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コリアンメロディー
코리언 멜로디
日本人へ大衆の思い伝えた
일본인에게 대중의 생각을 전했다
「玄界灘をはさんで、呼べばこたえが返ってくるような国、韓国の音楽を訪ねてお送りするコリアンメロディー」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부르면 대답이 돌아올 것 같은 나라. 한국의 음악을 찾아서 보내 드리는 코리언 멜로디”
エフエム愛知が昭和45(1970)年12月から平成2(1990)年3月まで、日曜深夜に20年にわたって放送していた番組「コリアンメロディー」のオープニングフレーズである。紅白歌合戦の司会も務めた元NHKアナウンサー、谷田部敏夫が初代DJだった。
FM아이치가 1970년12월에서 1990년3월까지 일요일 심야에 20년에 걸쳐 방송하고 있던 프로그램 “코리언 멜로디”의 오프닝 멘트이다.
名古屋市在住の韓国大衆音楽研究家、朴燦鎬は懐かしそうに語る。「韓国の歌だけを取り上げる番組は珍しかったんです。よく聴いてましたよ」
나고야 시에 살고 있는 한국대중음악연구가 박찬호는 그리운 듯이 말한다. “한국노래만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드물었지요. 그래서 잘 청취하고 있었지요”
エフエム愛知が民放初のFM局として開局したのが昭和44年。翌年、番組をスタートさせたのが初代社長、本田静雄だった。
FM아이치가 민방 초의 FM국으로서 개국한 것은 1969년 다음 해에 프로그램을 시작한 사람이 초대사장 혼다 야스오였다.
本田は開局前に韓国・大邱のFM局を視察した。そのとき、韓国歌謡など約20枚のLPレコードを寄贈される。そこで歌を通した日韓文化交流を思いついたという。
혼다는 개국 전에 한국 대구의 FM국을 둘러보았다. 그 때 한국가요 등, 20장의 LP레코드를 기증받았다. 거기서 노래를 통한 일한문화교류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1回の放送で3曲を流した。歌詞は日本語に意訳する。現在の社長、本多立太郎は番組のディレクターを10年以上担当していた。「洋楽全盛の時代に異彩を放っていましたね。どこか懐かしいメロディーでした」
1회 방송에서 3곡을 내보냈다. 가사는 일본어로 의역했다. 현재의 사장 혼다 타쓰타로는 프로그램의 PD를 10년 이상 담당하고 있었다. “양악 전성시대에 이채를 발휘했어요. 어딘지 그리운 멜로디였지요”
月に数通のリクエストがあり、熱心なファンがいる一方、「なぜ韓国の音楽を流すんだ」という抗議もあった。しかし本田の思いは揺るがなかった。
한 달에 수통의 리퀘스트가 있었고, 열성 팬이 있는가 하면 “왜 한국음악을 내보내는 거야” 라는 항의도 있었다. 그러나 혼다의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福岡のRKB毎日放送で名物ディレクターだった木村栄文は韓国、朝鮮をテーマに多くの映像ドキュメンタリーを手がけた。55年2月放映の「鳳仙花-近く遥かな歌声」は大衆歌謡を通じて日韓の近現代史を描き、その年の芸術祭大賞に輝いた。
후쿠오카의 RKB매일방송에서 명물 PD였던 기무라 히데후미는 한국, 조선을 테마로 많은 영상다큐멘터리에 손을 댔다. 55년2월 방영한 “봉선화-가깝고 먼 노래소리”는 대중가요를 통하여 한일의 근대사를 묘사해 그 해의 예술제 대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韓国歌謡の知識はほとんどなかったんです。ただ戦前、戦中を生き抜いてきた日韓の歌謡関係者がまだ健在で、彼らの生の声や歌を聴きながら、朝鮮の人たちの生活や哀(かな)しみを伝えたかった」と振り返る。
“한국가요의 지식은 전혀 없었지요. 다만 전전과 전시를 살아온 한일의 가요관계자가 아직 건재하고 그들 육성이나 노래를 들으면서 한국사람들의 생활과 슬픔을 전하고 싶었지요” 라고 회상한다.
番組のテーマ曲「鳳仙花」は三・一独立運動(1919年)直後に創作された歌曲。日本の統治に対する抵抗歌として知られる。番組では「木浦の涙」や「離別」など韓国歌謡が新旧入り交じって紹介された。
프로그램의 테마 곡 “봉선화”는 3.1독립운동(1919년) 직후에 창작된 가곡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가로서도 알려지고 있다. 프로그램에는 “목포의 눈물” “이별” 등 한국가요가 신구 섞여서 소개되었다.
ゲストも豪華だ。美空ひばりが古賀メロディーを語り、“韓国の美空ひばり”とも言われた実力派、李美子が「カスマプゲ」などを歌う。とりわけ孫牧人作曲の「他郷暮らし」が効果的に使われていた。番組の中盤とエンディングで李美子が白のチマチョゴリ姿で歌い、芥川賞作家の李恢成もインタビュー中に歌う。
게스트도 호화로웠다. 미소라 히바리가 고가멜로디를 이야기하고 “한국의 미소라 히바리” 라고 하는 실력파 이미자가 “가슴 아프게” 등을 노래한다. 특히 손목인 작곡의 “타향살이”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프로 중반과 엔딩에서 이미자가 하얀 치마 저고리모습으로 노래하고 아쿠타가와상 작가인 이회성도 인터뷰 중에 노래를 불렀다.
木村は「私が最も好きな韓国メロディーなんです」と笑顔を見せた。土地を失った農民の望郷の歌である。これこそ木村が番組で最も伝えたかったことなのかもしれない。
기무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멜로디입니다” 하며 웃어 보였다. 땅을 잃은 농민의 망향 곡이다, 이것이야 말로 기무라가 프로그램에서 가장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ちょうどそのころ、「演歌のルーツは韓国にあるのでは」という説がささやかれ始めた。それは木村が「鳳仙花-」をつくるきっかけの一つでもあった。
마침 그 무렵 “엔카의 루트는 한국에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설이 조용히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무라가 “봉선화…”를 만드는 계기의 하나이기도 했다.
ただ、描き方によっては番組の根幹を揺るがしかねないテーマだ。そこでコメンテーターとして起用されたのが、戦後の日韓をまたいで活躍した韓国人の作曲家、吉屋潤(キル・オギュン)だった。
다만 묘사방식에 따라서는 프로그램의 근간을 흔들지도 모르는 테마였다. 그래서 해설자로 기용되었던 것이 전후 한일을 오가며 활약했던 한국인 작곡가 길옥윤이었다.
「全然違うと思う」。番組の中で吉屋潤はこう反論した。「韓国の演歌は日本が統治した時代に副産物として日本が韓国に残した遺産です。日本から発生したものであり、そこから離れて新しい形の生命力と表現方式をもった」。それぞれのオリジナリティーを信じていた。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프로 중간에서 길옥윤은 이렇게 반론했다. “한국의 엔카는 일제시대의 부산물로서 일본이 한국에 남겨간 유산입니다. 일본에서 발생한 것으로 거기서 떨어져 새로운 모양의 생명력과 표현방식을 가지게 된 거지요” 서로 독자성을믿고 있었다.
吉屋潤が元妻のパティ・キムに書いた曲「離別」は多くの日本人歌手がカバーし、ソウル五輪のために書いたテーマソング「朝の国から」はキム・ヨンジャが歌った。国境を越えて思いを共有する名曲だった。
길옥윤의 전처 패티 김에게 쓴 곡 “이별”은 많은 일본인가수가 커버했고, 서울올림픽을 위해 쓴 테마송 “아침의 나라에서”는 김연자가 노래했다. 국경을 넘어 생각을 공유하게 하는 명곡이었다.
吉屋潤と交流があった韓国KBSの元日本語放送アナウンサー、本田雅嗣は「吉屋さんは“韓国の古賀政男”といってもおかしくない存在。
길옥윤과 교류가 있었던 한국KBS의 전 일본어방송 아나운서 혼다 마사쓰구는 “길옥윤 씨는 “한국의 고가 마사오”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로,
影響力も大きかった」と語る。大衆歌謡を通じた日韓交流に果たした功績は今も語り継がれている。
영향력도 컸다”고 말한다. 대중가요를 통한 한일교류에 끼친 공적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4)オーケーレコード
오케레코드
“遺伝子”受け継ぎ韓流ブーム
”유전자” 이어받은 한류 붐
戦前と戦中の朝鮮半島で最も勢いのあったレコード会社がテイチク系のオーケーレコードである。
전전과 전시 한반도에서 가장 세력이 있던 레코드회사가 테이치쿠게열의 오케레코드였다.
日本のレコード会社の多くが支社や支店を構えていた。日本コロムビア、ビクター、ポリドール、テイチク、太平…。放送局の開局も相乗効果を生み、ラジオから流れる大衆歌謡が庶民の耳に切なく響いた時代。
일본 레코드회사의 대개가 지사나 지점을 두고 있었다. 일본컬럼비아, 빅터, 포리돌, 테이치쿠, 다이헤이 등, 방송국의 개국도 상승효과를 낳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가 서민의 귀에 애달프게 들렸던 시대.
中でもオーケーレコードは「木浦の涙」の李蘭影、「連絡船は出て行く」の張世貞、「涙に濡れた豆満江」の金貞九、「哀愁の小夜曲」の南仁樹ら人気歌手を数多く抱え、専属作曲家も孫牧人や金海松、朴是春ら多士済々だった。
그 중에도 오케레코드사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애수의 소야곡”의 남인수 등, 인기가수를 많이 품고 있었고, 전속 작곡가도 손목인, 김해송, 박시춘 등 쟁쟁했다.
テイチクの傘下になる前、1933(昭和8)年のオーケーレコード創設にかかわったのが李哲と金星欽だ。2人は現在の延世大学の同期生で、大学で吹奏楽団を作るほどの音楽好きでもあった。娯楽が少なかった当時、卒業後は民族系のレコード会社を起こそうともくろんでいたという。
테이치쿠 산하가 되기 전 1933년, 오케레코드 창설에 참여한 바 있는 이철과 김성흠 두 사람은 현재의 연세대학동기생으로서 대학에서 취주악단을 만들 정도로 음악에 열성이었다. 오락이 적었던 당시에 졸업 후 민족계열의 레코드회사를 세우려고 기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金星欽の長女で大阪に住む金英恵は「父は理数系なので技術面に興味があったんです。奈良にあったテイチク本社を一人で訪れ、レコード製作を学んだと聞きました。深夜、工場に忍び込んで産業スパイみたいなこともしたそうですよ」と話す。
김성흠의 장녀로 오사카에 살고 있는 김영혜는 “부친은 이공계였기 때문에 기술면에 흥미가 많았고, 나라에 있는 테이치쿠 본사에 혼자 방문해서 레코드제작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심야 공장에 숨어 들어가서 산업스파이 같은 일도 했던 거 같아요” 라고 말한다.
オーケーレコードの原点は、奈良にあった。
오케레코드의 원점은 나라에 있었다.
1936年、オーケーレコードは経営権をテイチクに譲ったが、社長だった李哲は新たな戦略を打ち出す。オーケーグランドショー(のち朝鮮楽劇団)である。
1936년 오케레코드는 경영권을 테이치쿠에 넘겼지만 사장이었던 이철은 새로운 전략을 내세웠다. 오케그랜드쇼(후의 조선악극단)이다.
「春香伝」や「李秀一と沈順愛」「善花公主」など朝鮮の人たちになじみのある伝説をミュージカル化し、音楽は孫牧人や金海松、朴是春らが担当、李蘭影や張世貞、南仁樹、金貞九ら人気歌手が演じた。そこで、それぞれの持ち歌も歌わせた。
“춘향전”이나 “이수일과 심순애” “선화공주” 등 한국사람에게 친숙한 전설을 뮤지컬화 하여 음악은 손목인과 김해송, 박시춘 등이 담당, 이난영과 장세정, 남인수, 김정구 등 인기가수가 연기했다. 거기서 각자의 자기 노래도 부르게 했다.
金英恵は「父は裏方に徹しました。性格がおとなしかったんです。一方で李哲、実は叔父なのですが、そのエンターテインメントに対する才能を高く評価していました」と語る。李哲は金星欽の妹と結婚したのだ。
김영혜는 “부친은 무대 뒤에 철두철미했어요. 성격이 온순하셨지요. 한편 이철, 실은 고모부인데, 그 엔터테인먼트에 대하는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답니다” 라고 말한다. 이철은 김성흠의 누이와 결혼했다.
朝鮮楽劇団はソウル公演だけでなく、各地を巡業し、人気を集めた。レコードの売り上げにもつながったのだろうか。いずれにせよオーケーレコードの大衆歌謡が半島全土に広まった。
조선악극단은 서울공연뿐만 아니라 각지를 순회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레코드 매상에도 이어진 것일까 여하튼 오케레코드의 대중가요가 반도 전역에 전파되었다.
その勢いに乗って、1939年には日本公演を果たす。「ハントウのショウボート朝鮮楽劇団、帝都訪問初公演」などと宣伝され、東京・浅草の花月劇場から公演をスタート、全国を巡った。朝鮮のヒットソングを歌ったのはオーケーレコードのトップスターたちだった。
그 여세를 몰고 1939년에는 일본공연을 실현시켰다. “반도의 쇼보트 조선악극단, 일본방문 최초공연” 등으로 선전되어, 도쿄 아사구사의 가게쓰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했다. 조선의 히트 송을 노래한 것은 오케레코드의 톱스타들이었다.
朝鮮楽劇団の総務部長として団長の李哲に迎えられた日本人がいた。佐藤邦夫という。
조선악극단의 총무부장으로서 단장인 이철에 영입된 일본인이 있었다. 사토 쿠니오이다.
1940年ごろ、朝鮮半島で“国策映画”の宣伝に携わっていたとき、見いだされた。宝塚歌劇の作品を手がけるなどレビューやミュージカルの分野での経験は豊富だった。
1940년경 한반도에서 “국책영화”의 선전에 종사하고 있을 때 발탁되었다. 다카라즈카 가극의 작품에 손을 대는 등 리뷰나 뮤지컬 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했다.
生前の佐藤と親交があった元韓国日報記者の佐野良一は「楽劇団の巡業引率が佐藤さんの主な仕事でした。日本人の彼が先頭に立って各地の軍との交渉にあたったので興行をスムーズに行うことができたのです。なにより楽劇の魅力を知り尽くしていた」と話す。わずかな年月だが楽劇のスターたちと交流を深めた。
생전에 사토와 친교가 있던 전 한국일보 기자였던 사노 료이치는 “악극단의 순회를 인솔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지요. 일본인인 그가 선두에 서서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과 교섭했기 때문에 흥행을 순조롭게 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무엇보다도악극의 매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지요” 라고 말한다. 잠시 세월이었지만 악극단 스타들과 교류를 돈독히 했다.
50年代から70年代にかけての韓国の芸能界には楽劇の出身者も多かった。戦前、戦中の日本を知る彼らが、歌謡曲を通じた日韓交流に貢献した。
5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한국의 예능계에는 악극단 출신자가 많았다. 전전 전시의 일본을 아는 그들이 가요 곡을 통한 한일교류에 공헌했다.
佐藤は戦後、ビクター芸能に在籍し、築いた人脈を大いに活用する。「日韓が国交回復する前にフランク永井の韓国公演を実現させたり、張世貞やパティ・キム、吉屋潤らによる『韓国歌謡名曲集』をリリースしたり、その仕事ぶりは精力的でした」と佐野。
사토는 전후 빅터예능에 재직하며 쌓았던 인맥을 크게 활용한다. “한일이 국교회복하기 전에 후랑크 나가이의 한국공연을 실현시켰고, 장세정이나 패티 김, 길옥윤 등이 부른 “한국가요명곡집”을 발행하거나 일하는 솜씨는 정력적이었지요” 라고 사노가 말한다.
今の韓流ブームの礎を築いた人物だった。
지금 한류 붐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었다.
(5)SPレコードの時代
SP레코드 시대
今も生き続ける哀愁の旋律、言葉
지금도 이어오고 있는 애수의 선율, 가사
十数年前、在日韓国人ミュージシャンのパギやん(本名・趙博(チョウ・バク))は曾祖母の遺品の中に約80枚の古いSPレコードがあるのを知った。大阪市内の自宅を整理していた家族が見つけたのだという。
10수년 전 재일한국인 뮤지션 박양(본명: 조박)은 증조모의 유품 가운데에서 약 80장의 오래된 SP레코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사카시내의 자택을 정리하고 있던 가족이 찾았다고 한다.
「一枚一枚が新聞紙に包まれていてね、米びつの中へ大切に保管されていたんです。ほとんどが植民地時代の朝鮮人歌手のものですよ。驚いたな」
“한 장 한 장이 신문지에 싸여 있었어요. 뒤주 속에 소중히 보관되었던 겁니다. 거의가 일제강점시대의 조선인 가수 거였어요 놀랐지요”
昭和46年に88歳で亡くなった曾祖母。昔の大衆歌謡を聴いていたところを、その生前に見たことはなかったそうだ。
1971년에 88세로 돌아가신 증조모. 옛날 대중가요를 듣고 있었던 장면을 생전에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趙博が韓国の大衆歌謡に関心を持ち始めたのは昭和50年代、神戸市外大に通っていたころだ。別の大学の先輩が歌う「他郷暮らし」に感動し、神戸の大衆音楽研究者の論文を読み、カセットテープを集め始めた。
조박이 한국의 대중가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5년대 고베 시 외대에 다녔을 무렵이었다. 다른 대학의 선배가 부르는 “타향살이”에 감동하여 고베의 대중음악연구자의 논문을 읽으며 카세트 테이프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民族の血なんでしょうか、ハマりましたね。ハルムイ(曾祖母の呼び名)がどんな思いで聴いていたのか、今思うと、そんなことも気になる」
“민족의 핏줄일까요, 완전히 빠졌지요. 할머니가 어떤 기분으로 듣고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도 궁금했다”
大学院生だった昭和55年夏、大阪市内のライブハウスで「演歌でつづる」と題して歌った。「木浦の涙」「他郷暮らし」「ナグネソルム」…。日本の統治下に歌われた曲ばかり。政治色もある催しだったが、その新鮮さからか、盛り上がった。
대학원생이던 1980년 오사카 시내에 있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엔카로 엮는다”라는 타이틀로 노래를 했다.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 “나그네 설움” 등. 일제 때에 불리던 곡만 불렀다. 정치색도 있는 공연이었지만, 그 신선함에 분위기가 뜨거웠다.
「あの時代の歌を歌うことを批判する人たちも多いけれど、親や祖父母たちが親しんだ歌です。歌っちゃいけない理由はない。歌い継ごうと思った」
“그 시대의 노래를 부르는 걸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부친이나 조부모들에게는 친숙한 노래입니다. 노래해서 안 된다는 이유는 없어요. 노래를 계속하려고 마음먹었지요”
いまも時折、ライブで歌う。ハルムイを思い浮かべながら。
지금도 가끔 라이브에서 노래를 한다. 할머니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いま、韓国で大衆歌謡が注目されることは少ない。そんな中で研究対象として取り組む若い研究者もいる。韓国学中央研究院韓国学大学院の李埈煕だ。36歳。名門ソウル大学の大学院で東洋史を学んだが、いわゆるマニアな学問に転向した。
지금은 한국에서 대중가요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젊은 연구자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이준희로 36세, 명문 서울대학의 대학원에서 동양사를 전공했지만 소위 열중하고 싶은 학문으로 전향했다.
「中学生のときに興味を持ちました。『哀愁の小夜曲(セレナーデ)』を歌った南仁樹(ナム・インス)が特に好きでね。研究したいと思った理由は歴史や歌詞に間違いや歪曲(わいきょく)がひどかったからです」
“중학생 때에 흥미를 가졌지요. “애수의 소야곡”을 노래한 남인수가 특히 좋았지요. 연구하게 된 동기는 역사나 가사에 착오와 왜곡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主に1930年代から50年代の激動期に流行した大衆歌謡に関心を寄せてきた。SPレコードの時代だ。歌手や作曲家、作詞家の個別研究をはじめレコード産業の実態などを歴史的観点から掘り起こしてきた。
주로 1930년에서 50년대의 격동기에 유행한 대중가요에 관심을 가져왔다. SP레코드시대였다. 가수나 작곡가, 작사가의 개별 연구를 비롯해 레코드산업의 실태 등을 역사적 관점에서 파고들었다.
この夏、研究のため日本を訪れる。韓国文化体育観光部の支援を受けたプロジェクトで、テーマは「歌の朝鮮に向けたモダンボーイ・李哲(イ・チョル)の夢。オーケーレコードと朝鮮楽劇団」。
이번 여름, 연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다. 한국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은 프로젝트로 테마는 “노래의 조선에 향한 모던보이 이철의 꿈.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
「オーケーレコードの創業者だった李哲はSP時代の韓国大衆歌謡の象徴的存在でした。その生涯と仕事の手がかりを日本で探ってみたい」
“오케레코드의 창업자였던 이철은 SP시대 한국대중가요의 상징적인 존재였지요. 그 생애와 사업에 대한 실마리를 일본에서 찾고 싶습니다.”
韓国ではKポップが人気を集めている。ところが2004年に演歌調の「オモナ!(「あらまぁ」の意)」という大衆歌謡の歌が突如ヒットした。
한국에서는 K팝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2004년에 엔카 조의 “어머나!”라는 대중가요가 갑자기 히트했다.
歌ったのは張允貞。女性アイドルのようなルックスで、大衆歌謡ながら華やかな衣装やダンスを取り入れ、若者たちの絶大な支持を得た。
노래한 것은 장윤정. 여성 아이돌과 같은 모습으로 대중가요이면서 화려한 의상과 댄싱을 엮어 젊은이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李埈煕は「これを大衆歌謡の復活と評価する声もありますが、ちょっと疑問だな。歌に恨の心がない。大衆歌謡の境界があいまいになってきたのは歌謡史の流れなのでしょうけれど…」と語る。
이준희는 “이것을 대중가요의 부활이라고 평가하는 소리도 있지만, 좀 의문스럽지요. 노래에 한의 정신이 없어요. 대중가요의 경계가 애매해진 것은 가요사의 흐름이겠지만…”이라고 말한다.
張允貞は翌年、NHK「歌謡コンサート」で「オモナ!」を熱唱した。
장윤정은 다음 해 NHK “가요콘서트”에서 “어마나!”를 열창했다.
その後、日本の演歌歌手、林あさ美が日本語の歌詞で歌う。タイトルは「恋してオモナ」。
그 후, 일본의 엔카가수 하야시 아사미가 일본어 가사로 노래했다. 타이틀은 “사랑해줘요 어머나!”
かつて古賀政男が作曲し、藤山一郎が歌った「酒は涙か溜息か」は蔡奎燁が朝鮮語で吹き込んだ。張世貞が歌った「連絡船は出て行く」は戦後、菅原都々子により日本語で歌われた…。
일찍이 고가 마시오가 작곡하여 후지야마 이치로가 불렀던 “사케와 나미다카”는 채규엽이 한국어로 취입했다. 장세정이 부른 “연락선은 떠난다”는 전후에 스가하라 쓰즈코가 일본어로 노래했다….
海峡を越えて、日韓で歌い継がれた大衆歌謡。そこには同じ庶民の哀愁や情感が生き続けている。
해협을 건너 한국과 일본에서 노래하며 이어온 대중가요. 거기에는 같은 서민의 애수와 정감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끝)
|
첫댓글 드디어 "海峡を越えて - 해협을 건너서" 연작 게재가 최종회가 되었네요.
귀중한 자료를 진정한 엔카 카페다운 카페 우리 제주정낭회에 소개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별도의 코너를 만들어 보존하겠습니다.
거듭 감사의 말씀 드리며 언제나 활력과 기쁨 넘치고 행복한 나날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루 님
엔카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 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이 글을 투고했습니다.
다행히 마루 님이 관심을 가져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マルさんが「마루 엔카방」を運営し、数多くの演歌を紹介していられることを知りました。
これは演歌同好人たちには演歌の参考書として大きな役割をしていると思っております。
頑張って下さい。
엄동설한에 건강을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