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 지성소 안에는 근본 하나님이 거하시며 에레츠 안에는 거하시지 않는다.
2) 생명나무는 지성소(근본)로부터 나오는 근본 아버지와 하나 된 그리스도 예수다.
3) 성소는 대상이지만 지성소는 대상이 아닌 근본 하나님의 거처로서 하나다.
2. 본론
1) 지성소 안에는 근본 하나님이 거하시며 에레츠 안에는 거하시지 않는다.
지성소 안에는 근본 하나님이 거하시므로 근본 하나님은 에레츠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 오직 근본 하나님의 집인 지성소 안에서만 하나다. 창세기 2장 이하에 이 문제가 크게 대두된다. 글자로 보면 에레츠 안에 근본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를 체험하지 아니하면 성경전체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문제가 창 2:9부터 발생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하아다마)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
우선 번역된 이 문장은 원래의 그 의미를 바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앞의 기록에서 다시 번역하여 이야기하였지만 ‘땅’으로 번역한 ‘하아다마’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크게 땅으로 번역한 단어가 에레츠와 아다마가 등장하는데 에레츠에도 하아레츠가 있고, 아다마에도 여러 층의 하아다마가 등장한다.
2) 생명나무는 지성소(근본)로부터 나오는 근본 아버지와 하나 된 그리스도 예수다.
생명나무는 지성소(근본)로부터 나오는 근본 아버지와 하나 된 그리스도 예수다. 그래서 지성소는 성소를 넘어서 있다. 성소는 에레츠 안에 있지만 지성소는 에레츠 너머에 있다. 이것은 내면에서 발견하여야 한다. 그러나 글(문자)로 들여다보면 지성소 또한 에레츠 안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래서 체험이 중요하다.
3) 성소는 대상이지만 지성소는 대상이 아닌 근본 하나님의 거처로서 하나다.
성소는 대상이지만, 지성소는 대상이 아니며, 지성소에는 근본 하나님이 계신다. 그래서 보는 나, 듣는 나, 느끼는 나, 생각하는 나, 슬픈 나, 기쁜 나, 행복한 나, 평안한 나는 대상이기 때문에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지성소 안에는 기쁨의 눈물 또한 없다(계 21:4).
우리는 기쁘고 행복하고 평안하면 그것이 근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복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이 모든 것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대상일 뿐이다.
(몽학 선생 아래에서는 그림자로서 근본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다. 성장해선 이것 또한 비려야 한다. 어려선 육체의 예수를 따라가야 하지만 장성해서는 그를 장대(십자가, 겉 사람)에 매달아 죽여야 한다)
그 생명의 그 빛(근본)!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