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칠정 논쟁(四端七情 論爭)
사단칠정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핵심 논쟁으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약 8년간 서신으로 주고받으며 '사단(四端: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칠정(七情: 희로애락, 애오욕)'의 관계를 규명한 논변으로, 이(理)와 기(氣)의 발현 원리를 다루며 조선 사상계를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나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현하고 기가 따르며, 칠정은 기가 발현하고 이가 타는 것이라 주장한 반면, 기대승은 사단이 칠정의 일부라고 보며 이기호발설을 제기했고, 이 논쟁은 조선 후기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요 내용
시작: 1559년, 정지운의 설을 이황이 수정하자 기대승이 문제 제기하며 시작됨.
논쟁의 핵심: 사단(착한 마음)과 칠정(감정)이 이(理)와 기(氣)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는가.
퇴계 이황의 주장:
사단은 이(理)가 발현한 것이고 기(氣)가 따름.
칠정은 기(氣)가 발현한 것이고 이(理)가 탐.
사단은 순수하게 선하며 칠정(감정)과 분리되어 이의 우위를 강조.
고봉 기대승의 주장:
사단도 칠정의 일부.
칠정 중 선한 감정만 사단으로 형상화된 것.
이(理)와 기(氣)가 함께 발현하는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
결과 및 영향:
이황이 말년에 자신의 주장을 일부 수정하며 이기호발설을 수용.
조선 후기 성리학을 영남학파(이황 계승)와 기호학파(기대승, 이이 계승)로 나누는 사상적 배경이 됨.
의의
인간의 본성과 감정, 심성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이끌어냄.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정립하며 한국 성리학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
예송(禮訟) 또는 예송논쟁(禮訟論爭)
예송의 원래 의미는 '예절에 대한 쟁송, 논쟁'이며 이 문서에서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한 직후 효종의 의붓어머니인 장렬왕후가 행해야 했던 상례 격식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여러 차례 격렬하게 벌어졌던 학술적, 정치적, 사회적 논의를 다룬다.
원래 예송이라는 단어 자체에 논쟁한다는 뜻의 訟(송사할 송)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예송논쟁'은 겹말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예송'이라는 단어가 거의 쓰이지 않아 어원 의식이 거의 사라져서 '예송'보다 '예송논쟁'으로 쓰는 일이 더 잦다.
두 차례 모두 장렬왕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규례에 대한 논쟁으로, 1차(기해예송, 1659년)는 아들인 효종의 상례에서였고 2차(갑인예송, 1674년)는 며느리 인선왕후 상례에서였다.
호락논쟁(湖洛論爭)
호락논쟁(湖洛論爭)은 18세기 조선의 노론 당파 내부에서 발생한 논쟁이다. 심성론의 성선의 강조로 인해 생기는 모순을 둘러싼 논쟁으로, 사람의 성과 사람 이외의 존재의 성이 같은지 다른지가 골자로서 인물성동이론쟁(人物性同異論爭)이라고도 한다. 이는 유교적 주체인 "성인"과 보통 사람의 성이 같은지 다른지에 관한 논쟁으로 확장되었으며, 인간의 본성, 그 중에서도 특히 도덕심에 관한 논쟁으로서 정치와 관련된 주요 의제였다.
노론 내부에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며 본성의 선함을 중시한 이들을 낙론이라 했고, 인물성이론을 주장하여 기질의 발현을 중시한 이들을 호론이라 했다.
호(湖)는 충청도, 낙(洛)은 서울을 의미하여 각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지를 뜻하였다.
호락논쟁은 성리학에 내재된 모순을 둘러싼 논쟁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란 이후 악화된 강상윤리 문제가 지배 엘리트들에게 포착되고 그 해결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청나라 문물의 도입 문제로 연결되기도 하여, 홍대용, 박지원 등의 북학파는 낙론으로서 호락논쟁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한족의 명나라는 멸망하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선은 호란 이후로 북벌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청나라는 중국의 지배를 더 굳건하게 하고 있었으며, 문화를 더 발전시키고 있었다.
호락논쟁은 청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느냐 또는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 사회의 발전에 이용할 수 있는냐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원칙에 충실했던 지방의 선비들의 호론은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청나라의 문물을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서울지역의 선비들은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