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1>
1992년 여름, 안암동 고려대학교 앞 한 허름한 중국집.
야구경기를 마친 회사 야구동호회 젊은이들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날의 경기 내용과 짬뽕국물을 안주 삼아 모두들 거나하게 취했다.
자리를 마무리하며 누군가가 외쳤다.
“우리 아들들과 함께 야구할 때까지 우리 같이 야구합시다! 건배!”
원샷 후 그들은 모두 하나 되어 어깨동무를 했고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그들이 아들들과 야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는 단 한명만이 남아있다.
<상황 2>
솔라이트밧데리,현대해상화재,라이거스,에이스코리아,야미사,백상자이언츠,
WWE,한국유학원,영재티쳐스.이노포리머,대륙상사,세진산업개발,효성,탑건설....
엔젤스도 한 때는 회사팀으로 넉넉한 재정 지원을 바탕으로, 위에 언급한 팀들과
비슷하게 선수를 모은 적이 있다. 취업을 시키기도 했고, 룸싸롱의 광란도 있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 없다.
<상황 3>
2005년 2월.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지갑에 만원짜리 하나 달랑 넣고 지하철, 버스
타고 다니던 놈에게 갑자기 감독을 하란다. 그 해 뛰어야 할 리그는 3개.
거의 매주 일요일 아내 차를 빌려 타고 정신없이 달렸다.
이듬해부터는 재정상의 이유로 1개 리그만 참여해야했고 그 뒤로 오랫동안
그 보잘 것 없는 놈은 부족한 팀 운영비를 때로는 대출로, 때로는 팀원들에게
빌렸다가 다시 갚는 식으로 충당했다. 체질 상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데다
주머니까지 가벼운 그 놈이 팀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경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잘 조정해 주는 것, 경기 때 가능한 멋진 사진을 찍어 주는 것,
차가 없는 팀원은 집 앞에서 경기장, 또 집 앞까지 모시고 다니는 것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마음을 담은 문자를 보내는 것 밖에는 없었다.
<상황 4>
그 보잘 것 없는 놈은 나름의 방식대로 팀을 하나로 묶고 팀원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실력이 너무 출중해서 다른 팀에
스카웃(?)되거나, 회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팀을 찾아 떠나거나, 또는 아무런
이유없이 떠나는 팀원들이 생길때는 모두가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 여기고
한 개비 담배로 아쉬움을 날렸다. 하지만, 미치광이 돈키호테에게도 언제나 그를
따르는 산쵸 판사가 있었고, 심술쟁이 마술사 가가멜에게도 아즈라엘이 있었듯,
고맙게도 그 보잘 없고 부족한 놈에게는 그를 믿어주며 묵묵히 함께 하는 팀원들이
있었고, 매년 새로운 팀원들이 꼭 필요한 자리를 절묘하게 채워 주는 행운도 따라
비틀거리면서도 그 놈은 계속 걸어 갈 수 있었다.
<상황 5>
그 놈도 이제는 나이를 먹는가 보다. 온몸에 근력도 떨어지고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다.
저녁 아홉시가 되면 명상을 하며 잠이 든다. 이제는 20년 가까이 싸워온 공황장애라는
병과 싸우기도 버겁다. 그래서 그런지 오직 바라는 것은 ‘스트레스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도 이 세상에 와서 잘한 것이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것, 아들의
아빠인 것, 그리고 엔젤스라는 팀의 감독인 것‘ 딱 세가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 놈은 여전히 야구장으로 간다. 지고는 못살던 젊은 시절의 혈기왕성했던
기억에 가끔씩은 심장이 쿵쾅거리지만, 이제는 야구와 엔젤스라는 팀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Hi Five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분히 즐겁다.
<마지막 상황>
그 놈은 이제 인생의 딱 절반을 엔젤스와 함께했다. 위에 언급한 상황들을 겪었기에
이기는 것에 대한, 사람에 대한 욕심은 없다. 그저 물 흐르듯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다.
한편, 반평생을 온 힘을 다해 지켜온 팀이기에 모든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때로는
묘한 몽니를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놈은 자신의 부족함이 여전하고 거기에다 늙은이
같은 심술까지 부리더라도 그래도 믿고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변함없이 야구장
으로 갈 것이다. 왜냐하면 엔젤스는 이 세상에 와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그 놈의 마지막
자존심이기에.
첫댓글 그놈이야기의 그놈은 내가아는 그분이네요~~~ 제가 그분 인생의 재미와 무료함을 달랠수있는 방법을 찾을때까지 연구해서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여기만 들어오면 아주 심난하다~~~~ㅎㅎㅎ
이렇게 좋은 팀에서 야구를 할수 있다니,,,,,,,,정말 다행이네,,,,,,,,,,감사합니다!
흠..
감독님과 팀원들이 있는 야구장으로 변함없이 가겠습니다.~ 엔젤스의 팀원이 된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게임원에서 다음카페로 옮기신 이유가... 정말 뼈저리게 느껴지는 상황들...
...... 그래도 전 늘 형 70km이내에 있습니다.
글을보면서 그분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반역자 이투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