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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계절
(시계태엽 오렌지)
Novelist 소원
한빛은 돌아서는 소년을 불러 세울 이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더 멀어져 목소리마저 닿지 않게 되기 전에 다급히 한마디를 내미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하지만 선뜻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이런 짓을 했느냐고 묻기에는 소년의 등이 너무 작아 보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보내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끝낼 방법조차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소년의 뒷모습이 조금도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말을 고르고 골라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니?”
그제야 소년은 웃음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소리를 내며 돌아봤다. 걱정이 마음에 닿아서가 아니었다. 질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냐니.
소년에게는 자신이 괜찮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일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는 일은 이미 오래전에 그만둔 뒤였다.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한빛은 소년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섣불리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소년이 자기 이야기를 계속하게 해야 했다. 재차 말을 고르는 사이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멈춤이라는 구원을 선물했을 뿐이에요. 늦어서 놓치고 남겨져 잃는 일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도록 말이죠.”
“그러니까 네 말은 여기 있는 모두를 구하려 했다는 거지?”
“그렇죠.”
한빛의 시선이 소년의 손으로 향했다. 소년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달리 작은 손안에서는 옷소매 끝자락이 잔뜩 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왜 하나도 편안해 보이지 않는 거니?”
소년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편안한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죠?”
“너도 꼭 무언가를 잃은 사람 같아.”
“그만하세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만하라고 했잖아!”
소년이 소리친 순간 멈춰 있던 공기가 크게 일그러졌다. 구겨진 소매를 붙잡고 있던 소년의 손이 튕기듯 올라갔다. 손끝으로 허공을 비틀자 뒤틀린 공기가 한빛을 덮쳤다. 피할 틈도 없었다. 걱정이 남은 한빛의 얼굴 위로 회색빛이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소년조차 예상하지 못한 듯 손을 내리지 못했다.
석고처럼 굳은 한빛의 눈가에는 미처 떨어지지 못한 눈물 한방울이 남아 있었다. 눈물은 굳어 버린 뺨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닿았다. 물방울이 닿은 자리에서 가느다란 금이 뻗어 나갔다. 처음에는 실금에 불과했던 것이 순식간에 바닥을 가르고 주변 건물까지 타고 올라갔다. 소년은 뒤늦게 손을 내렸지만 한 번 벌어진 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정차의 시간 전체가 안에서부터 깨져 나가듯 크게 흔들렸다.
그 순간 남자와 소녀는 각자의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소녀의 책상 위에는 악보가 하나 놓여 있었다. 마른 종이 위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소녀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물이 샐 만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물방울은 악보의 제목 위에서 천천히 번져 나가고 있었다.
칙-
남자의 책상 한쪽에서 장난감 기차가 멈췄다. 곧 시계를 확인했다. 자정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모든 소리가 끊겼다. 익숙해져 버린 정적 속에서 다시 눈을 떴다.
“이상하다.”
“맞아요. 아직 자정이 아니었어요.”
남자는 소녀의 대답에 묘한 반가움을 느끼며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재진입 때문인지 지난번부터 마음에 걸리던 장면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들도 하나둘 떠올랐다. 남자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모르네요.”
소녀는 자신을 하늘, 차하늘이라고 소개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처음 만났을 때 휘파람을 불었죠. 그 직후에 멈춰 있던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요.”
“그건 저도 몰라요. 너무 조용해서 소리가 나기는 하는지 확인해 본 것뿐이에요.”
“지난번에는 왜 구덩이로 뛰어들었어요?”
“그냥 그 애가 만들어 놓은 길로 계속 끌려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뛰어들었다고요?”
“어떻게 되든 제가 정한 쪽으로 가고 싶었으니까요.”
남자는 선뜻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이해했다기보다는 더는 묻지 않기로 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잠시 말이 끊겼다.
“이번에도 그 애가 있을까요?”
“없기를 바라야죠.”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낡은 표지판 하나가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56번 거리.’
그 외에는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말없이 표지판을 향해 걸었다.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경계가 조금씩 느슨해졌다. 표지판 아래에 다다랐을 때 앞서 걷던 하늘의 발끝에 종이 한 장이 걸렸다. 하늘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봤다. 구겨지고 찢긴 종이들이 길 위에 흩어져 있었다. 발끝에 걸린 종이를 주워 펼치자 한가운데에 같은 단어가 몇 번이고 겹쳐 쓰여 있었다.
‘늦음.’
글자를 썼다가 지우는 대신 그 위에 다시 덧쓴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에 떨어진 종이를 하나 더 펼쳤다. 어느 것을 읽어도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늦었다는 후회와 되돌리고 싶다는 문장만 모양을 바꿔 반복되고 있었다. 남자도 구겨진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늦지도 않는다.’
‘멈춘 것은 더 이상 잃지 않는다.’
문장의 끝에는 다른 글씨보다 짙게 눌러쓴 한 줄이 남아 있었다.
‘태엽을 뽑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흩어진 종이 중 태엽이 적힌 것들을 찾아 펼치기 시작했다.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태엽을 뽑은 순간 흐르던 모든 것이 멈췄고 그 뒤로 누구도 늦지 않게 되었다는 기록이었다. 종이를 내려다보다 소년이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떠올렸다.
“그 애가 태엽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뽑아서 이곳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정확히는 태엽이 빠진 상태로 시간을 붙잡아 둔 것 같아요.”
“그럼 태엽을 다시 돌려놓으면요?”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방법도 보이지 않았다.
“해보죠.”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표지판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표지판 너머로 들어서자 길 양쪽에 회색 형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누군가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달아나려는 자세로 굳어 있었다. 하늘의 걸음이 멈췄다. 회색 형체들 사이로 익숙한 물건이 보였다. 회색으로 굳은 손에는 부러진 드럼스틱 한 쌍이 들려 있었다. 그 손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친구였다. 굳어 버린 친구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친구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하늘은 문득 이마에 남은 듯한 익숙한 감각을 떠올렸다. 무대에 오르기 전마다 긴장으로 굳어 버리곤 했다. 그럴 때면 친구는 말 대신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정신 차려.
할 수 있다는 둘만의 신호였다. 눈물을 삼키던 하늘의 뒤에서 한빛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들려왔다. 돌아봤을 때 남자는 석고처럼 굳은 한빛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도 한빛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일어나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하늘은 친구를 한 번 돌아본 뒤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남자의 이마를 망설임 없이 튕겼다.
딱.
“아.”
남자가 뒤늦게 이마를 감싸며 하늘을 바라봤다.
“정신 차려요.”
하늘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그런 하늘의 입가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붉어진 눈가와 가늘게 떨리는 손끝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남자의 시선이 하늘이 바라보는 곳으로 향했다. 부러진 드럼스틱을 쥔 채 굳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제야 하늘이 무엇을 견디며 자신의 이마를 튕겼는지 알았다.
“그러니까 우리까지 여기서 멈추면 안 돼요.”
남자는 결심한 듯 말했다.
“태엽을 찾죠.”
“그걸 왜 찾는데요?”
남자의 말에 돌아온 대답은 하늘의 것이 아니었다. 회색으로 굳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년이 걸어 나왔다. 손에는 그들이 찾던 태엽이 들려 있었다.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왜요?”
“이 시간을 끝내야 하니까.”
“끝내면요? 끝내면 저 사람들이 돌아와요?”
“그건...”
“이대로 두는 게 뭐가 문제예요? 여기서는 아무도 떠나지 않아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아픔도 느끼지 않죠. 그게 왜 나빠요?”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빛을 잃은 뒤 자신도 차라리 모든 것이 멈추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그 바람이 눈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굳어 있는지 알면서도 소년에게만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태엽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난 안 줄 거예요.”
남자는 망설임 없이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을 탓할 수 없다는 것과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였다. 그렇기에 남자는 소년의 경고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지 않자 소년이 손을 들어 공기를 비틀었다. 남자의 몸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가까워지기는 커녕 처음보다 더 멀어져 있었다.
바닥을 짚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이 까지고 입안에서는 비릿한 맛이 났다. 소년은 쫓아오지도 않았다. 처음 자리에 선 채 태엽을 쥐고 있을 뿐이었다. 힘으로 밀어붙일수록 다치는 쪽은 남자뿐이었다. 다가가려 할수록 거리는 오히려 벌어졌다. 무작정 달려들어서는 닿을 수 없었다. 소년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힘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면을 포기하고 굳어 있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지만 몇 걸음을 뛰어도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 짧은 금속음이 들렸다. 소년이 손을 비틀기 직전 태엽에서 난 소리였다.
딸깍.
한 박자 뒤 바닥이 흔들렸다. 소년이 다시 손을 들었다.
딸깍.
이번에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공간이 뒤틀리고 다시 제자리를 찾는 짧은 순간을 기다렸다. 진동이 멎자마자 몸을 앞으로 던졌다. 소년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자 태엽을 움켜쥔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남자의 손끝이 태엽을 스쳤다.
‘됐다.’
소년은 태엽을 품 쪽으로 당기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금속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자의 몸이 허공에서 멈췄다. 앞으로 뻗은 손도 바닥을 차던 발도 그대로 굳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사방에서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손을 더 뻗으려 했다. 태엽은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줘도 손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켜보던 하늘은 태엽에서 소년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를 짓누르는 동안에도 태엽을 움켜쥔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순간 오래전 바다에서 건너온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태엽을 빼앗으려 다가가는 대신 그 문장을 천천히 소리 내었다.
“파도는 속삭인다. 흩어진 구름보다 내 품이 더 넓다고.”
소년의 손이 멈췄다. 태엽을 움켜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이 쓴 문장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하늘은 소년이 멈춘 사이에 자신이 그 시를 줍게 된 이야기부터 쉬지 않고 쏟아냈다. 당시에는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바다에 남긴 아름다운 문장으로 여겼다. 차마 버릴 수 없어 접어 둔 종이는 오랫동안 하늘의 노트 사이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친구를 잃고 난 뒤 그 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지 묻던 그 시가 마치 자신의 마음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시 한 편이 슬픔을 모두 없애 줄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과 비슷한 외로움을 먼저 문장으로 남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친구를 잃고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하던 하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다시 악보를 펼칠 이유가 되었다.
소년이 멈춘 시간 속을 헤매는 동안에도 그가 바다에 남긴 시는 하늘의 흐르는 시간 속에 머물고 있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썼을 뿐이었다. 누구에게 닿으리라고 기대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오래전에 흘려보낸 문장은 자신이 모든 것을 멈춘 동안에도 한 사람의 시간을 앞으로 밀고 있었다.
문득 그날의 바다가 떠올랐다. 바다가 움직였기에 종이는 떠날 수 있었고 시간이 흘렀기에 하늘에게 닿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면 자신의 문장도 누군가의 마음에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은 단지 또 다시 상처가 생기는 일을 막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멈춘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떠나지 않는 대신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태엽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이 하나씩 펴졌다. 눈에 띄게 내밀지는 않았지만 다가오는 하늘을 막지 않았다. 열린 손바닥 위의 태엽을 하늘이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러자 태엽이 손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그 움직임에 반응하듯 주변의 균열이 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균열 끝에는 거대한 구조물이 서 있었다. 중심부에는 태엽과 꼭 맞을 것 같은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하늘은 마지막으로 소년을 돌아보고는 태엽을 빈자리에 밀어 넣었다. 태엽이 맞물리는 소리가 구조물 안쪽으로 퍼졌다. 잠시 후 멈춰 있던 톱니 하나가 움직이자 맞물린 톱니들이 차례로 깨어났다. 낮은 진동과 함께 바닥을 가르던 균열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표지판의 불빛은 일정한 간격을 되찾았고 길 위의 종이들은 되살아난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정차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뒤이어 회색으로 굳은 사람들의 표면에 가느다란 금이 번졌다. 남자와 하늘은 동시에 몸을 돌렸다. 남자는 한빛에게 달려갔다. 하늘도 친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갈라진 표면 아래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온 빛이 환하게 빛날 뿐이었다.
회색 형체의 사람들은 되살아나지 못했다. 애초에 현실에서는 이미 끝난 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끌어와 붙잡아 둔 것이었다. 한빛과 친구는 돌아오는 대신 억지로 붙잡혀 있던 마지막 순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남자는 한빛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차마 힘을 주어 붙잡지는 못했다. 한빛은 이미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붙잡아 다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끝내 건네지 못한 말들이 목울대에 걸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바라봤다. 걱정이 남아 있던 얼굴이 빛 속에서 천천히 흐려졌다. 손끝의 차가운 감각도 조금씩 사라졌다.
이번에는 한빛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포개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은 친구 앞에 서 있었다. 부러진 드럼스틱을 쥔 손은 이미 절반가량 사라지고 있었다. 손을 뻗는 대신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딱.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눈물은 굳이 닦지 않았다. 친구가 건넨 신호는 이제 자신의 몫이었다. 친구의 모습은 부러진 드럼스틱과 함께 작은 빛으로 부서져 허공에 흩어졌다.
남자와 하늘은 한동안 각자의 빈자리를 바라봤다. 시간이 다시 흐른다고 해서 잃어버린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슬픔과 후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음 순간은 찾아오고 있었다. 구조물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거리와 건물의 윤곽이 크게 흔들렸다. 두 사람의 모습도 빛 속에서 흐려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남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작업실이었다. 멈춰 있던 장난감 기차가 칙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도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작업실에는 한빛이 남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가 창가에 끌어다 놓았던 의자와 자주 사용하던 머그컵이 보였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자 의자 위에 놓인 종이가 작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와 익숙한 자리에 앉을 것 같았다.
한동안 빈 의자를 바라봤다. 시간이 지나도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한빛이 남긴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지금과 같은 순간이 찾아올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 오랫동안 덮어 두었던 악보를 펼쳤다.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곡이었다. 무엇을 더 적어도 부족할 것이고 어디에서 끝내도 틀린 것처럼 느껴질 터였다. 펜을 들어 멈춰 있던 다음 마디에 음표 하나를 적었다.
얼마 뒤 작은 공연장의 불이 켜졌다. 하늘은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그 뒤로 연주자들이 자리를 잡았지만 드럼 앞의 의자만은 비어 있었다. 관객들은 드럼 연주자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하지만 하늘은 빈자리를 치우거나 다른 악기로 대신 채우지 않았다.
곧 ‘84글자의 시’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하늘은 바다에서 건너온 문장들을 소리내어 불렀다. 한때 이름도 모르는 소년이 혼자 남긴 글은 하늘의 목소리를 만나 비소로 노래가 되었다. 그렇게 노래는 무대를 건너 이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닿기 시작했다.
드럼이 들어와야 할 마디가 다가왔다. 반주 사이에 넓은 빈자리가 생겼다. 관객들의 수군거림도 그제야 멎었다. 짧은 침묵 속에서 친구를 떠올렸다. 무대에 오르기 전 자신의 이마를 튕기던 손과 할 수 있다는 듯 웃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빈 마디를 서둘러 지나가지 않고 친구가 채웠을 박자를 그대로 남겨 둔 채 다음 소절을 불렀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리움을 감추는 대신 더 크게 노래했다.
여든네 글자의 시가 공연장을 가득 채우자 관객들이 환호했다. 누군가는 곁에 앉은 사람의 손을 잡았다. 소년이 누구에게도 닿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남긴 문장은 이제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한 마음으로 위로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공연장 안을 박수가 가득 채웠다. 박수가 잦아들기를 기다린 하늘은 보면대 위에 놓인 악보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물자국이 번진 종이 위에 곡의 제목이 남아 있었다.
‘피차일반’
*
그 무렵 소년은 다시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작은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연필 끝을 종이에 대려던 순간 파도 사이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허우적대고 있었다. 젖은 날개가 물살에 휩쓸릴 때마다 작은 몸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연필이 손에서 떨어졌다. 이번에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가늠하지 않았다. 괜히 다가갔다가 더 나빠질 가능성 따위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이 몸을 붙잡기 전에 먼저 일어났다. 펼쳐진 공책을 그대로 둔 채 바다를 향해 달렸다. 밀려오는 물살이 다리를 붙잡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나 중심을 잃으면서도 갈매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속으로 손을 뻗었다.
바닷바람이 남겨진 공책의 장을 넘겼다. 마지막 장에 적힌 문장이 햇빛 아래 드러났다.
‘늦지 않았다.’
작가 소원
소설과 시를 사랑하는 작가.
끝없는 상상을 글로 펼치며,
읽고 쓰는 일을 삶의 중심에 두고 내면의 세계를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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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권리는 크레이프사운드에 있으며,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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