온다. 두 가지 문의 지(地)와 위(位)는
무슨 이유로 그 이치가 각기 다른가?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한 귀퉁이만 들어 보여주면
그 나머지는 따라서 잘 관찰해야 한다.
이제까지 네 가지 법상을 건립하는 문에 관해 설명하였다.
‘이 두 가지 문이 각각 일체법을 다 포팔한다’고 한 구절은 법문이 포괄하는 것이 원만한 문에 해당한다.
즉, 진여문이 일체법을 포괄한다는 쪽에서 보면 어느 한 법도 진여 아닌 것이 없고, 생멸문이 일체법을
포괄한다는 쪽에서 보면 어느 한 법도 생멸 아닐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여문은 생멸문의 모든 법을
포함할 수 없고, 생멸문도 진여문의 모든 법을 포함할 수 없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법을 다 포괄한다’고
말한 것은, 생멸의 일체법을 빠짐없이 포괄하며 진여의 일체법을 빠짐없이 포괄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 두 가지 문이 동등함을 지키면서 각각 구별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법문이 포괄하는 것이 원만한
문에 관해서 설명하였다.‘무슨 뜻인가?
이 두 가지 문은 서로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은 문답을 일으켜
원인을 밝히는 문에 해당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단도직입적으로 답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약설부분[略說分]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광설분(光說分)을 설하겠다.
【論】 심진여(心眞如)는 바로 일법계대종상법문(一法界大摠相法門)의 체(體)다. 무슨 말인가?
심성(心性)은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나, 단지 망념에 의해 일체 법이 차별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심념(心念)을 떠나기만 하면 경계로 나타난 모든 상(相)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상을 떠났고 명자의 상을 떠났고 심연(心緣)의 상을 떠났다. 필경 평등하고
변이(變異)함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다. 오직 일심뿐이므로 진여(眞如)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모든 언설은 임시로 붙인 이름일 뿐 실다운 내용이 없으며, 단지 망념을 따를 뿐이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여라고 할 때 그것은 상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언설 중의 언설로서, 언설을 통해 언설을 떨어버린다. 그러나 이 진여의 체는 떨어버릴 만한 것이 없다.
일체법이 모두 진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여의 체를 세울 수도 없다. 일체법이 진여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이란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에‘진여(眞如)’라는 명칭을 붙이는 줄을 알아야 한다.
【문】 위에서 말한 대로 진여가 그런 뜻을 담고 있다면,
모든 중생들은 어떻게 방편을 수순(隨順)하여 수행해야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답】 일체법을 설하기는 하지만 설하는 자도 설할 것도 없으며 일체법을 염(念)하기는 하지만
염하는 자도 염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수순이라 하며, 언설과 염을 떠나면 그것을
깨달아 들어감이라 한다. 한편 진여를 언설에 의해 분별해 보면,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니, 궁극적으로 실상을 드러내는 능력을 갖기 때문이나.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자체에 무루성품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공(空)이라 할 때, 그것은 본래부터 모든 염법과 상응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모든 차별된 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허망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은
유상(有相)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아니고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며,
유와 무를 동시에 갖는 상[有無俱相]도 아니며,
같은 상도 아니고 다른 상도 아니며,
같은 상이 아닌 것도 아니고 다른 상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같은 상과 다른 상을 동시에 갖는 상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일체법을 다 말할 수 있다.
일체 중생을 의지하여 허망한 마음이 있게 되고, 염념(念念)에 분별하지만 진여와 전혀 상응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뜻에 의해 공(空)이라고 설한 것이지, 허망한 마음을 떠난다면 사실상 공이라고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불공(不空)이라고 한 것은 이미 나타난 진여법의 자체는 공하여 망념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진심이 항상하여
변하는 일이 없고 정법(淨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불공이라 이름했을 뿐, 불공이라 해서 취할 만한 상(相)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망념을 떠난 경계라서 증득해야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釋】 여기서부터는 광설분이다. 여기에 세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체성이 되는 진여를 설한 문[根本體性眞如門]이다.
둘째는 문답을 일으켜 의심을 없애는 문[發起問答決疑門]이다.
셋째는 가설로 상을 열어 진여를 설하는 문[假說開相眞如門]이다.
첫 번째 문에 다시 세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명자를 건립하는 문[建立名字門]이며,
둘째는 진여의 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는 문[直詮眞體門]이며,
셋째는 명자를 해석하는 문[解釋名字門]이다.
‘심진여(心眞如)는 바로 일법계대종상법문(一法界大摠相法門)의 체(體)이다’라고 한 구절은
명자를 건립하는 문에 해당한다. 이는 공능(功能)을 기준으로 붙인 명칭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심진여에 각기 열 가지 명칭이 있는데, 어째서 나머지는 배제하고 이 명칭만 건립하는가?
업을 짓는다는 면에서 보아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른 명칭들은 이럴 면에
전혀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명칭으로 건립하지 않고 생략한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일심(一心)은 대업(大業)을 일으키고
법(法)은 총업(摠業)을 일으키며
계(界)는 상업(相業)을 일으키므로,
일심법이 문이 되어준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門)이란 체(體)를 이른다. 이런 이유에서 ‘법문의 체’라고 한 것이다.
갖가지 별상(別相)에 대해서는 전에 설한 것에 준해서 잘 살펴야 한다.
여기까지가 명자를 건립하는 문에 관한 설명이다.
다음으로 진여의 체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는 문에 관해 설하겠다.
‘심성은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구절은 생멸문을
배제하고 진여문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무슨 뜻인가?
진여의 법은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라서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머무는 것도 아니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머묾도 없고 달라짐도 없다.
반면 생멸의 법은 생하는 것이고 면하는 것이라서 생함도 있고 멸함도 있다.
머무는 것이기도 하고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기에 머묾도 있고 달라짐도 있다.
이렇듯 진여와 생멸은 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차별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론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할 때 ‘~이 아니다[非是]’는 뜻에서 아니 불[不]자를 쓴 것이지,
아니라는 말을 긍정한다는 뜻[是非]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니[不]라고 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여기서 말하는 진여의 법이란 백 가지 비[百非]로써 비를 부정하고
천 가지 시[千是]로써 시를 부정한다. 비를 부정하고 시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양쪽을 부정하는 데 머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망념에 의해 일체 법이 차별을 갖게 된다’라고 한 구절은 임시로 저쪽의 유(有)를 빌어서
이쪽의 무(無)를 드러낸 것이다. 즉, 생멸문의 가유(假有)를 빌어서 진여문의 실무(實無)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따라서 심념(心念)을 떠나기만 하면 경계로 나타난 모든 상은 없다’고 한 이유는, 모든 희론의 식(識)을 떠나기만 하면
모든 허망한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상을 떠났고 명자의 상을 떠났고
심연의 상을 떠났다’고 한 구절은, 떠나고 끊는 진여의 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언설(言說)과 명자(名字)와 심량(心量)에는각각 몇 가지가 있으며, 그 내용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언설(言說)에 다섯 가지가 있고
명자(名字)에 두 가지가 있고
심량(心量)에 열 가지가 있으니
계경에서 그렇게 차이를 두어 설하기 때문이네.
【釋】 언설에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상언설(相言說),
둘째는 몽언설(夢言說),
셋째는 망집언설(妄執言說),
넷째는 무시언설(無始言說),
다섯째는 여의언설(如義言說)이다.
『능가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대혜여, 상언설(相言說)이란 색(色) 등 갖가지 상을 집착하는 데서 생한다.
대혜여, 몽언설이란 본래 수용했던 허망한 경계를 염(念)하여 그 경계에 의지해 꿈을 꾸며, 깨고 나서는 허망한
경계에 의지하였으므로 실답지 않다는 것을 아는 데서 생한다. 대혜여, 집착언설(執着言說)이란 본래 들었던 바나
본래 지었던 업을 염(念)하는 데서 생한다. 대혜여, 무시언설(無始言說)이란 비롯함 없는 때로부터 희론에 집착하여
번뇌종자(煩惱種子)를 훈습(熏習)하는 데서 생한다.”
『금강삼매계경(金剛三昧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일체 만법은 다 언설과 문자[言文]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문자의 상이 그대로 의미[義]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여실상의 의미는 언설로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설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너의 중생들이 언설을 하는 곳에 있기에 언설로 설할 수 없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법을 설한다. 내가 쓰는 언설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의미를 나타내는 언설이다. 반면 중생들이
쓰는언설은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담고 있는 말에 불과하다. 의미를 나타내지 못하는 언설은
무엇이든 공무(空無)하며, 공무한 언설은 의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의미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 허망한 말일 뿐이다.
여의어(如義語)란 실다운 공[實空]으로서 불공(不空)을 말하며
공의 실성[空實]으로서 실유가 아님[不實]을 말한다.
여의어는 공(空)과 실(實) 두 가지 상을 떠났으며,
그렇다고 중간[中]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 이 법은 따라서 세 가지 상을 떠난다.
정해진 처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여(如如)에 따라 그대로 설하기 때문이다.’”
이상 다섯 가지 중에 앞의 네 가지는 허망한 언설이므로 진리를 논할 수 없고,
마지막 하나만이 여실한 언설이므로 진리를 논할 수 있다. 마명보살은 앞의 네 가지에 의거했기 때문에
‘언설의 상을 떠났다’고 말한 것이다.
명(名)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각각의 글자에 따라 차별되는 명[字字名]이고,
둘째는 거울 속에 그림자를 영사하는 원리와 같은 명[字影名]이다.
『능가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여, 다음으로 명신(名身)에 관해 설하겠다. 자(字)는 명자(名字)로부터 차별된다.
즉, 아[阿] 자에서 가[呵] 자까지를 명신이라고 한다.”
『도품계경(道品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거울 속의 영상이 동시에 펼치는 언설[共說]과도 같다고 해서 영상의 명[影名]이라고 한다.”
자(字)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소리에 의지하는 자[依聲字]고,
둘째는 공에 의지하는 자[依空字]다.
『능가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여, 다음으로 자신(字身)에 관해 설하겠다. 소리의 상단과 음운의 높낮이를 자신이라고 한다.”
『대혜계경(大海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전에 이렇게 물었다.
무엇을 허공륜자(虛空輪字)라고 하느냐고, 그것은 마치 허공에 나는 새가 밝은 빛을 타고 저 너머로 가면서
열 가지 어우러진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허공륜자도 이와 마찬가지임을 관해야 한다.’”
명(名)과 자(字) 이 두 가지에서 각각 첫 번째 것으로는 매우 깊은 진리를 설명할 수 없고,
두 번째 것으로는 진리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의 것, 즉 자자명(字字名)과 의성자(依聲字)를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명자상을 떠났다’고 말한 것이다.
심량(心量)에는 열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1. 첫째는 안식의 심량[眼識心],
2. 둘째는 이식의 심량[耳識心],
3. 셋째는 비식의 심량[鼻識心],
4. 넷째는 설식의 심량[舌識心],
5. 다섯째는 신식의 심량[身識心],
6. 여섯째는 의식의 심량[意識心],
7. 일곱째는 말나식의 심량[末那識心],
8. 여덟째는 아리야시의 김량[阿梨耶識心],
9. 아홉째는 다일식의 심량[多一識心],
10. 열째는 일일식의 심량[一一識心]이다.
이상 열 가지 중에서 안의 아홉 가지 심량은 진리를 연하지 못하고,
마지막 심량 한 가지만이 진리를 연하여 경계로 삼을 수 있다.
여기서는 앞의 아홉 가지에 의거해서 ‘심연(心緣)의 상을 떠났다’고 한 것이다.
본유계경(本有契經)』에서는 “깊고 깊은 진리는 오직 자소의(自所依)의 연(緣)을 경계로 삼을 뿐, 여타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설했기 때문이다.‘필경 평등하고 변이(變異)함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다’고 한 구절은 세 가지를 떠난 데서 나오는 공덕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다. 즉, 모든 차별이 네 가지 허망한 언설을 근본으로 삼아 전개되며, 모든 외도의 아홉 가지 왜곡된 주장과
열 가지 엉뚱한 집착은 다름 아닌 명자(名字)를 근본으로 삼아 전개되며, 깨뜨리는 모습을 가진 모든 번뇌장(煩惱障)과
무너뜨리는 모습을 가진 모든 소지장(所知障)은 다름 아닌 심품(心品)을 의지처로 삼아 전개되지만,
진여의 체에는 이 세 가지 상을 떠나므로 세 가지 공덕이 가득 차 있다. ‘오직 일심뿐이므로 진여(眞如)라는 명칭을 부여한다’는
구절은, 체의 진여[體眞如]를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언설은 임시로 붙인 이름일 뿐 실다운 내용이 없으며, 단지 망념을 따를 뿐이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은 세 가지를 떠나는 이유를 드러내는 말이다. 즉, 모든 언설에는 실(實)이 없고 모든 가명(假名)에는 실이 없으며 모든 식심(識心)은 단지 망념을 따를 뿐이어서 얻을 수가 없기에 언설로는 할 수 없지만 진실한 이치에서는 이 세 가지 상을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허가(虛假)의 상과 여실(如實)의 법은 지극히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진여라고 할 때 그것은 상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구절은 한걸음더 나아가 다른 각도에서 전개하는 말로서,
집착의 허물을 떨어주기 위한 말이다. 즉, 어리석은 중생은 집착하기를, “세 가지 상을 멀리 떠나 세 가지 덕을 원만히
갖춘 제진여의 이치에 비록 가상(假相)은 없다 해도 실상(實相)이 있어서 본래 그렇게 상주하니 결정코 실유가 아닌가?”라고
한다. 이러한 집착으로 인해 항상하다[常]는 견해에 떨어져 벗어날 기약이 없기에, 이러한 견해를 떨어주기 위해서
‘진여라고 할 때 그것은 상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말을 보탰다.
‘즉, 언설 중의 언설로서, 언설을 통해 언설을 떨어버린다’고 한 구절은 진여가 상을 갖지 않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보여준 말이다. 즉, 모든 언설은 궁극에 가서는 진여에 이르며, 더 이상 진여를 초과하지는 않는다. 이미 언설을 끊었는데, 어찌 없는 언설로
나타낼 상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언설을 통해서 언설을 떨어보낸다’는 말이 성립한다. 여기서 떨쳐 버리는 것[能遣]은
여여(如如)를 따라 그대로 설하는 것이며, 떨쳐 보내지는 것[所遣]은 네 가지 허망한 언설이다.
『대본유마힐계경(大本維摩詰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문수사리보살마하살이 구나아벌타다(鳩那阿筏陀多)에게 말하였다. ‘우리 모든 대중은 다 각각
자신이 즐기는 바에 따라 팔천한 가지로 불이를 향하는 문[向不二門]을 펼쳐 설합니다.
마치 유마힐께서 우리 대중을 위해 언설을 떠난 언설로 불이가 아닌 불이를 설하시어 가설의 허물을 없애주시듯.’
이때 유마힐이 아무 말 없이 잠자코 계시니 문수사리가 유마힐을 찬탄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거사시여,
말은 말대로 진여를 설하시고 귀는 귀대로 진여를 들으십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불이의 법문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불이의 법체(法體)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진여의 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는 문에 관한 내용이다.
다음으로 명자를 해석하는 문에 관해 설하겠다.
‘이 진여의 체는 떨어버릴 만한 것이 없다. 일체법이 모두 진여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은 진(眞)에 의거해서
명칭을 해석한 것이며, ‘그렇다고 진여의 체를 세울 수도 없다. 일체법이 진여와 동일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은 여(如)에 의거해서 명칭을 해석한 것이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구절을 말하는가?
끊고 증득하는 지혜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무슨 뜻인가?
번뇌를 끊는 도품[斷道]은 반드시 대치할 장애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진체(眞體)에는 떨쳐 없애야 할 염법이 없으므로 능히 대치해 나가는 번뇌를 끊는 도품 또한 있을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어느 한 법도 진체(眞體) 아닌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 장애나 지혜가 있다면 마음이 수승하고
하열함에 따라 모든 위(位)와 지(地)를 건립할 수 있지만 진여의 체에는 건립할 분위가 없으므로
능히 건립하는 방편도 있을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어느 한 법도 여체(如體)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법이란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에 진여(眞如)라는 명칭을 붙이는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구절은 이상에서 설한 내용을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말이다.
여기까지가 근본체성이 되는 진여를 설한 문에 관한 설명이었다.
다음으로 문답을 일으켜 의심을 없애는 문에 관해 설하겠다.
‘위에서 말한 대로 진여가 그런 뜻을 담고 있다면, 모든 중생들은어떻게 방편을 수순(隨順)하여
수행해야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구절은 의심을 일으켜 질문을 던지는 말이다.
묻는 자는 어느 구절에다가 어떤 의심을 일으켰는가?
‘일체법은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고 한 구절을 꼬투리로 해서
수순하기 어려움에 관한 의심을 가지고 따져 물은 것이며, 더 나아가 파생될
문제를 꼬투리로 해서 깨달아 들어가기 어려움에 관한 의심을 가지고 따져 물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순에 관한 구절은 인(因)에 관한 의문을 직접적으로 물은 것이며
깨달아 들어감에 관한 구절은 과(果)에 관한 의심을 직접적으로 물은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훌륭한 언설은 문혜(聞慧)를 낳고 자라게 해서 방편을 수순하게 하고, 견문을 통해 성취한 지혜는
사혜(思慧)를 낳고 자라게 하여 방편에 수순케 하며, 사유를 통해 성취한 지혜는 수혜(修慧)를 낳고 자라게 하여
방편을 수순하게 한다.훌륭한 가르침은 어느 것이든 언설을 다하며, 삼혜(三慧)는 무엇이든 염법(念法)을 다한다.
그러므로 언설이 없으면 삼혜도 없고, 삼혜가 없으면 만행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진여의 법은 설할 수 없으므로
언설의 가르침도 없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삼혜도 없으며, 삼혜가 없으므로 십지의 만행을 성취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모든 중생들은 무엇을 의지처로 삼아 점점 닦아 나가야 하는가?’ 하는 이런 의심이 들었으므로 한다
‘어떻게 수순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나아가‘인이 되는 행[因行]은 능기(能起)에 해당하고 과가 되는 덕[果德]은 소기(所起)에 해다. 그런데 일으키는
인이 없다면 능입(能入)도 없고, 능입이 없다면 소입(所入)도 성립할 수 없다.
능입은 금강심(金剛心)을 말하고 소입은 금강지(金剛地)를 말한다. 그렇다면 인이 없는데 무엇을 문으로 삼아
여래의 살바야해(薩婆若海)에 깨달아 들어가겠는가?’ 하는 이런 의심이 들었으므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 두 가지 물음은 생멸문에 의지해서 진여문에 관해 의심을 일으킨 것이다. 무슨 말인가? 어떤 중생들은, ‘생멸문에서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닦아 인행을 빠짐없이 갖추어 원만한 과덕을 성취하듯이, 진여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럴진대 ≺설명할 수 없다≻는 구절은 결과적으로
가행의 선[加行善] 가행선이란 문(聞)ㆍ사(思)ㆍ수(修) 삼혜(三慧)를 자량(資糧)으로 삼아 닦아 나아가는 것이다.
생멸문(生滅門)에서 왕향(往向)하는 이치에입각해서 진여에 난주(亂住)하는 이치에 의심을 냈으므로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45상)을 부정하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또 ≺생각할 수 없다≻는 구절은 결과적으로 다섯 가지 등의 위[五等位]를 비방하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의심한다.
여기서는 이런 의도를 가지고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일체법을 설하기는 하지만 설하는 자도 설할 것도 없으며
일체법을 염(念)하기는 하지만 염하는 자도 염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수순(隨順)이라 하며,
언설과 염을 떠나면 그것을 깨달아 들어감이라 한다’고 대답한 구절은, 물은 순서에 따라 저 의심을 풀어준다.
수순에는 본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생멸의 수순이고,
둘째는 진여의 수순이다.
생멸의 수순 가운데 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향상(向上)의 수순이고, 둘째는 향하(向下)의 수순이다.
향상의 수순이란 신위[信]로부터 금강지[金剛]에 이르기까지, 보리과를 향해 수순하는 방편을 말한다
향하의 수순이란 청정하고 묘한 자성의 장(藏)으로부터 최초[第一]의 염인 신(信)에 이르기까지 야야지(耶耶地)를
향해 수순하는 방편을 말한다.
향상의 수순이라고 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상(無常)의 음성과 언설을 통해 무상의 문혜(聞慧)가 생기고 자라나며, 무상의 문혜를 통해 무상의 사혜(思慧)가 생기고
자라나며, 무상의 사혜를 통해 무상의 수혜(修慧)가 생기고 자라나며, 무상의 수혜를 바탕으로 무상의 인행과 과덕이 생기고
자라난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 향한다[向上]는 표현을 쓴 것이다.
향하의 수순이라고 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향상된[常] 인행과 과덕을 바탕으로 향상된 수혜가 생기고 자라나며, 항상된 수혜를 바탕으로 항상된 사혜가 생기고 자라나며,
항상된 사혜를 바탕으로 항상된 문혜가 생기고 자라나며, 항상된 문혜를 바탕으로 항상된 언설이 생기고 자라난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로 향한다[向下]는 표현을 쓴 것이다.
향상ㆍ향하의 두 가지 문은 전후가 아니라 동시적인 관계를 갖는다. 수순하는 데 따르는 장애와 지혜의 차별에 관해서는 해당되는 문장이 나오는 곳에서 분명하게 밝히겠다. 진여문에서 ‘설명할 수도 없다’고 한 이유는
진여문에 항상된 음성언설과 무상한 음성언설이 없기 때문이며,
‘생각할 수도 없다’고 한 이유는
진여문에 항상된 삼혜와 무상한 삼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서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이지, 진여 자체[自]의 언설이나 심념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뜻으로 미루어 보건대, 다른 각도의 문제를 가지고 엉뚱한 방향에서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진여문이 있기 때문에 저 생멸문이 있고, 저 생멸문이 있기 때문에 이 진여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여문에 속하는 언설과 염은 어떤 특성을 갖는가?
진여문에 어떤 언설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항상된 음성도 아니고 무상한
음성도 아니다. 즉 설하는 주체도 설할 대상도 없는, 여여 그대로의 언설이다.
또 진여문에 어떤 염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항상된 삼혜도 아니고 무상한 삼혜도 아니다.
즉 염하는 주체도 염할 대상도 없는, 적멸적정의 염이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문에는 어디를 향한다거나 나아간다거나 하는 일이 없고, 뒤섞여 머물기 때문이다.
무엇을 진여의 수순이라 하는가?
비록 일체법을 설하기는 하나 상설(常說)의 언설도 없고 무상설(無常說)의 언설도 없으며 능
설(能說)의 언설도 없고 가설(可說)의 언설도 없음을 안다면 이것을 진여에 수순하는 음성이라 하고,
이것과 어긋나면 진여에 대해 전도된 음성이라고 한다. 또 일체법을 염하기는 하지만 항상된
혜념(慧念)도 없고 무상의 혜념도 없으며 능념(能念)의 염도 없고 가념(可念)의 염도 없음을 알면
이것을 적멸적정에 수순하는 염이라 하고
이것과 어긋나면 적멸적정에 대해 전도된 염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수순(隨順)의 상에 관한 설명이었다.
이제부터는 깨달아 들어감에 관한 의심을 풀어 주겠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생멸문의 깨달아 들어감이고,
둘째는 진여문의 깨달아 들어감이다.
생멸문의 깨달아 들어감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향상(向上)의 깨달아 들어감이고,
둘째는 향하(向下)의 깨달아 들어감이다.
향상의 깨달아 들어감이란 금강지(金剛地)를 말하고
향하의 깨달아 들어감이란 야야지(耶耶地)를 말하니,
수순에 관한 의문을 풀어 준 설명에 준해서 관찰해야 한다.
진여문의 깨달아 들어감이란 자문(自門)이 소의(所依)가 된다.
무엇을 통해 깨달아 들어가는가?
잡위(雜位)를 통해 들어간다.
어떻게 들어가는가?
언설과 염을 떠남으로써 들어간다.
어떤 언설과 어떤 염을 떠난다는 말인가?
진여문의 구비언설(俱非言說)과 구비념(俱非念)을 말한다.
그러므로 ‘언설과 염을 떠나면 그것을 깨달아 들어감이라 한다’고 하였다.
수순이라는 첫 번째 문제에서 성취를 얻었으므로,
두 번째로 전개되는 깨달아 들어감에 관한 의문을 결단하여 이치를 밝혔다.
이제까지 문답을 일으켜 의심을 없애는 문에 관해 설하였다.
이제부터는 가설로 상을 열어 진여를 설하는 문에 관해 설하겠다.
여기에 두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의 진여문이고,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의 진여문이다.
여실공이란 여여한 체 가운데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모든 염법(染法)이 다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여실불공이란 여여한 체 가운데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모든 정법(淨法)이 빠짐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문은 하나가 하나를 동반하는 관계로서 서로 떨어지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현묘한 이치를 담고 있는 게송을 독송해야 한다.
저 게송은 다음과 같다.
세 가지 가상(假相)을 멀리떠났고
세가지 실덕(實德)을 원만히 갖추었기에
이러한 인연으로 체진여(體眞如)를 건립한다네.
사구(四句)의 상을 멀리 떠났고
사법(四法)의 덕을 원만히 갖추었기에
이러한 인연으로 상진여(相眞如)를 건립한다네.
허물과 근심을 일으키는 모든 행은
세 가지 가상과 사구의 상을 근본 삼고
모든 공덕품은 세 가지 실덕과
사법의 덕을 근본으로 삼는다네.
이러한 인연으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이 수량에 품(品)을 한정해서 이와 같이 안립한다네.
이제 이 게송을 독송함으로써 진여문을 놓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망념을 떠난 경계라서
증득해야만 상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은 뒤섞여 머무는 데서 오는 증득[雜住證]을 말함이지
방향을 세우고 닦아 나가는 데서 얻어지는 증득[往向證]을 말함이 아니다.
이제까지 심진여문에 관해 설하였다.
다음으로 심생멸문에 관해 설하겠다.
【論】 심생멸(心生滅)이란 무엇인가?
여래장(如來藏)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멸하는 마음이 있다.
불생불멸하는 것이 생멸하는 것과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음을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 이름한다.
이 식(識)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일체법을 섭수하기도 하고
일체법을 생하기도 한다.
무엇이 두 가지 뜻인가?
첫째는 각의 뜻[覺義]이고,
둘째는 불각의 뜻[不覺義]이다.
【釋】 여기에 두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1. 첫째는 소의총상문(所依摠相門)이고
2. 둘째는 능의별상문(能依別相門)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니,
사유에 머물러 관찰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한편으로는 생멸문이 일심(一心)을 의지처로 삼고,
한편으로는 생멸문의 각의 뜻과 불각의 뜻이
아리야식을 의지처로 삼기 때문에 이런 이중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인 소의총상문에 대해 설하겠다.
‘심생멸(心生滅)이란’이라고 한 구절은 일심을 의지처로 삼는다는 면[上]을 환기시키려고 세운 것이다.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라고 한 구절은, 소의가 되는 일심과 거기서 다양하게 갈라져 나오는 일심을
포함하기 때문에 ‘여래장’이라 명칭한 것으로서, 즉 위의 심자(心字)에 다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른
명칭을 붙인 것이다. ‘생멸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 구절은 능의법문(能依法門)으로서, 생멸문을 말한다.
이제 경에 의거해서 여래장문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겠다. 여래장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여래장은 그 중에 어디에 속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여래장(如來藏)에 열 가지가 있으니
계경에서 다르게 설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여기서 말하는 여래장은 그 중 여행여상(與行與相)에 속한다네.
【釋】 여래장에 열 가지가 있다.
경에서 그렇게 구별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1. 첫 번째는 대총지(大摠持)여래장으로서,
모든 여래장을 남김없이 포함하기 때문이다.
『제불무진장계경(諸佛無盡藏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끝없는 큰 보배로 이루어진 수승하고 원만한 다라니[大寶無盡殊勝圓滿陀羅尼]라는
여래장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장(藏)을 남김없이 포함하여 어디든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무엇에든 해당하지 않는 곳이 없다.
절대 원만하고 절대 평등하여 여래장이라는 여래장은 어느 것이든 이것을 근본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무엇 때문인가?
이 여래상은 여래장의 왕이며, 여래장의 주인이며, 여래장의 하늘이며, 여래장의 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갖기 때문에,
끝없는 큰 보배로 이루어진 수승마고 원만한 다라니의 여래장이라 이름한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다라니장은 모든 여래장이 소의(所依)로 삼는 총상(摠相)이 됨을 밝히기 위해서다.
이 밖에 다른 경에 나오는 갖가지 여래장은 능의(能依)의 별상(別相)이 되기 때문이다.
무슨 의미로 여래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포섭하고 지속시키는 공능[攝持]을 가졌기 때문이다.
2. 두 번째는 유전과 속박을 멀리 떠난 여래장이다.
하나같이 청정하고 하나같이 원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실제계경(實際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불자여, 여래장이란 오직 각자(覺者)에게만 있고 여여(如如)에게만 있나. 유전(流轉)의 인을 떠났고
사려와 지식의 속박을 떠나 하나하나가 흰색과도 같이 깨끗하다. 그러므로 여래의 창고[如來之藏]라고 이름한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진여문의 일심에는 혹(惑)의 인(因)도 없고 각(覺)의 인도 없다. 따라서 혹의 과도 없고 각의 과도 없다.
하나의 진(眞), 하나의 여(如)에는 오직 청정하고 미묘한 여래의 체만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의미로 여래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잡되게 섞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3. 세 번째는 행(行)과 상(相)을 동반하는 여래상이다.
유전(流轉)의 힘을 동반하면서 법신여래를 덮고 감추기 때문이다.
『능가계경(楞伽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여래장이란 선과 불선의 인이 되어 괴로움와 즐거움을 받게 한다.
인과 본래부터 함께 하면서 생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는 것이,
마치 무대 위의 배우와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생멸문의 일심은 혹(惑)에도 힘을 부여하며, 각(覺)에도 힘을 부여하여 생사법과 열반법을 출현시킨다.
마치 허깨비가 아닌 마술사가 갖가지 마술을 보여줄 때와도 같이, 각각의 상황에 맞게 작용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무슨 의미로 여래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법신인 여래를 덮어버리는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4. 네 번째는 진여진여(眞如眞如)의 여래장으로서, 오직 여(如)만
있기 때문이다. 『진수계경(眞修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여리여리(如理如理)의 여래장은 건립되는 것도 아니고 비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 정체지(正體智) 증득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연할 바의 경계도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오직 이치와 이치만 있을 뿐, 그 밖의 저러저러한 것들은 없기 때문이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진여문의 성진여(性眞如)의 이치에는 이(理)가 이(理)로부터 나올 뿐,
지(智)가 이(理)에서 나오지는 않음을 밝히기 위해서다.
무슨 의미로 여래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5. 다섯 번째는 생멸진여(生滅眞如)의 여래장이다.
불생불멸이 생멸의 염법(染法)에 대해 수동적인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능가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찰나에도 머물지 않는 제법을 집착하여,
수시로 사견을 내면서 그에 따라 이렇게 말한다. ‘무루법(無漏法) 역시 찰나에도 머물지 않으므로
저 진여의 여래장을 파괴한다’고 그렇다면 대혜여, 금강여래장은 여래가 증득한 법으로서 찰나에
머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여래가 증득하신 법이 찰나에 머물지 않는다면 모든 성인은
성인이 될 수 없겠기에 말이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생멸문에서의 성진여(性眞如)의 이치는 무상한 상(相)을 멀리 떠나 불생불멸의 법이 된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무슨 의미로 여래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염법에 물들기 때문이다.
6. 여섯 번째는 공여래장(空如來藏)이다.
모든 공은 여래를 덮고 가리기 때문이다.
『승만계경(勝鬘契經)』에서 “세존이시여,
공여래장은 진여에 대해
떠나고[離]
이탈하고[脫]
달라지는[異]
일체 번뇌의 장(藏)을 갖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였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생멸문의 모든 염법이 자상(自相)의 본각(本覺)에 갖추어진
무량한 성품 공덕을 감추고덮는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무슨 뜻으로 일체 염법에 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모든 염법은 요술로 만든 허깨비와도 같이 차별을 보인다.
따라서 염법은 체상(體相)에도 실(實)이 없고 작용(作用)에도 진(眞)이 없다.
이런 뜻에서 공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법신인 여래의 실덕(實德)과 진체(眞體)를 덮어
숨기고 있으므로 이런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이름한다.
장이라는 공능[能藏]을 두고 붙인 이름이기에 공여래장이라 하였다.
7. 일곱 번째는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다. 모든 불공은 공의 염법에
물들기 때문이다. 『승만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세존이시여, 불공여래장에는 떠나거나 이탈하거나 달라지는 일이 없는,
부사의한 불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생멸문의 자상의 본각에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모든 공덕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는데,
그것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모든 염법에게 물든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무슨 이유로
모든 정법(淨法)을 불공(不空)이라고 통칭하는가? 모든 정법의 자체에는 수승하고 묘한 실다운 작용이
있어서 허망한 가법을 멀리 떠나 작위(作爲)를 초월했기 때문에 불공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염법에 의해 가려진다는 면에서 여래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편 출현할 때는 법신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숨거나 덮여 있을 때는 여래장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여기서는 소장(所藏)의 정법(淨法)을 두고 이름을 붙였기에 불공여래장이라 한 것이다.
8. 여덟 번째는 능섭여래장(能攝如來藏)으로서,
무명장(無明藏) 속의 자성청정심이 모든 공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승불감계경(不增不減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여래장의 본제(本際)와 상응하는 체(體) 및 청정법이 있다. 이 법은 여실해서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지도 이탈하지도 않는 지혜의 부사의한 법이다. 무시(無始)의 본제(本際)로부터 청정과 상응하는
법의 체를 갖기 때문이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갖가지 모든 중생의 자성청정심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세 가지 지혜와
네 가지 덕을 빠짐없이 구비하고 원만히 성취하였음을 밝히기 위해서다.
무슨 의미로 여래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전도심(顚倒心)으로 말미암아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능소(能所)의 정법(淨法)을 두긴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능섭여래장(能攝如來藏)이라 한다.
9. 아홉 번째는 소섭여래장(所攝如來藏)으로서,
일체 염법인 무명장(無明藏)은 그 자체가 이미 염법을 벗어나 원만히 깨달은 자에게 포섭되기 때문이다.
『부증불감계경(不增不減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여래장의 본제와 상응하지 않는 체 및 번뇌에
얽히는 법과 청정하지 않은 법이 있다. 이것은 본제를 이탈해서 상응하지 않는 법이며 번뇌에 얽히는 청정하지
않은 법으로서, 여래의 보리에서 나오는 지혜 가져야만 끊을 수 있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시각(始覺)의 원만한 부처님은 모든 장애를 끊고 모든 지혜를 갖추어 지혜의 밝음을 밖으로 삼고
장애의 어두움을 안으로 삼아 모든 염법의 지혜를 포섭함을 밝히기 위해서다.
무슨의미로 여래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섭지하는 공능을갖기때문이다.
10. 열 번째는 은부여래장(隱覆如來藏)으로서,
법신인 여래가 번뇌에 의해 덮이고 숨겨지며 꺼지고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부증불감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여래장은 미래제에 이르기까지 평등하고 항상하게 있는 법으로서
모든 법의 근본이 된다. 일체법을 빠짐없이 갖추어 세간법에서도 이탈하는 일이 없다. 이런 뜻에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다양성을 갖는 일심의 체는 법계와 동등하고 삼제(三際)에 두루하며, 모든 염법과 정법을
원만하게 구족해서 무엇에든 통하지 않는 바가 없고 어디든 가서 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다.
또 한편으로 수연문(隨緣門)의 자성청정심이 염법 가운데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며,
침몰되어 있을 때는 아직 법신여래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히기 위해서 이 경문을 인용하였다.
이상이 열 가지 여래장이다.
이 열 가지 중에 여기서 말하는 여래장은
세 번째 행과 상을 동반하는 여래장에 속한다.
이제까지는 여래장문(如來藏門)에 관해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아리야식문(阿梨耶識門)에 관해 설명하겠다.
‘불생불멸하는 것이 생멸하는 것과 화합해서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음을 아리야식이라고 이름한다’고
한 구절은 부분적인 명칭을 배제하고 완전한 명칭을 건립한 것이다. 뜻으로 보면 완전하지만 말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불생불멸하는 것과 생멸하는 것이란 각각 어떤 법을 말하며,
어떤 위상[分位]이나 범위[分齊]를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무위법(無爲法) 전체를 포괄하므로 불생멸(不生滅)이라 하고
유위법(有爲法) 전체를 포괄하므로 생멸(生滅)이라 한다네.
【釋】 모든 무위법을 다 포괄하므로 불생불멸이라 한 것은,
불생불멸이 갖가지 무위법의 총상(摠相)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유위법을 다 포괄하므로 생멸이라 한 것은,
생멸이라는 말이 유위법의 총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유위와 무위 두 가지 법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어떤 명칭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무위법은 비록 한량이 없으나 네 가지로 요약되니
진여(眞如)와 본각(本覺), 그리고시각(始覺)과 허공(虛空)이라네.
유위법도 한량이 없으나 다섯 가지로 요약되니
근본무명(根本無明)과 사상(四相)의 품을 말한다네.
【釋】 무위법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진여무위(眞如無爲),
둘째는 본각무위(本覺無爲),
셋째는 시각무위(始覺無爲),
넷째는 허공무위(虛空無爲)다. 이것을 네 가지 무위법이라 한다.
유위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무명유위(根本無明有爲),
둘째는 생상유위(生相有爲),
셋째는 주상유위(住相有爲),
넷째는 이상유위(異相有爲),
다섯째는 멸상유위(滅相有爲)다. 이것이 다섯 가지 유위법이다.
그렇다면 우선
네 가지 무위법은 무엇으로 체(體)를 삼으며, 어떠한 작용[用]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네 가지 무위는 각각 두 가지 소의(所依)를 가지니
공통[通]의 소의와 개별[別]의 소의라네.
무위법의 작용 역시 체와 마찬가지니
해석하는 대로 관찰해야 하네.
【釋】 진여무위는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소의[通依]로서,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일심의 본법(本法)으로 체(體)를 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소의[別依]로서, 생멸문 안의 적정(寂靜)한 이법(理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본각무위(本覺無爲)도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소의로서,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일신의 본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소의로서, 생멸문 안의 자연본지(自然本智)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시각무위(始覺無爲)도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소의로서,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일심의 본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소의로서, 생멸문 안의 남[他]을 따라 일어나는 지혜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허공무위(虛空無爲)도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소의로서, 유위도 아니고 무리도 아닌 일심의 본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소의로서, 생멸문 안의 무소유사(無所有事)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이상이 네 가지 무위법 각각이 갖는 두 가지 소의다.
진여무위는 두 가지 작용을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작용으로서, 진여무위가 일체 모든 법을 출생하는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작용으로서, 평등한 성품을 잃지 않게 하는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본각무위도 두 가지 작용을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작용으로서, 본각무위에 자성(自性)을 고수하지 않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작용으로서, 본각무위는 전변(轉變)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각무위도 두 가지 작용을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작용으로서, 시가무위가 망(妄)을 따라 전전[轉]하는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작용으로서, 시각무위가 자체의 허물을 대치하는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허공무위도 두 가지 작용을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작용으로서, 유(有)를 유가 되게 하고자 하는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작용으로서, 공무(空無)의 성품을 잃지 않게 하는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이상이 무위법이 갖는 두 가지 작용이다.
소의나 작용에 있어서,
공통적[通]이란 말은
다른 것[他]에 통한다는 뜻이며
개별적[別]이란 말은
자신[自]에게 국한된다는 뜻이다.
이 두 마디 말을 가지고 폭넓게 관찰해야 한다.
무위법이 갖는 갖가지 별상(別相)에 관해서는 해당하는 구절이
나오는 곳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다섯 가지 유위법은 무엇을 체로 삼으며, 어떠한 작용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다섯 가지 유위법은 각각 두 가지 소의를 가지니
공통적인 소의와 개별적인 소의라네.
유위법의 작용도 체와 마찬가지니 해석에 따라 관찰해야 하네.
【釋】 근본무명유위(根本無明有爲)는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1. 하나는 공통적인 소의로서,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일심의 본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2.또 하나는 개별적인 소의로서, 생멸문 안의 대력주지(大力住地)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생상유위(生相有爲)도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소의로서,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일심의 본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소의로서, 생멸문 안의 미세한 분위[細分]를 갖는 염법(染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주상유위(住相有爲)도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소의로서,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일심의 본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소의로서, 생멸문 안의 거친 분위[麤分]를 갖는 염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이상유위(異相有爲)도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소의로서,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일심의 본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소의로서, 생멸문 안의 거친 분위를 갖는 염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멸상유위(滅相有爲)도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소의로서,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일심의 본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소의로서, 생멸문 안의 거친 분위를 갖는 염법으로 체를 삼기 때문이다.
이상이 다섯 가지 유위법 각각이 갖는 두 가지 소의다.
근본무명유위는 두 가지 작용을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작용으로서, 모든 염법을 생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작용으로서, 가서 닿는 곳마다 막히는 일을 만들기 때문이다.
생상유위도 두 가지 작용을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직용으로서, 위와 아래에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인 작용으로서, 가서 닿는 곳마다 막히는 일을 만들기 때문이다.
주상유위와 이상유위의 작용은 생상유위에서 설한 내용과 같다.
멸상유위도 두 가지 작용을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통적인 작용으로서, 위[上]와 자신에 대해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나.
또 하나는 개별적인 작용으로서, 막히는 일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상이 다섯 가지 유위법 각각이 갖는 두 가지 작용이다.
유위법이 갖는 갖가지 별상에 관해서는 해당하는 구절이
나오는 곳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무슨 이유로 모든 유위법과 모든 무위법이 공통적으로 일심을 체로 삼는다고 설하는가?
계경에서 그렇게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계경을 말하는가?
예컨대 『도지경(道智經)』을 들 수 있다.
어떻게 설하고 있는가?
저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리야식(阿梨耶識)에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일체법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으며, 어느 곳에서 생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유위법과 모든 무위법은 생하는 처소가 수승하여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
어째서 그런가?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처소에, 유위법으로 무위법으로 능히 생하기 때문이다.’
문수사리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디를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처소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처소란, 다름 아닌 일심의 본법(本法)을 말한다.
유위가 아니기에 유위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무위기 아니기에 무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생하는 처소가 수승하여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고 내가 말한 것이다.
선남자여, 비유하면 여러 자식들이 대왕과 부모라는 두 가지 의지처[所依]를 갖듯이,
모든 유위법과 모든 무위법도 그와 같이 각각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즉, 통달의(通達依)와 지분의(支分依)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자면, 모든 초목이 대지와 종자라는 두 가지 의지처를 갖듯이, 모든 유위법과
모든 무위법도 그와 같이 각각 두 가지 소의를 갖는다. 즉, 통달의와 지분의다.’”그리고는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하셨기 때문이다.‘화합해서’라는 구절은 능훈(能熏)과 소훈(所熏)의 차별을 드러내 보인 말이다.
어떻게 드러내 보였는가? 모든 정법(淨法)과 모든 염법(染法)이 유력(有力)과 무력(無力)이라는 점에서 서로 번갈아 가며
우월하기도 하고 열등하기도 하다는 점을 열어 보였다. 이제부터 두 가지 문을 시설하여 분명히 설명하겠다.
나는 위로 향해서 나아가는 문[上轉門]이다. 생멸문에 이 두 가지를 벗어나는 법이라고는 없다.
이 두 가지 문은 어떻게 차별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염법이 힘을 갖고 모든 정법이 힘을 갖지 못할 때
근본을 등지고 아래로아래로 전전하니 이를하전문(下轉門)이라 한다네.
모든 정법이 힘을 갖고모든 염법이 힘을 갖지 못할 때
근원을 향해 위로 위로 전전하므로 이를 상전문(上轉門)이라 한다네.
【釋】 염ㆍ정의 모든 법이 서로 우월하고 열등한 관계에 있으므로
두 가지로 나아가는 문[二轉門]이 성립될 수 있다. 이제부터 우선
첫 번째로 아래로 향해서 나아가는 문을 설하겠다.
근본무명은 어떠한 법으로 소훈(所熏)을 삼으며,
어느 시점에서 훈(熏)하는 일을 일으키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소훈(所熏)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일법계심(一法界心)과네 가지 무위(無爲)라네.
첫 번째 것도 중간 것도 마지막 것도 아니어서처
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동시에 취했기 때문이니계경에서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라네.
【釋】 근본무명(根本無明)은 다섯 가지 법으로 소훈(所熏)을 삼는다.
즉, 일법계와 네 가지 무위법이다.
근본무명이 일법계를 훈하는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한 가지 법계심이 두 가지 자재(自在)를 가지니
유위의 자재와 무위의 자재라네. 근본무명은 이 중에
첫 번째 자재에 의거해서 훈이라는 사업을 일으킨다네.
【釋】 일법계심은 두 가지 자재를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유위자재(有爲自在)니,일법계심이 유위법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무위자재(無爲自在)니,무위법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근본무명은 뒤의 자재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첫 번째 자재에 의지해서 훈하는 사업을 일으킨다.
『중실계경(中實契經)』에서,
“근본무명은 자소의(自所依) 분제(分齊)의 양(量)을 훈하는 것이지 자기 외에 다른 것을 훈하지 않는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진여법을 훈하는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진여무위(眞如無爲)의 법은 공통적인 작용과 개별적인 작용
두 가지 작용을 가지니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네.
이 근본무명은 첫 번째 작용에 의지해서
훈하는 사업을 일으키며 나머지 무위법도 마찬가지라네.
【釋】 진여무위가 통(通)과 별(別)의 두 가지 작용을 갖는다는 점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근본무명은 뒤의 작용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첫 번째 작용에 의지해서 훈하는 사업을 일으킨다.
진여무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세 가지도 그러하여 뒤의 작용이 아닌
첫 번째 작용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근본무명이 훈하는 사업을 일으키는
시점[時]과 분량[量]은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끝도 아니므로 처음과 중간과 끝을 동시에 취한다고 하였다.
『본지계경(本智契經)』에서
“큰 힘을 갖는 무명[大力無明]이 훈(熏)하는 사업을 일으킬 때는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개별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다 취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능훈(能熏)이다 소훈(所熏)이다 할 때,
무슨 뜻을 가졌기에 훈이라는 표현을 쓰는가?
우선 능훈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근본무명이 저 법을 끌어다가 자체에 합해서 분리되지 않은 채
함께 행[俱行]하고 함께 전[俱轉]하기 때문이다.
소훈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저 법을 장애하지 않고 어느 경우든 어기지 않고 순종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다섯 가지 유위법이 네 가지 무위법과 일법계심을 훈할 때,
다섯 가지 소훈의 범이 거기에 수순해서 다섯 가지 능훈의 법과 어울려 사업을 함께 하며 동시에 전전한다.
그러므로 본론에서 ‘불생불멸하는 것이 생멸하는 것과 화합하여’라고 한 것이다.
대무명이 일심의 본법을 공통의 소의로 삼기 때문에 첫 번째 자재에 의지해서 훈습이라는 사업을 일으키는 예와 같이,
유위(有爲)의 사상(四相)도 마찬가지다. 대무명이 네 가지 무위법이 갖는 통달(通達)의 작용에 의지해서 훈하는 사업을 일으키는 예와 같이 유위의 상도 그러함을 알 것이다. 이러한 뜻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풀이하는 곳에 이르면 이치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非一非異]’고
한 본론의 구절은, 유위법과 무위법의 동일성과 차별성 문제를 드러내 주기 위함이다. 어떻게 보여주는가?
일법계심의 무위 자재와 네 가지 무위의 별사(別事) 작용이 일법계심의 유위자재와 네 가지 무위의 통달 작용과
이치상 같지 않기 때문에, 이 점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가 아니다[非一]’ 하였으며, 능훈의 염법을 받는 일법계심의
유위자재와 네 가지 무위통달 작용이 능히 훈습하는 사업을 일으키는 다섯 가지 유위법과 이치상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 점을 보여주기 위해 ‘다르지도 않다[非異]’고 하였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소훈(所熏)의 정법(淨法)이 능훈(能熏)의 염법(染法)과 각기 차별된다는 뜻에서
‘하나가 아니다’라 하였고, 능문과 소훈이 다 같이 일심에서 일어난 것이지 다른 것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다르지도 않다’고 하였다.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 이름한다’라고
한 구절은 완전한 개념[圓滿字]을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말이다.
이제까지 아래로 향해서 나아가는 문에 관해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위로 향해서 나아가는 문[上轉門]을 설명하겠다.
이 위로 향해 나아가는 문을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기 위해 계경의 말씀을 앞서 소개하겠다.
『능가왕계경(楞伽王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세존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여러 불자들이여, 내가 옛일을 기억해 보니
출현[出]해 있을 때 내가 오는 것은 남[他]을 의지해서고,
들어 가[入] 있을 때 남이 오는 것은 나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을 밝히려고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두 가지 나아감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여주는가?
‘출현[出]해 있을 때 내가 오는 것은 남[他]을 의지해서’라고 한 것은 아래를 향해 나아감을 말하고,
‘들어 가[入] 있을 때 남이 오는 것은 나를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위를 향해 나아감을 말한다. 무슨 뜻인가?
‘나’란 진여본가인 여래장의 불(佛)을 말하며,
‘온다’는 것은 훈습을 받는다는 뜻이다.
남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각을 뒤로 하고 무명인 남[他]에게 의지 안다는 뜻이다.
위 경문에 의거해서 아리야식문을 해석했기 때문에 ‘불생불멸하는 것이 생멸하는 것과 화합하여’라고 하였으니,
이는 아래로 향해서 나아가는 문에 해당한다. 만일 위로 땅해서 나아가는 문을 성립시키고자 한다면
‘생멸하는 것이 불생불멸하는 것과 화합하여’라고 했어도 무방하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현리론(玄理論)』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마명보살은 본아세야(本阿世耶)에서 위와 같은 차례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본체에 그림자가 저절로 따르듯이 한쪽만을 제시함으로써 숨겨진
다른 한쪽도 아울러 드러내는 논법이다. 그러므로 빼먹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위로 향해서 나아가는 문에 관한 내용은 「대치사집분(對治邪執分)」에 가면 이치가 자명해진다.
이상이 위로 향해서 나아가는 문에 관한 설명이다.
다음으로 해섭안립문(該攝安立門)을 설하겠다.
갖가지로 차별되는 식(識)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어떠한 계경에서 각각 식을 몇 가지로 설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모니(牟尼) 대각존께서 평생토록 설하신 성스런 말씀 중에서
식(識)에 대한 말씀을 다 모으면 열 가지가 있으니각각의 계경에서
다르게 설하고 있다네. 한 가지로부터 시작해서열 가지로 끝나니
귀본계경(歸本契經) 등에서 분명히 설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釋】 일대에 걸쳐 식(識)에 대해 여러 성인이 설하신 경전의 말씀을
모아 보면 다해서 열 가지가 있다. 즉, 한 가지 식으로부터 열 가지 식에 이른다.
어떤 것이 열 가지 다르게 설하는 경인가?
첫 번째는 한 가지 식을 건립해서 모든 식을 다 포괄한다는 설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가 되는 하나의 심식[一切一心識]을 건립해서 모든 식을 포괄한다.
하나의 심식이 두 가지 자재에 두루하여 무엇이든 안립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심계경(一心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문수사리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몇 가지 식을 설하시며, 그 체상(體相)은 어떠합니까?
원컨대, 저를 위하여 분별해서 열어 보여 주소서,’ 이때 세존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문수사리여, 모든 대중을 위해 이런 물음을 던지는구나. 잘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내 이제 그대를 위해 분별하여 해설해 주겠다.’
그러자 문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즐거운 마음으로 듣기를 원하옵니다.
’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식만을 건립할 뿐, 그 밖의 식은 건립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한 가지 식이란, 많음도 되고 하나도 되는 유일한 식[多一一識]이다.이 식은 갖가지 힘을 가지며 갖가지 모든 명자를 지어내는데, 오직 한 가지 식일 뿐 결코 다른 법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한 가지 식만을 건립할 뿐, 그 밖의 식은 건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둘째는 아리야식(阿梨耶識) 하나를 건립해서 모든 식을 다 포괄한다.
아기야식이 장애(障礙)와 무장애(無障礙)의 뜻을 구속하여 포괄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아리야식계경(阿梨耶識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이때 관자재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통달총상식(通達摠相識)이라고 하며,
무슨 이유로 총상(摠相)이라는 명칭을 붙입니까?’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통달총상식이란 아리야식을 말한다.
이 식에는 막힘[礙事]과
막히지 않음[非礙事]이 있어서 일체법을 빠짐없이 갖춘다.
마치 큰 바닷물이 물과 파도에게 공통적으로 해당한다는 뜻에서
총상이라는 이름을 얻듯이, 이런 의미에서 총상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셋째는 말나식(末那識) 하나를 세워서 모든 식을 다 포괄한다.
말나식이 열한 가지 뜻을 갖추어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현료계경(顯了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갖가지 심식(心識)은 한량없이 많지만 오직 말나(末那)의 전변(轉變)일 뿐 그 밖의 법은 없다. 어째서 그런가?
이 말나식은 열한 가지 뜻을 갖추어, 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의식(意識) 한 가지를 건립하여 모든 식을 다 포괄한다.
의식에는 자재한 일곱 가지 전변(轉變)이 있어서 그에 따라 맞는 일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칠화계경(七化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겠다. 요술을 부리는 마술사는 하나뿐이지만 요술의 힘으로 일곱 사람을 만들어낸다.
어리석은 이는 그것을 보고 일곱 사람이라고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그것을 보고 한 사람일 뿐 나머지
일곱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안다. 의식(意識)이라는 마술사도 이와 마찬가지다.
오직 하나 뿐인 식이 일곱 가지 일[事]을 지어내는데, 범부들은 그것을 보고 일곱 가지 일이라고 하지만 깨달은 이는
그것이 오직 의식일 뿐 나머지 일곱 가지는 없음을 안다.”이상이 동일한 한 가지 식만을 건립하는 네 가지 계경이다.
두 번째는 두 가지 식을 건립하여 모든 식을 포괄하는 설이다. 무엇이 두 가지 식인가?
첫째는 아리야식이고
둘째는 의식이다.
아리야식이라는 이름에 업식(業識)ㆍ전식(轉識)ㆍ현식(現識)의
세 가지가 다 따라오기 때문이며, 의식이라는 이름에 일곱 가지 전식[七轉識]이 다 따라오기 때문이다.
『능가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여, 자세히 설하면 여덟 가지 식이 있고, 간략하게 설하자면
두 가지 식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요별식(了別識)이고,
둘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세 가지 식을 건립하여 모든 식을 다 포괄하는 설이다.
무엇이 세 가지 식인가?
첫째는 아리야식이고,
둘째는 말나식이고,
셋째는 의식이다.
아리야식이라는 이름에
세 가지 식이 다 따라오기 때문이며,
말나식이라는 이름이
의근(意根)을 직접적으로 의미하기 때문이며,
의식이라는 이름에
여섯 가지 전식[六轉識]이 다 따라오기 때문이다.
『자운계결(慈雲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한편 경수(敬首)여, 자세히 설하면 열 가지 식이 있는데 그 모두를
세 가지 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미세한 양상을 갖는 성질의 식[細相性識]이고,
둘째는 근의 양상을 갖는 성질의 식[根相性識]이고,
셋째는 분위에 따라 격리되는 양상을 갖는 성질의 식[分離相性識]이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하였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네 가지 식을 건립하여 모든 식을 다 포괄하는 설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앞의 세 가지에 일심식(一心識)을 더한 것이다.
『무상계경(無相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식법(識法)은 셀 수 없이 많으나 네 가지 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소의가 되는 하나의 근본식[所依本一識]이고,
둘째는 의지와 장의 공능을 갖는 식[能依持藏識]이고,
셋째는 의가 지탱하는 식[意持識]이고,
넷째는 빠짐없이 분별하는 공능을 갖는 식[遍分別識]이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하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다섯 가지 식을 건립하여 모든 식을 다 포괄하는 설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앞의 네 가지에 수순변전식(隨順遍轉識)을 더한 것이다.
『대무랑계경(大無量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또 하나의 식이 있으니, 이 식은 저러저러한 식에 속하지 않으면서 저러저러한 식 어느 것에나 두루하다.
어디든 거슬리지 않고 순종해서 전전하는 식[隨順遍轉識]이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여섯 가지 식을 건립해서 모든 식을 다 포괄하는 설이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안식(眼識) 등 다섯 가지 별식(別識)과 제육의식(第六意識)이다. 『사성제계경(四聖諦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수왕(樹王)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작은 근기를 가진 모든 중생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밀한 취지를 가지고
이와 같이 설한다. 단지 여섯 가지 식뿐 그 밖에 다른 식은 없다고, 이것이 실제로 나의 본뜻이다.
여섯 가지 식에 모든 식이 다 들어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대중들 앞에서 이렇게 설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일곱 가지 식을 건립해서 모든 식을 다 포괄하는 설이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앞의 여섯 가지에 말나식을 더한 것이다.
『법문계경(法門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한편, 문수사리여, 식법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육식신(六識身)과 말나식을 말한다. 이 일곱 가지 식은 동시에 전전[轉]하기도 하고
전후를 갖고 전전하기도 한다. 그런데 제칠식(第七識)은 수승한 힘을 갖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장식(藏識)을
붙들어 유지시키는 작용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분별식(分別識)의 의지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여덟 번째는 여덟 가지 식을 건립하여 모든 식을 다 포괄하는 설이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앞의 일곱 가지에 아리야식을 더한 것이다.
『도지계경(道智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심왕(心王)에 여덟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 안식(眼識)의 심왕으로부터 여덟째 이숙보식(異熟報識)의 심왕을 말하니,
갖가지 의법이 이 여덟 가지 수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아홉 가지 식을 건립하여 모든 식을 다 포괄하는 설이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앞의 여덟 가지에 암마라식(唵摩羅識)을 더한 것이다.
『금강삼매계경(金剛三昧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여, 어떤 예리한 전전력[利轉]이 있길래 중생의 모든 정식(情識)을 전변하여 암마라(唵摩羅)에 들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하나의 깨달음을 통해 모든 식을 전변해서 암마리에 들게 한다.’”
열 번째는 열 가지 식을 건립하여 모든 식을 포괄하는 설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앞의 아홉 가지에다가 일체일심식(一切一心識)을 더한 것이다.
『법문계경(法門契經)』에서 “심량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열 가지 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시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했기 때문이다.이상이 식(識)을 열 가지로 다르게 설하는 경전의 말씀이다.
이 열 가지는 보배스러운 문서[寶冊] 중 어디에 들어가며,
식을 어떻게 안립(安立)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
본론에서 분명히 설했으나 지금 거듭 해석하는 것은
계경에 흩어져 나오는 문장들을이 논에 대조하여 맞추어보기 위함이라네.
【釋】 본론인 『마하연론』에서 비록 분명하게 설했지만,
이제 근기가 둔한 자를 위해 중복해서 해석하여, 각 경의 문장이 이 논의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밝히겠다.
『일심법계경(一心法契經)』에서 심식의 총체 격으로 세운
‘일체일심식(一切一心識)’은 『마하연론』의 ‘일법계(一法界)’라는 말에 해당한다.
그 의미는 이미 설한 바와 같다. 『아리야식계경(阿梨耶識契經)』에서 심식의 종체 격으로 세운 ‘아리야식’은
『마하연론』에서 총체 격으로 세운 ‘아리야식’에 해당한다. 어째서 그런가?
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불생불멸하는 것이 생멸하는 것과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음을 아리야식이라고 이름한다. 이 식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일체법을 섭수하기도 하고
일체법을 생하기도 한다.
무엇이 두 가지 뜻인가?
첫째는 각의 뜻[覺義]이고 둘째는 불각의 뜻[不覺義]이다.”
또 『현료계경(顯了契經)』에서 총체 격으로 세운 ‘대말나식(大末那識)’은
마하연론에서 총체 격으로 세운 ‘말나(末那)’에 해당한다. 어째서 그런가?
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멸의 인연이란 중생이 심(心)에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전변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아리야식에 의지해서 무명이 있음을 말한다.
불각(不覺)이 일어나 경계를 보고[能見]
경계를 나타내고[能現]
경계를 취하는[能取]
망념을 일으켜 끊임없이 상속하므로 의(意)라고 말한다.
이 의(意)에는 다섯 가지 명칭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업식(業識)이라는 명칭으로서, 무명의 힘으로 인해 불각의 심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둘째는 전식(轉識)이라는 명칭으로서,움직이는 마음에 의지하여 상을 보는 공능[能見]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셋째는 현식(現識)이라는 명칭으로서,모든 경계를 나타내는 공능[能現]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마치 밝은 거울이 색상을 나타내듯, 현식도 마찬가지로 오진(五塵)이 마주해서 다가오면 전후없이
즉시 나타내주니 언제든지 임의로 일어나 항상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라는 명칭으로서, 염법과 정법을 분별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라는 명칭으로서, 염(念)이 서로 상응하여 단절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했기 때문이다.
『칠화계경(七化契經)』에서 심식의 총체 격으로 건립한
‘동일의식(同一意識)’은 『마하연론』의 ‘일분의식(一分意識)’에 해당한다. 형식면에서 보면 교설에 빠진 것도 있지만
교설이 담고자 한 비밀스런 의도는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다음으로, 의식(意識)이란 다름 아닌 상속식(相續識)을 말한다.
모든 범부가 점점 더 깊이 소유하고 집착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를 헤아리고 갖가지 허망한 집착으로
일[事]에 따라 반연(攀緣)하여 육진(六塵)을 분별한다는 뜻에서 의식(意識)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갖가지 경에 나오는 식에 관한 설은 이 논의 해당처에 가서
그때그때 여여하게 배대하겠다.
이제까지 갖가지 경에 나오는 식의 명칭을
이 논에서 어떻게 포괄하고 정립하는가[該攝安立門]에 관해 설했다.
다음부터는 장식이라는 명칭을 분석하는 부분[藏識剖字門]을 설하겠다.
아리야식이라는 명칭은 몇 가지로 차별되며,경에서 어떻게 각각 달리 설하고 있는가?
경의 어떤 자의(字義)가 이 논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열 가지 아리야(阿梨耶)가 있으니
계경에서 달리 설하기 때문이라네.
마하건달표(摩訶鍵怛摽)
건아시가라(鍵阿尸伽羅)
백백암마라(白白唵摩羅)
흑백암마라(黑白唵摩羅)
갈라라건마(羯羅羅鍵摩)
박다제건마(縛多提鍵摩)
사가나건마(奢呵那鍵摩)
파아차니라(婆阿叉尼羅)
백백가살라(白白迦薩羅)
흑백가살라(黑白迦薩羅)
이상 열 가지 식을『마하연론』에서는분명히 드러나게 설하여 경우에 맞게 배속시킨다네.
【釋】 아리야식에는 모두 열 가지 명칭이 있다. 어째서 그런가? 경에서 그렇게 구별해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대섭주아리야식(大攝主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총상(摠相)의 대식(大識)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둘째는 근본무명아리야식(根本無明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근본무명을 독립시켜 아리야로 삼기 때문이다.
『망상계경(妄想契經)』에서, “찰사지다제왕식(刹奢只多提王識)은 다름 아닌 망법(妄法)을 가리킨다. 일법계의 체(體)를 요달하지 못하므로써, 아리야식을 근본으로 염법(染法)이 출생하고 불어나서 끊어질 때가 없다. 만일 제왕식이 없다면 흑품(黑品)의 권속은 영원히 의지처를 잃어 생장하지 못한다”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이 아리야식을 『마하연론』의 설에 배대해 본다면 어디에 들어가는가?
이 논의 “불각(不覺)이란 무엇인가?
진여의 법이 하나인 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심이 일어나
망념이 있게 되지만”이라고 한 구절과 그 이하 자세한 설명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청정본각아리야식(淸淨本覺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자연본지(自然本智)를 독립시켜 아리야로 삼기 때문이다.
『본각계경(本覺契經)에서, “자체가 청정한 불(佛)의 아리야식은 무루(無漏)를 구족하고 공덕을 완전히 갖춰 항상 청정하고 어디까지나 모호한 점이 없다. 훈습을 받는 상도 없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상도 없으며, 지(智)의 체가 부동하여 청정한 품[白品]을 구족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유일하게 청정한 식[獨一淨識]이라 이름한다”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이 아리야식을 『마하연론』의 설에 배대해 본다면 어디에 들어가는가?
이 논의 “각(覺)의 체상에 네 가지 큰 뜻이 있는데, 허공과 동등하고 깨끗한 거울과도 같다”고 한 구절과
그 이하 자세한 설명이 이에 해당한다.
넷째는 염정본각아리야식(染淨本覺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 다라니의 지혜[不守自性陀羅尼智]를 독립시켜 아리야로 삼기 때문이다.
『본인연기계경(本因緣起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광엄동자(光嚴童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여, 무슨 인연으로 이제껏 있지 않았던 들어가기 어려운 법회[未曾有會]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다른 연을 따라 일어나는 다라니 지혜[隨他緣起陀羅尼智]를 능가왕식(楞伽王識)이라 이름한다고,
무엇을 능가왕이라 하기에, 그것을 비유로 들어 연을 따라 일어나는 다라니의 지혜를 보여주십니까?’
이때 존자께서 광엄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능가왕은 항상 큰 바다 속 마라산(摩羅山)에 거처하며 십만 육천 귀신들을 권속으로 거느리고 있다. 이러한 권속들은 모두 변화궁전[化宮殿]을 타고 여러 국토를 돌아다니는데, 예외 없이 능가왕의 힘에 의지해야
비로소 돌아다닐 수 있다.
저 귀신의 무리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신중(神衆)들은 아무런 위력이나 덕이 없고, 아무런 기력도 없어서 그런 일들을 할 능력이 없다. 여의대왕(如宜大王)이
우리 신중에게 감당할 능력을 부여하시고 저 능가왕이 적절한 때를 보아 수승한 능력을 부여하시기에 그 분의 힘과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함께 다니기 때문이다≻라고. 그것은 능가왕이 비록 자신의 몸을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신중에게 힘을 골고루 완전히 행사하여 각각에게 자신의 몸과 똑같은 분량을 얻게 함으로써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왕과 분리되지 않고 함께 활동한다는 뜻이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에 따라 일어나는 지혜[不守自性智]도 마찬가지로 한량없고 끝이 없는 모든 염법과 번뇌의 귀신들의 훈습을 받아 분리되지 않은 채 동시에 다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들어가기 어려운 회중에서 다른 연을 따라 움직이는 각지(覺智)를 능가왕식이라고 이름한다.’”
이 아리야식을 『마하연론』의 설에 배대해 본다면 어디에 들어가는가,
이 논의 “마찬가지로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도 무명이라는 바람에 의해 움직임이 생기는데,
실과 무명은 다 같이 형상이 없고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라고 한 구절과 그 이하 자세한 설명이 이에 해당한다.
다섯째는 업상업식아리야식(業相業識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
근본업상(根本業相)과 업식(業識)을 독립시켜 아리야로 삼기 때문이다.
『본성지계경(本性智契經)』에서,
“아리야식에는 능료(能了)의 작업도 없고
소료(所了)의 작업도 없다.
나눌 수도 없고 떨어뜨려 구분할 수도 없다.
오직 정밀하게 움직이고 은밀히 흐른다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건마(鍵摩)라고 이름한다”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이 아리야식을 『마하연론』의 설에 배대해 본다면 어디에 들어가는가?
이 논의 “다음으로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상이 나오지만,
세 가지 상은 저 불각과 서로 상응하여 분리되지 않는다. 무엇이 세 가지 상인가?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다.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망심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이라 한다. 깨닫기만 하면 망념이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면 바로 괴로움이 있게 된다. 과는 인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여섯째는 전상전식아리야식(轉相轉識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
경계상을 능견(能見)하는 것과 전식(轉識)을 독립시켜 아리야로 삼기 때문이다.
『대무량계경(大無量契經)』에서, “아리야식은 유견(有見)의 견(見)으로 전(轉)하고
무견(無見)의 견(見)으로 일어난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이 아리야식을 『마하연론』의 설에 배대해 본다면 어디에 들어가는가?
이 논의 “두 번째는 능견상(能見相)이다.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므로,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일도 없다”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일곱째는 현상현식아리야식(現相現識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
경계의 상과 현식(現識)을 독립시켜 아리야로 삼기 때문이다.
『실제계경(實際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각각 다르게 현전하는 지(地)를 따라 전(轉)하며 서로 다르게 행을 구족하며 전하기 때문에 아리야식이라 이름한다.
한편 이 아리야식은 순수한 이숙무기(異熟無記)의 법으로서 흰색과도 같이 깨끗한 상을 갖기에 성취라고도 이름한다.”
이 아리야식을 『마하연론』의 설에 배대해 본다면 어디에 들어가는가?
이 논의 “세 번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다.
보는 공능에 의지하기 때문에 경계가 망령되이 나타나니, 보는 일을 떠나면 경계도 없다”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여덟째는 성진여리아리야식(性眞如理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
정지(正智)로써 증득한 청정한 진여를 독립시켜 아리야로 삼기 때문이다.
『제법동체계경(諸法同體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모든 식(識), 즉
시식(是識:妄識)과 비식(非識:智)도 다 식에 소속되는 것이다”라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여여아리야식(如如阿梨耶識)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리야식은 『마하연론』의 “청정반야의 본질 경계[質境]는 진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아홉째는 청정시가아리야식(淸淨始覺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
본유(本有)의 청정한 시각반야(始覺般若)를 독립시켜 아리야로 삼기 때문이다.
『과원만계경(果圓滿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보리수왕(菩提樹王)에게 말씀하셨다.
‘자연시각아리야식(自然始覺阿梨耶識)은 당연히 항상 청정본각을 여의지 않으며,
청정본각은 당연히 항상 시각의 청정식을 여의지 않는다.
이것이 있으면 그에 따라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그에 따라 이것이 있는데,
때로는 종류를 같이하며
때로는 종류를 달리한다.’”
여기서 말하는 아리야식은 『마하연론』의 “본각의 의미는 시각(始覺)의 상대적 개념으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각의 의미는 다름 아닌 본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열째는 염정시각아리야식(染淨始覺阿梨耶識)이라 이름하니,연을 따르는 시각 반야를 독립시켜 아리야식으로 삼기 때문이다.
『과원만계경(果圓滿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리고 보리수왕이여, 시각의 청정한 식과 청정한 본각을 염정시각아리야식이라고 하듯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에 따라 일어나는 본각(本覺)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 아리야식을 『마하연론』의 설에 배대해 본다면 어디에 들어가는가?
이 논의 “무슨 뜻으로 시각의 측면[始覺義]을 말하는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게 되고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설한다.
한편,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 이름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니라고 한다”고 한 구절과 그 이하 자세한 설명이 이에 해당한다.
이상에서 말한 내용은 본론에 들어가서 결택할 때가 되면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말나(末那)의 열 가지 뜻과
여섯 가지 의식(意識)에 대해서는
앞으로 나올 문장에서 차례로 해석하겠기에 여기서는 생략했을 뿐이다.
여기까지 장식이라는 명칭을 분석하는 부문[藏識剖字門] 및
장식의 상을 분별하는 문[分相門]에 관해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총식이 일체법을 거두어들이고 생하며 공덕과 허물을 원만히
갖추었다는 점을 밝히는 부문[摠識攝生圓滿門]에 관해 설하겠다.
이 식은 두 가지 측면[義]을 가지며,
그럼으로써 일체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일체법을 다 생한다.
무엇이 두 가지 측면인가?
첫째는 각의 측면[覺義]이고
둘째는 불각의 측면[不覺義]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이 수승하고
원만한 본식(本識)의 상(相) 전체를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가?
두 가지를 원만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공덕(功德)이 원만하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허물과 근심이 원만하다는 것이다.
공덕이 원만하다고 하는 이유는,
각(覺)이라는 자구(字句)가 모든 공덕을 여의기나 금지 않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무량무변한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모든 공덕을 여의거나 끊지 않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무량무변한 일체를
다 생하기 때문이다. 허물과 근심이 원만하다고 하는 이유는, 불각(不覺)이라는 자구가 갖가지 허물과 근심을
여의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무량무변한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갖가지 허물과 근심을 여의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무량무변한 일체를 다 생하기 때문이다.
거두어들이고 생하고 훈습하는 이러한 갖가지 차별상에 대해서는 저 별상을 다루는 결택분(決擇分)에서 분명하게 밝히겠다.
已說立義分,
次說解釋分。
解釋分中,
法門名字其數幾有,其相云何?頌曰:唯有四種法 餘二十九門 略不解釋故九論已說故。
論曰:解釋分中,唯釋四法,所餘法門略不別釋。
云何爲四?
一者一體摩訶衍,
二者三自摩訶衍,
三者眞如門,
四者生滅門。
何故餘法略不解釋?一心遍滿等九論中,已解釋故。所謂一心遍滿論中,唯釋四法,所餘法門略不別釋。
云何爲四?
一者一體一心摩訶衍,
二者三自一心摩訶衍,
三者一體一心門,
四者三自一心門。
融俗歸眞論中,唯釋四法,所餘法門略不別釋。云何爲四?
一者無量無邊諸法差別,不增不減體大摩訶衍,
二者寂靜無雜一味平等,不增不減體大摩訶衍,
三者諸法差別,不增不減體大門,
四者一味平等不增不減體大門。
法界中藏論中,唯釋四法,所餘法門略不別釋。云何爲四?
一者如來藏功德相大摩訶衍,
二者具足性功德相大摩訶衍,
三者如來藏功德相大門,
四者具足性功德相大門。
祕密微妙論中,唯釋四法,所餘法門,略不別釋。云何爲四?
一者能生一切世閒因果用大摩訶衍,
二者能生一切出世閒善因果用大摩訶衍,
三者世閒因果用大門,
四者出世閒善因果用大門。
衆命合一論中,唯釋四法,所餘法門,略不別釋。云何爲四?
一者無量無邊諸法差別不增不減摩訶衍,
二者寂靜無雜一味平等不增不減摩訶衍,
三者諸法差別不增不減門,
四者一味平等不增不減門。
眞如三昧論中,唯釋四法,所餘法門,略不別釋。云何爲四?
一者如來藏功德摩訶衍,
二者具足性功德摩訶衍,
三者如來藏功德門,
四者具足性功德門。
心性淸淨論中,唯釋四法,所餘法門,略不別釋。云何爲四?
一者能生一切世閒因果摩訶衍,
二者能生一切出世閒善因果摩訶衍,
三者世閒因果門,
四者出世閒善因果門。不動本原甚深玄理二種論中,唯釋一法,所餘法門,略不別釋。
云何爲一?所謂不二摩訶衍法。廣說略說各差別故。何故諸論建立門中,備標本數,散說門中,
各闕其數?爲欲顯示法體不分,義門得別故,
復次,爲欲令使學者增長思惟力故。
復次,爲欲令使開示教理,甚深極玄,出生尊重讚歎心故。
復次,爲欲顯示法門廣大,如虛空界,義理無窮,如澄神海,言說不能具談,思惟不知其量故,已說本數。次當別釋
。
本曰: 解釋有三種,云何爲三?
一者顯示正義,
二者對治邪執,
三者分別發趣道相。
論曰:如是三門,解釋四法大門數量。
本曰:‘ 顯示正義者,依一心法,有二種門。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是二種門,皆各摠攝一切法。此義云何?以是二門不相離故。
’ 論曰:卽是略說分,此中有三門。云何爲三?
一者建立四種法相門,
二者法門該攝圓滿門,
三者發起問荅顯因門。
依一心法,有二種門。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者,卽是建立四種法相門,二法二門名字差別,其數幾有,其相云何?
頌曰:各有十種名 契經異說故 而無有別體隨能立名故。
論曰:二法二門,各有十名。諸契經中,別別說故,而其法體無有差別,隨彼功能,立其名故。二種本法十名云何?
頌曰:毘摩訶健那 摩訶鳩尸帝 摩尸陁那羅摩迦羅俱舍。 必薩伊尼羅 婆伽婆俱舍必達摩邊那 或名摩訶衍。
婆伽叉一婆必阿素摩利 如是十種名 通二種本法。
論曰:二種本法各有十名。名通義別。云何爲十?
一者名爲廣大神王,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鳩那耶神王,
二者遮毘佉羅神王。第一神王住金剛山,一向出生吉祥神衆。第二神王住大海中,遍通出生一切種種吉祥神衆、過患神衆。
二種本法廣大神王,亦復如是。一體本法一向出生眞如淨法。三自本法遍通出生一切種種淸白品法、染污品法故,
自體契經中,作如是說:文殊師利,前白佛言:世尊,甚深極妙二種大乘,不知,不覺,同異。極疑衆心,如宜世尊,
爲衆更說。佛造作相,而告文殊言:善男子,如是二法,譬如金剛神王及主海神王,其相各差別。謂如金剛神王,
住金剛山,現諸境界,唯現金光,不現餘光,眞如一心金剛神王亦復如是。唯有淨法,無有餘法故,
又如金剛神王唯出生淸淨眷屬,嘗不出生雜亂眷屬,眞如一心亦復如是。唯出生無垢淸淨法故。復次,譬如主海神王,
住大海中,出生種種麤惡眷屬,種種善妙眷屬,生滅一心主海神王亦復如是。出生一切染淨法故。二者名爲大虛空王
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空自在空王,
二者色自在空王。第一空王以空容受,而爲自在,第二空王以色容受,而爲自在。二種本法亦復如是。一體空王以無住處,
而爲自在;三自空王,以有住處,而爲自在故。金剛三昧契經中,
作如是說;一心如法理,自體空無,如彼空王本無住處。一地契經中,
作如是說:一心法體,於諸障㝵,無有障㝵,令住諸法,譬如空王,於一切色,得自在故,容受大種故。
三者名爲出生龍王。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出生光明龍王,
二者出生風水龍王。第一龍王以淨光明,而爲依止;第二龍王以風水德而爲依止。
二種本法,出生龍王,亦復如是。一體本法,以純淨法,而爲其體
三自本法,以染淨法,而爲其德故。順理契經中,
作如是說:一心本法,純一無雜,譬如光明龍王,
以淨光明,而爲宮殿,以淨光明,而爲相身,以淨光明而爲徒衆無始契經中作如是說譬如大海中,有大龍王,名曰出生風水。
從其頭頂,出生澄水從其尾末,出生標嵐。由是龍王故,大海水風,常恒相續,無有斷絕,一心龍王亦復如是。能生一切差別平等種種諸法,常恒相續,無有斷絕故。四者名爲如意珠藏。
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金主如意,
二者滿主如意。第一如意,唯出金剛,第二如意,具足出生善不善物。二種本法,亦復如是。一體如意,唯生淨法;
三自如意,通生染淨法故。如如契經中,作如是說:佛告金剛藏菩薩言:佛子,譬如金翅鳥,王命終,然後其心入海,
爲如意珠。能生金沙,利益龍王,一心本法亦復如是。能生眞理利圓滿者故本性智契經中作如是說譬如遮多利鬼,
爲報恩故,於一萬劫,爲如意珠,利益海生,一心如意亦復如是。能生長生死,及涅盤法故。
五者名爲方寸。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白毫方寸,
二者亂色方寸。第一方寸中,唯現前天像;第二方寸中,通現前五趣。如是二毫衆生身分,顯了分明,譬如明鏡,
二種本法亦復如是。故攝無量契經中,作如是說:淸淨法界如白必薩伊尼羅,無盡法界如亂必薩伊尼羅故。
六者名爲如來藏。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遠轉遠縛如來藏,
二者與行與相如來藏。
實際契經中,作如是說:佛子,如來藏者,唯有覺者,
唯有如如,離流轉因,離慮知縛,一一白白。是故名爲如來之藏。楞伽契經中,
作如是說:如來藏者,爲善不善因,受苦樂,與因俱,若生若滅,猶如伎兒故。
七者名爲一法界。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純白一法界,
二者無盡一法界。
第一法界如空劫時,第二法界如住劫時。眞如法界契經中,作如是說:空種無㝵,如空長時,遍種無㝵,如有長時故。
八者 名爲摩訶衍。義如前說,
九者 名爲中實。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等住中實,
二者別住中實。
第一中實如獨明珠,
第二中實如順明珠,明中實契經中,
作如是說:離邊眞心,若眞如依,如異同珠,若生滅依,如同異珠故,十者名爲一心。
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是一是一一心,
二者是一切是一切一心。
第一一心,隨所作立名,第二一心隨能作立名。一心法契經中,作如是說:爾時,舍利弗白佛言:世尊,本地修多羅中,
作如是唱:其心體性非大,非小非法非非法非同非異非一非一切何因緣故,今日自言眞如一心,因一故一,
生滅一心,因多故一?將非世尊,無有前後相違過耶?
佛言:善男子,莫作如是說。所以者何?心法非一,因所作一故,假名爲一。
心法非一切,因所作一切故,假名爲一切。而言一心,不說一切心者,隨能作心,立其名故。
乃至廣說。
是名爲十。如是十名,摠攝諸佛一切法藏根本名字。
已說二法十種別名。次說二門名字差別。
眞如十名,其相云何?
頌曰:婆伽婆俱舍 健遮阿多那 必菩提婆梨健訶健婆那。
阿陁阿只尼 阿伽阿始耶度羅諾補帝 漠呼鍵那地。
摩訶標陁一婆阿叉尼羅 如是十種名 眞如不共稱。
論曰:心眞如門有十種名。云何爲十?
一者名爲如來藏門,無雜亂故;
二者名爲不二平等門,無差別故;
三者名爲一道淸淨門,無異歧故;
四者名爲不起不動門,離作業故,
五者名爲無斷無縛門,無治障故;
六者名爲無去無來門,無上下故;
七者名爲出世閒門,無四相故;
八者名爲寂滅寂靜門,無往向故;
九者名爲大摠相門,無別相故;
十者名爲眞如門,無虛僞故。
是名爲十。如是十名,摠攝諸佛一切法藏平等義理法門名字。
生滅十名,其相云何?頌曰:
阿梨耶鍵摩 婆伽婆俱舍
阿伊婆那羅 健訶健只尼。
健伽健始耶 叉叉筏那羅
羅諾補帝尼 闍縛多涅盤。
呵只伽那尸多跋多健舍
如是十種名 生滅不共稱。
論曰:心生滅門,有十種名。云何爲十?
一者名爲藏識門,攝持一切染淨法故;
二者名爲如來藏門,覆藏如來法身體故;
三者名爲起動門,相續作業故;
四者名爲有斷有縛門,有治障故;
五者名爲有去有來門,有上下故;
六者名爲多相分異門,染淨之法過恒沙故;
七者名爲世閒門,四相俱轉故;
八者名爲流轉還滅門,具足生死及涅盤故;
九者名爲相待俱成門,無自成法故;
十者名爲生滅門,表無常相故。
是名爲十。如是十名,摠攝諸佛一切法藏種種差別法門名字。
已說二門十種別名。次說同異分相門。
二種本法同異差別,其相云何?
頌曰:
有三異二同 各依門境別
各遍名同故 同名異義故。
論曰:二種本法有三異二同。云何爲三異?
一者依異,各有所依摩訶衍故;
二者門異,各具能入門差別故;
三者境異,各緣自依,爲境界故。
是名爲三異。云何爲二同?
一者遍同,周遍法界等其量故;
二者名同,十種名字通二法故。是名爲二同。何故如是?同名異義故。
二種法門同異差別,其相云何?頌曰:
有七異一同
人法依行體
境界位別故
異名異義故。
論曰:是二種門,有七異一同。云何爲七異?
一者人衆異,眞如門中,唯有淸淨解脫者故,生滅門中備有三聚諸衆生故;
二者法門異,眞如門中,唯有一向淸白品故,生滅門中,備有一切染淨法故;
三者所依異,各有所依摩訶衍故;
四者行法異,眞如門中,一心一念,生縛,不生,以爲其行故,生滅門中,以生滅生,以滅滅滅,以爲其行故;
五者體相異,心眞如門與其本等故。心生滅門與其本別故。楞伽契經中,作如是說:寂滅者,名爲一心。一心者,名如來藏故;
六者境界異,各緣自依,爲境界故;
七者位地異,眞如門中,相雜住故,生滅門中,往向住故。
是名爲七異。云何爲一同?
所謂遍同故。何故如是?異名異義故。
二門位地何等契經分明顯說?
各有幾位?頌曰:
楞伽等契經 眞如有一種
生滅門有二唯亂上下故。
論曰:二門位地,楞伽等契經中,明了顯說。謂大本楞伽契經中,
作如是說:迴向卽信心 信心卽佛地 佛地卽十地十地卽發心。
分流楞伽契經中,作如是說:十地爲初地 初地爲八地 九地爲七地七地爲八地。
二地爲三地 四地爲五地三地爲六地 寂滅有何次。
眞修契經中,作如是說:一歲母一時 生五十歲兒 彼五十歲兒懷妊一歲母。 生五十一歲 大丈夫男子或豈如是有 或豈如是無。
如是等諸經,依心眞如門,建立其位地。於眞如門,唯有一向雜亂,住位無有餘位。是故頌曰唯亂。餘契經中,
次第往向種種位地,依生滅門而所安立。應審觀察,於生滅門,有二種位。
云何爲二?
一者向上門,
二者向下門。如是兩門,生滅決擇,自當顯說。心生滅門正智所證性眞如理,何門所攝?生滅門所攝。非眞如門。分界別故。
二門眞如復有何別?眞如門理,理自理故。生滅門理,智自理故,二門位地。以何義故,其理各別?無障有障故,擧是一隅
隨應應觀。已說建立四種法相門。是二種門皆各摠攝一切法者,卽是法門該攝圓滿門。謂以眞如門,攝一切法,無一一法而非眞如。以生滅門,攝一切法,無一一法而非生滅故。然眞如門不能攝生滅門一切諸法。又生滅門不能攝眞如門一切諸法。而言摠攝一切法者,摠攝生滅一切法故。摠攝眞如一切法故,所以者何?如是二門,皆悉平等,各各別故。已說法門該攝圓滿門。
此義云何?以是二門不相離故者,卽是發起問荅顯因門。謂直表問故,直說荅故。已說略說分,次說廣說分。
本曰:‘心眞如者,卽是一法界大摠相法門體。所謂心性不生不滅。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若離心念,
則無一切境界之相。是故一切法從本已來,離言說相,離名字相,離心緣相,畢竟平等,無有變異,不可破壞,
唯是一心故,名眞如。
以一切言說假名無實,但隨妄念,不可得故,言眞如者,亦無有相。謂言說之極。因言遣言,此眞如體,無有可遣。以一切法,
悉皆眞故,亦無可立,以一切法皆同如故。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故,名爲眞如。問曰:若如是義者,諸衆生等云何隨順而能得入?答曰:若知一切法雖說,無有能說#可說,雖念亦無能念可念。是名隨順,若離說念,名爲得入。
復次,眞如者,依言說分別,有二種義,云何爲二?
一者如實空,以能究竟顯實故;
二者如實不空,以有自體具足無漏性功德故。所言空者,從本已來,
一切染法不相應故。謂離一切法差別之相,以無虛妄心念故。
當知眞如自性,
非有相,
非無相,
非非有相,
非非無相,
非有無俱相,
非一相,
非異相,
非非一相,
非非異相,
非一異俱相。
乃至摠說依一切衆生,
以有妄心,念念分別,皆不相應故,
說爲空。若離妄心,實無可空。故所言不空者,已顯法體空。無妄故,卽是眞心。常恒不變,淨法滿足,則名不空。
亦無有相可取#以離念境界,唯證相應故。’論曰:卽是廣說分。此中有三門。云何爲三?
一者根本體性眞如門,
二者發起問荅決疑門,
三者假說開相眞如門。
第一門中,卽有三門。云何爲三?
一者建立名字門,
二者直詮眞體門,
三者解釋名字門。心眞如者,卽是一法界,大摠相法門體者,卽是建立名字門。謂隨功能立其名故。一心眞如各有十名。
何故除餘唯立是名?作業當故,所餘衆名必非如是故。略不立,此義云何?一心作大業,法作摠業,界作相業。故法之門,
門則是體。是故說言法門體。種種別相,率向,應審。已說建立名字門。次說直詮眞體門。
所謂心性不生不滅者,直詮眞如門,而簡生滅門。謂眞如法,
非生非滅,
無生無滅。
非住非異,
無住無異。
非如生滅之法是生是滅,
有生有滅,
是住是異,
有住有異故。以相有無爲差別故。復次,非是言不。非謂是非故,言不焉。
所以者何?其眞如法,
百非非非。
千是非是。
非非,
非是,
於非二,
亦不住故。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者,且假彼有,顯此是無。謂假生滅門之假有,示眞如門之實無故。若離心念,則無一切境界之相者,若離諸戲論之識,無有一切妄境界故。是故一切法從本已來,離言說相,離名字相,離心緣相者,直顯示眞如法離絕之相故,言說、名字、心量,各有幾數,其相云何?頌曰:言說有五種 名字有二種 心量有十種契經異說故。
論曰:言說有五。云何爲五?
一者相言說;
二者夢言說,
三者妄執言說,
四者無始言說,
五者如義言說。
楞伽契經中,作如是說:大慧,相言說者,所謂執著色等諸相,而生。大慧,夢言說者,念本受用虛妄境界,
依境界夢。覺已,知依虛妄境界,不實而生。大慧,執著言說者,念本所聞,所作業而生。大慧,無始言說者,從無始來,
執著戲論,煩惱種子熏習而生。金剛三昧契經中,作如是說:舍利弗言:一切萬法,皆悉言文。言文之相,卽非爲義。如實之義。不可言說。今者如來云何說法?佛言:我說法者,以汝衆生在生說故,說不可說。是故說之。我所說者,義語,非文。
衆生說者#文語非義。非義語者,皆悉空,無空無之言無言,於義不言義者,皆是妄語。如義語者,實空不空,空實不實。離於二相,中閒不中,不中之法離於三相。不見處所,如如如說故,如是五中,前四言說,虛妄說故,不能談眞。後一言說,如實說故,得談眞理。馬鳴菩薩據前四故,作如是說,
離言說相。名有二種。云何爲二?
一者字字名,
二者字影名。楞伽契經中,作如是說:大慧,復次,名身者,所謂諸字從名字差別。
從阿字,乃至呵字,名爲名身。道品契經中,作如是說:鏡中共說,名爲影名故。字有二種。云何爲二?
一者依聲字,
二者依空字。
楞伽契經中,作如是說:大慧,復次,字身者,謂聲長短,音韻高下,名爲字身。大海契經中,
作如是說:佛告文殊師利言:汝所前問,云何名爲虛空輪字者,譬如虛空中飛鳥,踰明耀時,出十種和聲,虛空輪字,
應如是觀故。如是二中,各初一種,不能詮表甚深眞理;各後一種,得詮眞理故。
今據前門,作如是說,離名字相。
心量有十。云何爲十?
一者眼識心,
二者耳識心,
三者鼻識心,
四者舌識心,
五者身識心,
六者意識心,
七者末那識心,
八者阿梨耶識心,
九者多一識心,
十者一一識心。
如是十中,初九種心,不緣眞理。後一種心,得緣眞理,而爲境界。今據前九,作如是說:離心緣相。本有契經中,
作如是說:甚深眞理,非餘境界。唯自所依緣,爲境界故,畢竟平等,無有變異,不可破壞者,顯示三離之功德故。
謂一切差別,以四種妄言說,而爲根本而轉,一切外道九種變論、十種異執,唯以名字爲本而轉,一切煩惱破障,
一切所知壞障,唯以心品爲依轉故。而眞體中,離三相故,滿三德耳。唯是一心,故名眞如者,摠結體眞如。以一切言說,
假名無實,但隨妄念,不可得故者,顯示三離之因緣故,謂以一切言說無實,一切假名無實,一切心識但隨妄念,
不可得故#不可言說眞實理中,不離三相故。虛假之相,如實之法,極相違故。言眞如者,亦無有相者,第二轉言,遣執著之過。謂愚衆生,作如是執,遠離三相,圓滿三德,體眞如理,雖無假相,而有實相。自然常住,決定實有。由如是計,墮於常邊,
無出離時。是故爲遣如是見故,言言眞如者,亦無有相。謂言說之極,因言遣言者,直示眞如無相之因緣。謂諸言說極於眞如,更莫超過。旣絕言說。豈得有相,無相無言?故得因言遣言而已。於是能遣如如如說,所遣四種虛妄言說。
大本維摩詰契經中,
作如是說:爾時,文殊師利菩薩摩訶薩語鳩那阿筏陁多言:我等諸大衆,皆悉各各隨所自樂,宣說八千一種向不二門,
如宜維摩詰,爲我等大衆,離言說言說,說非不二不二,除遣假說之垢。於是維摩詰默然無所說。
爾時,文殊讚維摩言:善哉,善哉,居士,如言說如,如耳聽如。善哉,善哉#斯乃眞實不二法門。斯乃眞實不二法體故。
已說直詮眞體門,次說解釋名字門。此眞如體無有可遣,以一切法悉皆眞故者,約眞釋名,亦無可立。以一切法皆同如故者,
約如釋名。此文爲明何義?所謂顯示無有斷證智故。
此義云何?謂斷道起,必因治障。不能自起,而眞體中,無有染法而可除遣故。無有能治之斷道。
所以者何?以無有一一法而非眞體故。復次,若有障智,隨心高下,應可建立一切位地,而如體中,無有分位而可建立故,
無有能立之方便。所以者何?以無有一一法,而非如體故。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故,名爲眞如者,摠結所上說故。
已說根本體性眞如門,次說發起問答決疑門。
問曰:若如是義者,諸衆生等云何隨順,而能得入者,生疑致問。問者依何等句,
發何等疑?所謂依不可說不可念句故,發難隨順之疑,依第二轉言句故,發難得入之疑。於是隨順之句,
直疑其因;得入之句,直疑其果。所以者何?善巧言說,生長聞慧,隨順方便。聞所成慧生長思慧#隨順方便。
思所成慧生長修慧,隨順方便。一切善教,極於言說,一切三慧,盡於念法。若無言說;則無三慧;若無三慧,則無萬行。
而眞如法不可說故,無有言教;不可念故,則無三慧;無三慧故,無以成就十地萬行。諸衆生等,以何爲依,
漸漸進修?如是疑故,作問而言#云何隨順。行因能起,果德所起。若無起因,則無能入。若無能入,不得所入。能入謂金剛心。所入謂金剛地而已。無因,以何爲門,證入於如來薩婆若海中?如是疑故,作問而言而能得入。如是二問,依生滅門,
疑眞如門。謂有衆生,作如是疑。如生滅門中,斷一切惡,修一切善,備足因行,圓滿果德,眞如門中,亦復如是。豈不可說,撥加行善,不可念,誹五等位?今擧此意,發如是問。荅曰:若知一切法;雖說,無有能說可說,雖念,亦無能念可念。
是名隨順。若離說念,名爲得入者,如其次第,決彼二疑。
所謂隨順,自有二種。云何爲二?
一者生滅隨順,
二者眞如隨順。生滅隨順中,而有其二種。
云何爲二?
一者向上隨順,
二者向下隨順。
向上隨順者,從信乃至金剛,能爲菩提果,隨順方便故。向下隨順者,從自性淨妙藏,乃至第一念信,
能爲耶耶地,隨順方便故。所言向上隨順者,因無常音聲言說,生長無常之聞慧,因無常之聞慧,生長無常之思慧,
因無常之思慧,生長無常之修慧,因無常之修慧,生長無常之行德。是名向上。所言向下,隨順者,因常之行德,
生長常之修慧,因常之修慧,生長常之思慧,因常之思慧,生長常之聞慧,因常之聞慧,生長常之言說。是名向下。
如是二門,同時具足,無有前後,障智別相,至於文處,自當顯說。眞如門中,作如是說,不可說者,
以無有常無常之音聲#言說故,不可念者,以無有常無常之三慧故。非無自門之言說及念,作如是說,不可說,不可念。
以此義故,不可以異門,難異門,此有故彼有,彼有故此有。若爾,眞如門中,言說及念,
何等相耶?謂有言說,非常音聲,非無常音聲,謂無能說可說,如如如說。
復次,有念。非常三慧,非無常三慧。謂無能念可念,寂滅寂靜念。
所以者何?眞如門中,無有往向。雜亂住故,
云何名爲眞如隨順?謂若知一切法,雖說,無有常說,說無無常說。說無能說,說無可說,說是名爲隨順,於眞如音聲。
若與此相違,是名爲顚倒於眞如音聲。
復次,若知一切法雖念,無常慧念,無無常慧念,無能念念,無可念念。是名爲隨順於寂滅寂靜念。
若與此相違,是名爲顚倒於寂滅,寂靜念。已說隨順相。次決得入疑。此中有二。云何爲二?
一者生滅得入,
二者眞如得入。
生滅得入中,而有其二種。云何爲二?
一者向上得入,
二者向下得入。言向上者,卽金剛地。言向下者,則耶耶地。須隨順句,應審觀察。眞如得入者,則自所依。以何得入?
謂是雜位。云何得入?謂離說念。離何等說念耶?謂眞如門俱非言說及俱非念,是故說言若離說念,名爲得入。
第一轉言得成就故,第二轉疑決斷理明。已說發起問荅決疑門。
次說假說開相眞如門。此中有二門。云何爲二?
一者如實空眞如門,
二者如實不空眞如門。如實空者,如如體中,過於恒沙一切染法,皆悉空空,無所有故。如實不空者,如如體中,
過於恒沙一切淨法皆悉具足無所少故如是二門隨一一具不相捨離。於是應誦玄理頌言。
如彼頌言:遠離三假相 圓滿三實德 以此因緣故建立體眞如。 遠離四句相 圓滿四法德以此因緣故 建立相眞如。
一切過患行三四相爲本 一切功德品 三四德爲本。以此因緣故 不增亦不減 止於數量品作如是安立。
今誦此頌本,應持眞如門。以離念境界,唯證相應故者,是亂住證。非往向證。已說心眞如門,
次說心生滅門。
本曰:‘ 心生滅者,依如來藏故,有生滅心。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非一非異,名爲阿梨耶識。
此識有二種義,能攝一切法,能生一切法。云何爲二?
一者覺義,
二者不覺義。’
論曰:此中有二門。云何爲二?
一者所依摠相門,
二者能依別相門。此中有二重,住思應觀察。謂生滅門一心爲依,生滅門攝覺義、不覺義,梨耶爲依故,先說初門。
心生滅者,者。唱上立故,依如來藏故者,所依一心。彼多一心亦名如來藏故,則是上心字,下降建立異名故。
有生滅心者,能依法門。謂生滅門故,今當依經,如來藏門分明顯示。
如來之藏,其數幾有,今如來藏何所攝耶?
頌曰:如來藏有十 契經異說故此中如來藏與行與相攝。
論曰:如來藏有十種。於契經中,別別說故。
云何爲十?
一者大摠持如來藏,盡攝一切如來藏故,諸佛無盡藏契經中,作如是說:佛告文殊:有如來藏,名曰大寶無盡殊勝圓滿陁羅尼。盡攝諸藏,無所不通,無所不當,圓滿圓滿,平等平等,一切所有諸如來藏,無有以此非爲根本。何以故?此如來藏,
如來藏王,如來藏主,如來藏天,如來藏地。以此義故,名曰大寶無盡殊勝圓滿陁羅尼如來藏故。此經文明何義?
所謂顯示陁羅尼藏所依摠相。餘契經中,諸如來藏能依別相故,以何義故,名如來藏?謂攝持故。
二者遠轉遠縛如來藏,一淸一滿故,實際契經中,作如是說:佛子,如來藏者,唯有覺者,唯有如如,離流轉因,離慮知縛,
一一,白白。是故名爲如來之藏故,此經文明何義?所謂顯示眞如門一心無有惑因,無有覺因,無有惑果,無有覺果,
一眞一如,唯有淨妙如來體故。以何義故,名如來藏?謂無雜故。
三者與行與相如來藏,與流轉力,法身如來令覆藏故。楞伽契經中,作如是說:如來藏者,爲善不善因,受苦樂。與因俱,
若生若滅,猶如伎兒故。此經文明何義?所謂顯示生滅門#一心,於惑與力,於覺與力,出現生死涅盤之法,
譬如非幻幻人,於諸幻事,隨其所應,與力用故。以何義故,名如來藏?謂令覆故。
四者眞如眞如如來藏,唯有如故。眞修契經中,作如是說:如理如理如來藏,非建立,非誹謗,非常,非無常,
非正體智之所證得。亦非意、意識之所緣境界。何以故?唯有理理,無彼彼故,此經文明何義?所謂顯示眞如門中,
性眞如理,唯理自理,非智自理故,以何義故名如來藏?謂無他故。
五者生滅眞如如來藏,不生不滅被生滅之染故。楞伽契經中,作如是說:大慧,愚癡凡夫不覺不知,執著諸法,
剎那不住,墮在邪見,而作是言:無漏之法,亦剎那不住,破彼眞如如來藏故。復次,大慧,金剛如來藏,如來證法。
非剎那不住。大慧,如來證法,若剎那不住者,一切聖人不成聖人故。此經文明何義?所謂顯示生滅門中,
性眞如理遠離無常之相,不生不滅之法故。以何義故,名如來藏?謂被染故。
六者空如來藏,一切諸空覆藏如來故。勝鬘契經中,作如是說:世尊,空如來藏,若離,若脫,若異,一切煩惱藏故。此經文明何義?所謂顯示生滅門中,一切染法隱覆自相本覺無量性功德故。以何義故,一切染法摠名爲空?所謂一切染法幻化差別。體相無實,作用非眞故,名爲空。而能隱覆法身如來實德眞體。是故名爲如來之藏,從能藏染,立其名故。
七者不空如來藏,一切不空被空染故。勝鬘契經中,作如是說:世尊,不空如來藏,過恒沙不離,不脫,不異,不思議佛法故。此經文明何義?所謂顯示生滅門中,自相本覺備過恒沙一切功德,被過恒沙一切染法之所染故。以何義故,一切淨法摠名不空?所謂一切淨法,自體中實,作用勝妙。遠離虛假,超越巧僞故,名不空。被染之覆,名如來藏。於出現時,名爲法身,
於隱覆時,名如來藏故,從所藏淨,立其名故。
八者能攝如來藏,無明藏中自性淨心,能攝一切諸功德故。不增不減契經中,
作如是說如來藏本際相應體及淸淨法此法如實不虛妄,不離不脫智不思議法。無始本際來,有此淸淨相應法體故。此經文明何義?所謂顯示一切諸衆生自性淸淨心,從無始已來,具足三智,圓滿四德,無所闕失故。以何義故,名如來藏?由顚倒心,
不知不覺故。從能所淨立其名故。
九者所攝如來藏,一切染法無明地藏,旣乃出離圓滿覺者,爲所攝故。不增不減契經中,
作如是說:如來藏本際不相應體及煩惱纏不淸淨法,此本際離脫不相應、煩惱纏不淸淨法,唯有如來菩提智之所能斷故。
此經文明何義?所謂顯示始覺滿佛斷一切障,具一切智,智明爲外,障闇爲內,一切染法智所攝持故。
以何義故,名如來藏?謂攝持故。
十者隱覆如來藏,法身如來煩惱所覆隱沒藏故。不增不減契經中,作如是說:如來藏未來際平等,恒及有法,
則是一切諸法根本。備一切法,具一切法,於世法中,不離不脫故。此經文明何義?所謂顯示多一心體等,於法界,
遍於三際,具足圓滿。染淨諸法,無所不通,無所不至故。復次,顯示隨緣門中,自性淨心,於染法中隱藏沈沒,
法身如來未出現故。
是名爲十。如是十中,今如來藏與行與相,已說如來藏門,次說阿梨耶識門。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
非一非異,名阿梨耶識者,略去分名,建立滿名。雖義具足,言未足故。
此中所說不生不滅,及與生滅,各何等法?分際云何?
頌曰:摠攝諸無爲 名爲不生滅 摠攝諸有爲故名爲生滅。
論曰:摠攝一切無爲法故。是故名爲不生不滅。不生不滅諸無爲法之摠相故,摠攝一切有爲法故。故名生滅。
生滅之言,諸有爲法之摠相故。
如是有爲、無爲二法,各有幾數,何等名字?
頌曰:無爲雖無量 略說有四種 謂眞如本覺始覺與虛空。 有爲雖無量 略說有五種謂根本無明 及與四相品。
論曰:無爲法有四種。
云何爲四?
一者眞如無爲,
二者本覺無爲,
三者始覺無爲,
四者虛空無爲。
是名爲四。
有爲法有五種。
云何爲五?
一者根本無明有爲,
二者生相有爲,
三者住相有爲,
四者異相有爲,
五者滅相有爲。是名爲五。且四無爲以何爲體,有何等用?
頌曰:依各有二種 所謂通及別 如體用亦爾隨釋應觀察。
論曰:眞如無爲有二所依。
云何爲二?
一者通所依,非有爲,非無爲,一心本法以爲體故。
二者別所依,生滅門內,寂靜理法以爲體故。本覺無爲有二所依。云何爲二?一者通所依,非有爲非無爲,一心本法以爲體故。二者別所依,生滅門內,自然本智以爲體故。始覺無爲有二所依。云何爲二?一者通所依,非有爲非無爲,一心本法以爲體故。二者別所依,生滅門內,隨他起智以爲體故。虛空無爲有二所依。云何爲二?一者通所依,非有爲非無爲,一心本法以爲體故。二者別所依,生滅門內,無所有事,以爲體故。是名二依。復次,眞如無爲有二種用。
云何爲二?
一者通用,一切諸法令出生故。
二者別用,平等之性令不失故。本覺無爲有二種用。
云何爲二?
一者通用,不守自性故。
二者別用,不轉變故。始覺無爲有二種用。
云何爲二?
一者通用,隨妄轉故
二者別用,對治自過故。虛空無爲有二種用。
云何爲二?
一者通用,欲有令有故。
二者別用,空無之性令不失故是名二用此中所說通謂他義別謂自義。依此二言,應廣觀察。種種別相,至於文處,自當顯說。
五種有爲以何爲體,有何等用?
頌曰:依各有二種 所謂通及別 如體用亦爾隨釋應觀察。
論曰:根本無明有爲有二種依。
云何爲二?
一者通依,非有爲非無爲一心本法以爲體故。
二者別依,生滅門內,大力住地以爲體故。生相有爲有二種依。
云何爲二?
一者通依,非有爲非無爲,一心本法以爲體故。
二者別依,生滅門內,細分染法以爲體故。住相有爲有二種依。
云何爲二?
一者通依,非有爲非無爲,一心本法以爲體故。
二者別依,生滅門內,麤分染法以爲體故。異相有爲有二種依。
云何爲二?
一者通依,非有爲非無爲,一心本法以爲體故。
二者別依,生滅門內,麤分染法以爲體故。滅相有爲有二種依。
云何爲二?
一者通依,非有爲非無爲,一心本法以爲體故。
二者別依,生滅門內,麤分染法,以爲體故。是名二依。
復次,根本無明有二種用。
云何爲二?
一者通用,能生一切諸染法故。
二者別用,隨所至處,作㝵事故。生相有爲有二種用。
云何爲二?
一者通用,於上下中與其力故。
二者別用,隨所至處,作㝵事故。如說生相住異亦爾。滅相有爲有二種用。
云何爲二?
一者通用,於上及自與其力故。
二者別用,能作㝵事故。是名二用。種種別相#至於文處,自當顯說。以何義故,作如是說,有爲無爲一切諸法,
通以一心而爲其體?於契經中,如是說故。何等契經?謂道智經。云何說耶?於彼經中,作如是說:爾時,
文殊師利白佛言:世尊,阿梨耶識具一切法,備一切法,過於恒沙。過於恒沙如是諸法,以誰爲本,生於何處?
佛言:如是有爲無爲一切諸法,生處殊勝,不可思議。何以故?於非有爲非無爲處,是有爲法是無爲法而能生故。文殊師利又白佛言:世尊,云何名爲非有爲非無爲處?
佛言:非有爲非無爲處者,所謂卽是一心本法。非有爲故,能作有爲,非無爲故,能作無爲。是故我說生處殊勝不可思議。
復次,善男子,譬如庶子有二所依。一者大王,二者父母,有爲無爲一切諸法,亦復如是。各有二依,謂通達依及支分依。
復次,善男子,譬如一切草木有二所依。一者大地,二者種子。有爲無爲一切諸法亦復如是。各有二依。謂通達依及支分依。
乃至廣說。故。與和合者,卽是開示能熏所熏之差別故。云何開示所謂顯示染淨諸法,有力無力互有勝劣故。今當作二門,
分明顯說,
云何爲二?
一者下轉門,
二者上轉門。生滅門中,不出此二。如是二門云何差別?
頌曰:諸染法有力 諸淨法無力 背本下下轉名爲下轉門。 諸淨法有力 諸染法無力向原上上轉名爲上轉門。
論曰:由染淨諸法互有勝劣故,二種轉門得成而已。今當先說初下轉門。根本無明以何等法而爲所熏?於何時中而作熏事?
頌曰:所熏有五種。 謂一法界心 及四種無爲非初非中後。 取初中後故 如契經明說。
論曰:根本無明以五種法而爲所熏。謂一法界及四無爲。熏一法界,其相云何?
頌曰:一種法界心 有二種自在 謂有爲無爲是根本無明。 依於初自在 而能作熏事。
論曰:一法界心有二種自在。
云何爲二?
一者有爲自在,能爲有爲法而作依止故。
二者無爲自在,能爲無爲法而作依止故。根本無明依初自在,能作熏事。非後自在。中實契經中,
作如是說:根本無明熏自所依分際之量,非他所依故。熏眞如法,其相云何?
頌曰:眞如無爲法 有二種作用 所謂通及別如前決擇說。 是根本無明 依於初作用而能作熏事 餘無爲亦爾。
論曰:眞如無爲有二種用。謂通及別。如前所說根本無明,依初作用,能作熏事。非後作用。如說眞如,餘三無爲亦復如是。
皆依初用,非後用故,作熏時,量非初,亦非中後。取初中後故。本智契經中,作如是說:大力無明作熏事時,
初及中後一時具取,而非別取故,此中所說能熏所熏,以何義故,名言爲熏?謂能引彼法,而合自體,不相捨離,俱行俱轉故,名能熏。又能於彼法,不作障㝵。若隨若順,不逆違故,名爲所熏。謂五有爲法,
能熏四種無爲法及一法界心所熏五法隨來而與五能熏共會和合,同事俱轉。是故說言不生不滅,與生滅和合,
如大無明一心本法爲通依故。依初自在,作熏習事,四相有爲應如是知。如大無明依四無爲通達作用,能作熏事,
四相有爲應如是知。如是等義,至自決擇,其理分明。非一非異者,
卽是開示有爲、無爲同異差別故。云何開示所謂顯示一法界心,無爲自在四種無爲別事作用,與一法界心有爲自在,
四種無爲通達作用不同理故,名爲非一。爲欲顯示受能熏染法,一法界心有爲自在四種,無爲通達作用,
與能作熏事五種有爲不異理故,名爲非異。復次,所熏淨法與能熏染法,各差別故,名爲非一。能熏所熏俱一心作,
無有他故#名爲非異。名爲阿梨耶識者,摠結圓滿字。已說下轉門,次說上轉門。若欲成立此上轉門,更應安置經本之辭。
所謂楞伽王契經中,作如是說:爾時,
世尊告大衆言:諸佛子,我念往昔,於出時中,我來依他,於入時中,他來依我故。此經文明何義?謂顯示二轉故。
云何顯示?謂於出時中,我來依他者,卽是下轉。於入時中,他來依我者,卽是上轉。此義云何?我謂則是眞如本覺如來藏佛故。來謂受熏之義故。依他者,背自本覺,依無明他故。依此經文,作解釋故。是故說言不生不滅,與生滅和合,則是下轉門。若欲成立上轉門者,可言生滅與不生不滅和合。以此義故,玄理論中,則存斯詞。馬鳴菩薩本阿世耶,比來次第分明顯了。
擧一兼一,影示而已。是故無有闕失過咎。上轉門義於對治分,其理自明。已說上轉門。次說該攝安立門。諸識差別,
其數幾有,何等契經中,各說幾種識?
頌曰:牟尼大覺尊 一代聖說中 摠集有十種各異說契經。 謂一種爲始 十種而爲終歸本等契經 分明顯說故。
論曰:凡集一代諸聖說中異說契經,摠有十種。謂從一種識,乃至十種識。
云何爲十種差別經?一者立一種識,摠攝諸識。此中有四#云何爲四?一者立一切一心識,摠攝諸識。所謂以一心識,
遍於二種自在,無所不安立故,一心法契經中,作如是說:
爾時,文殊師利承佛威神之力,卽白佛言:世尊,說幾種識?體相如何?當願爲我分別開示。
爾時,世尊告文殊言善哉,善哉!文殊師利,爲諸大衆,當問此事。諦聽。諦聽,善思念之。我當爲汝分別解說。於是,
文殊白佛言:善哉!世尊,願欲樂聞。佛告文殊言:我唯建立一種識,所餘之識非建立焉。所以者何?一種識者,
多一一識。此識有種種力,能作一切種種名字,而唯一識,終無餘法。是故我說建立一種識,所餘之識非建立焉故。
二者立阿梨耶識,摠攝諸識。所謂以阿梨耶識具足障㝵義、無障㝵義,無所不攝故。阿梨耶識契經中,
作如是說:爾時,觀自在菩薩卽白佛言:
世尊,云何名爲通達摠相識?以何義故,名爲摠相?
佛告觀自在菩薩言:所言通達摠相識者,卽是阿梨耶識。此識有㝵事及非㝵事,具一切法,備一切法,譬如大海爲水波等,
作摠相名。以此義故,名爲摠相故。三者立末那識,摠攝諸識。所謂以末那識具足十一種義,無所不攝故。顯了契經中,
作如是說:種種心識雖有無量,唯末那轉,無有餘法,所以者何?是末那識,
具足十一義,無所不作故。四者立一意識,摠攝諸識。所謂以意識有七種轉變自在,隨能作其事故。七化契經中,
作如是說:譬如幻師,唯是一人,以幻術力,變化七人。愚人見之,謂有七人,而智者見唯有一人,無餘七人,
意識幻師亦復如是。唯是一識能作七事,凡夫見之,謂有七事。而覺者見唯有意識,無餘七事故,
是名建立同一種識四種契經。二者立二種識,摠攝諸識。
云何爲二?
一者阿梨耶識,
二者意識。阿梨耶識者,摠擧業轉現三識故。意識者,摠擧七種轉識故。楞伽契經中,
作如是說:大慧,廣說有八種識,略說有二種。
何等爲二?
一者了別識,
二者分別事識,乃至廣說故。三者立三種識,摠攝諸識。
云何爲三?
一者阿梨耶識,
二者末那識,
三者意識。阿梨耶識者,摠擧三相識故。末那識者,直意根故。意識者,
摠擧六種轉識故。慈雲契經中,作如是說:復次,敬首,廣說有十種識。摠說有三種識。
何者爲三
?一者細相性識,
二者根相性識,
三者分離相性識,乃至廣說故。四者立四種識,摠攝諸識。云何爲四?謂前三中,
加一心識故。無相契經中,作如是說:識法雖無量,不出四種識。
云何爲四?
一者所依本一識,
二者能依持藏識,
三者意持識,
四者遍分別識,乃至廣說故。
五者立五種識,摠攝諸識。云何爲五謂前四中加隨順遍轉識故大無量契經中,
作如是說:復次,有識非彼彼識,攝遍於彼彼識,所謂隨順遍轉識故。
六者立六種識,摠攝諸識。云何爲六?所謂眼等五種別識及第六意識故。四聖諦契經中,作如是說:佛告樹王:我爲小根諸衆生故,以密意趣作如是唱:但有六識,無有餘識,而實本意,爲欲令知六種識中,具一切識,於大衆中,作如是唱故。
七者立七種識,摠攝諸識。云何爲七?謂前六中加末那識故。法門契經中,作如是說:復次,文殊師利,識法有七種。
云何爲七?所謂六識身及末那識。如是七識或一時轉,或前後轉。復次,第七識有殊勝力故,或時造作持藏之用,
或時造作分別之依故。
八者立八種識,摠攝諸識。云何爲八?謂前七中,加阿梨耶識故。道智契經中,
作如是說:心王有八。
云何爲八?
一者眼識心王,乃至八者異熟報識心正。種種識法不出此數故。
九者立九種識,摠攝諸識。
云何爲九?謂前八中,加唵摩羅識故。金剛三昧契經中,作如是說:爾時,無住菩薩而白佛言:尊者,以何利轉,
而轉衆生一切情識,入唵摩羅?佛言:諸佛如來常以一覺,而轉諸識,入唵摩羅故。
十者立十種識,摠攝諸識。云何爲十?謂前九中,加一切一心識故。法門契經中,
作如是說:心量雖無量,而不出十識,乃至廣說故。是名十種異說契經。
如是十種於寶冊中,云何該攝,云何安立#頌曰:於本論雖明 今更作重釋 將契經散文屬斯論摠言。
論曰:於本論中,雖分明說,而今爲鈍,更作重釋,將契經文,屬當論言。所謂一心法契經以依阿梨耶識說,
有無明不覺,而起能見,能現,能取境界,起念相續故,說爲意。此意復有五種名。
云何爲五?
一者名爲業識,謂無明力不覺心動故;
二者名爲轉識,依於動心能見相故;
三者名爲現識,所謂能現一切境界,猶如明鏡,現於色像,現識亦爾,
隨其五塵對至,卽現無有前後。以一切時,任運而起,常在前故;
四者名爲智識,謂分別染淨法故;
五者名爲相續識,以念相應不斷故。’乃至廣說故。七化契經中,摠所建立同一意識,摩訶衍論一分意識攝。說相雖闕,
具密意故,於本論中,作如是說:‘復次,言意識者,卽此相續識,依諸凡夫取著轉深,計我我所,種種妄執,隨事攀緣,
分別六塵名爲意識。’乃至廣說故,如是如是彼彼諸經,隨應當處,應如如配。已說該攝安立門。次說藏識剖字門。
阿梨耶識名字差別,其數幾有?契經異說其相云何?何等字義,屬何等處?
頌曰:有十阿梨耶 契經異說故 摩訶鍵怛摽鍵阿尸伽羅。 白白唵摩羅 黑白唵摩羅羯羅羅鍵摩 縛多提鍵摩。
奢呵那鍵摩婆阿叉尼羅 白白迦薩羅 黑白迦薩羅。如是十種識 摩訶衍論中 分明顯說故隨應各配屬。
論曰:阿梨耶識摠有十種。所以者何?於契經中,別別說故,
云何爲十,
一者名爲大攝主阿梨耶識,所謂卽是摠相大識,義如前說。
二者名爲根本無明阿梨耶識,所謂根本無明別立,以爲阿梨耶故,十種妄想契經中,作如是說:剎奢只多提王識,直是妄法。
不能了達一法界體。一切染法阿梨耶識以爲根本,出生,增長,無斷絕時。若無提王識,黑品眷屬永無所依,不能生長故。
此阿梨耶識,當何決擇攝?於本論中,作如是說:‘所言不覺義者,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不覺心起,而有其念。’
乃至廣說故。
三者名爲淸淨本覺阿梨耶識,所謂自然本智,別立以爲阿梨耶故。本覺契經中,作如是說:自體淨佛阿梨耶識,具足無漏,
圓滿功德,常恒淸淨,常恒決定,無受熏相,無變異相,智體不動,具足白品。是故名爲獨一淨識故。此阿梨耶識當何決擇攝?
於本論中,作如是說:‘復次,覺體相者,有四種大義。與虛空等,猶如淨鏡。’乃至廣說故。
四者名爲染淨本覺阿梨耶識,所謂不守自性陁羅尼智,別立以爲阿梨耶故。本因緣起契經中,
作如是說:爾時,光嚴童子卽白佛言:尊者,以何因緣故,難入未曾有會中,作如是說?隨他緣起陁羅尼智,
名爲楞伽王識,云何名爲楞伽王,以之爲喩,示彼緣起陁羅尼智?於是尊者告光嚴童子言:此楞伽王常在大海摩羅山中,
率十萬六千鬼神之衆,以爲眷屬。如是諸眷屬,皆乘化宮殿,遊於諸剎,皆悉承賴彼楞伽王,方得遊行。
所謂諸鬼神衆作如是言:我等神衆,無有威德,無有氣力,於諸所作,無有其能。如宜大王,我等衆中,與堪能力。
彼楞伽王卽隨其時,與殊勝力,不相捨離,而共轉故。謂楞伽王,雖非分身,而能遍滿諸神衆中,各各令得全身之量,
於一切時,於一切處,共轉不離。不守自性智亦復如是。能受一切無量無邊煩惱染法鬼神衆熏,不相捨離而俱轉故,以此緣故,我難入會中,作如是說:隨轉覺智名爲楞伽王識故,此阿梨耶識當何決擇攝?於本論中作如是說:‘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
心與無明,俱無形相,不相捨離。’乃至廣說故。
五者名爲業相業識阿梨耶識,所謂根本業相及與業識別立,以爲阿梨耶故。本性智契經中,作如是說:阿梨耶識無能了作,
無所了作,不可分析,不可隔別。唯由精動隱流義故,名爲鍵摩故。此阿梨耶識當何決檡攝?
於本論中,作如是說:‘復次,依不覺故,生三種相,與彼不覺相應不離。
云何爲三?
一者無明業相,以依不覺故心動,說名爲業。覺則不動,動則有苦。果不離因故。
’六者名爲轉相轉識阿梨耶識。所謂能見境界之相及與轉識,別立以爲阿梨耶故。大無量契經中,
作如是說:阿梨耶識有見見轉,無見見起故,此阿梨耶識,當何決擇攝?於本論中,
作如是說:‘二者能見相,以依動故,能見,不動則無見故。
’七者名爲現相現識阿梨耶識。所謂境界之相及與現識,別立以爲阿梨耶故。實際契經中,作如是說:別異別異,
現前地轉,相異相異,具足行轉。是故名爲阿梨耶識?復次,此阿梨耶識眞是異熟無記之法。淨白相故。或名成就故。
此阿梨耶識當何決擇攝?於本論中,作如是說:‘三者境界相,以依能見故,境界妄現。離見,則無境界故。
’八者名爲性眞如理阿梨耶識。所謂正智所證淸淨眞如別立以爲阿梨耶故諸法同體契經中,作如是說:有識,
是識非識,識攝。所謂如如阿梨耶識故。此阿梨耶識當何決檡攝?所謂淸淨般若質境眞如攝故。
九者名爲淸淨始覺阿梨耶識。所謂本有淸白始覺般若,別立以爲阿梨耶故。果圓滿契經中,
作如是說:佛告菩提樹王言:自然始覺阿梨耶識,當常不離淸淨本覺。淸淨本覺當常不離始覺淨識。隨是彼有。隨彼是有。
或非同種,或非異種故,此阿梨耶識當何決檡攝?於本論中,作如是說:‘本覺義者,對始覺說。始覺義者,卽同本覺故。
’十者名爲染淨始覺阿梨耶識。所謂隨緣始覺般若,別立以爲阿梨耶故。果圓滿契經中,作如是說:復次,樹王,
如始覺淨識及白淨本覺,說染淨始覺阿梨耶識不守自性緣起本覺,亦復如是。故此阿梨耶識當何決擇攝?
於本論中,作如是說:‘始覺義者,依本覺故,而有不覺,依不覺故,說有始覺。又以覺心原故,名究竟覺。不覺心原故,
非究竟覺。’乃至廣說故。如是等義,至自決擇自當備演。十種末那、六種意識,於後文中,隨次釋故,今略而已。
已說藏識剖字分相門。次說摠識攝生圓滿門。此識有二種義,能攝一切法,能生一切法。
云何爲二?
一者覺義,
二者不覺義者,而摠顯示本識殊勝圓滿相故。此義云何?所謂具足二種圓滿故。
云何爲二?
一者功德圓滿,
二者過患圓滿。功德圓滿者,覺義字句能攝一切無量無邊過於恒沙不離不斷諸功德故。能生一切無量無邊過於恒沙不離不斷諸功德故。過患圓滿者,不覺義字句能攝一切無量無邊過於恒沙若離若脫諸過患故,能生一切無量無邊過於恒沙若離若脫諸過患故,如是種種攝生熏習差別之相,至彼別相決擇分中,分明顯示。釋摩訶衍論卷第二丁未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석마하연론』 2권(ABC, K1397 v37, p.1001b01-1014a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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