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
ㅡ 삼국사기와 고대 역사서 (3) ㅡ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을 전 편에서도 나열했지만 다시 한번 요약하면, <김부식은 철저한 사대주의자였었고,칭제건원과 서경천도운동 묘청일파들을 몰살시켰고, 삼국사기에 단군신화를 제외 시켰고, 신라 외 고구려와 백제 역사를 소홀히 했고, 우리 기록이 적다는 이유로 중국사서를 더 중시하여 기록했다>는 등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깊게 살펴보지 못한 지나치게 편향되어있는 평가라는 것이다.
사실 나도 최근까지 그 편향된 시각으로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보아 왔었다. 그리고 그런 비판 내용으로 기고문으로 일간지에 내기도 했다.(아래사진 참고)
사실, '김부식'이 은퇴할 때가 되어서야 '인종'의 권유로 없어진 역사를 복원하라는 명을 받고 만든 것이 '삼국사기'이다. 국가에서 발행한 철저한 '국정화역사서'이다. 김부식은 총제작자 겸 감독일 뿐 김부식이 독단으로 삼국사기를 쓴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김부식 입지를 고려하면 내용에 김부식과 그 세력 영향이 강하게 반영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이는 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황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은, 김충효, 정습명으로 김부식까지 모두 11명인데 김부식과 가까운 이들이었으며 주로 자료 수집과 정리를 담당했다. 편찬의 기준은 모두 김부식에 의해서 결정되었으며 김부식이 더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론'만 보아도 김부식의 의도는 국왕의 집필 방침과 함께 양대 축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전편에서 김부식이 당시 대외정세를 현실적으로 파악하게 된 이유는 5번이나 중국을 방문해 중국에서 직접보고 겪었기 때문이다. 송나라 쇠퇴와 금나라 강성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했다.
김부식이 중국측 기록을 우리 기록보다 더 중시해 참조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삼국사기를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은 이들의 비판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내내 "기록이 없어서 아쉽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통탄하다." 같이 김부식이 살던 시절엔 이미 고구려와 백제측 기록이 증발해버린 상태였고, 이에 따라 김부식도 어쩔 수 없이 중국측 기록을 인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 편에서 언급했다시피 삼국사기를 보면 김부식을 단순 사대주의자로 보기엔 어려운 면이 꽤 많다. 삼국을 중국과 대등하게 '본기'로 기록한 점이 대표적이라고 앞 편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 성향을 대놓고 보여주는 것은 본론 자체가 아닌 '사론'이다. 사기에서 사마천의 말이 '태사공왈'로 나타나는 것처럼, 삼국사기에서 김부식 의도 역시 '사론'으로 나타난다. 사론에서 김부식은 '사대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다운 표현이 많이 나온다.
물론 삼국사기가 좀 보수적인 내용인 것은 맞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역사서들이나 삼국사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구삼국사' 등 내용을 현재 추정하는 것과 비교해서, '삼국사기'는 보수적인 사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성급한 주장이다. '구삼국사' 경우에는 허무맹랑한 기록조차 모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부식은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입장에서 철저히 현실적인 것만 기록하려고 노력은 했다.
신라 중심 사관이 나타난다는 지적도 무리한 주장이다. 삼국사기에서 신라역사 비중이 과다하게 큰 것도 아니다. 분량을 비교하여 신라가 많이 차지하게 보인 이유는 통일신라를 포함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를 제외하면 삼국을 비교적 균형있게 다루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아래 사진참고) 그러나 김부식이 백제는 폄훼한 기록은 종종 보인다.
나는 우리 사료들에 대한 국뽕입장이 아닌 철저한 비판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왜곡된 고대사를 바로 잡고 일본, 중국의 날조된 역사관에 대항할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사기가 긍적적인 면도 많지만 전문가들에 의하면 아직까지도 해명할 수 없는 비판 받을 부분이 꽤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점을 살펴 보면,
첫 째, 삼국사기는 초기 기록상 지명, 인명 등 용어사용이 너무 무분별하다. 이 문제는 삼국사기 기록 정확성을 저하시킨다.
둘 째, 건국초 기록에 신화와 설화를 지나치게 인용하여 사료로서 신뢰성도 저하시켰다. 김부식은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에 의거해 저술한다고 해 놓고 정작 삼국사기에 '고구려시조, 신라시조 탄생설화'는 기록해 두었다. 또한 각종 당시 한반도 기이한 설화들을 기록해두며 "믿지는 못하겠는데 일단 전해지니까기록해둡니다."라고 각주를 달아놓기도 했다. 그런데 윗 이야기는 앞서 말한 '단군신화'를 기록하지 않았던 이유와는 크게 배치된다. 추정하기로는 말 그대로 '삼국사기'는 '삼국사'를 기록하는 역사서 임으로 그 이 전 고조선신화 역사를 뺀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점은 김부식 잘못된 판단으로 생각되어진다. 삼국사기가 '삼국사'라고 하지만 그 뿌리부터 밝혀두는 것이 역사서 기본이라 본다. 또 정서인 삼국사기에 단군신화와 고조선 역사가 우리 민족역사임을 당당히 밝혔다면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은 더 기를 펴지 못 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셋 째, 삼국 이외의 한반도내 마한을 비롯한 수십개 대소국들에 대한 기록의 미비점, 특히 삼국초기 진한과 변한지역의 주요세력이었던 가야에 대한 기록부족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와 왜의 관계성에 대한 혼란을 초래시켰다.
넷 째, 신라의 통일세력에 대한 지나친 미화(특히 김유신과 김춘추)하고 백제패망에는 조소까지 보이고 있다. 특히 백제 멸망과 관련 의자왕 기록은 많이 곡해되어있고 백제멸망을 당연하다듯이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판이 아직 해명되지 않고 있음에도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한국 고대사의 보물같은 중요한 사서이다. 만약 삼국사기가 편찬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삼국시대를 고조선시대처럼 깜깜이로 볼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중 고조선 시대는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렇지만 고조선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게 무엇이 있는 가? '위만', '기자', '준' 왕이름 몇 몇 빼고는 아는 왕이름도 없다. 단군이 왕 이름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단군신화'부터 2천년이 넘는 고조선 시대 역사를 단 두, 세편으로 정리 하기도 벅차다.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삼국시대 또한 그럴 수도 있었다.
사실 '삼국유사'도 '삼국사기'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
'삼국사기'가 편찬 되고 나서 140년이 지난 후 1285년에 불승 '일연'이 삼국사기에 문제점을 직시하고 '삼국유사'를 개인적으로 편찬한 것이다.
'일연'은 고려가 '몽골침략'에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우리 민족의식을 일깨우기위해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정사의 성격을 지닌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는 야사도 많이 포함시켰다. 특히 향가나 이두로 표기한 글도 있으며, 향찰로 표기된 혜성가 등 신라 향가 14수는 균여전에 실린 11수와 함께 한국고대 문학사에서 절대적 가치가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 사회의 역사, 종교, 문화, 풍속, 언어 등을 연구하기 위한 기본서로 삼국사기와 함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같은 국정화 된 역사서가 담지 못한 우리 역사의 절대적 가치가 있는 단군신화 등 역사, 종교, 문화, 풍속, 언어 등을 담아 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역사서는 하나의 이념이나 집권세력이 추구하는 한 가지 국가적 목표로만 가는 '국정화 역사서'가 아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검정화 역사서'로 가야하는 이유를 삼국유사가 분명하게 보여 준다.
다른 우리나라 고대 역사서인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겠다. 내가 이 역사서에 말할만큼 아직 지식이 없다. 그만한 지식을 쌓았을 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역사서에 대한 이야기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끝내고 왕에게 받치는 '출간표'로 끝을 맺고자 한다.
글이 길어지지만, 삼국사기는 전부 다 못 읽겠지만 출간표인 '進三國史記表'(삼국사기를 올리며 드리는 표문)정도는 읽어 보시라고 원문 전체를 올려 놓는다.^^
<進三國史記表>
삼국사기를 올리며 드리는 표문
[신 아무개는 아룁니다, 옛날의 여러 나라 역시 각자 사관을 두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가로되 "진(晉)의 『승(乘)』, 초의 『도올(檮杌)』, 노의 『춘추가 다 한 가지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바다 동쪽의 세 나라도 역년(歷年)이 길고 오래되어 마땅히 그 일을 드러냄이 있어야 할 방책이 있어야 하는데, 늙은 신으로 하여금 이것을 모아서 엮게 하셨으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흠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인종)께옵서는 당우(唐虞)의 문사(文思)를 갖추시고 하의 우의 근면하고 검소을 본받으셔서 바쁘신 중 틈이 날 때마다 이전 시대의 역사책을 두루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학사대부(學士大夫)가 다섯 경전과 제자백가의 책이라든지, 진과 한의 역사시대의 『사기』에 대하여는 혹 널리 통하여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 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선 도리어 막막하여 그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된 일이다, 더구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세 나라가 세 발 솥처럼 나란히 서서 능히 예(禮)로써 중국과 교통한 때문에 범엽의 『후한서(後漢書)』라든지 송기의 『당서(唐書)』에다 그 열전이 있지만, 그 역사서는 자기 나라의 안에 관한 것은 상세히 하고, 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해서 자세히 실리지 않았습니다. 또 그 옛 기록으로 말하면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역사적 족적을 놓친 것이 많으니, 이런 까닭에 임금의 선· 악이라든지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나라의 안위, 인민의 잘 다스려짐(治)과 어지러움(亂)에 관한 것을 다 드러내어 써 후세에 권하고 경계함을 보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삼장(三長)의 재능(있는 인사)을 얻어 일가의 역사를 완성하여 이를 만세에 끼치어 해와 별과 같이 환하게 하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본래 삼장의 재능도 없고 또 깊은 지식도 없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날로 정신이 혼몽하여, 비록 독서를 부지런히 하여도 책만 덮으면 곧 잊어버리며, 붓을 잡아도 힘이 없고 종이를 대하면 죽죽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신의 학술이 이와 같이 천박하고 이전 시대의 사적(事蹟)이 저와 같이 아득합니다. 이러므로 한껏 정신과 힘을 다하여 겨우 권책을 이루었으나 결국 보잘것이 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라오니 성상 폐하께옵서 이 거칠고 남루한 편찬을 양해하여 주시고 망령된 저작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것이 비록 이름난 산에 비밀스러이 소장될 거리는 되지 못하나 간장항아리 덮개와 같은 쓸모 없는 것으로는 돌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의 구구하고 망령된 뜻을 굽어살펴주십시오.]
이어서 단군신화 편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