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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블릿 스케치
전창수 지음
등장인물 : 향야, 우라, C교수, E교수, 재성이
1.
하늘의 파란 모양이 새들의 노래소리를 더욱 더 즐겁게 하고 있었다. 새들의 노랫소리 너머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의 푸른 잎들은 향야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있었다.
향야의 아버지는 중국 사람이었고, 향야의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었다. 향야의 할아버지는 독일 사람이었고, 향야의 할머니가 중국 사람이었다. 한국 사람의 계보를 잇는 어머니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향야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향야를 낳았다. 향야는 아버지에게 무척 어이없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말이야, 미국이 중국을 쳐들어와서 자신들의 국가를 언젠가 점령할 거라 생각해.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미국을 항상 경계하지!”
향야는 아버지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냐며 따졌지만, 아버지는 차곡차곡 설명해 주었다.
“중국은 오랫동안 공산국가였어. 자유라고는 모르고 살았지.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자유란 낯설어. 그래서 중국은 진짜 민주주의가 뭔지 아직은 모른다고 봐야 해. 나도 한국에 와서 진짜 자유란 게 뭔지 알았으니까”
향야는 아버지의 설명을 차츰차츰 듣다 보니, 어느 덧 중국이 민주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납득이 갔다. 중국은 다당체제가 원래 아니었다. 그래서 당에 대항하는 것은 곧 국가에 대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중국 정부는 중국의 인민이 국가에 반기를 들까봐 노심초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만 살아온 향야로서는 아버지가 중국인이기에 중국에 대해 많이 얘기해줘서 중국에 대해 들었지, 중국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에 계속 살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는 잘 안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정부의 당파 싸움이 하루도 빠지지 않는 곳이다. 사람들은 정부의 당파 싸움을 보면서, 언제나 혀를 찬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당에 모든 힘을 다 쏟아붓기도 한다. 향야는 그런 한국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또한 어머니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말이지,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하고 싶어지는 성향이 있어서야.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왜냐하면, 한국의 역사를 보면, 하고 싶은 것을 했던 구조가 아니야. 먹고 살기 위해서 억지로 살아야 했고, 한국전쟁 때는 억지로 집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 했지. 일제 점령 시대에도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못하고 살았어.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그때의 억압했던 감정들이 지금 쏟아져 나오는 거야. 한국은 그래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지. 그렇게 노력해온 우리의 선조들 덕분에, 지금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 많은 어르신들이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을 보면서 뿌듯해 하곤 하지. 한국의 민족은 이렇게 좋은 뿌리를 갖고 있지.”
엄마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해는 하지만, 향야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미쳤다. 그래서, 향야는 정치경제외교학과를 가기로 했고, 엄마도 아빠도 향야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이라면 꼭 가라며 밀어주었다. 향야는 당당히 D대학 정치경제외교학과에 당당히 입학했다. 거기서 만난 우라라는 친구와는 마음이 잘 맞아서 거의 만날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라는 향야와 함께 미팅을 나가게 되는 날을 꿈꾼다고 말했다. 향야는 우라에게 정치경제외교학과에 다니는데 남자들이 우리에게 과연 관심을 둘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우라의 말을 빌자면, 정치경제외교학과이기에 정치에 뜻을 둔 남자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을 거라 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정치에 뜻을 둔 남자라면 당연히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을 거고, 정치를 잘 아는 영부인 예정자가 필요할 것이다. 향야는 언젠가 우라와 함께 미팅을 함께 보기로 했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향야 자신이 정치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남자의 부인이 되는 것보다, 향야 자신이 직접 대선까지 나가 보는 것이다. 우라와 그런 얘기를 나누었더니, 그러면 남자들은 향야한테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우라는 정치경제외교학과를 선택한 이유가 영부인이 되고 싶어서라고 했다. 향야는 우라와 마음도 잘 맞지만, 이 점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정치경제외교학과까지 와서 정치에 입문해야 맞는 거 아닐까, 하는 반문에 우라는 영부인의 꿈 역시 정치에 뜻을 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우라는 그래서 선택하라고 했다. 자기랑 같이 미팅을 할 것인지, 직접 정치에 뜻을 둘 건지. 직접 정치에 뜻을 둘 거라면, 미팅은 다른 사람과 가겠다고 했다. 향야는 좀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조금씩 삐걱거릴 우라와의 관계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향야가 가는 길을 포기할 순 없었다. 향야는 우라에게 말했다.
“나는 정치에 입문할 거야. 그 뜻을 꺽을 순 없어. 미혼으로 살더라도 말이야.”
“그럼,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거야. 나는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하고 미팅하러 다녀야 해. 이제 너와는 같이 못 다니겠네.”
“그래, 그렇게 해야 되는구나…”
“나는 그래야 돼. 나는 반드시 영부인이 될 거야.”
“알았어, 그 꿈 꼭 이루길 바랄게”
향야는 우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향야는 이제 누구랑 같이 다녀야 할지 그걸 몰랐으나, 교수님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말해 보기로 했다. 교수님이라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정치학과 교수님과 외교학과 교수님을 만나뵙기로 했다. 향야가 계획하는 그 정치 너머로 교수님들의 시선이 머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향야는 거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언젠가 향야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기다리며 향야는 교수님의 방으로 향했다.
2.
향야는 먼저 C교수님의 방으로 향했다. 교수님이 계실지 안 계실지는 몰랐다. 그러나, 향야는 C교수님에게 자신의 길이 정말로 맞는 건지 묻고 싶었다. 자신이 정치에 입문하겠다는 것이, 정말로 잘한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향야는 C교수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저, 여기 C교수님의 방 아닌가요?”
“맞습니다. C교수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어디 가셨나요?”
“지금 말씀드리기 곤란하구요, C교수님을 보시려거든, 며칠 후에 오시죠”
“안 되는데…”
“급한 용건이 계시다면, 거기서 말씀하세요”
“저기, 제가 정치가가 되려고 하는데요.”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제 생각이 맞는 건가 해서 왔습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정치가가 되려면 남의 의견에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자신의 소신을 지켜야 하죠. 누군가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왜요?”
“왜냐하면 말입니다. 정치가가 남의 의견을 듣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결정한다면, 나중에 이 사람 저 사람 말에 흔들릴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아니요”
“C교수님도 이 이상은 말씀 못 드릴 것입니다.”
“근데, C교수님의 남편이신가요?”
“남편은 아니구요. 누군지는 말씀드리는 것은 곤란하군요.”
“말씀 고맙습니다”
“네, C교수님을 뵈시려면, 3~4일 후에 다시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네…”
향야는 E교수의 방으로 갔다. E교수님이 환한 얼굴로 향야를 맞이했다.
“왠일이야?”
“고민이 있어서요”
“뭔데?”
“정치가가 되려고 해요. 국회의원이 되어서 국정운영에 참여하려고 해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치가들 중에 여성정치가도 많이 나와야지.”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연하지.”
“그럼, 정치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해야지. 지금의 나에게 온 것처럼”
“아까 다른 분들은 그럼 안 된다고…”
“그 사람의 의견도 중요하지”
“그럼, 그 사람 말을 들어야 하나요, 교수님 말을 들어야 하나요?”
“그게 정치가의 숙명이지.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거”
“아, 그렇게 되나요?”
“그렇게 되지!”
향야는 정치가의 길은 참 어렵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교수님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창문 밖으로 어느 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창문 너머의 노을이 참 아름답게 교수님의 방을 비추고 있었다.
“노을이 참 아름답네요.”
“그래서, 나는 나의 방을 좋아하지. 그리고 내가 여기 오래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까르르 웃는 교수님의 웃음소리 너머에 향야가 가야 할 길이 보이는 듯 했다. 삶의 너머를 바라보는 교수님의 웃음소리가 향야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 향야는 왠지 그 웃음소리를 지켜주고 싶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노을은 더 많은 햇살을 만들어냈다. 그 햇살의 갈래길 하나에 향야도 들어 있었다.
3.
향야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빠한테 얘기해서 신문도 몇 개를 보기로 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도서관을 다니면서 다양한 지식들을 습득하기로 했다. 그래서, 향야는 요즘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다니며, 공부하는 재미에 산다. 신문도 너무 재미있다. 아빠가 정치가가 되려면 경제신문을 꼭 봐야 한다고 해서 경제신문을 보고, 아빠가 신문 보는 것을 이제 시작하려면 스포츠신문도 봐야 한다고 해서 스포츠신문도 같이 보는 중이다. 그러면서, 아빠는 정치가가 되려거든 신문도 공부하듯이 보라고 했다. 남들이 보듯이 건성건성 읽어서는 제대로 된 정치가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조언도 덧붙였다. 향야는 아빠가 자기를 적극 지지해주는 데 대해서 더없이 행복했다. 반드시 정치가가 되어서, 이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특히, 정치적인 발전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는 길을 가는데 더없이 일조하겠다는 비전을 세웠다. 향야가 스포츠신문을 보면서, 신문에 끄적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향야를 건드렸다.
툭...
향야는 향야를 향해 건드리는 게 실수인 줄 알고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다시 또 누군가가 향야를 건드렸다.
툭...
향야는 그제서야 자신을 건드리는 누군가를 보았다.
“누구세요?”
“나, 몰라?”
“아, 재성이구나”
재성이은 우리 학급의 동기다.
“근데, 무슨 일이야?”
“그냥 다짜고짜 얘기할게.”
“뭘?”
“나랑 사귀자!”
“응? 뭐라고?”
“나랑 사귀자고!”
“너, 미쳤니?”
“아니, 사귀자는데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아니, 다짜고짜 얘기하니까 그렇지”
“다짜고짜 얘기한다고 했잖아”
“아니, 너 지금 진심으로 그러는 거야?”
“진심이 뭔지는 몰라도 진심이야”
“아니,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건데?”
“사귀고 싶다고”
“사귀고 싶다고?”
“그래, 사귀고 싶다고!”
“그럼, 나도 다짜고짜 애기할께!”
“그래, 얘기해 봐!”
“다짜고짜 안 사귈래!”
“응, 응?”
“다짜고짜 안 사귄다고?”
“그래!”
“이유는?”
“이유?”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봐”
“응?”
“그럼 안 사귀어 주지!”
“음...난 정치가가 될 거니까!”
“그건 이유로 충분하지 않아! 내가 싫은가?”
“응?”
“내가 싫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가 되지!”
한동안 말을 하는 걸 잃고 넋을 잃고 재성이를 바라보는 향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 정치가가 될 거라니까?”
“그래서?”
“음...”
“그래서?”
“내 말이 안 믿기나 보지?”
“내가 싫단 말을 우회적으로 하는 거 아니야?”
“진짜로 정치가가 될 거라니까!”
“아..진짜였어?”
“그래, 진짜라고!”
“아… 그, 그럼, 난 그만 갈게”
“야!”
“아니야, 나를 싫어한단 말로 알아들을게. 그럼, 이만”
“야, 어디 가?”
“그럼, 안녕~ 나 차인 걸로 할께!”
“야! 야! 야! 이 못된 놈아!”
향야는 재성이가 가는 너머로 쓸쓸하게 비춰진 창밖 햇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세상의 편견과 싸워야 하는 자신의 인생이 힘겨울 수밖에 없음이 예견되었다. 그 세상 너머에 있는 진실도 함께 싸워야 할 세상이었다. 향야는 창밖에서 내리쪼이는 햇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산 스멀스멀 올라오는 흐릿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아직도 편견 때문에 고통 받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향야는 그 편견과 맞서 싸우리란 다짐을 햇살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 햇살이 향야의 눈망울을 더욱 더 맑게 빛내고 있었다. 그 맑은 눈망울 속에서 향야의 마음이 밝아지길 누군가는 소망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