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분노…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공소시효 끝나면 난 자유” 유족의 한 맺힌 분노
조미진 기자 ㅣ 기사입력 2015/03/02 [13:57]
남아 유괴해 돈 받으려던 범인…납치 초기 이미 ‘살해’
다양한 연령 여성 성폭행 후 살해한 ‘화성 연쇄살인’도
수사의 안일함으로 미궁 빠진…대구 어린이 황산테러
“공소시효 폐지로 범인 처벌 가능케 해야” 여론도 커져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 ‘이형호 어린이유괴살인’,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는 우리나라 3대 미제사건으로 불린다. 이형호 유괴 살인사건의 피해아동뿐 아니라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 피해자들은 모두 살해됐으며 황산테러를 당했던 피해아동도 범행을 겪은 지 49일 만에 숨졌다. 이 세 사건 모두 당시 또는 이후 영화화되거나 수차례 어론을 통해 조명되며 알려졌다. 하지만 초동수사의 미흡함이나 경찰의 안일함 등으로 범인조차 특정하지 못한 채 공소시효가 만료돼 향후 범인을 잡더라도 처벌이 전혀 불가능하게 됐다. 대구 황산 테러 사건도 최근 유력 용의자의 당시 처리에 대한 재정 신청이 기각 돼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을 취기에 처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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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현대=조미진 기자]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부녀자들을 성폭행 후 살해해 전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희대의 연쇄살인사건, 이형호 어린이 유괴 살인사건은 범인을 특정하지도 못한 채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아버렸다. 최근엔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까지 공소시효 만료 위기에 놓여 있어 악질 엽기 범죄에 대한 제도적 문제가 크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형호 유괴 살인사건
▲ 이형호 군은 유괴된 지 44일 지난 1991년 3월13일 잠실대교 서쪽 한강둔치 배수로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지난 1991년 1월 당시 초등학교 3학년 故 이형호 군이 유괴돼 43일 만에 한강공원 잠실지구 인근 배수로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2007년에 개봉된 영화 <그놈 목소리>가 이 사건을 토대로 제작된 것.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살던 이형호는 1991년 1월29일 저녁 놀이터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행방불명됐다. 그리고 그날 밤 30대 남자가 협박 전화를 걸어왔고 이는 43일 동안 60여 차례 이어졌다.
범인은 철두철미하게 움직였다. 협박 전화를 처음 걸고 난 뒤에는 경찰에 신고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형사를 위장해 전화를 걸어 형사들을 바꿔달라고 해 계모가 그대로 대답할 뻔하기도 했다. 당시 이형호의 부친 이우실은 재혼한 상태로 아이의 생모는 따로 있었다.
범인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찰에 신고했을 경우에 대비해 치밀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범인은 직접 돈을 받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 은행 계좌를 개설해 돈을 받으려 했다. 당시는 신분증 없이 가짜 신분으로 계좌 개설이 가능했기에 범인이 은행에 계좌를 개설한 뒤 특정 장소에 계좌번호를 적은 메모를 남겨 입금을 지시하는 ‘무인 포스트’ 방식이었다. 하지만 은행 직원들이 사고 계좌임을 보고 머뭇거리자 범인은 도주했다. 해당 은행지점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고, 통장 개설 신청서와 메모지에도 지문이 없었다.
또 돈을 받는 데 실패한 범인은 같은 해 2월14일 밤 최후통첩을 했다. 통첩을 받은 곳에 형사들은 잠복했지만 무전기 의사소통 과정에서 위치를 혼동해 범인이 돈을 집어갈 동안 형사들은 우왕좌왕하고 만 것. 그날 밤 범인은 전화를 걸어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연락을 끊었다.
범인의 마지막 통화로부터 한달 후인 1991년 3월13일 한강공원 잠실지구 터널 옆 배수로에서 아이의 시체가 발견됐다. 부검 결과 위에 남아있는 음식물이 실종 당일 친구 집에서 먹은 음식으로 확인된 것. 유괴 당일 내지 직후 살해해 이미 아이가 죽은 상태에서 계속 금품 요구 협박 전화를 한 것으로 밝혀지자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이후 범인이 계좌를 개설하며 대화를 나눈 은행원의 기억을 토대로 몽타주가 작성됐고 공개수사로 전환됐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국과수의 범인 음성 성문 분석 결과, 아이 친척인 이상재(가명)의 성문과 완전 일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상재는 이형호의 생모와 인척으로 이우실과 생모의 이혼 당시 생모 편에서 대립했기에 이우실과 사이가 아주 나빴다. 또 당시 하던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을 빌리고 다닐 정도로 자금 사정도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유괴 후 전화를 수차례 걸었던 범인은 아이의 생모와 살고 있는 형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아이의 조부가 자산가이므로 돈을 충분히 줄 수 있지 않냐는 등 가족, 친척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사실들을 많이 알고 있어 이상재에 대한 의심은 증폭됐다.
그 외에도 이상재가 범인으로 의심될 만한 정황들이 많았다. 범인이 개설한 은행 통장 명의가 이상재의 주변 인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재는 서울의 공중전화를 통해 협박 전화가 걸려온 날, 경주에 있었다며 당시 고속도로 통행 영수증을 제시했고 이후 경주에 머문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그가 경주에서 전화를 걸고 서울의 공범이 이를 이형호의 집에 연결해 알리바이를 조작할 수도 있었다. 특히 이상재는 대학에서 전기 통신을 전공했기에 그 가능성은 상당했다. 그는 다른 날의 기억은 흐린 반면 사건 당일 일정만 뚜렷이 기억하고 여러 물증을 갖고 있어 알리바이를 조작하려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결국 뚜렷한 증거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범인을 검거할 좋은 기회를 여러 차례 날렸다.
시체 부검 결과 위에 남아있던 잡곡과 나물에 착안, 송파 및 강남지역 보리밥 식당을 수사했는데, 아이가 실종 당일 친구 집에서 잡곡밥과 나물을 먹은 사실 등 행적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헛다리만 짚은 것.
결국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채 이 사건은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되고 말았다. 그러나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선 범행 수법 등을 통해 범인이 최소 3명 이상이라는 가설이 제시 됐다.
범인이 ‘저희’ ‘우리’ 등의 단어를 자주 사용했으며, 무인 포스트 방식에서 타인에게 들키지 않고 이우실만 메모지를 발견하게 하려면 때 맞춰 메모지를 갖다놓는 인물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점, 이우실의 동선을 파악하는 감시 역할도 따로 있어야 범인과 접선 과정이 제대로 진행된다는 점, 그 외 목소리 심리 분석 등이 근거로 제기됐다.
하지만 이제는 설령 범인을 잡더라도 처벌이 불가능하다.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
이 사건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10대부터 70대까지 10명의 여성이 성폭행당한 후 차례로 살해된 사건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모티브가 되면서 또다시 유명세를 탔다.
이 사건의 주요 특징은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과 피해자가 젊은 층에만 한정되지 않고 50대, 60대, 70대 등 다양하다는 것, 4, 6, 7, 9차 사건에서 피해자의 음부가 크게 훼손됐고, 사건현장이나 피해자의 음부 안에서 정액 또는 머리카락, 담배꽁초가 발견됐다.
또한 피해자의 대부분이 목이 졸려 살해됐다. 한 피해자의 국부에서는 9개의 복숭아 조각이 나오고 가슴이 19차례나 칼로 도려질 정도로 범행 수법이 굉장히 잔인하고 대범했다.
충격적인 엽기사건임에도 첫 사건이 서울 아시안게임을 하루 앞둔 날 일어났기 때문에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에는 ‘연쇄 살인사건’으로 수사가 되지 않았고 경찰은 일반적인 개별 살인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었다.
그러나 살인은 계속 이어져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럼에도 수사에 진척이 없자 이 연쇄 살인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됐고 경찰도 이 사건에 총력을 기울이게 됐다. 100만 명이 훨씬 넘는 경찰 병력이 투입된 것.
8차 사건의 범인은 검거됐지만 이 범인이 다른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아 나머지 사건들은 다시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때문에 이 사건들이 단독범의 소행인지, 다수의 범인에 의한 명확하게는 개별사건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때는 과학수사가 발달하지 않아서 경찰이 남겨진 증거를 훼손하거나 지나쳐 버리는 일이 많았다.
당시 수사 기술로는 시신의 음부에서 발견한 정액으로 혈액형만 간신히 파악했을 뿐이어서 유전자 감식은 불가능했다. 또한 3명의 용의자가 자살하기도 해서 ‘화성괴담’이라는 말까지 돌기도 했다. 범인에 대한 온갖 추측과 가설이 난무한 이 사건도 결국 지난 2006년 공소시효가 끝나버렸다.
대구 황산 어린이 테러
이 사건은 명백하게 영구미제사건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그럴 위험에 처한 경우에 해당된다.
대구고등법원이 지난 2월, 16년 전 발생한 이 사건에서 피해아동의 부모가 용의자로 지목한 남성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적절했는지를 가려달라는 재정신청(裁定申請)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경위는 이러하다. 1999년 5월20일 대구시 동구 효목동 골목길에서 집 인근 학원에 가던 태완(6)군이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에게서 황산을 뒤집어쓴 것이다. 태완 군의 고개를 젖히고 입을 벌려 황산을 고의로 투척한 것.
태완 군은 이 사고로 두 안구가 녹아 실명했으며, 식도가 완전히 녹고 온몸의 피부가 녹아 붕대를 전신에 감은 채 고통에 신음하며 투병생활을 했다. 그러나 사고 49일 만에 끝내 패혈증으로 숨지고 말았다.
하지만 태완 군이 의식을 찾은 후부터 아이의 어머니는 사고 상황에 대한 아이의 진술을 수차례 녹음했다. 아이의 진술이 필요하다는 경찰의 요구 때문이었다는 게 어머니의 주장이다. 하지만 정작 태완 군의 주장은 경찰 수사과정에서 묵살됐다.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례로 피해자인 태완 군과 유일한 목격자였던 청각장애아가 공통적으로 범인이 봉지에 담긴 무언가를 뿌렸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당시 황산을 비닐봉지에 넣어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두 아이 진술의 신빙성이나 진실성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실험한 결과 황산을 비닐에 옮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로 밝혀졌다.
또 당시 경찰은 청각장애아의 진술도 전혀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청각장애아는 의사전달이 되지 않기 때문에 진술을 믿기 힘들다는 입장을 밝힌 것. 하지만 이후 모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 청각장애아의 지능을 검사한 결과 일반인이나 일반인 이상의 지능지수를 가졌음으로 밝혀져 공분을 사기도 했다.
어머니가 지목한 용의자인 이웃집 아저씨의 상체와 하체 두 군데 화상자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전문가들은 범인의 몸에 흔적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용의자는 경찰진술과정에서 태완 군을 옮길 때 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타깝게도 경찰이 용의자의 흉터를 발견한 시점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기에 흉터의 원인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용의자의 경찰 진술 내용은 받아들여졌다. 거짓말 탐지기 판정 결과 때문이었다. 당시 경찰은 2번 거짓말 탐지기를 통해 용의자의 말이 진실이라고 판정한 것.
최근 있었던 재정 신청에서 태완 군의 부모는 “당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생활정보지의 황산 수치는 5%대가 나왔다. 국과수는 황산에 직접 접촉한 것이라고 밝혔다”며 “용의자의 신발을 조사했을 때 황산 수치는 4.6%로 나왔는데 어떤 경위로 이런 수치가 나왔는지에 대한 대답은 얻을 수 없었다”며 철저한 증거 재수사를 요구했다.
비난받은 경찰의 수사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심문과 수사기록 등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서도 재판부는 용의자에 대한 공소제기 명령을 내리는 데는 증거가 부족한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국과수의 당시 분석 자료에 따르면 태완 군의 부모가 용의자로 지목한 인물이 경찰에 제출한 신발 등에서 황산 반응이 나타났다.
그러나 해당 인물은 사건 발생 뒤 태완 군을 안고 처음 병원으로 옮긴 사람이어서 이 과정에서 황산에 간접적으로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수사 기관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경찰의 안일한 수사로 범인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사건은 미궁 속에 빠졌다.
태완 군의 어머니가 이웃집 아저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이유는 태완 군이 그가 같은 목소리로 사고를 당하기 전 자신을 불렀고, 사고가 난 후 또 자신을 불렀다는 증언 때문이다. 또 태완 군은 사고 직전 골목에서 본 사람은 이웃집 아저씨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행을 위해 이웃집 아저씨가 원래 안면이 있던 태완 군을 불렀다는 것이다.
태완 군을 최초 발견한 이웃집 아저씨는 태완이를 소리쳐 불렀고 태완 군의 부모님으로부터 수차례 금전적인 부탁을 했지만 거절당해 복수적 동기도 존재했다.
태완 군 부모는 십수년째 1인 시위를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정신청 기각 결정과 관련해서도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대법원에 재항고할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국민들은 미국 등의 선진국이 강력 범죄에 대해서 공소시효를 아예 두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도 살해 사건 등 강력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하루빨리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거 법의 안정성과 수사 낭비 등으로 공소시효가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과학 수사가 가능한 현재는 공소시효는 오히려 범인에게 면죄부를 주며 사회의 형사정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happiness@hyunda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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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미제사건이므로 냉철하게 판단하고 사건해결을 위한 단서를 제공해야 하고 새로운 사실은 없어도 문제해결을 위한 긍정적 접근이 좋다.
공소시효를 폐지하자는 취지는 공감하면서도 그로 인한 불편과 부작용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는 자신에게도 boomerang처럼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할 수 없다고 해도 범죄의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에게 독살당했거나 인조의 괴롭힘으로 죽었을 확률이 높다.
1637년 청태종에게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한 인조는 청황제(세조 순치제)를 칭송하는 소현세자를 보고 화가 나서 청황제가 준 벼루(용연)로 쳐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괴롭혀 죽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지금 밝혀진다해도 법적으로 처벌할수 없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실이므로 중요하듯이 공소시효가 폐지돼서 처벌할 수 없다고 해서 진실 발견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꾸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공소시효 탓만 할 것이 아니라 미제사건을 객관적 증거와 profiling을 통해서 냉정하게 문제를 풀어 가는 지혜가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